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30

通達無我法者 2011. 2. 28. 01:4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열정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열정 때문에 쉽게 성공을 합니다.

그러나 그 열정 때문에 쉽게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일에 쓰는 열정은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지만

나쁜 일에 쓰는 열정은 자신과 남을 해칩니다.


열정이 지나치면 눈이 멀어 만용을 부리게 되고

옳고 그름의 경계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행복과 불행이 마음 하나로 결정하고,

명예와 불명예가 마음 하나로 결정합니다.


같은 열정이 선한 조건을 만들면 깨달음을 얻고

같은 열정이 선하지 못한 조건을 만들면 악도에 떨어집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13가지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종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외부에서 방문하는 마음 5가지와

내부에서 방문하는 마음 6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모두 11가지의 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나머지 2가지는 주인의 마음입니다.

12번째 들숨의 마음과 13번째 날숨의 마음입니다.

의식이나 마음이나 같은 용어라서 들숨의 의식과 날숨의 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주인의 마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위빠사나 수행자는 항상 알아차릴 대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때의 대상이 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이 알아차릴 대상을 세분화하면 몸, 느낌, 마음, 그리고 법으로 나눕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래로 많은 수행자들이 알아차릴 주된 대상을 몸으로 하고

그 중에서 몸의 호흡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을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주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주인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호흡을 주대상으로 하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호흡을 하기 때문이며

가장 분명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있는 대상이라서 호흡을 주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물론 특별한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호흡이 주대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13가지의 알아차릴 마음의 종류를 말함에 있어서 여러분들은 생소한 단어를 발견하셨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외부에서 방문하는 마음과 내부에서 방문하는 마음을 말할 때

‘방문’ 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에 위빠사나 수행방법의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알아차릴 때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알아차림을 둡니다.

눈으로 볼 때 마음이 밖에 있는 대상에 나가서 아는 것이 아니고,

밖에 있는 대상이 눈에 접촉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을 안에서 알아차린다고 말합니다.


만약 눈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 마음을 밖에 있는 곳에 두면

바른 알아차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귀가 소리를 알아차릴 때 마음이 소리 나는 곳으로 가면

바른 알아차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똑같이 코와 냄새가 그렇고 혀와 맛이 그렇습니다.

신체가 외부의 대상과 접촉할 때에도 마음이 대상으로 가면

바른 알아차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마음의 경우에는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려야지

밖으로 가면 더욱 바른 알아차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감각기관을 지키는 문지기와 같다고 합니다.

물론 마음이 꼭 감각기관에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 마음이 밖으로 나갈 수도 있으며, 또는 안팎으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감각기관의 문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전제로 수행을 합니다.

그래서 외부의 대상들이 감각기관을 방문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방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내부에서 방문하는 마음은 번뇌가 있는 마음이 일어난 것을 아는 마음과

번뇌가 없는 것을 아는 마음과 이러한 두 가지 마음의 부딪침을 방문이라고 합니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부딪침을 손님이라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방문이라는 말은 감각대상이 감각기관과 부딪칠 때 알아차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방문이라는 말은 부딪침, 접촉, 손님 등의 뜻을 함축한 말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자는 방문이라는 말을 통해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하겠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사진을 찍을 때

밖에 있는 대상이 필름에 닿아서 영상이 찍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필름이 밖에 있는 대상으로 나가서 영상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이상의 13가지 마음의 범주 안에 보통사람들이 가진 모든 마음들이 다 포함됩니다.

어떠한 마음이 일어나든 간에 그것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의 부딪침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이들 6문을 통해서만 의식이 일어날 수가 있으며, 

마음은 6문을 벗어나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은 저 홀로 일어날 수없고

물질적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 일어난 마음입니다.


또한 유체이탈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은 죽기 전까지 결코 몸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울러서 감각기관인 6문에 여섯 가지 대상이 부딪쳐서

여섯 가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18계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아닌 것은 불교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한 인간의 번뇌를 해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또한 마음과 느낌과 지각과 마음의 의도는 동시에 일어나는 구생법입니다.

여기서 느낌과 지각과 마음의 의도는 마음의 작용으로 분류합니다.

처음부터 함께 태어나고 동시에 발생하는 법을 구생법이라고 합니다.

오온의 수, 상, 행, 식은 함께 태어난 것이고, 

함께 태어난 것은 함께 작용하고 함께 소멸하게 됩니다.


상응법이 서로 관련되어 함께 하는 것이라면

구생법은 처음부터 선천적으로 떨어질 수 없이 함께 하는 것이며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마음의 작용을 빨리어로 ‘쩨따시까’ 라고 하고

한문으로 ‘심소(心所)’ 라고 합니다.


마음을 말할 때 심(心)을 사용하는 경우는 마음의 작용과 구별할 때입니다.

마음은 아는 마음인 식이 있고, 식과 함께 일어나서 소멸하는 수, 상, 행이라는

마음의 작용이 있습니다.

식이 있어서 모든 것을 하지만 실제로 일하는 것들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입니다.

수, 상, 행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을 식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압니다.

그래서 식은 수, 상, 행과 같아지는 마음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를 내는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아는 마음이 화를 받아들여서 그대로 화를 내는 마음이 됩니다.

이처럼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구생법이라고 합니다.


이상 4가지의 정신적 현상인 수, 상, 행, 식을 알아차릴 때

물질적인 현상인 색이 제외되지는 않습니다.

오온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존재하며 함께 사라지는 법이므로,

오온 중에 하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나머지 오온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마음이 가장 뚜렷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인 심념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심념처라고 해서 오직 마음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오온이 함께 작용하여 알아차리는 것인데,

그중에 마음에 대한 것을 두드러지게 알아차려서 바로 심념처라고 합니다.

사실 한 존재를 이루는 오온은 상호 연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치 라임주스의 설탕, 과일, 주스, 소금, 물이 원료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 역시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들숨의 의식과 날숨의 의식이 이 심념처를 닦는 중에

주인의식으로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념처에서 신념처나 수념처가 배제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들 세 가지의 알아차림이 합쳐서 최종적인 사성제의 진리를 알아차리는

법념처로 종결되어야 합니다.


오온이 함께 작용하듯이 사념처도 모두 함께 작용합니다.

그래서 오온이나 사념처는 모두 한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법념처로 종결될 때 법념처도 처음에는 다섯 가지 장애인 오개로부터 시작해서

오온, 육입, 칠각지, 사성제의 진리로 완성이 됩니다.

법은 알아차릴 대상이면서 그 자체가 진리인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에 열거한 13가지 종류의 마음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먹고 싶고, 냄새 맡고 싶어 하는 마음은 탐심에 속하고, 질투나 인색은 성냄에 속합니다.

보시를 하려는 마음은 탐욕이 없는 마음에 속합니다.

들뜨고 산만한 마음은 어리석은 마음에 속합니다.


어리석지 않은 마음인 지혜는 위의 13가지 마음 안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지 않은 마음은 왜 13가지 마음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것인가요?

그 이유는 어리석지 않은 마음이 정견(正見)이라는 도지, 즉 지혜인데,

그것이 바로 알아차림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13가지의 마음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들 마음은 한 순간에 오직 하나씩만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11번째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하지 않고

의(意), 혹은 의식(意識)이라고 말하는 것은

알아차림 자체가 이미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의 또는 의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보통 수행의 대상이 되는 마음이 너무 많아서 알아차리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자는 이때 마음의 매순간 오직 하나씩만 알아차린다는 점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의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쉽게 얘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탐심이 일어나면 탐심이 일어났다고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큰 어려움이 없이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의 종류가 많다고 하지만 대상을 아는 것으로서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 분류한 마음의 종류는 마음이 일어난 곳과 마음의 경지에 따라서 세분화됩니다.


마음이 일어난 곳은 욕계, 색계, 무색계, 출세간계의 네 분류를 하는데

이들 마음을 모두 합치면 89가지로 분류하는 방법과 121가지로 분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을 89가지 내지 121가지로 분류하셨지만

실제 아는 마음은 하나입니다.

어떤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정신적 지혜를 가졌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분류될 뿐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마음의 종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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