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초기불교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通達無我法者 2015. 9. 7. 23:17

“수행은 머리 아닌 가슴으로”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0-4
“마음이 커질수록 행복해지고, 마음이 작고 약할수록 괴로운 법”

2015-06-03 (수) 10:37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머리로 하는 교육만 받아 왔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기간이 20년이라면 그 기간 내내 머리 교육만 시킵니다. 그러니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머릿속에 쓰레기통까지 다 들어 있는데 정작 자신의 마음을 아는 능력은 별로 없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은 많지만 그 힘이 아주 약합니다. heart education, 마음의 교육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수행하는 것이 그 마음의 교육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릴 때부터 마음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참되게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머리 교육’만 있고 ‘가슴 교육’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수행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합니다. 마음으로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를 그냥 지켜봅니다. 마음으로 대상을 직면하여 있는 그대로를 압니다. 말없이 그냥 알기만 합니다. 갈수록 내면에서 말이 없어지고 그 속말이 온전히 사라져 조용해지면 수행이 아주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완전히 속말이 없어지면 너무 조용하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가 됩니다.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조용하고 아무 말이 없지만 그것을 아는 마음은 있습니다. 집중이 아주 잘 되고 있는 것이지요. 속말이 있으면 아직 수준이 낮은 것이고, 속말이 완전히 꺼져 있을 때가 수준이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자들은 그걸 모르기 때문에 좋을 때마다 항상 스스로 망가뜨립니다. 조금 조용해지면 ‘아, 이상하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이러면서 일부러 생각을 꺼내서 일으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저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거 관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저거 관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것이 틀린 방법입니다. 수행 중에 내가 누군지 모르겠고,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도 모르게 되고, 내가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개념들이 다 깨질 때가 진짜, 궁극적인 실제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논장을 조금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데, 이 상태가 바로 개념들이 깨져 나가고 실제를 알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개념들이 깨지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고, 내가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도 모르고,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수행대상에 마음이 있을 때, 그때가 되면 우리가 평생 살아오면서 알았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는 이 상태를 계속 관찰하지 못하고 그 상태에서 서둘러 나와 버립니다. 그것이 수행에서 사실 아주 좋은 상태인데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하게도 거기에서 급하게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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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행복한동행(해피투어) 제공

 

그러므로 수행 중에 그렇게 조용해지면 그것이 궁극적인 상태, 실제를 보고 있을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궁극적인 실제를 봐야 진리를 봅니다. 진리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수행처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자리, 궁극적인 실제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인 실제를 봤다면 수행자가 진리와 많이 가까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다시 나옵니다. 그렇게 될 때마다 다시 나오니 그것이 수행을 망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용해지면 그것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그걸 그대로 따라가십시오.
 
물질과 정신을 끊임없이 관찰함으로써 일단 계율이 깨끗해집니다. 아침부터 밤낮으로 계속 관찰하고 있으면 나쁜 말을 못하고 나쁜 행도 못합니다. 나쁜 생각조차도 하지 못합니다. 일어나는 대로 그 즉시 바로 관찰하고 또 관찰만 하니까 번뇌를 지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계율이 깨끗해져서 마음이 청정한 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와 정이 아주 논리적 합리적으로 연결됩니다.

 

미묘하고 신비로운 것이 하나도 없고 이해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하는 대로 되고, 하는 만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속에서 했던 일반적인 삶과 지금 하고 있는 수행의 삶을 비교해 보십시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매 순간 닦고 닦으면 몸으로 짓는 업이 줄어들고, 입으로 짓는 업도 줄어들고, 마음으로 짓는 업도 줄어듭니다. 또 강하고 크게 일어나는 번뇌들이 사라져서 몸과 입이 청정해지니까 마음도 따라 청정해집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이 집중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니까 힘이 생기고, 그렇게 생기는 힘으로 집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집중의 힘이 있어서 있는 사실을 그대로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고, 그 사실이 곧 무상·고·무아입니다. 있는 사실이 무상인데 우리가 모르고 영원하다고 사견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사실이 매 순간 일어나 사라지기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운데 우리는 그것이 행복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있는 사실이 무아인데 우리는 나다 너다, 남자다 여자다 하면서 상을 만들고 그것을 진실하다고 착각합니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그것이 집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정해야 집중이 되고, 집중이 되면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그 사실이 무상·고·무아이니 그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처음에는 물질 정신의 두 가지 특징을 알게 됩니다. 수행을 계속 해 나가면 우리의 마음에 생길 수 있는 45가지 마음을 다 보게 되고 52가지 마음부수도 다 보게 되고 18가지 물질을 번갈아서 다 보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보아 나가면 못 보는 것이 별로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차츰차츰 물질 정신 두 가지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래서 사견이 많이 사라지고, 사견이 사라졌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개념이 사라지고, 내가 남자다 여자다 나누는 마음이 사라지고, 내가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되고, 그런 개념이 다 깨지면서 궁극적인 실제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인 실제를 계속 파악하고 있으면 ‘이것 때문에 이것이 있고, 저것 때문에 저것 있는 거구나.’라고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기고, 의심들이 많이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일 뿐 우연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계속 보고, 보고, 또 보면서 세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지혜만 있어도 사람이 얼마나 착해지는지를 체험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사람에게 심리변화가 오면서 업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오는 모든 것들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없어지면서 진정으로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어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 사람이 나한테 말한 것이 그래서 그랬구나.’ 이렇게 모든 것이 이해가 가니 사람이 지극히 선량해집니다. 그러니까 따로 용서가 필요 없습니다. 이해가 되면 용서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입장을 바꾸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살인하는 사람까지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 내 안에 그 마음과 그 생각이 들어오면 나 역시 그렇게 살인을 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되면서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안 보이고 모든 이들을 다 좋은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뭔가를 잘못하는 사람은 있지만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두 번째 지혜만 깨달아도 사람의 심리 변화가 엄청나게 대단합니다. 심리가 완전히 변화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도 그와 유사한 마음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죽기 직전이 되면 사람들이 다 착해져서 잘못 살아온 것을 후회하게 되어 ‘아, 내가 왜 그때는 그런 말을 했나, 왜 내가 이렇게 살아왔나, 이런 것을 왜 내가 좋다고 생각했나, 이런 것 다 무시하고 살아도 되었던 것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병이 들어 많이 아플 때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아플 때, 죽을 만큼 아플 때 그런 생각이 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그때 내가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그렇게 연연해했을까, 왜 그렇게 아기같이 굴었을까, 다 나으면 절대로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나으면 얼른 그 사람에게 사과해야지…….’ 그렇지만 병이 다 나으면 그 순간에 몽땅 잊어버립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렇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은 심하게 아파 봐야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지혜만 해도 신심이 일어나는 게 대단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지혜가 한 시간 안에 생겼다가 한 시간 안에 날아가는 사람이 있고, 한 달 두 달 있는 사람이 있는데 당연히 오래갈수록 좋습니다. 어떤 지혜이든 아주 강력하게 오래가면 쉽게 안 잊어버릴 수 있어서 그것이 진짜 내 것이 됩니다. 잠깐 있다가 금방 끝나 버리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자주 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수행을 자주 하면 지혜가 지속적으로 향상됩니다. 수행 잘하는 사람은 똑같이 다시 밑의 단계에서 시작해도 발전하는 속도가 다릅니다. 처음에는 1단계에서 20분 걸리던 것이 다음에는 2단계에서 2분 만에 3단계로 올라갈 수도 있고 3단계에서 1시간 하던 사람이 2분, 3분 있다가 바로 4단계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행할 때마다 이 지혜를 자꾸 반복하게 됩니다.

 

지혜가 오르내리는 것이 수다원이 되어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어도 수행은 4단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수다원이 된 다음에 수행하더라도 일어남 사라짐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처음 1·2·3 단계는 건너뛰고 하지 않지만 4단계부터는 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수행이 좋았던 적이 있어도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시작해야 됩니다. 가장 잘 되었던 그 자리가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단계를 자꾸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그 지혜가 익어지면서 실생활에서도 그 지혜가 저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별것 아닌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마음이 넓어지고, 마음이 깊어지면서 아주 성숙해지고 착해져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를 잘하고 그렇게 사람이 성장합니다. 적개심이 사라지고 관대해지고 평화로워집니다.

 

그러면 누가 행복합니까? 우선 본인이 행복합니다. 마음이 그렇게 커질수록 자신이 행복해지고, 마음이 작고 약할수록 자신이 괴로운 것입니다. 마음의 폭이 넓은 만큼, 그릇이 큰 만큼 그 사람이 세상에서 흔들림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삶의 흐름을 잘 타고 가게 됩니다. 그것이 두 번째 지혜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데서 오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업과 과보를 많이 이해하니까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집니다. 또한 그렇게 되니 수행이 더 좋아지게 되고 이렇게 앞뒤가 연결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위빳사나 지혜의 세 번째 단계가 옵니다.

 

 

 

“사마타건 위빳사나건 고비 잘 넘겨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0-5
“올라오는 고통을 열심히 관찰하면 수행이 좋아져서 다음 단계로”

2015-06-18 (목) 10:02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삼마사나 냐나’라고 하는 세 번째 단계인 무상·고·무아를 아는 지혜가 일어나면 생겨나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단계에서 다시 한 단계 올라선 이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뭐든지 보면 변하거나 사라지고, 더위, 추위, 딱딱함, 부드러움, 아픔 등의 변화가 매우 다양하고 빠르며, 아픈 것도 여러 가지이고 아픈 정도가 몹시 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 세 번째 단계가 되면 관찰하는 대상들이 쏟아지듯이 많아져서 관찰이 힘들다고 느낍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첫 단계 때에는 수행자가 대상을 잡고 있으면서 관찰하는 속도가 매우 느립니다. 하나 관찰하고 한참 있다가 다시 하나 관찰하는 식으로 느리게 진행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지혜가 되면 관찰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고 빠른 만큼 대상들도 많이 보이니까 그 대상이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관찰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나를 관찰하는데 한꺼번에 넷, 다섯, 여섯……, 이렇게 다양한 대상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제대로 관찰하기도 전에, 미처 다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힘이 들고, 계속 사라지기만 하니 모든 것이 무상하게 여겨지게 됩니다.

몸의 여기가 조금 불편하여 여기를 보면 보는 순간 그것이 없어지고, 또 다른 데가 이상이 있어 그곳을 보면 그 즉시 없어지고, 그래서 ‘아, 진짜 무상하구나. 모든 것이 보면 변하는구나.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리고 무상한 게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몸과 마음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수행 도중에 몸도 마음도 몹시 괴로워서 수행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아직 이 단계까지는 아무래도 물질 쪽을 많이 봅니다. 물론 처음 1단계 때의 물질보다는 많이 미세해진 물질이고, 보면 다 해체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 세 번째 단계까지는 몸이 완전히 사라지는 느낌은 별로 없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사라진 느낌이어서 손발, 머리, 다리 등 몸의 어떤 부분은 없는 것 같고 어떤 부분은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들인데 그 상태에서 집중이 더 강해지면 점점 대상이 사라져 감을 느낍니다.

 

뭔가가 있는 것 같아 관찰하면 그것들이 해체되면서 흩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다리를 봐도 처음에는 분명하게 느껴지던 것이 계속 관찰하다 보면 차츰 아무것도 없는 느낌으로 변합니다. 그런 식으로 내가 관찰하는 부분이 다 흩어지고 해체가 되면서 처음에 알고 있던 모양과 크기가 없어지고 나중에는 지·수·화·풍의 느낌들만 남습니다. 따뜻함이나 차가움, 가볍고 무거움 등의 느낌만 남고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물질적 느낌은 모두 사라진다면 세 번째 단계의 수행이 잘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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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세 번째 단계에서 무조건 다 아파야 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른데 원래 마음이 아주 평온한 사람들이나 별로 화가 나지 않는 사람들은 아프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많지는 않습니다. 또 사마타 집중수행을 많이 했던 사람들도 별로 아픈 것을 모르고 바로 바로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 번째 단계에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오만 가지가 통째로 다 나타나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데가 없습니다. 여기 아프다가 없어지고, 저기 아프다가 없어지는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집니다.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니 무엇부터 관찰해야 하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됩니다.

 

이걸 관찰하면 또 다른 무엇이 생기고, 그것을 보다 보면 또 다른 것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뭔가 괴로운 것이 되게 많고, 아픈 곳도 엄청 많고, 병이 나는 곳도 아주 많습니다. 딱딱한 것을 보면 딱딱한 것이 없어지고, 몸이 뜨거웠다가 그것을 보면 다시 뜨거운 것이 없어지고, 이런 식으로 보면 없어지는데 처음 그 단계를 시작할 때는 오래가기도 합니다. 처음 보면 오래가는데 한 번 제대로 보면서 변하면 ‘아, 진짜 무상하다.’ 이런 마음이 확고하게 생깁니다.

 

이 단계에서 무상을 한 번 보면 머리로는 무상을 천 번 만 번 그려 보게 됩니다. 세 번째 지혜는 그런 것입니다. 무상·고·무아를 수행의 체험으로 아는 사실이 한 번이라면 이것을 계속 반복해서 숙지하는 것은 수없이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보다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 모든 것이 무상이다, 고통스럽다, 무아이다 이런 마음만 꽉 차게 됩니다. ‘아, 진짜 고통스럽다.’ 하는데 이 단계에서의 고(苦)는 사실 ‘고고’입니다. 정말 아프고, 너무나 괴롭고,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듭니다.

 

그때 수행자가 그 고비를 넘어가지 못하면 수행에서 몹시 어려워집니다. 그 고비를 잘 넘겨야 합니다. 그 고비를 못 넘기는 사람은 그 고비가 무섭고 두려워서 다음에 수행하면 진땀부터 납니다. 그 힘든 고비를 넘어서고 나면 ‘아, 너무도 행복하다.’ 하면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깨달은 줄로 착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힘든 것을 넘어가서 행복한 것이지 자신이 깨달은 법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이 없어지니까 행복한 것이지요. 처음에 아프다고 울다가 이번에는 너무나 행복하다면서 웁니다. 특히 여자들이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경향이 있지만 남자들도 눈물이 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빛 같은 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사띠가 아주 좋아집니다. 그때부터 놓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경지라서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어린 아기가 자기 아버지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학교로 따지면 지금 막 유치원 어린이정도랄까, 아직 초등학교도 안 간 상태입니다. 그 정도 단계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사실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수행에 어려움이 사라지고 흔들림도 없어집니다.

그 세 번째 고비를 넘으면 한 시간 앉아도 괜찮고, 두 시간 앉아도 괜찮고 별로 몸에 대한 고통이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앉아서 집중만 되면 이 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마타건 위빳사나건 그 세 번째 단계는 공통입니다.

 

화두 수행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화두수행 중에도 어떤 때는 너무 힘들다가 그것만 넘어가면 너무 행복해서 울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은 세 번째 단계에서 네 번째로 갈 때에 계속 물질과 정신을 끊임없이 관찰하기 때문에 무상·고·무아를 반복적으로 보게 됩니다. 사마타로 가는 사람은 지도자가 없으면 거기서 멈추게 됩니다. 백 명 중에 백 명이 멈춰 버리고 죽을 때까지 그 행복했던 상태를 그리워하면서 살게 됩니다. ‘아, 그때 좋았었는데. 아, 그때 내가 대단했었는데…….’ 하면서 현재 자신의 수행이 제자리에 멈춰 있다고 걱정하고, 지난날의 수행에 대해 스스로 백 점 만점의 점수를 주면서 그때를 그리워합니다. 거기서 멈춘 사람은 어떻게 하면 예전처럼 될까를 고민하며 제대로 수행을 하지 못하니 더 이상 수행의 진도가 나아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마타건 위빳사나이건 그 고비를 잘 넘어가야 합니다.
 
세 번째 지혜의 특징은 고찰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고찰은 생각으로 살피는 것과 비슷합니다. 지혜가 있긴 있지만 꿰뚫어 보는 지혜와 생각하는 지혜가 섞여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무상·고·무아로 봅니다. ‘내가 진짜 무상하네, 영원하지 않네, 계속 변화하네…….’ 이런 생각이 계속 됩니다. 숙지하는 마음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가다 보면 고통이 올라옵니다. 그 고통을 다시 열심히 관찰하게 되면 수행이 좋아져서 4단계로 올라갑니다.

 

 

“단계 높아질수록 변화 속도 빨라져”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0-6
“수행의 단계에서 오는 현상 왜곡 않고 바르게 관찰해야 성숙한 단계로”

2015-07-14 (화) 16:32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우다얍바야 냐나’라고 하는 4단계에서는 몸이 아프지 않은 상태에서 사띠가 아주 좋아 놓치는 것이 별로 없어지고, 갈수록 관찰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뭐든지 생기면 바로 사라지고, 생기면 바로 사라져서 생멸밖에 없게 됩니다. 4단계에서도 심리 변화가 많이 있습니다. 4단계로 가면 욕심이 많이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욕심 부리는 마음이 잘 안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여겨져 무엇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도 많이 줄어들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만 가도 스스로가 깨달았다고 착각할 만큼 달라지지만 지혜가 있는 순간만 그러할 뿐 그 지혜가 없어지면 다시 아래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그 지혜를 유지만 시킬 수 있으면 세 번째 단계로도 사람이 아주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진정한 위빳사나 지혜는 네 번째 단계부터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 단계에 도달했으면 본인이 이번 생에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결정 내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하고, 신심이 있고, 노력하고, 정직하며, 이 네 번째 지혜인 ‘우다얍바야 냐나’가 있으면 그 사람은 바로 이번 생에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해야 되고, 신심이 좋아야 되고, 노력도 해야 되고, 또 정직해야 하고, 이 네 번째 지혜까지 일어나고 있으면 바로 이번 생에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 없다고 부처님께서 단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몸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온몸의 느낌이 어디에서나 똑같아서 머리, 코, 목, 배 등 어디에서 보든지, 조금 더 미세한 뭔가가 몸이라고 할 수 없는, 마음속으로 알고는 있는데 분명하지는 않은 뭔가가 있고, 그것도 계속 빠르게 일어나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런 때는 수행 중에 갑자기 허전한 느낌이 들 수가 있습니다. 처음엔 물질 쪽으로 많이 보고 있는데 그 물질들이 다 없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자신의 수행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지혜의 단계에서 네 번째 지혜로 넘어갈 때 수행자들이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처음엔 이 세 번째 지혜 때 대상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그 대상들을 따라 관찰하느라 매우 바쁩니다. 그래서 1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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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행복한동행 투어 제공

또 아플 때도 아프면서 집중이 되고 있기 때문에 대상이 아주 또렷합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지혜를 넘어서면 갑자기 몸 전체가 대상을 관찰하는 것같이 느껴지면서 수행이 어렵게 여겨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갑자기 수행할 줄 모르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가 너무 답답하고 또 그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수행이 깨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수행 단계가 무너지면 다시 1단계에서 시작합니다. 호흡을 봤다가, 배를 봤다가, 물질 정신을 구별하는 단계로 다시 내려왔다가 하면서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과정을 많이 합니다. 세 번째 지혜에서 밑의 단계로 떨어지면 몸이 다시 느껴지고, 아주 분명히 앉아 있을 때 앉아서 눈을 뜨면서 보는 것같이 몸이 다 느껴지는 단계로 다시 돌아가는데 처음보다 속도는 빨라집니다. 그런 상태에서 조금만 있으면 집중되어 방금 전의 그 자리로 다시 옵니다. 그렇게 1단계, 2단계, 3단계를 아주 빠르게 내려갔다 올라갔다 잘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3단계의 초기 단계가 되면 원래 보고 있던 물질이 아주 미세해지면서 물질의 느낌보다는 정신 쪽의 느낌이 강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마음이 그런 마음 상태를 관찰할 줄 모르기 때문에 자꾸 망상을 부립니다. 생각이 자꾸 일어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아, 내가 열심히 하는데 수행이 안 된다. 처음보다도 안 된다.’ 그렇게 착각합니다. 마음이 너무 빨리 변화하며 들락거리고 그것을 빨리 따라잡지 못하면서 집중도 안 된다고 느낍니다.

 

처음 3단계에서 아플 때는 한 시간 정도가 그대로 집중이 됩니다. 아프니까 대상이 분명합니다. 그러다가 차츰 아픔이 없어지면 대상이 희미하게 느껴지면서 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지고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이 완전히 망가진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대상이 전혀 다르게 바뀌기 때문에 수행자가 새로운 대상을 못 잡고 있어서 그럴 뿐입니다. 그럴 때가 바로 수행지도자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 단계입니다. 그때에 편안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미세해지고 묘해지는 대상을 놓치지 않고 차분하게 따라가면서 관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수행자가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서 관찰할 수 있게 되고 마침내 네 번째의 지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지혜가 되면 대상이 미세하기 때문에 그 집중은 원래 있었던 집중보다 엄청나게 깊은 집중입니다. 그렇게 해서 네 번째 집중이 네 번째 단계에 있는 대상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가 오게 됩니다. 사실 세 번째 지혜의 끝부분부터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엄청나게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나올 때도 있고, 어느 때는 그 빛이 워낙 강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굴 피부 색깔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합니다. 강력한 희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도 합니다. 희열에는 강도의 차이에 따라 다섯 가지 정도로 나뉘는데 처음에 생기는 희열은 등이 서늘하거나 추운 것 같은 느낌이 들다가 조금 세지면 파장이 몸으로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 오고, 어느 때는 발가락부터 머리까지 전류가 관통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손발이 날아가는 것처럼 갑자기 움직여지기도 하고 몸통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다 희열인데 네 번째 지혜에서 생기는 희열은 엄청나게 묘합니다. 예를 들자면 기름 한 방울을 솜에 떨어뜨리면 그 기름은 한 방울 정도의 적은 양인데도 차츰차츰 솜으로 다 번져나갑니다. 그런 것같이 희열이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퍼져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온몸이 편안해져서 안 좋은 데가 없을 정도이고 불편한 데가 없습니다. 지·수·화·풍의 느낌에 치우침이 없이 아주 원활하고 조화롭게 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 느낄 정도로 몸이 부드러워지고 온몸에 엄청난 희열이 퍼져나갑니다. 그러면서 온몸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집니다. 그럴 때는 쉽게 땀이 나지 않습니다. 그 지혜에 들어가면 편안하고 에어컨을 쐬는 것같이 시원하고 상쾌합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몸에서 땀이 많이 나고 냄새도 아주 심합니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볼 때도 냄새가 몹시 많이 납니다. 그런데 그 단계를 넘어가면 4단계부터는 몸이 매우 좋아지기 때문에 그런 독한 냄새들이 없어지고 땀도 많이 안 납니다. 똑같은 온도에서 수행할 때 네 번째 지혜가 안 오는 사람은 많이 지치지만 그 지혜가 일어나는 사람은 지치지 않고 이렇게 몸 상태도 두드러지게 좋아집니다. 그때는 사띠도 엄청나게 좋아져서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기억들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어느 때는 현재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과거를 죽 기억하면서 특별히 생각하지도 않는데 40살에서 39살 때, 38살 때, 37살 때……, 이런 식으로 과거로 죽 돌아가서 네 살, 세 살 때까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4단계 지혜에 오래 머무르면서 계속 수행하면 그 단계의 지혜가 점점 뚜렷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이 단계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다시 더 성숙한 단계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4단계 지혜가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사띠가 매우 좋아지면서 빛이 보이고 몸의 느낌이 매우 좋아지면서 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기쁨과 행복의 느낌이 엄청나게 강렬하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지혜의 청정함이 생기지 않으면 이 상태에서 멈추면서 자만이 강해지고 점차로 수행이 망가집니다. 그렇게 망가지면 무너져 내려 다시 1단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1단계에서 4단계로 올라가는 속도는 처음보다 매우 빠를 수 있지만 그렇게 계속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 진정한 위빳사나 지혜가 쌓이지 않습니다.
 
이 네 번째 지혜 단계에서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은 빛이 보이면 그 빛을 관찰해 보거나, 그 빛에 이런 저런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관찰해 보기도 하고, 궁금한 것이 일어나면 그 궁금한 것을 관찰하기도 합니다. 또 온몸에 퍼져 있는 희열이 있으면 그 희열을 관찰합니다. 성숙한 단계로 못 가는 사람은 그 희열이 오면 ‘아, 되게 좋다.’ 하고 거기서 욕심을 부리고, 그 상태에서 깨달았다고 착각하며 자만을 부립니다. 또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집중이 떨어져서 수행이 잘못되면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게 됩니다. 수행의 단계에서 오는 현상을 왜곡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바르게 관찰하는 사람은 성숙한 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4단계 초기에서 계속 수행하여 성숙한 단계로 가게 되어 진정으로 생멸을 보는 것이 ‘우다얍바야 냐나’로, 그때부터가 진정한 위빳사나 지혜의 시작입니다.

 

그 4단계를 오래 보면 계속 일어남 사라짐의 속도가 점차 빨라집니다. 사람의 힘에 따라 속도는 똑같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무상을 1초에 한 번 알다가 두 번 알다가……, 하는 식으로 변화가 오고 그 정도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삼법인을 아는 정도가 매우 빨라지면 행고, 즉 ‘상카라둑카’라는 것이 무섭다고 느끼게 되고, 매 순간 내가 죽임을 당하는 느낌이 옵니다. 죽음이 와서 편안하게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그렇지가 않아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또 죽는 느낌이 드니 너무 괴로운 것, 그것이 고입니다. 거기서 무아를 아는 것이지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히 원인에 따른 결과일 뿐 원인이 내가 아니고 결과도 내가 아니고 원인에도 손을 쓸 수 없고 결과에도 어찌해 볼 수 없이 있는 것을 오직 바라보기만 할 뿐입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걸 알고 있는 것 자체가 무척 무섭고 두렵고, 그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니까 다음에는 생기는 것을 보기보다는 사라지는 것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차가 빨리 지나가면 앞 번호는 안 보이고 뒷번호만 겨우 조금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상태에서 계속 집중하여 관찰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계속>

 

 

“위빳사나, 깨달음의 길”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0-7
“상카루빽카 넘어서면 아라한…부처 되려면 상카루뻭카에 머물러야”

2015-07-27 (월) 16:45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그것이 ‘방가 냐나’라고 하는 위빳사나 지혜 다섯 번째 단계입니다. 그 방가 냐나가 아주 강할 때는 눈을 뜨고 있는데도 모든 게 계속 사라지는 듯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바닥을 보면 바닥이 사라지는 것 같고, 나무를 봐도 나무가 해체되는 것처럼 나무 모습이 흩어져 보입니다. 발을 바닥으로 내려디디면 발과 바닥이 함께 아래로 쑥 들어가는 느낌이 있어서 일반적으로 보고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니 점 같은 미세한 대상들이 계속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방가가 너무 센 까닭입니다. ‘내가 눈이 나빠졌나?’ 하고 착각할 정도로 눈을 뜨고 있을 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하면 사람을 봐도 사람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느낌을 받습니다.
 
위빳사나 지혜의 다섯 번째 단계, 그 다음 지혜로 넘어가면 ‘바야 냐나’라는 여섯 번째 지혜가 생깁니다. ‘바야’는 ‘무섭다’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몹시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들이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지혜를 말로 표현할 때는 다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무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무상을 보면서 고를 알 때가 있고, 무상을 보면서 무아를 알 때도 있습니다. 방가 냐나 단계에서도 고를 많이 알게 됩니다. 계속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것이 가치 있는 게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게 없다. 너무 괴롭다…….’ 이런 것이 다 고에 해당되는데 이런 고를 25가지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를 무조건 고통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고통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나를 계속 고문하는 느낌이 오면 괴롭힘을 당한다고 느끼므로 이것 또한 고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둑카는 가치가 없는 것, 확고하지 않은 것, 고문하는 것, 괴롭히는 것 등등이 모두 포함되는 의미입니다.

 

수행 중에 보는 모든 것이 무상합니다. 관찰하면 그 즉시 사라지는 걸 보는 과정에서 계속 알게 되는 느낌은 그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처음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봤다가 나중에는 계속 사라지는 것만 보게 되는데, 계속 사라지는 것을 보니까 무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무서움은 무상을 보는 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지혜의 공통점은 무상·고·무아를 보는 것입니다. 그 무상·고·무아를 보는데 어느 지점이 되면 특별히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지혜의 단계를 나누는 것이고, 위빳사나 지혜 4단계부터 깨달음에 도착할 때까지는 계속 무상을 봅니다. 무상을 보며 무아를 느낄 때가 있고, 고를 느낄 때가 있으며, 깨달음에 들어가기 직전 마음, 도의 바로 직전 마음까지는 지속적으로 무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 다음의 도마음은 해탈을 봅니다. 무상의 소멸, 원인과 결과의 소멸을 보는 것이 도지혜 과지혜이고 그 도의 바로 앞 마음까지는 무상만 봅니다. 일어나 사라지는 물질과 정신의 과정, 그 무상을 보는 것이 4단계 위빳사나 지혜의 처음 단계부터 깨달을 때까지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의 무상을 볼 때 지혜와 집중 정도에 따라서 그 보는 대상은 다릅니다. 방가는 계속 무너지는 것이고 바야는 무서운 느낌이 강하게 오는 것입니다. 무서움 때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행 안 하고 가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고 사띠를 놓쳐 버리는 데서 온 결과입니다.

 

처음에는 제대로 관찰하여 무상이 무서운 것을 보았는데 그 무서움이 점점 커지면서 공포심이 더 커지니까 마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약해지면서 제대로 관찰하지 않으니까 생각이 들어온 것이고, 생각이 들어오니까 그 공포감이 일반적인 무서움으로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수행으로 보게 된 무서움이 평소 알고 있는 일반적인 공포감으로 바뀌면서 관찰을 하지 못하게 된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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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행복한동행 투어 제공

그래서 수행을 멈춰버리고 우는 사람도 있고, 수행처에서 도망가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위빳사나 수행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과정에서 온 잘못입니다. 본인이 마음으로 끊임없이 관찰해야 되는데 관찰하지 못하고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수행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바야 냐나, 무서움의 단계에서 무너지지 않고 제대로 관찰하면 다음에 일곱 번째 지혜인 ‘아디나와 냐나’, 즉 비참함의 지혜가 생깁니다. ‘아, 사실이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물질과 정신에 대해 완전히 정이 떨어지는 단계입니다. 계속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이 실체가 없는 것을, 착각한 것임을 알게 되는 지혜입니다.

 

‘나’를 ‘무아’로 보는 것, 나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화로 보는 게 아니라 있는 사실 그대로를 봅니다. 매 순간 무너지기 때문에 너무나도 무섭고 그것을 비참하다고 압니다. 예를 들면 부부가 있는데 남편이 부인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부인이 계속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자신이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후에 ‘아, 전혀 좋은 게 아니었구나. 너무도 나쁘구나, 무섭구나.’ 하고 아는 순간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나면 부인의 나쁜 점이 계속 눈에 들어오면서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집성제가 계속 무너지고 있는 것으로 고를 알면 집이 계속 무너지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도성제로 계속 관찰하고 있는 것이 고성제이며 이 지혜의 힘으로 여덟 번째 위빳사나 지혜인 ‘닙비다 냐나’로 넘어갑니다. 여덟 번째인 ‘닙비다 냐나’는 너무 지루하고 모든 게 혐오스러워지는 단계입니다.

 

이 때 수행자가 잘못하면 진짜 게으름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너무 심심하고 뭐든지 하기 싫고 먹기 싫고, 잠을 자는 것도 싫고 수행을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할 정도가 됩니다. 이 단계에서 제대로 수행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자꾸만 화가 나고 세상이 싫어지고 심지어는 자살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닙비다 냐나 단계에서 제대로 깊게 관찰하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아주 깊게 볼 수 있게 되는데, 수행의 힘이 약해지면서 관찰을 제대로 못하면서 일상생활에서 닙비다(지루함)가 오는 것입니다. 그건 제대로 마음을 챙기지 못했기 때문에 올바른 지혜에서 조금 비뚤어진 쪽으로 가버린 상태로 잘못하면 생각이 엄청나게 많아질 수 있습니다.

 

제대로 관찰하는 사람은 이 상태가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는 동안에 생기는 현상임을 알고, 지루함이나 혐오감도 수행 중에 생긴 것일 뿐 그것이 일상생활의 지루함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음 상태를 계속 놓치지 않고 집중하여 관찰하면 그 다음에는 ‘아, 지루하다, 이런 생을 더 받고 싶지 않다, 다시 윤회하고 싶지 않다.’ 하는 마음이 강해지면서 그때부터 해탈을 강력하게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윤회하지 않고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이 해탈이지요. 일체 원인과 결과가 소멸되는 단계, 원인이 모두 사라지니 당연히 결과도 사라지는 것이 해탈인데 마음이 그 쪽을 향해 강하게 방향 전환을 합니다.
 
그래서 아홉 번째가 ‘문찌뚜까먀따 냐나’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 해탈로 가고 싶은 마음, 이 몸과 마음,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계속 보면서 참기 어렵게 지루하고, 그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마음,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지루함에서 벗어나 해탈을 성취하고자 함이 문찌뚜까먀따, 이것도 지혜입니다.

 

지루하고 혐오스러운 마음 상태를 관찰하여 문찌뚜까먀따 상태로 넘어서면 물질과 정신의 일어나고 사라짐,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이 행고에서 벗어나서 해탈로 가고 싶어지는데 여기에서도 바르게 수행하지 못하면 생각이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 수행을 그만두고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수행처에 있으면 집으로 도망가고 싶고, 집에 있으면 또 다른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져서 진득하게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어디에 있든지 항상 불편해 합니다. 항상 마음이 안정을 못 찾아 방황하게 되는데 그때는 다시 수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 정신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보면서 지혜가 생겨야 되는데, 사람들의 집중이 떨어지고 지혜가 부족하여 계속 놓쳐버리고 마음이 또 딴 생각으로 가버리고, 그 생각들을 챙기지 못하면 마음이 헤매게 됩니다.
 
그런 상태를 분명하게 관찰하여 계속 지혜가 커지면 그 다음 열 번째 단계가 ‘빠띠상카 냐나’라는 지혜가 생깁니다. ‘빠띠’는 ‘다시’, ‘상카’는 ‘노력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은 다른 핑계거리를 찾지 않습니다. 4단계부터 확실해지는 것이 도리가 없다, 오로지 수행하는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을 본인이 잘 압니다.

 

‘아, 진짜 벗어나고 싶은데 다른 길이 없구나.’ 하는 자연스럽고 강한 이 느낌이 강하게 밀려옵니다. 계속 관찰하면서, 그 관찰하는 과정과 결과가 아무리 괴로워도 ‘괴롭구나, 그런데 이 길밖에 없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서 그때부터는 수행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래서 끊어지지 않는 관찰이 시작됩니다. 무상을 계속 보는 마음이 별로 무섭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고,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수행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빠띠상카 지혜 다음에 마지막으로 ‘상카루뻭카’, 최고의 지혜가 오는 것입니다. 이 상카루뻭카는 위빳사나 지혜 중에서 최고 단계입니다. ‘상카라’는 지금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는 사실이고 ‘우뻭카’는 중립, 평정심입니다. 무서운 것도 없고, 지루한 것도 없고, 벗어나고 싶은 것도 없고, 모든 상황을 아주 평정하게 받아들이면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카루뻭카가 아주 강할 때는 아라한의 마음하고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별로 놀라는 일도 없고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화도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상카루뻭카 지혜도 영원하지 않아 언젠가는 깨지지만, 한순간에 깨져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밑에 있는 약한 지혜들은 깨지면 바로 0으로 떨어져서 다시 시작할 때는 첫 단계인 밑바닥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카루뻭카는 그렇게 쉽게 깨지지도 않고, 깨졌다 해도 한꺼번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약해지면서 서서히 무너집니다.

 

상카루뻭카를 강하게 갖고 있는 사람은 아라한이 어떤 분인지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욕심 부리지도 않고 화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면 보통 사람들은 가장 사랑하던 가족 누군가가 갑자기 죽으면 눈물 안 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카루뻭카 상태에 있으면 눈물을 마구 쏟거나 쉽게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계속 무상·고·무아를 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죽은 것을 평정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지금 여기에서 무상, 죽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 죽었구나.’를 아는 순간 그 마음이 슬프기 마련인데, 그 슬픔이 일어나는 즉시 싹 사라지고 계속 중립이 유지되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멍청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하게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상카루뻭카 지혜를 확실하게 가져본 사람만이 아라한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상카루뻭카를 갖고 있는 순간의 마음이 제일 깨끗한 순간입니다. 잠재적 번뇌까지 완전히 약해지는 상태입니다. 잠재의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거의 없는 듯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상카루뻭카 상태를 그대로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그때가 바로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는 기회이고,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중단 없이 수행하면 마침내 깨닫는 것입니다. 상카루뻭카 지혜의 마음에 머물 수 있으면 사람이 지극히 청정해지면서 도지혜가 어떤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카루뻭카에서 도가 일어날 때는 상카루뻭카를 한 단계만 넘어가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도를 성취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상카루뻭카와 도지혜 사이에 마음이 몇 개 있습니다. 상카루뻭카 지혜의 마지막 마음으로 빠리깜마, 우빠짜라, 아눌로마, 고뜨라부라는 네 가지 마음이 있고 그 다음에 도지혜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빠리깜마는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카루뻭카에서 도의 상태로 들어갈 때 마음이 준비하는 것이 빠리깜마이고 그 다음에 우빠짜라, 이 단계가 되고 난 후에 두 번, 세 번 될 수는 있지만 많은 시간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어서 한 시간 두 시간씩 있을 수는 없습니다. 상카루뻭카로 넘어가서 우빠짜라로 나아가면 이것은 도로 들어가기 위해서 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빠짜라가 도의 마당으로 들어선 것으로 비유된다면 그 다음이 아눌로마인데 이것을 영어로 하면 adjust입니다. 우리가 전기코드 꽂을 때 전압이 안 맞으면 중간에 연결시켜 주는 어댑터가 있는데 그것과 흡사합니다. 그런 것이 아눌로마예요. 지금 일반적인 마음, 범부의 마음에서 성인의 마음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 중간에 어댑터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눌로마라는 마음 하나가 있는데 이것도 위빳사나에 포함되는 마음이며 ‘아눌로마 냐나’란 그런 의미입니다. 빠리깜마, 우빠짜라, 아눌로마는 모두 무상을 봅니다.
 
그 다음이 고뜨라부 냐나인데 이것은 범부의 성(姓)을 잘라버리는 것으로 범부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의미입니다. 범부의 영역이 끝나고 성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단계가 꿰뚫어 봄인데 고뜨라부가 바로 그 경계선입니다. ‘고뜨라’는 ‘성(姓)’이고 ‘아비부’는 ‘넘어왔다, 넘쳤다, 넘었다’는 뜻이어서 ‘원래 있던 성을 넘어섰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이 마침내 도지혜가 됩니다. 그런데 고뜨라부부터는 무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해탈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 도의 마음 직전 마음이 고뜨라부인데 고뜨라부 때는 해탈을 봅니다. 고뜨라부 전까지인 빠리깜마, 우빠짜라, 아눌로마까지 물질 정신을 대상으로 물질 정신의 무상·고·무아 셋 중에 하나를 알고 그 다음 단계인 고뜨라부, 다음이 도지혜(막가 냐나)입니다. 도 다음에는 바로 과지혜로 도지혜는 딱 한 번 있지만 과지혜는 두세 번 될 수 있습니다. 빳짜웩카나 냐나는 뒤돌아보는 지혜입니다. 뒤돌아본다는 것은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아, 방금 전에 그랬구나.’ 하고 해탈을 순간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해탈은 한 번만 보는 것으로 도지혜를 딱 한 번 보면 그 도지혜가 해탈을 보는 것이고, 그것이 번뇌를 잘라버리는 일도 동시에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성제를 동시에 안다는 뜻입니다. 사성제를 동시에 안다는 것은 불을 켜면 환해지는 것과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불을 켜자 어둠이 순식간에 없어지고 밝아지는 것처럼 도성제가 되는 즉시 고성제가 되는 것이고, 집성제를 버리는 것이고, 멸성제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성제가 동시에 된다는 뜻이고, 도의 단계는 단 한 순간이며 그 다음에 바로 과마음입니다.
 
도지혜와 과지혜를 다시 비유하여 설명하자면, 힘차게 뛰던 사람이 갑자기 멈추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서지 못하고 한두 걸음 앞으로 더 나아가게 되는 것처럼 도지혜 다음에 곧바로 과지혜가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뒤돌아보는 지혜, 빳짜웩카나 냐나는 방금 전의 아주 충격적이고 선정의 힘이 강한 상태에서 ‘아, 그랬구나!’ 하면서 자신이 버린 번뇌를 알고, 남아 있는 번뇌도 알 수 있으며, 방금 전에 본 해탈을 다시 새겨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지혜가 생기면서 한 단계가 끝나는 것이고 그것이 수다원의 도와 과 단계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깨닫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심리를 분석하지 못했거나 깨달음의 정의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위빳사나가 이렇게 지혜의 단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수행임을 알고, 단번에 깨달을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단 한 번에 깨달았다고 하면 그것은 진짜 깨달음이 아닌 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고, 진짜 깨달음이라면 본인의 심리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수행 단계를 계속 올라간 사람일 것입니다. 수행이 제대로 되고 있으면 지금까지 말한 느낌들과 그 과정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위빳사나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위빳사나 지혜가 무르익어갈 때 물질과 정신의 매 순간 일어나서 사라짐을 보는 것은 똑같은데 수행자의 지혜, 거기에서 받는 느낌이 다른 것으로 지혜의 단계를 나누는 것입니다. 무상을 보면서 무서워하기도 하고, 거기에 대한 지루함이나 혐오감을 보기도 하는 것이지요. 상카루뻭카에 이르면 수행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수행이 스스로 수행을 합니다. 원래 수행은 본인이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상카루뻭카는 그렇게 애쓸 것 없이 수행이 자기 스스로 걸어가는 것처럼 저절로 됩니다. 그 상카루뻭카 지혜가 내게 있는지 없는지는 아주 뚜렷하기 때문에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상태에 오면 24시간 안 자고 수행할 수 있습니다. 상카루뻭카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잠자는 것이 별로 필요 없습니다. 5분 정도만 졸아도 다섯 시간을 잔 것처럼 힘이 생기고 피로가 사라집니다. 한 번씩 졸기는 하지만 우리가 매일 하듯이 잠자리에 누워서 자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상카루뻭카 상태가 되면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상카루뻭카 지혜를 얻어 보면 아라한이 어떤지 알게 되어 진정한 해탈을 간절한 마음으로 추구하게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전생에 십바라밀 보살행을 하시면서 위빳사나 수행을 많이 하셨는데 상카루뻭카 상태에서 멈춰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부처가 돼야 하셨기 때문이었는데, 상카루뻭카를 넘어가서 아라한이 되고 나면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윤회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내가 꼭 부처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상카루뻭카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열심히 해 보면 내가 보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수행에 아무 문제가 없고, 수행을 이보다 더 열심히 할 수는 없을 만큼 하는데도 상카루뻭카를 넘어서지 못하면 아마 보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넘어가지 않는 이유는 붓다가 되겠다는 큰 원력 때문입니다. 붓다가 되겠다고 보살행을 계속 해왔던 원력이 참으로 강한 사람은 수행의 모든 것을 갖춰도 상카루뻭카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지혜도 뛰어나고 노력도 대단하고, 건강과 신심이 더할 수 없이 좋은데다 상카루뻭카까지는 잘 갔는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가고 싶지도 않다면 틀림없이 자신을 보살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살인지 아닌지를 검증할 수 있는 단계가 바로 이 상카루뻭카입니다.
 
어떤 수행에서 시작하든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면 틀림없이 깨달을 수 있는 길을 가는 사람이고, 그런 것이 없으면 깨달음의 길이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아무리 잘한다 해도 선정을 얻을 뿐 깨닫지는 못합니다. 깨닫는 길로 가고 있으면 틀림없이 지금까지 공부한 이 과정을 거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수행자 본인이 수행을 함으로써 스스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그 단계가 각각 어떠한지를 모두 살펴보았고 불·법·승 삼보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다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게송을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불·법·승의 공덕을 숙지하고 공덕을 쌓으면서 그 공덕의 진실을 말함으로써 여러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는 아주 아름다운 게송입니다.

 

붓도 로께 사뭅빤노, 히따야 삽바빠니남
담모 로께 사뭅빤노, 수카야 삽바빠니남
상고 로께 사뭅빤노, 뿐냑켓땀 아눗따람
에떼나 삿짜왓제나 수키따 혼뚜 사다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부처님의 법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중생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승가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중생들이 선업이라는 씨앗을 심기에 좋은 논밭이 되어 주기 위해서이다.
이 진실을 말함으로써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Buddha 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3번)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는 팔정도”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1(끝)
부처님 “팔정도 외에 다른 가르침으로 깨달은 자를 보지 못했다”

2015-08-12 (수) 16:43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11.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3번)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싸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여의시어 온갖 공양과 예경 받으실 만하며
사성제 진리를 비롯한 모든 법을 올바르게 스스로 깨달으신
그 존귀하신 부처님께 절합니다.

고통 받는 중생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위험 처한 중생들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걱정 있는 중생들 모든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기를 (3번)


Dukkhappattā ca niddukkhā
bhayappattā ca nibbhayā
sokappattā ca nissokā
hontu sabbepi pāṇino (3번)
둑캅빳따 짜 닛둑카
바얍빳따 짜 닙바야
소깝빳따 짜 닛소까
혼뚜 삽베삐 빠니노
사두 사두 사두

(팔정도 게송)

 

Etadattani sambhūtaṃ, brahmayānaṃ anuttaraṃ
niyyanti dhīrā lokamhā, annadatthu jayaṃjayaṃ
에따닷따니 삼부땀, 브라마야낭 아눗따랑니얀띠 디라 로깜하, 안냐닷투 자양자양
이 위없는 최고의 범천의 수레(팔정도)를 본인의 것이 되게 하라.
이 세상을 벗어나는 지혜로운 자는 나머지 모든 것들도 이길 것이다.

 

●●●

 

11일의 집중수행을 마치는 해제법문입니다. 그 동안의 법문을 압축시켜 말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정도이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게송은 이 팔정도에 대한 게송입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어디에 머무르시건 이 게송을 부르면서 팔정도 수행을 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때 부처님께 다가온 아난존자가 그 날 있었던 일을 전하였습니다.

 

“부처님, 제가 오늘 탁발을 하려고 길을 걷다가 마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그 마차에는 흰색 옷을 입는 자눗소니라고 불리는 큰 부자인 바라문이 타고 있었고, 흰 말 8마리가 끌고 가는 마차도 온통 흰색으로 치장이 되어 있어서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마차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도 모두 흰옷을 입었고, 마부도 흰색 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마부가 들고 있는 회초리까지도 흰 색이었습니다. 그것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감탄하여 소리를 질렀는데 ‘아, 이것이 진짜 범천의 마차(브라마야나)이다.’ 하며 칭찬을 쏟아놓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처님, 사람들은 그 마차를 매우 대단하게 여기면서 관심을 보였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그 정도로 대단한 수레(마차)는 없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가르침에는 아주 대단한 수레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담마야나이다.”

 

‘담마야나’란 ‘법이라는 수레(법승)’라는 뜻입니다. 차는 사람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타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경전에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법이라는 수레에 올라타면 자기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장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 그 수레가 최고의 수레이고, 더 이상 좋을 수 없으며 싸움에서 항상 이기는 최고의 수레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에는 마차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아주 일반적인 마차로 두세 사람이 탈 수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위에서 말한 말 8마리 정도가 끄는 아주 크고 대단한 수레이며, 마지막으로 하나는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혼자 타고 싸우는 마차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마차는 바로 팔정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 8마리가 끄는 마차일지라도 이 세상 끝까지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팔정도라는 법승(法乘)을 타면 인간의 세상에서 신의 세상으로 갈 수 있고, 인간의 세상에서 범천의 세상으로 갈 수도 있으며, 인간의 세상에서 세상을 초월하고 해탈까지 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가끔씩 농담 삼아 “나는 대승도 아니고 소승도 아니고 바로 법승이다.”라고 말하곤 할 때의 그 법승이 담마야나입니다. 한국에서는 소승 대승을 말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원래 소승도 없고, 대승도 없습니다. 대승을 원어 그대로 번역하면 ‘대’는 크다는 뜻의 ‘마하’, ‘야나’는 수레라는 뜻이어서 ‘마하야나’이고 소승은 히나야나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때 ‘소’라는 말과 ‘히나’의 뜻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소’는 ‘작다’라는 뜻인데 ‘히나’는 ‘낮다’라는 뜻입니다. ‘대소’는 ‘크고 작음’이라는 의미이니 소승을 바르게 번역하려면 ‘작다’는 뜻의 ‘쭐라야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낮다’는 말인 ‘히나’의 반대말은 ‘높다’ 즉 ‘에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번역되어 쓰이는 말은 ‘마하야나, 히나야나’이니 그 의미가 좀 어중간하고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하여간 삼장법, 오부니까야에는 ‘마하야나, 히나야나’라는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불교에 여러 파가 생기면서 나중에 생긴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오직 하나, ‘담마야나’ 즉 법승(法乘)입니다. 법승이 다른 것이 아니라 팔정도인데 이 팔정도라는 법의 수레를 타면 아주 좋은 데에 갈 수 있고, 모든 싸움에서 이긴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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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행복한동행 투어 제공



위의 ‘모든 싸움에서 이긴다(상가마위자야).’라는 말과 관련된 경전에 전하는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출가하려고 하면 신들이 “아, 어느 지방에서 어떤 부모의 아들딸이 지금 출가하려고 한다.”라고 소리를 지른답니다.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이 머리 깎고 수염 깎고 가사를 입을 때면 다시 “어느 지방의 어떤 집안 아들딸이 전쟁터에 나가려고 갑옷을 입고 있다.”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른다고 합니다. 이 가사가 갑옷, 번뇌와 전쟁하는 갑옷입니다. 또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아라한이 될 때 아주 큰 소리를 지른답니다. 신들이 그렇게 소리를 지른다고 할 때에 바로 ‘상가마위자야(saṅgāmavijaya)’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가마’는 ‘전쟁’을, ‘위자야’는 ‘이긴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존자에게 팔정도라는 법승을 타는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싸움에서 이기고 최고로 좋은 곳에 갈 수 있는 마차가 바로 이 팔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하면서 힘이 들 때 이 게송을 암송하면 큰 힘이 생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시기 직전 마지막 제자인 수밧다에게 해 주신 말씀도 다름 아닌 이 팔정도입니다. 이런저런 의문 나는 것들을 묻는 수밧다에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시간이 별로 없구나. 다른 이야기는 하지 말고 이 말을 잘 들어라. 팔정도가 있는 가르침에 첫 번째로 깨달은 자인 수다원이 있다. 두 번째로 깨달은 자 사다함이 있고, 세 번째로 깨달은 자 아나함이 있으며, 네 번째로 깨달은 자인 아라한이 있다.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에는 이 네 종류의 깨달은 자가 없다. 내가 지금 출가한 지 51년째인데 이 가르침 외에 다른 가르침으로 깨달은 자를 보지 못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마지막 시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만큼 여러분들이 팔정도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만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팔정도를 공부하고 계시니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셔도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덧붙이시기를, 비구들이 이렇게 팔정도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면 이 세상에 아라한은 끊이지 않을 거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수행자가 팔정도를 제대로 실천하면서 잘 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오래 머물 수 있고, 우리가 잘못 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빨리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아라한이 있는 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라지는 것의 단계를 다섯 가지로 봅니다. 첫 단계는 깨달은 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라한이 없어지고, 아나함이 없어지고, 사다함도 수다원도 모두 없어져서 깨달은 자가 한 명도 살아 있지 않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인간 세상이건 천신 세상이건 범천 세상이건 깨달은 자가 하나도 없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사라짐입니다.
 
그래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직은 남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자가 없어도 깨닫기 위해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대로 된 비구·비구니가 살아 있어서 계·정·혜를 실천하고 있다면 아직까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의 사라짐이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 사라짐은 제대로 된 승가가 없고 제대로 계율을 지키지 않는 스님만 남아 있을 때입니다. 그 스님들은 머리 깎고 가사 입고 공부를 하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겉모습만 승가입니다.
 
그 다음에는 스님들이 평복으로 입는 가사는 사라지고 행사 때만 가사를 입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사를 입지는 않고 가사의 귀퉁이를 조금 잘라 몸에 걸쳐 스님임을 표시하게 됩니다. 머리도 기르고 가사를 귀에 조금만 걸어도 스님이라고 인정하는 시대가 오고, 어떤 사람은 가사를 끈처럼 해서 손이나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차차 그렇게 될 것이라고 경전에 나옵니다.
 
그래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조금은 남아 있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맨 끝에 가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지식까지 모두 없어집니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나 미얀마에 있는 돌에 새긴 경전이 남아 있을지라도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아무도 모르게 되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 신의 세계, 범천의 세계 그 어디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가 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사리도 사라집니다. 그것이 완전히 끝나는 것입니다. 즉 첫째는 깨달음의 단계, 둘째는 실천의 단계, 셋째는 경전 공부의 단계, 넷째는 겉모습의 단계, 다섯째는 완전히 부처님의 사리까지 끝나는 단계입니다. 그러니 비구·비구니, 재가자 사부대중이 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부처님의 시대가 오래오래 갈 수 있게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
한다 다니 빅카웨 아만따야미 워
와야담마 상카라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비구들이여, 이제 당신들에게 마지막 말을 해야겠다.

 

조건 따라 움직이는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이 모든 것은 사라지는 법이다. 그러니 잊지 않음으로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하라.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도 “너희들이 해야 하는 일이란 다른 일이 없다, 오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잊지 않음으로 완벽하게 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잊지 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잊지 않음이 논장에서 말하는 사띠입니다. 그 잊지 않음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이 많이 있는데 핵심은 불·법·승 삼보와 선업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선업을 잊지 않음 속에도 가르침이 많이 있지요. 몸으로 하는 나쁜 짓 세 가지, 입으로 하는 나쁜 말 네 가지, 마음으로 하는 나쁜 짓 세 가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나쁜 세 가지를 하고 오욕락에 빠져 있으면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 나쁜 세 가지는 안 하지만 선업도 하지 않는 사람이 두 번째로 잊어버린 사람, 세 번째 잊어버린 사람은 나쁜 것 세 가지는 하지 않고, 선업을 하긴 하지만 대충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이렇게 법문 듣고 수행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욕락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또 그 오욕락에 빠져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몸으로 살생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삿된 음행을 하기도 합니다. 또 입으로 거짓말, 이간질하고 쓸데없는 말 하고 욕설하고 그런 사람도 있고, 직접 몸으로는 하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욕심 부리고, 성내고, 사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있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선업을 앞뒤가 끊어지지 않게 연결시키면서 꾸준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만이 잊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젊기 때문에 자만이 생기는 것도 잊고 있는 것이고, 건강하기 때문에 자만하게 되는 것도 잊고 있는 것이며, 외모가 잘 생기고 예뻐서 자만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잊어버림과 잊지 않음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이 있는데 핵심은 선입니다. 선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하고 있으면 ‘아빠마다’, 선을 잊어버리면 바로 악, ‘빠마다’이지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잊지 않음, 사띠이고 실천적으로 말하면 사념처 수행입니다. 사념처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몸, 느낌, 마음, 법 중 어느 하나에는 항상 사띠를 가지고 있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양하고 아주 많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가지입니다.
 
오늘 수행 마지막 날인 해제법문에서 수행자 여러분들께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선물로 드립니다.

 

한다 다니 빅카웨 아만따야미 워
와야담마 상카라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시고 더 이상 아무 말씀 안 하신 채 열반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말 한 마디만 마음 깊이 담아 두고 잊지 않아도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잊지 않음, 항상 깨어 있음으로 해야 하는 일을 완벽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에는 가사 공양도 있고, 꽃 공양, 촛불 공양 등 많이 있지만 그 중 최고의 것은 실천 수행하는 공양, 즉 빠띠빳띠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모든 보시를 법의 보시가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해 온 계·정·혜 수행 공덕을 부처님께 공양 올리겠습니다.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 그리고 닙바나
이와 같은 아홉 가지 법을 마땅히 성취할 수 있는 수행으로
성스러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드높은 법에 공양을 올립니다.
드높은 승가에 공양을 올립니다.
 
이 계·정·혜 수행 공덕이 생․노․병․사 삼세윤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   나를 성취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회향공덕’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늘 하루 쌓아올린 모든 선업 공덕을 스승님, 부모형제 그리고 친지들, 도움 주신 천신들 그리고 성인들, 친구든 원수든 차별 없이 회향하니 모두들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저의 이러한 공덕의 회향으로 모든 이들 불선업에서 완전히 벗어나 삼세 행복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이 모든 선업을 모든 이들이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소서.

 

사두, 사두, 사두.

 

 

*지금까지 귀중한 연재를 해주신 빤딧차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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