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방의 서문 9
照用同時하니 本無前後요 菱花對像하고 虛谷傳聲이로다 조용동시 본무전후 능화대상 허곡전성
비춤과 작용이 동시(同時)라. 본래 앞뒤가 없고, 거울[菱花]은 만상을 비추고 빈 골짜기에는 메아리를 전하네. 강의 ; 방편으로 본다면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들려놓는 일이다. 그 진실에 있어서는 위에는 하늘이요. 아래는 땅이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려는 승려고 속인은 속인이다. 또 비춰보는 입장에서는 삼천대천세계와 온 우주를 남김없이 다 비취 본다. 그 작용을 하는 데는 할과 방이 번개 치고 태풍 불고 폭우 내리듯 난무한다. 임제의 사조용(四照用)이란 것이 있다. 역시 법을 쓰는 경우의 한 예로써, 임제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떤 때는 먼저 사람을 비추어 관찰하고 뒤에 작용을 보이며[先照後用], 어떤 때는 먼저 작용을 하고 뒤에 관찰한다[先用後照]. 또 어떤 때는 관찰하고 작용하는 것을 동시에 하며[照用同時], 어떤 때는 관찰하고 작용하는 것을 때를 달리 한다[照用不同時].” 라고 하였다. 본문의 말처럼 사람을 관찰하는 것과 열어주고 보여주는 작용은 일정하지 않다. 오는 사람의 근기와 수준과 성향에 따라서 그 법을 쓰고 방편을 쓰는 것이 다르다. 본래 앞뒤가 없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시중(示衆)에서 설명이 있을 것이다. 임제스님이 찾아오는 납자를 알아보는 데는 이쁘고 추하고 잘나고 못나고를 가려내는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 남자가 오면 남자를 비추고 여자가 오면 여자를 비춘다. 서양 사람 동양 사람을 너무도 밝게 잘 비춘다. 머리카락하나 빠뜨리지 않고 소소영영하게 비춰내듯이 오는 사람들을 소상하게 살핀다. 근기와 수준과 그 마음 씀씀이를 알아보는 것이 이렇게 거울 같다. 때로는 텅 빈 골짜기에 메아리 울리듯 가 닫는데도 없이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물에 비친 달그림자 같다.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올리는 종소리 같다.
妙應無方하야 不留朕蹟이로다 묘응무방 불유짐적
신묘하게 대응하는 솜씨는 종잡을 수 없어서 그 자취를 남기지 않았도다. 강의 ; 이렇게 하여 임제스님의 제자들을 훈도하는 능대능소(能大能小)하고 능살능활(能殺能活)하는, 신묘불측(神妙不測)한 솜씨는 불교사에 독보적 가풍을 세운 예가 되었다. 사람들을 제접하는데 출신지역과 남녀노소를 따지랴. 근기를 따라 응하여 주는 데는 자신의 지금 상황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모두가 큰마음 큰 작용이 활달자재하고 예측 불가능한 모습이다. 여기까지는 임제스님의 법의 깃발을 세우고 사방에서 모여오는 사람들을 제접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기능과 활동작용[機用]을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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