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마방의서문11/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8. 29. 11:40
마방의 서문  11  (서문 끝)


面壁未幾密付將終이여 正法誰傳瞎驢邊滅이로다

면벽미기    밀부장종      정법수전   항로변멸

 

면벽하고 앉으신지 오래지 않아 은밀히 입멸후의 뒷일을 부촉하였다.

"정법을 누가 전할 것인가. 눈 먼 당나귀에게서 없어지리라."하셨다.


강의 ; 여기까지는 임제스님의 말년의 수용을 밝힌 것이다.

스님은 임종하실 때 앓은 일도 없었다.

당나라 함통 8년[서기 867년] 정해년 정월 10일 옷을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서 제자 삼성(三聖)스님과 몇 마디의 문답을 마치고 고요히 가셨다.

행록에 나타난 열반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임제스님이 열반하실 때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하였다.

“내가 가고 난 다음에 나의 정법안장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여라.”

삼성스님이 나와서 사뢰었다.

“어찌 감히 큰스님의 정법안장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이후에 누가 그대에게 물으면 무어라고 말해 주겠는가?”

삼성스님이 “할!”을 하므로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 먼 나귀한테서 없어질 줄 누가 알겠는가?”

말을 마치시고 단정하게 앉으신 채 열반을 보이셨다.

일천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모두 임제스님의 정법안장에 목을 매고 있다.

너도 나도 임제스님의 법손이라고 자랑들이다.

망승(亡僧)에게까지 “속히 사바세계에 오셔서 임제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소서.”라고 축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 먼 나귀한테서 없어지리라[滅].”라는 이 한마디 말을 아마도 30년은 좋이 참구해야 하리라.


圓覺老演今爲流通이라 點檢將來하니 故無差舛이로다

원각노연    금위유통     점검장래      고무차천

 

원각종연스님이 이제 이 임제록을 유통하려하기에

점검해 보니 아무런 잘못이 없도다.


강의 ; 원각스님은 당시의 어록을 간행하고 유통시키는데 매우 권위 있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운문광록(雲門廣錄)도 중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제자도 1천 2백여 명이나 되며 북송(北宋)의 휘종황제의 청으로 궁중에서 설법한 일도 있는 스님이다.

그 스님이 교감하여 간행하면서 서문을 쓴 마방(馬防)에게 점검해보고 서문을 쓰게 하였던 것이다.

점검한 결과 특히 임제스님의 종지(宗旨)를 드러내는데 아무런 손색이 없으며 완전하다는 뜻이다.

기록을 남기는 것은 때로 사실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이다.

세존이 아무리 훌륭한 성인으로서 일세를 풍미했다하더라도 그 기록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런 분을 알았겠는가.

우리가 모른다면 그 또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임제스님도 역시 같은 경우다.

그래서 이 어록을 간행하여 유통시킨 원각스님의 공은 바닷물을 먹으로 삼아 쓰고 또 쓴다 하더라도 다할 수 없다.


唯餘一喝하야 尙要商量하노라 具眼禪流 冀無賺擧어다

유여일할      상요상량        구안선류    기무잠가

 

오직 일할(一喝)을 남겨놓고 헤아려 보기를 바라노니,

눈을 갖춘 선사들은 바라건대 잘못 거량하지 말라.


강의 ; 아직도 한 “할”이 있다.

언어문자로 임제스님의 사상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로 다 드러냈으나,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임제스님의 “할”의 낙처(落處)는 아직 그대로 있으니 언어문자를 떠나고 사량분별을 떠나서 잘 거량해 보라.

그렇다고 도안(道眼)을 갖춘 선사로써 임제할을 함부로 잘못 거론하지는 말라.

임제스님이 보고 있느니라.

깊이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서문을 쓴 마방의 살림살이다.


宣和庚子仲秋日 謹序하노라

선화경자(宣和庚子) 중추일에 삼가 서문을 쓰다


강의 ; 임제록을 출간하기 위하여 서문을 쓴 때는 북송의 휘종황제 선화 2년(서기 1120)이다.

임제스님이 입적(入寂)하신지 254년이 되는 해이다.

서문을 강설한 것이 좀 장황한 것 같으나 필자는 좀 미진한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