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9/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8. 29. 17:39
 시중  9


12-1 일이 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

師示衆云, 道流 切要求取眞正見解하야 向天下橫行하야 免被這一般精魅惑亂이니라 無事是貴人이니 但莫造作이요 祇是平常이라 儞擬向外하야 傍家求過하야 覓脚手錯了也로다 祇擬求佛하니 佛是名句니라

임제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참으로 중요한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眞正見解]를 구해서 천하를 마음대로 다니면서 도깨비 귀신에게 홀리지 않는 것이다.

일이 없는 사람이 참으로 귀한 사람이다.

다만 억지로 조작하지 말라.

오직 평상의 생활 그대로 하라.

그대들이 밖을 향하고 옆집을 찾아 헤매면서 방법[脚手]을 찾아봐야 그르칠 뿐이다.

단지 부처를 구하려 하나 부처란 이름이며 글귀일 뿐이다.”


강의 ; 불교공부를 하는 일이나, 집안의 살림을 사는 일이나,

회사를 경영하는 일이나,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나 모든 것에 가장 우선하는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다.

이 일에 대하여 진정견해를 가졌다면 천하를 횡행하여도 겁날 것이 없다.

부질없는 사람들의 되지 못한 말에 놀아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참선을 하고 간경을 하고 기도를 하고 6바라밀을 닦아야 성불할 수 있다는 도깨비의 혼이 붙어 귀신 씨 나락 까먹는 것과 같은 소리를 하는 것에 홀리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이 없는 사람이 귀인이다.

귀인은 부처님이요, 조사다. 참사람이다.

다만 허위 조작하지 말고 평상심으로 살아라.

그렇게 하려면 자기 자신 외에 밖을 향해서 치닫지 말라.

밖을 향해 치달으며 찾은 부처는 모두가 명자(名字)에 불과하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구절은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

단막조작 지시평상(但莫造作 祇是平常)이다 꼭 알아두라.


儞還識馳求底麽 三世十方佛祖出來 也祇爲求法이요 如今參學道流 也祇爲求法이라 得法始了 未得依前輪廻五道니라 云何是法 法者是心法이니 心法無形하야 通貫十方하야 目前現用이언마는 人信不及하고 便乃認名認句하야 向文字中求하야 意度佛法하니 天地縣殊로다

“그대들은 바깥을 향해서 허둥대고 찾으려 하는 그 사람을 아는가?

시방 삼세의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로지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지금 여기에 참여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도 또한 다만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법을 얻어야 끝낼 수 있다.

법을 얻지 못하면 여전히 지옥·아귀·축생·천도·아수라[혹 인도]의 다섯 갈래의 길에 떨어져 윤회하게 된다.”

무엇이 법인가?

법이란 마음의 법이다.

마음의 법은 형상이 없어서 온 시방법계를 관통하고 있어서 눈앞에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철저하게 믿지 못하고서 다만 명칭을 오인하고 글귀를 오인해서 문자 속에서 구하고 있다.

불법을 생각으로 헤아려 이해하려고 하니 하늘과 땅의 차이로 멀리 달라져 버렸다.


강의 ; 그대들은 부처를 찾으려고 밖을 향해서 허둥대는 그대 자신을 아는가?

찾는 그 사람이 곧 찾을 사람이다.

우리들이 부처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찾는 그 사람이 곧 찾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찾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될 것을 언제부터인가 이미 찾아 나서서 허둥대고 있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로지 법을 구하기 위해서다.

모든 수행자들도 마찬가지다.

불법이란 마음의 법이다.

마음의 법은 형상이 없다.

온 시방에 꽉 차 있다. 그

래서 바로 눈앞에서 환하게 쓰고 있다.

그런데 법을 구하기 위해서 수행하면서도 눈앞에 있는 그것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 목전에서 쓰고 있는 그것이 법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즉, 구하고 있는 그 일, 그 사람이 곧 법인데도 말이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가슴이 터질 노릇이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인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중생들은 참으로 이유도 많다.

진짜를 버리고 문자 속에서 가짜를 찾고 다닌다.

그렇게 하면 저 하늘 멀리 아득해 지리라.

십만 팔 천리로 멀어지리라.

옛날 법을 구하기 위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중국으로 인도로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 법을 구해 갔었다.

가서 돌아오지도 못하고 객사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법이란 마음의 법이고 마음의 법이란 그대 자신이다.

한 걸음도 옮길 필요가 없다.

스스로를 깨닫고 스스로를 증득하는 것,

그것이 불조가 법을 구하는 수행이다.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증득하는 것이 참다운 수행이다.

원효(元曉)스님과 의상(義湘)스님이 함께 법을 구해 중국으로 가다가 원효는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마음의 법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구법(求法)의 행각(行脚)을 끝냈다.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것이다.

몽둥이 하나로 심법(心法)을 보여준 사람도 있다.

한 소리 고함으로 심법을 보여준 사람도 있다.

손가락 하나로 심법을 보여준 사람도 있다.

새벽의 별을 보고 심법을 깨달은 사람이 있었다.

꽃을 들어 보인 것을 보고 심법임을 알고 미소 지은 사람도 있었다.

어느 봄 날 복사꽃이 핀 것을 보고 심법을 깨달은 사람이 있었다.

경전을 읽는 소리 한 마디에 심법을 깨달은 사람도 있었다.

변소 길에 눈에 미끄러져서 심법을 깨달은 사람도 있었다.

참으로 별의별 일기일경(一機一境)과 일언일구(一言一句)에서 심법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한번 생각할 구절은 법자시심법(法者是心法).

심법무형 통관십방(心法無形 通貫十方). 목

전현용 인신불급(目前現用 人信不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