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쓰게 되면 곧 쓴다
道流야 把得便用이요 更不著名字니 號之爲玄旨니라 山僧說法은 與天下人別하니 祇如有箇文殊普賢이 出來目前하야 各現一身問法하되 纔道咨和尙하면 我早辨了也니라 老僧穩坐에 更有道流하야 來相見時 我盡辨了也니 何以如此오 祇爲我見處別하야 外不取凡聖하며 內不住根本하야 見徹更不疑謬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잡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일컬어 깊은 뜻[玄旨]이라고 한다.
나의 법문은 천하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
가령,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바로 눈앞에서 각각 한 몸을 나타내어 법을 물으려고 막 ‘스님께 묻습니다’라고 하면 나는 벌써 알아버린다.
노승이 그저 편안히 앉아 있는데 어떤 수행자가 찾아와 나를 만날 때도 나는 다 알아차린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나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밖으로는 범부와 성인을 취하지 않고 안으로는 근본 자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견해가 철저해서 다시는 의심하거나 잘못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의 ; 잡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보게 되면 보고 듣게 되면 들을 뿐이다.
그 듣고 보고 하는 것을 달리 이름 붙일 것이 아니다.
보는 것인가 하면 듣는 것이다.
듣는 것인가 하면 손으로 잡는 것이다.
잡는 것인가 하면 어느새 걷는 것이다.
이것을 부처·조사·보리·열반·진여·불성·자성·법성 등등이라고 구태여 옳지도 않은 이름을 붙일 것이 아니다. 쓸 일이 있으면 그대로 쓸 뿐이다.
또 임제스님은 자신의 뛰어난 안목을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오더라도 그들의 경지를 다 알아 보며,
어떤 수행자가 오더라도 역시 그들의 경지를 다 알아본다.
그 까닭은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차별상에 떨어져 있지 않고,
그렇다고 근본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지에도 자신을 메어 두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경지의 사람이 오더라도 다 적응하여 간파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임제스님의 견해는 없다.
없는 견해이기 때문에 모든 견해에 적응하여 다 상대하여 알아본다는 것이다.
파득변용(把得便用)이 중요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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