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27/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8. 31. 15:35

시중 27

 

14-5 수행이란 업을 짓는 일이다

 

儞諸方言道호대 有修有證이라하니 莫錯하라 設有修得者라도 皆是生死業이며 儞言六度萬行齊修라하나 我見皆是造業이니라 求佛求法은 卽是造地獄業이라 求菩薩亦是造業이요 看經看敎도 亦是造業이니 佛與祖師는 是無事人이라 所以有漏有爲와 無漏無爲가 爲淸淨業이니라

 

“그대들이 제방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고 말하는데 착각하지 말아라.

설령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다.

그대들은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하지만 내가보기에는 모두 업을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도 업을 짓는 것이며,

경을 보거나 가르침을 듣는 것도 또한 업을 짓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는 바로 일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조사에게는 억지가 있고 조작이 있는 유루유위(有漏有爲)와 조작 없이 저절로 그러한 무루무위(無漏無爲)가 다 청정한 업이 된다.”


강의 ; 불교역사에서 임제스님 등 몇몇만 빼고는 모두 수행을 강조한다.

열심히 닦아야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별의 별 수행을 다 권한다.

참선, 염불, 간경, 주문, 육바라밀, 몸을 불사르고 절을 하는 등등이다. 그

러나 임제스님은 위와 같이 수행해서 깨닫는 다는 것은 잘못알고 있다고 한다.

수행이 전혀 필요 없는 일이다.

놀라운 말씀이다.

설사 수행을 해서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 될 뿐이다.

생사해탈을 위한 수행이 도리어 생사 속으로 빠져드는 길이란다.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 일도 다 업을 짓은 일이다.

불교는 성불이 목적이라고 하는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일이 모두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

구하는 그 사람이 곧 부처인데 그 사람을 버리고 따로 구하니 지옥 업이 될 수밖에 없다.

보살이 되기 위한 일도 경을 보거나 법문을 듣는 일도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이란다.

영가스님도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덕을 베푸는 것은 부처될 기약이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본래로 닦아 깨닫는 부처란 없다[無修證佛].

닦아서 점차적으로 되는 부처도 없다[無漸次佛].

사다리 타듯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서 히말라야산에라도 올라가자는 것인가.

위와 같은 가르침과 주장이 불교의 수많은 다른 가르침이나 주장보다 우선하기에 우리나라의 유수한 큰 스님들이 모두 임제스님의 법을 이었노라고 자랑한다.

위와 같은 임제스님의 사상을 이어받지 않으면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사상이 불교의 바른 사상이다.

진짜 불교다.

그렇다면 부처란 무엇인가?

일없는 사람이다.

일없는 사람이 부처인데 무슨 업을 그리 많이 짓는가.

일이 없는 사람인 줄 알고 나면 그때에 가서는 조작이 있는 짓이나 조작이 없는 짓이나 모두가 업이라 할 것도 없는 청정한 업이 된다.

텅 빈[청정한] 업이 된다.

양변을 떠나 있으니 유나 무나, 선이나 악이나,

생이나 멸이나 어디에 있어도 그는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다.

변견에 있어도 변견이 아니고, 편견에 있어도 편견이 아니다.

양변을 떠났으되 양변에 다 조화를 이루며 산다.

그래서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일뿐이다.

구불구법 즉시조지옥업(求佛求法 卽是造地獄業).

촌철살인의 말씀이다.

깊이깊이 사유하라.


有一般瞎禿子하야 飽喫飯了하고 便坐禪觀行호대 把捉念漏하야 不令放起하며 厭喧求靜하나니 是外道法이니라 祖師云, 儞若住心看靜하며 擧心外照하고 攝心內澄하며 凝心入定하면 如是之流는 皆是造作이라하니라

 

“어떤 눈멀고 머리 깎은 사람들이 밥을 배불리 먹고 나서 곧 좌선하거나 관법을 하되 생각이 새어나가는 것을 꽉 붙들어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

또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만을 찾는데 이것은 다 외도의 법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마음을 안주시켜 고요함을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관조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정(定)에 든다면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조작이다.’라고 하셨다.”


강의 ; 좌선을 하고 관법을 수행하는 스님들을 비하해서 눈멀고 머리 깎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꾸준히 새어나가는 것을 붙잡아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또는 시끄러운 것을 매우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편견에 떨어져 있다.

그래서 좌선하는 사람들은 선방 부근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거나 일을 하는 소리가 들리면 기겁을 한다.

잡아먹을 듯이 화를 낸다.

또한 생각을 가라앉히거나 한 곳에 집중하거나 숨을 쉬는 것에 예의주시하거나 자신의 하나하나의 행위를 관찰하고 주시하는 따위의 수행을 하는 자도 있다.

이런 것은 불교가 아닌 외도(外道)의 법이라고 매도한다.

불교에서 가장 심한 욕이 불자를 외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제스님은 그와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조사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그따위 공부는 모두 조작이며 가짜라고 한다.

마음을 안주시켜 고요히 하는 것이 공부라면 일상생활에서 피치 못할 일,

즉 밥을 먹고 대소변을 보고 하는 일을 할 때는 공부가 아니지 않은가.

또 마음을 일으켜 밖을 비춰보거나,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는 것이 공부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또 무엇이라고 하는가.

또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선정에 드는 것이 공부라면 선정에 들지 않고 옷을 입거나 목욕을 하거나 할 때는 역시 공부가 아닌 것이다.

공부가 그렇게 간단이 있고 틈이 있으면 그것을 어찌 출세간의 공부라 할 것인가.

도가(道家)에서도 “도란 한 순간도 떠나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순간이라도 떠나 있으면 도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도교의 도도 이렇거늘 하물며 불교의 법이겠는가.

공부의 바른 길을 이렇게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밝혔다.

최상의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길을 잘 못 든 사람이 비일비재하다.

천 원짜리 물건을 하나 사면서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살피면서 인생을 걸고 도를 닦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살피고 또 살피며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할 일이다.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를 잘 가려야 한다.

그래서 정법(正法)을 찾아야 한다.

여시지류 개시조작(如是之流 皆是造作).

조작이 아닌 것이 불교다.


是儞如今與麽聽法底人을 作麽生擬修他證他莊嚴他리오 渠且不是修底物이며 不是莊嚴得底物이니라 若敎他莊嚴하면 一切物을 卽莊嚴得이니 儞且莫錯하라

 

“그대들은 지금 이렇게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어떻게 그를 닦고,

어떻게 그를 증득하며,

어떻게 그를 장엄하려 하는가?

그것은 닦을 물건이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만약 그것을 장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장엄할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잘못 알지 말아라.”


강의 ; 이 사람은 본래로 완전무결하여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

내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이라 달리 어디서 가져올 일이 아니다.

너무나 잘 생겨서 더 이상 장엄하거나 꾸밀 것이 아니다.

꾸미거나 화장을 하면 오히려 더 추하게 만든다.

닦거나 꾸미거나 장엄을 하면 마치 머리위에 다시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아서 멀쩡한 사람을 요귀를 만드는 격이 된다.

그 사람은 닦고 꾸미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일이 붙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이 보고 듣고 하는 일이란 그저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은 도리이다.

만약 그 사람을 장엄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장엄할 수 있으리라.

“꽃은 화사하게 피어 있고 새는 아름답게 지저귄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각각 완연하다.”라는 표현이 있다.

사람사람이 본래로 구족하였고 개개가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달리 무슨 장엄이 필요하겠는가.

또 저 산하대지를 어떻게 장엄하려고 하는가.

제발 그르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