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29/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8. 31. 16:22
시중 29 


14-7 평상심이 도다

道流야 諸方說有道可修하며 有法可證하나니 儞說證何法修何道오 儞今用處欠少什麽物이며 修補何處오 後生小阿師不會하야 便卽信這般野狐精魅하야 許他說事하야 繫縛他人言道호대 理行相應하고 護惜三業하야사 始得成佛이라하니 如此說者는 如春細雨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제방의 선지식들이 말하기를 도를 닦을 것이 있고 법을 깨칠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치며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쓰고 있는 것에서 무슨 모자람이 있으며,

어떤 점을 닦고 보완한다는 것인가?

못난 후학들이 잘 모르고 이들 여우와 도깨비들을 믿어서 그들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까지 얽어매어 말하기를 ‘이치와 행이 서로 부합하고 삼업(三業)을 잘 보호하고 지켜야만 비로소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들은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강의 ; 천번만번 말하지만 제방의 선지식들은 모두들 닦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고 한다.

요즘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이 이처럼 발달하고 불교도 이제 알 수 있을 만치 알건만 그래도 한결 같이 닦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곳곳에서 닦는 다고들 야단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닦아서 얻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본래로 완전한 것을 다시 닦은들 무엇이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부처가 무슨 조각 작품도 아니고 한 점 한 점 그려가는 그림도 아니다.

과거의 수많은 부처님과 조사들을 살펴보라 무엇이 달라진 것이 있는가.

본래 그 사람이다.

처음부터 완전무결한 존재다.

그것은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 사람들이 본래로 갖춘 것이고 개개인이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쓰고 있는,

잘 보고 잘 듣고 잘 느끼고 잘 아는 이것 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신통묘용이고 무량대복인 것을. 방거사도 말하지 않았던가.

신통묘용이 물을 길어오고 땔 나무를 해오는 일이라고.

이치와 행이 잘 부합하고 삼업을 잘 보호하여야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저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이치와 행이 잘 부합하고 삼업을 잘 보호하여 불에 타지 않던가.

물에 빠지지 않던가.

그것을 부처라고 하는가.

천번만번 외쳐도 더 외쳐야할 말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이금용처 흠소십마(儞今用處 欠少什麽).

너무 좋은 말이다.

길어서 어려우면 ‘흠소십마’만 외우라.


古人云, 路逢達道人이어든 第一莫向道하라하니라 所以言, 若人修道道不行이니 萬般邪境競頭生이라 智劍出來無一物하야 明頭未顯暗頭明이로다 所以로 古人云, 平常心是道라하니라

“옛 사람이 이르기를,

‘길에서 도를 아는 사람을 만나거든, 무엇보다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만약 누구라도 도를 닦으면 도는 행하여지지 않고 도리어 수만 가지의 삿된 경계들이 다투어 생겨난다.

지혜의 칼을 뽑아들면 아무 것도 없다.

밝은 것이 나타나기 전에 어두운 것이 밝아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道)다’라고 한 것이다.”


강의 ; 이 단락에는 아주 중요한 옛 사람의 말을 셋을 인용하고 있다.

먼저 도를 아는 사란을 만나거든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도란 본래 언급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제스님은 상당 첫 법문에서 “산승이 오늘 어쩔 수 없이 인정에 따라서 겨우 이 자리에 올랐으나 만일 조사들이 면면히 이어온 전통에 입각하여 큰일을 드날려 본다면 곧 바로 입을 열수가 없다.

또 그대들이 발붙일 곳도 없다.”라고 하였다.

입을 열기 전에 이미 틀려버린다.

그러니 부디 세상이 돌아가는 얘기나 할지언정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또 이런 말도 인용하였다.

도를 닦는다면 도는 행해지지 않고 온갖 삿된 경계가 다투어 일어난다.

천 번 만 번 강조 하지만 도는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로 비춰보면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고 중생도 범부도 아무 것도 없다.

번뇌무명이 곧 불성이고 허망한 이 육신이 곧 여래 법신이기 때문이다.

달리 어두운 것을 보내고 나서 밝은 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둘이 아니다.

하나다.

한번 시험해보라.

어두운 방에 문을 꼭꼭 닫고 전기 스위치를 올려서 불을 밝혀보라.

어두운 것이 그대로 밝은 것이다.

어두운 것이 어디로 빠져나가지도 않는다.

나갈 틈도 시간도 없다. 그

런데 곧 바로 밝아진다.

전혀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어두운 그대로가 밝은 것이다.

그래서 또 인용하시기를 굳이 도를 말한다면,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다.

천고의 명언이다.

달리 무엇을 논할 것인가.

무엇을 닦고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여기에서 치구심(馳求心)을 쉬어야 한다.

부처는 불상을 조각하듯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평상의 그 마음 그대로 도다.

즉심시불(卽心是佛).

현재 이 마음 이대로 부처다.

불교는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고 쉽다.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만고의 명언이다.

이 한마디만 알면 불교공부 끝이다.

서툰 글씨라도 하나 써서 걸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