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36/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8. 31. 18:05

시중 36

 

14-14 주객이 서로 만나다

道流

如諸方有學人來하야

主客相見了하고

便有一句子語하야

辨前頭善知識이라

被學人拈出箇機權語路하야

向善知識口角頭攛過하야

看儞識不識이어든

儞若識得是境이면

把得하야

便抛向坑子裏하나니라

學人

便卽尋常然後

便索善知識語하나니

依前奪之하면

學人云, 上智哉

是大善知識이여하리니

卽云, 儞大不識好惡로다하고

如善知識

把出箇境塊子하야

向學人面前弄하면

前人辨得하야

下下作主하야

不受境惑이라

善知識

便卽現半身

學人便喝한대

善知識

又入一切差別語路中擺撲하면

學人云, 不識好惡로다

老禿奴여하야

善知識

歎曰, 眞正道流로다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예컨대 여러 곳에서 학인이 찾아왔을 때 주인과 객이 인사를 나눈 뒤 학인이 대뜸 한마디를 던져 앞에 있는 선지식을 알아보려고 한다.

이를테면 학인으로부터 한 가지[箇] 시험하는 말[機權語路]을 끄집어내어 선지식을 향해서 입씨름하는 말[口角頭]을 던져서, ‘보십시오! 스님께서는 이걸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당하게 된다.

그 때 선지식이 만약 시험하는 말이라는 것[是境]을 알면 그 말을 잡아서 곧바로 학인을 궁지로 몰아넣는다[구덩이에 던져버린다].

그 때 학인은 곧 태도를 고치고 평상의 자세로 돌아간 뒤 곧 선지식의 말[가르침]을 찾는다.

그러면 선지식은 여전히 그를 부정해버린다.

학인이 말하기를 ‘참으로 지혜로우십니다.

큰 선지식이십니다.’라고 한다.

그 선지식은 곧 ‘이 녀석은 도대체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구나’라고 한다.

또 선지식이 하나의 시험하는 말[境塊子]을 학인 앞에 내놓고 희롱하면 그 학인이 알아차리고 하나하나 주제를 지어서 경계에 미혹함을 받지 않는다.

다시 선지식이 곧 진심을 조금[半身] 드러내 보이면 학인은 곧바로 “할!”하고 고함을 친다.

선지식이 다시 여러 가지 차별된 말로 시험해 보는데, 학인이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구나.

이 늙고 머리 깍은 종아.’ 하면 선지식은 찬탄하기를, ‘진정으로 도를 배우는 벗이로다.’라고 한다.”

 

 

강의 ; 이 단락은 선지식과 학인이 만나서 오고가는 대화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법을 거량하는 일은 늘 있어 왔다.

제대로 깨달은 사람들의 거량은 더 이상 논할 것이 없고 위와 같은 엉터리 가짜들의 거량은 문제가 많다.

필자도 선원에서 직접 많이 보아온 경험이 있다.

모두가 대개 일방적이다.

선지식도 학인이 법을 거량하거나 법을 거량하기 위해서 앞에 나와 절을 하면 다짜고짜 깔아뭉개는 식이다.

학인도 자신이 할 소리만 내뱉고 휙 일어서 버린다.

‘백골(白骨)이 만산(滿山)이다.’라고 하거나

또는 “할”을 하거나 주장자로 치거나 방바닥을 치거나 하고는 일어나 버린다. 단 두합을 가지 않는다.

서로 모르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옛 검객들은 오십 합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옛 선지식들도 진지하게 학인을 위해서 몇 합을 주고받다가 성의 있게 일러준다.

학인도 성의를 다하여 지시를 따른다.

요즘도 선원에서 오고가는 질문이 있기는 하다.

어떤 곳에서는 불교에 대한 상식이 자기 수준과 엇비슷하면 인가해준다.

공부에 관심만 좀 있어도 인가해준다.

인가를 받은 사람이 어느 날 ‘인가는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 것도 아니고,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하는 사람도 있다.

공부에 관심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으로서는 좋게 생각해 줘야 할런지 잘 모르겠다.

불법에 관심을 유도하는 뜻에서 좌우간 좋은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