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45/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3. 15:09
 

시중 45

14-23 삿되고 바른 것을 알라

或有學人

應一箇淸淨境하야

出善知識前이어든

善知識

辨得是境하고

把得抛向坑裏하면

學人言, 大好善知識이로다

卽云, 咄哉

不識好惡로다

學人便禮拜하나니

此喚作主看主니라

“혹 어떤 학인이 일개 청정한 경계를 선지식 앞에 내놓으면 선지식이 그것이 경계인 줄을 알아차리고 집어다가 구덩이 속에 던져버린다.

그래서 학인이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십니다’라고 하면 선지식은 곧 ‘쯧쯧,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구나’라고 한다.

그러면 학인이 절을 하는데 이것을 ‘주인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

강의 ; 이것은 선지식과 학인 모두 눈이 밝아서 함께 간파하고 문답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예다. 마치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드니 가섭존자가 미소를 보내고,

다시 ‘세존은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그대에게 부촉하노라.’

하면 가섭은 그 말을 기꺼이 받아드리는 광경이라고나 할까?

법을 인가하는 일과 함께 서로 주인이 되어 동시에 간파한 것이다. 임제록에서 공부를 점검하는 감변장(勘辨章)에 많이 있는 예다.

매우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선문답이다.

或有學人

披枷帶鎖하야

出善知識前하면

善知識

更與安一重枷鎖

學人歡喜하야

彼此不辨하나니

呼爲客看客이니라

大德

山僧如是所擧

皆是辨魔揀異하야

知其邪正이니라

“혹 또 어떤 학인이 목에 칼을 쓰고 발에 족쇄를 찬 채 선지식 앞에 나타나면, 선지식이 그 위에다 다시 칼과 족쇄를 한 겹 더 씌워버리는데도 학인이 기뻐하여 피차가 서로 분간하지 못하면, 이것을 ‘객이 객을 간파한다.’고 한다.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이와 같이 예를 든 것은 모두가 마군과 이단을 가려내서 삿된 것과 바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강의 ; 이 단락에서 간파한다는 것은 위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말이 좀 일정하지 않다.

객이라는 말이 학인이라는 뜻이었는데 여기서는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도 객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로가 눈이 어두운 처지이기 때문에 이리 저리 뒤엉킨 것이다.

학인이 기뻐함도 진정한 기쁨이 아니다.

동반의식에서 온 기쁨이다.

근래의 선문답을 보면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다.

대개 자신을 높이고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눈을 뜬 사람이라면 어찌 자랑을 하겠는가?

자랑을 하거나 아상을 내세운다면 어찌 눈을 뜬 사람이겠는가?

그 사람됨을 알만하다.

어릴 때 치기나 객기로 선배스님들과 일방적인 말 한마디 주고받은 것을 가지고 평생 떠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니까 그 선지식이 대답을 못하더라.’는 등. ‘옛 공안을 못 이르더라.’는 등.

입만 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시장 아낙네들에게 그런 자랑을 늘어놓는다.

임제록을 강설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필자도 실은 한없이 부끄럽다.

혹 학인과 문답을 한다 하더라도 서로 모르고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노릇이다.

흉내만 내는 것이다.

그런 것도 기록해 두었다가 책이 되어 돌아다닌다.

지금도 또 어디선가 자랑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참으로 아득하다.

이 법에 눈을 제대로 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알아내는 기준이 있다.

여덟 가지 바람[八風]이다.

이익·손해·훼방·추켜세움·칭찬·놀림·고통·즐거움이다.

이 여덟 가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 그 위인이 어지간하다고 할 수 있다. 안팎으로 모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밖으로는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 같으나 속마음이 흔들리면 그는 아니다.

지사나 의인이나 호걸도 이익이나 손해, 명예나 칭찬, 비방 등에 흔들리지 않는다.

하물며 마음공부에 달통한 도인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임제스님은 마와 이단을 잘 가리고 사와 정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