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 47
14-25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다 쓴다 大德아 山僧이 說向外無法하면 學人不會하고 便卽向裏作解하야 便卽倚壁坐하며 舌拄上齶하고 湛然不動하야 取此爲是祖門佛法也하나니 大錯이로다 是儞若取不動淸淨境하야 爲是면 儞卽認他無明爲郞主라 古人云, 湛湛黑暗深坑이 實可怖畏라하니 此之是也니라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밖에는 법이 없다고 말하면 공부하는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곧 안으로 알음알이를 지어서 벽을 보고 앉아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는 이것을 조사문중[祖門]의 불법이라 여기는데 크게 잘못 아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임이 없는 청정한 경계를 옳다고 여긴다면 그대들은 저 무명(無明)을 주인으로 잘못 아는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깊고 깊어 캄캄한 구덩이는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강의 ; 이 단락은 참선공부의 일종인 묵조사선(黙照邪禪)을 비판하는 이야기다. 그 때는 화두의 성격을 띤 법어는 많이 있었으나 특별히 그 법어를 오늘날 화두처럼 참구하기를 지도하는 일은 없었다. 선문답을 알아듣지 못하면 스스로 참구하고 사유할 뿐이었다. 또 묵조사선이라고 지칭하는 말도 없었다. 뒷날 그런 폐단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나온 말이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뜨는 공부에 있어서 묵묵히 앉아 안으로 관하면서 생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조사문중(祖師門中)의 불법이라고 여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캄캄한 무명의 상태를 대기대용(大機大用), 전체작용(全體作用)의 주인공, 무위진인으로 오인한 것이다. 활발발하게 살아있는 큰 생명이 목석처럼 멍청한 상태가 되어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임제스님이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를 통하여 깨달은 경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불법의 대의를 알고자하다가 생각이 이러한 무기공의 상태로 기우려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병을 없애기 위해 뒷날 대혜(大慧)스님은 선문답의 언어인 화두를 들고 참구할 것을 권하게 되었고, 화두를 참구하는 공부가 불교를 깨닫는 최 첩경의 방편이라 생각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儞若認他動者是면 一切艸木이 皆解動하니 應可是道也니라 所以動者是風大요 不動者是地大니 動與不動이 俱無自性이니라 儞若向動處捉他하면 他向不動處立하고 儞若向不動處捉他하면 他向動處立하나니 譬如潛泉魚가 鼓波而自躍이니라 大德아 動與不動은 是二種境이니 還是無依道人은 用動用不動하나니라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것을 오인해서 옳다고 한다면 온갖 초목들도 다 움직일 줄 아니 그것도 응당 도이리라.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질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땅의 성질이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모두 다 고정된 자성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곳에 서 있다. 또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는 곳에 서 있다. 비유하자면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결을 치면서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 큰스님들이여,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두 가지 경계이다. 의지함이 없는 도인[無依道人]이라야 움직임도 쓰고 움직이지 않음도 쓰느니라.”
강의 ; 우리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옳으냐?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다. 불교를 한마디로 표현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중도(中道)다.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은 선과 악의 상대적 견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쪽으로든 치우쳐 있으면 그것은 편견이고 변견(邊見)이다. 잘못된 견해다. 그래서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위진인은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다 쓰고 다 수용한다. 양변을 멀리 벗어나서 치우치지 않는다. 차(遮)와 조(照)의 동시적 삶을 산다. 그것이 불교적 삶이다. 왜냐하면 선과 악과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과 있음과 없음과 사랑하고 미워함과 주관과 객관과 번뇌무명과 보리열반과 부처와 중생과 성인과 범부 등 이 모든 것이 본래로 공인데 다만 연기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에 의해서 존재하므로 공이다. 공이기 때문에 연기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이런 이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도라고 한다. 존재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런 이치를 알아서 거기에 맞게 살면 그것이 중도적 삶이다. 중도적 삶을 사는 사람을 무의도인, 무위진인이라고 한다. 부처요 조사라고 한다. 그들은 혹은 동을 쓰고 혹은 부동을 쓴다. 영가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행할 때도 선이고 앉을 때도 선이다. 어·묵·동·정에 그 마음 편안하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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