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48/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3. 15:59
 

시중 48

14-26 삼종근기로 판단한다

如諸方學人來하면

山僧此間

作三種根器斷이라

如中下根器來하면

我便奪其境而不除其法하고

或中上根器來하면

我便境法

俱奪하고

如上上根器來하면

我便境法人

俱不奪하고

如有出格見解人來하면

山僧此間

便全體作用하야

不歷根器니라

“제방의 학인들이 찾아오면 산승은 여기서 세 가지의 근기로 그들을 판단한다. 중하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만 빼앗고 그 법을 없애지 않는다.

혹 중상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와 법을 함께 빼앗는다.

만약 상상의 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와 법과 사람을 다 빼앗지 않는다.

만약 격을 벗어난 뛰어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오면 나는 여기서 곧 전체작용을 나타내어 근기를 따지지 않는다.”

 

강의 ; 사람들의 근기란 다양하다.

하필 세 가지 근기이겠는가.

부처님은 다양한 근기를 모두 헤아려서 알맞게 대처한다.

그러나 조사들은 법을 씀에 있어서 간단명료하다.

첫째 사람이 의지할만한 것이 될 경계는 부정해버리고 그 이치[법]는 그대로 두고 상대한다.

둘째 경계와 법을 모두 다 부정하고 상대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어디에 몸 둘 바를 모른다.

셋째 경계와 법과 사람을 그대로 두고 상대한다.

이것은 좀 더 높은 차원이다.

그러나 모두 상식 안에서 법을 쓴다.

그러나 격을 벗어난 뛰어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오면 근기를 헤아리지 않고 전체를 작용한다.

이런 사람은 근기에 해당시키지 않는다.

전체작용이란 임제스님이 처음 황벽스님에게 불법의 대의를 물었을 때 황벽스님이 방을 써서 보여준 경우다[黃蘗山頭 曾遭痛棒].

전체작용(全體作用) 불역근기(不歷根器).

좋은 말이다. 임제스님의 대기대용이 엿보인다.

大德

到這裏하야

學人著力處니라

不通風하며

石火電光

卽過了也니라

學人

若眼定動하면

卽沒交涉이니

擬心卽差

動念卽乖

有人解者하면

不離目前이니라

“큰스님들이여, 여기에 이르게 되면 공부하는 이가 힘을 한껏 써야 한다.

바람도 통하지 않고 전광석화까지도 곧 지나가 버린다.

학인이 만약 눈만 깜박여도 곧 교섭이 없어진다.

마음으로 헤아리려 하면 곧 틀리며 생각을 움직였다하면 바로 어긋나 버린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눈앞을 여의지 않을 것이다.”

 

강의 ; 불교의 대의를 물었는데 사정없이 방을 후려 친 그 전체작용에 대해서 무어라고 입을 땔 것인가?

있는 힘을 다 해야 하리라.

바람도 통하지 않는 자리다.

전광석화보다도 빠르다.

날아오는 총알을 세 번 네 번 쪼개는 칼바람도 어쩌지 못한다.

학인이 눈도 깜박이지 못하는 자리다.

1초는 12찰나고, 1찰나에 9백번 생멸한다는 그 마음작용으로 무어라 일러도 이미 틀려버리고 어긋나 버린다.

너무 느려서 벌써 십만 팔 천리로 어긋나 버린 것이다.

사유심(思惟心)으로 전체작용의 경계를 헤아려서야 되겠는가.

이미 멀리 달아나서 그 낙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지금 이 순간 목전에서 떠나있지 않다는 것을.

大德

儞擔鉢囊屎擔子하고

傍家走하야

求佛求法하니

卽今與麽馳求底

儞還識渠麽

活鱍鱍地하야

祇是勿根株

擁不聚하며

撥不散하야

求著卽轉遠이니

不求

還在目前하야

靈音屬耳어니

若人不信하면

徒勞百年이니라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바랑에 똥짐을 짊어지고 옆으로 내달리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데,

지금 그렇게 구하는 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대들은 아는가?

활발발하게 작용하지만 그 뿌리가 없으니 움켜잡아도 모이지 않고 펼쳐도 흩어지지가 않는다.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하지 않으면 도리어 눈앞에 있다.

신령스런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데 만약 이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백년 세월을 헛수고만 할 뿐이다.”

 

강의 ; “똥자루를 짊어지고 옆으로만 내달린다.”

옆이란 무엇인가? 치우친 소견이다.

유무, 선악, 동정, 고락, 증애, 역순, 시비 등등의 양변에 떨어진 견해다.

육조스님도 도명을 만나 첫 법문에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선악 시비의 옆길을 헤매지 말라는 뜻이다.

세존이 처음 성도하시고 다섯 비구들을 찾아간 것도 고행의 삶과 쾌락의 삶,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말고 중도적 삶을 살기를 권하기 위해서다.

“나는 중도를 깨달았노라.”라는 <중도 대 선언(中道大宣言)>이 불타의 첫 일성이었다.

본래로 시비, 선악, 고락, 유무를 벗어난 지금 구하고 있는 그 사람을 아는 것이 문제의 열쇄다.

인간은 본래 그와 같은 치우친 견해가 아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그 본래 사람을 알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온 우주적 작용을 하지만 무슨 뿌리나 줄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움켜잡을 수도 없다.

흩어도 흩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구하거나 찾으면 찾아질 것 같으나 찾을수록 멀어지는 것이 또한 이 사람이다. 차라리 찾지 않으면 눈앞에 있다. 저 바람소리가 그 사람의 소리인가? 그 사람이 저 바람 소리인가? 지금 이 사람은 비시, 선악, 고락, 유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