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감변2/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5. 14:19
 

감변 2

15-2 도적에게 집을 맡기는 격이다

後潙山

問仰山호되

此二尊宿意作麽生

仰山云, 和尙作麽生

潙山云, 養子

方知父慈니라

仰山云, 不然하니다

潙山云, 子又作麽生

仰山云, 大似勾賊破家니다

뒷날 위산스님(771-853)께서 앙산스님(803-887)에게 물었다.

“이 두 존숙들의 참뜻이 무엇이겠는가?”

“화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보는가?”

“도적을 집에 두었다가 집안을 망쳐놓은 것과 흡사합니다.”

 

강의 ;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의 재 점검과 평가는 늘 이어진다.

위의 선문답에 대해서 위산스님은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앙산스님은 “도적을 집에 두었다가 집안을 망쳐놓은 것과 흡사합니다.”라고 하였다.

위산스님은 순리,

즉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앙산스님은 역리,

즉 부정적으로 해석하였다.

너저분하게 주해를 단다면 순리와 역리는 표현이 비록 다르지만 불교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같은 것임을 안다.

쌍차(雙遮-부정)는 곧 쌍조(雙照-긍정)고 쌍조는 곧 쌍차이기 때문이다.

차조동시(遮照同時)와 기용제시(機用齊示)를 자유자재로 쓰는 이들은 부정 속에 긍정이 있고 긍정 속에 부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난 김에 지팡이는 몸을 의지하는데도 쓰이고 사람을 치는 데도 쓰인다.

물에 비친 달과 같이 실재하지 않는 도량(道場)이지만 우리는 열심히 건립한다. 그리고 거기서 산다.

환화(幻化)인 공양 거리를 불상 앞에 열심히 올린다.

일체법이 중도 아닌 것이 없다.

양변을 떠나기도 하고 양변을 수용하기도 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