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7/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12. 15:37
 

 

무비스님 서장 대강좌 제 2-2 강

 

지금 다행히 집안의 세속 인연을 다 마치고 한가하게 지내며 다른 일이 없으니, 여기도 모두 정년퇴직하고 이 분하고 비슷한 분이 상당히 많네요.

스스로 채찍질해서 처음 뜻을 실행하고자 합니다.

수명도 많이 늘어났고, 15년 내지 20년쯤 늘어났고, 할 일은 어디서 크게 받아주지도 않고 하니까 불교공부 뿐입니다.

그것도 나이 들어서는 복잡한 공부 하는 것이 아니에요. 화두 딱 하나들고, 다 털어버리고 통장도 하나로 집약 시키세요.

여러 통장 해 놓으면 어디 얼마 갖다 놨는지 어디 얼마 놨는지 몰라요.

 

  이 看話禪(간화선)의 정신은 제가 처음에 뭐라고요? 선의 정신은 簡素(간소). 그랬지요? 선의 정신은 첫째 간소에 있다.

간단하고 소박한 인생. 왜 화두만 들고 살라고 하느냐? 화두가 밥 먹여 주느냐? 어떻게 하느냐? 아닙니다.

간단하고 소박한 깔끔한 삶이 너무 멋있어요. 그것이 인생 고수들이 사는 법입니다. 그래서 여기

  스스로 채찍질해서 처음 뜻을 실행하고자 합니다.

다만 친히 가르치심을 얻지 못함을 한탄할 뿐입니다.

일생 동안의 허물을 이미 하나하나 보여 드렸으니, 반드시 제 마음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자세하게 경계하고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청법과 지도편달을 당부 하는데, 소위 그 당시 중국 천하에 육부 장관을 지냈다는 겁니다.

종삼품 벼슬이라면 천하에 자존심과 아만과 긍지가 하늘을 찌를 듯한데 이렇게 꼬리를 내리고, 마음을 비우고, 청법을 합니다.

이 자세가 참 바람직하고 좋지요.

법에 있어선 이래야 되는 겁니다.

평소 마땅히 어떻게 공부를 해야 다른 길에 빠지지 않고 바로 本地風光(본지풍광)과 서로 契合(계합)하겠습니까?

本地風光. 無位眞人(무위진인). 참 나. 부처자리. 진여. 뭐라고 해도 그 말이 그 말입니다. 뭐라고 표현해도 답답해요. 답답할 뿐입니다.

 

  임제스님이 이런 고급 불교용어들을 수없이 공부하다가 이것이 불교가 아니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것 다 제쳐놓고, 황벽 스님을 찾아가서...

황벽 스님 찾아가서도 3년 동안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또 질문도 한 번도 못했어요. 그냥 갑갑할 뿐입니다.

금방 소개한 고급 용어들을 수없이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그것은 말에 불과하고 그냥 사람들이 편의상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겨지니까 갑갑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목주 스님의 안내를 받아서 “니 여기 온지 3년이나 됐는데 왜 여태 조실스님한테 가서 질문 하지 않고 그랬냐?” “뭘 어떻게 질문해야 됩니까?” 너무 갑갑한 겁니다. “네가 불교하고 싶어서 왔으니까 뭐가 불교입니까? 하고 물어라.” 그러니까 그 순진한 임제스님이 그대로 올라가서 “스님, 뭐가 진짜 불교입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황벽 스님이 있다가 -스님들 주장자 있지요? 아주 무겁고 굵고 그냥 우둘투둘해서 한 방만 맞아도 어디가 깨지든지 상처가 날, 그런 방망이 인데요. 무려 20방망이를 다짜고짜 후려 쳐 버렸어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제일 아주 좋은 법문입니다.

 

  그동안 본지풍광이 어떻고, 본래면목이 어떻고, 진여가  어떻고, 불성이 어떻고, 열반이 어떻고, 이런 쓰레기 같은 잡다한 용어들만 머릿속에 꽉 차있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불교는 제대로 안 들어갑니다.

많이 외우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전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처음에 어릴 때 그것이 좋은 줄 알고는 불교사전을 처음부터 외우기 시작했고, 대명법수라고 하는 상하권으로 된 법수 책만 있어요.

그것은 숫자를 통해서 불교의 교리를 나타내는 그것이 법수인데요.

그것만 그냥 처음부터 외우기 시작 했어요.

 

  1심 2문 3대 4신 5행 6자. 쭉 이렇게 설명 되어 있는 것. 그런데 지금쯤 제가 철이 나면서 그것이 불교가 아니고,

그것은 진짜 가짜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고, 여기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을 만나서 20 방망이를 얻어맞고, 또 20 방망이. 또 20 방망이. 도합 60 방망이를 얻어맞고도 아무 소득이 없었던 그런 심정을 조금은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의 질문도 일종의 그런 질문입니다. “무엇이 진짜 불교입니까?

바로 本地風光(본지풍광)과 서로 契合(계합)하겠습니까? 어떻게 공부해야 본지풍광하고 계합하겠습니까? 이것이 간화선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진짜 불교가 무엇입니까? 이거거든요.

이와 같은 말도 허물이 또한 적지 않습니다만 다만 정성을 바칩니다. 스스로 피하기 어려우니 진실로 가련하여 지극히 묻습니다. 자기의 정성과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는 편지입니다.

이것은 대혜 스님의 법문은 아니고, -서장 편집이 잘 되었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이러한 분의 질문하는 편지를 서두에다 이렇게 얹어놓고 비로소 대혜 스님의 법문을 이끌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p. 46

  2. 증시랑에게 답함 (1)

  증시랑에게는 여섯 편의 편지로 답하는 것이 실려 있습니다.

대혜 스님이 여섯 번의 편지를 보냈을 때는 증시랑은 얼마나 보냈겠습니까?

줄잡아 열 번은 더 보내지 않았겠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답하는 편지 속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을 했던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대혜 스님이 인용하는 글들이 있으니까 그 인용하는 글들을 보면 대강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대혜 스님의 친서를 우리가 접하게 됐습니다.

편지를 받아보니 어릴 때부터 벼슬하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큰 스승을 찾아뵙다가 중간에 科擧(과거)와 婚姻(혼인), 벼슬하는 일 때문에 세속 생각과 습관에 빠져서 순수하게 한결같이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을 큰 죄라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요.

 

  그 전에 제가 어릴 때, 제주도에 처음 가서 원명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시내에 무슨 일이 있어서 스님들 댓명하고 나온 일이 있었어요.

나왔는데 술주정뱅이가 고함을 고래고래 치고, 그냥 헤집고 다니다가 우리를 보더니,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누가 꾸중도 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고, 우리도 겁이 나서 피해야할 그런 입장인데, 와서 “잘못했습니다.”하는 그 광경을 제가 못 잊어요.

완전히 고양이 앞에 쥐가 되어서 사잇골목으로 도망 가 버리는 모습을 봤습니다.

  어떻게 보면 좋게 볼 수도 있겠는데, 또 바람직한 태도인가?

이런 것들도 우리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세속 생활을 한 것. 우리 모두, 여러분 모두가 이것이 큰 죄냐?

이 문제예요. 큰 죄냐? 아주 중요한 이야기지요.

여러분들의 인생이 지금 대혜 스님 말 한마디에 달렸어요.

천하의 대 선지식 대혜 스님 말씀이니까 이것은 큰 문제라고요.

큰 죄라 하였습니다.

  또 편지 속에 無常(무상)한 세간이 여러 가지 허망한 환상[虛幻(허환)]이어서 한 가지도 즐길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이 자리에 오신분들 세상사 어지간히 졸업하시고, 가끔 한 번씩 마음이 끄달릴 때도 있지만 어지간히 세상사 졸업했다고 봅시다.

거의 인생의 高手(고수)가 돼 가려고 하는 판에 이런 좋은 기회가 있어서 이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공부 잘하면 진짜 불교의 고수가 되고, 인생 고수가 됩니다.

그러면 대통령 열 번 준다 해도 그거 시시하게 보입니다.

대통령 열 번도 시시한데 그 까짓 국회의원이니 장관이니...

사업 잘 해서 부자 된 것. 그것은 下手(하수)들이나 하는 것이죠.

  장관이니 국회의원이니 대통령이니 무슨 그룹회장이니 하는 것은 전부 인생 하수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 정도는 알지요?

얼른 마음이 그렇게 다가서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불자들은 그 쯤 안다고요.

알기는 아는데 아직도 갈등이 좀 있어요. 하하하하하하하~~~

(우째 그리 잘 아노? 속을 환히 들여다본다 내가...)

 

  이 분은 그래도 그랬어요. 모두가 허망한 즐길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말을 대혜 스님에게 했어요.

그 때문에 마음을 다 하여 이 一大事因緣(일대사인연)을 참구 하고자 한다 하시니 제 마음에 매우 흡족합니다.

대혜 스님 마음이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생각하고 인생을 생각하고 “스님에게 공부 하겠습니다.

”이렇게 들어온 사람은 제일 이쁘지요. 제일 이뻐요.

그러니까 마음이 흡족하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일대사인연을 참구 한다. 이것도 불법. 불교. 성불. 깨달음 여기에 크게 벗어난 뜻이 아닙니다. [하나의 큰 인연] 그랬어요.

그것은 곧 법화경 같은데서는 “佛知見(불지견)”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다.” 부처님의 지혜를 일대사인연이라고도 한다.

 

  이미 선비가 되었기 때문에 봉급을 받아 생계를 해결해야 하고,

과거와 혼인과 벼슬살이도 세간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당신의 잘못이 아닌데,

작은 잘못으로 큰 두려움을 내었습니다.

그렇지요. 세상에 살면서 당연지사지, 그거 뭐 죄라고 할 거나 있습니까?

당연한 것이죠. 이 몸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으면 세상의 관례에 따라서 교육 받아야 되고, 成人(성인)이 되면 결혼해야 되고, 취직해야 되고, 자녀들 먹여 살리려면 어떻해요?

나쁜 줄도 알고 나쁜 짓도 하고, 나쁜 짓인 줄 모르고도 나쁜 짓 하고, 이래저래 더불어 그렇게 사는 겁니다.

남 하는 대로 그렇게 하고 사는 겁니다. 그것을 큰 죄라고 할 수 있습니까?

두려워 할 것도 없어요. 이것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제가 드리는 말씀이고,

대혜 스님 법문은 또 다릅니다.

 

시작 없는 오랜 세월부터 참된 선지식을 섬기고, 깊은 반야의 지혜를 익히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렇지요. 여기 와서 이런 시간을 우리가 내는 이것이 부처님하고 또는 인생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보다 나은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여기는 오랜 세월부터 참된 선지식을 섬기고, 깊은 반야의 지혜를 익히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생각을,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사실 불법을 공부 하겠다고 스님이 됐어도, 전문가인 스님이 되어서도 정말 골똘하게 불법. 이것 하나만 가지고 그렇게 인생을 오롯이 살다간 사람은 크게 많지 않습니다.

열 명에 한 두 사람 될까 말까? 그 외에는 살다보면 그냥 적당히 살고 마는 겁니다.

습관대로 관례대로 세상 통례대로 그렇게 적당히 삽니다.

하물며 세속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 없지요.

글쎄 저도 세속에 살았다면 이렇게 와서 이런 공부를 할까?

상당히 의심스러워요. 여기 오신 분들은 대단한 분들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왔습니다만, 대혜 스님이 이분에 대한 평도 참 올바르고 맞는 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부터 법문이 시작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말한 큰 죄라는 것은 聖賢(성현)도 또한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석가 달마도 다 장가갔고 직업도 있었어요.

그 분들은 아주 고위 공직자입니다. 둘 다 태자잖아요. 아주 고위 공직자입니다. 월급도 아주 많이 받고요. 또 공자 맹자도 역시 그랬고요. 공자 같은 이들은 어땠습니까?

어디 가서 한 자리 하려고 그야말로 상가집 개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한 자리 해보려고 중국 천하를 헤맸던 분 아닙니까? 맹자 같은 이도 역시 그랬어요.

  맹자 양현담에 보면 “당신은 우리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려고 오셨습니까?” 맹자가 첫 마디에 “하필 왜 이익이꼬?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또한 仁(인)과 義(의)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인과 의가 있다는 식으로 하지마는 그것이 통합니까?

인의예지가 통하나요? 권력자들에게 仁義禮智(인의예지)는 안 통하거든요.

오로지 이익과 권력만 통하는 그런 곳이지요.

그러니까 성현들도 면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런 것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 이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우리 불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다만 헛된 환상이며 구경의 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경의 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변하지 않는 법.

최후의 법이 구경의 법입니다. “환상이다” 이것이지요. 여기 환상이라는 말을 가지고 한참 이야기 해 나갑니다.

 

능히 마음을 진리의 문안으로 돌려 지혜의 물로써 먼지로 오염된 때를 씻어 버리고 깨끗하게 스스로 머물러야 합니다.

바로 한 칼로 두 동강을 내고 다시는 相續(상속)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반드시 앞도 생각하지 말고, 뒤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세상사와 출세간 사를 둘로 보지 아니 하면서 또한 세속적인 삶의 가치관과 출세간적인 삶의 가치관에 대한 확립을 우선적으로 세워야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그

래서 여기서 지혜의 물로써 먼지로 오염된 때를 씻어라 그랬어요.

그 앞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모두가 “환상이다.”그랬어요.

헛된 환상이며 구경의 법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환상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환상입니다.

  뒤에 그 이야기가 쭉 실타래 풀리듯이 풀어 나옵니다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6~7 십 년 세속에 묻혀서 살았다 하더라도, 이 공부 한번 해 보겠다고 마음을 낸 이상은 일도양단으로 한 칼로 두 동강을 내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라.

상속 하지 않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뭐 할 겁니까?

지금 생각하면 어제도 잘못하고 오늘도 잘못한 것이 되는 겁니다.

어제 잘못 했으면 그것으로 끝나 버려야지, 오늘 또 그것을 생각하면 오늘 또 잘못한 것이 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상속 하지 말라. 계속해 나가지 말라 이겁니다.

  그래 앞도 생각하지 말고, 뒤도 생각하지 말라.

공부하는 마당에 있어서는 뉘우쳐서 참회 하면 좋은 일 아니냐?

이것은 간화선 입장에서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보통 우리 상식적으로 하는 말이지요. 선불교에서는 뉘우치고 참회하고 지난 일을 거울삼아서 어쩌고 하는, 세속에서 말하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차원이 달라요. 그런 것 자꾸 머릿속에 떠올리거나 하면,

이 공부가 제대로 안 됩니다.

참선은 놔두더라도 서장공부부터 제대로 안 됩니다.

설령 어제 큰 죄를 지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더 이상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 그것을 생각하면 오늘 또 그 죄를 10분의 1은 짓는 것이 돼 버립니다.

 

대혜 스님 말씀이 당신의 개인적인 소견이 아니라,

정말 선불교의 관점에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 “참회”라는 말이 영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를 크게 여기서 숭상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헛된 환상이라고 말한다면, 지을 때도 또한 환상이며,

“나쁜 짓 할 때도 또한 환상이며” 이 말입니다.

나쁜 짓해서 그 과보를 받을 때도 또한 환상이며,

복을 짓는 것도 환상이며, 복을 받는 것도 환상이며, 죄업만이 환상이 아니에요. 똑 같습니다. 그러니까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죠.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불교의 고수라고 우리가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을 짓는 것도 환상이면 복 지을 필요 없네요. 맞아요. 복 짓지 마세요 오늘부터...

선불교에서는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구태의연한 상식들 다 떨어 버리세요.

脫俗(탈속). 그것 俗氣(속기)예요.

복 지어서 복 받고, 죄 지어서 참회하고 어쩌고저쩌고...

그것은 속된 일입니다. 속인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것은 속된 생각입니다.

 

지각할 때도 또한 환상이며, 환상임을 아는 그 사실도 환상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도 다 이 환상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어제 우리가 중요한 일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있습니까?

어제 만났던 사람. 어제 내가 한 일. 무엇이 있습니까?

하물며 1년 전 일이야 더 말할 나위 없는 거죠.

환상이라고 하니까 눈이 밝은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지, 이것 아니에요.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금방 이 자리에서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겁니다. 어제 일을 여러분들 한 번 떠올려 보세요. 뭐가 지금 있는가?... 뭐가 손에 잡힙니까? 이것이 환상 아니고 뭡니까? 어제 좋은 일을 했든, 나쁜 일을 했든 다 환상입니다.

어제 아무리 좋은 대접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 순간 아무 것도 없어요.

다 환상입니다.

  色卽是空(색즉시공)이라고요. 그대로 공이지, 세월이 가서 공이 아니고요.

즉시공이라고요. 분석해서 원자가 어떻느니 분자가 어떻느니 하는 것은 분석공입니다.

성문 연각들이나 하는 일이지 보살만 하더라도 즉시공입니다. 그대로 공입니다. 바로 공이라고 하는 것이지, 분석해서 공이라고 하는 것은 성문이나 아주 저급한 불교의 유치원생들이 하는 일입니다.

방금 우리 반야심경 외웠잖아요. 그것도 알아듣기 쉽게 번역해서 외웠지요.

즉시공입니다. 그

대로 공이지 무슨 분석해서 원자가 어떻고 분자가 어떻고 하수들이 하는 겁니다. 성문 연각...

 

오늘 잘못을 알았다면 환상의 약으로 다시 환상의 병을 치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아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는 그 즉시 知幻卽離(지환즉이)라, 不作方便(부작방편)이요.

환 인줄, 환상 인줄 이는 그 순간 곧 떠나 버려요.

아, 어제 일 아무 것도 아니구나. 어제 일은 내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구나.

그 순간 환상은 사라져 버렸어요.

어제 좋은 일도 환상이요. 어제 나빴던 일도 환상이요. 더 이상 필요 없지요.

 

  병이 나아서 약이 필요 없게 되면. 그 전과 같이 다만 옛날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어제 사람이 오늘 사람이고, 오늘 사람이 내일 사람입니다.

몸살을 앓다가 낫고 보면, 앓을 때 아팠지 낫고 보면 역시 그 사람입니다.

이것은 속뜻이 뭐냐? 깨달았다 하는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 “깨달음” “깨달음” 불교에서는 “불교”하면 “깨달음의 가르침”아닙니까? “부처님”하면 “깨달은 사람”이런 뜻인데요.

깨달았다는 것도 그래요. 특별한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나서도 그 이튿날 밥 먹어야 돼요. 목마르면 물 마셔야 돼요. 피곤하면 잠자야 돼요. 그 이튿날도 또 물마시고, 밥 먹고, 잠자고, 사람 만나면 대화해야 되고,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깨닫기 전 그 사람이라고요.

  그럼 깨달을 필요 없네요. 깨달을 필요 없어요. 깨달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 왜? 깨달을 필요가 없는가? 라고 하는 그것은 이미 깨달은 사람입니다.

 

저의 이 말에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깨달을 필요가 없어요.

이미 깨달아져 있고, 깨달아봐야 역시 그 사람입니다.

너무 차원 높아서 못 알아듣겠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너무 어려운 말을 하니까...

  제가 좋은 말도 나쁜 것도 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전부 환상이라고 했는데요.

초발심자경문에 그런 말이 있어요.

用如幻悲(용여환비)라. 환상과 같은 자비와 지혜를 쓴다. 그랬어요.

이 보십시오. 복 짓는 것도 환상이고 복을 받는 것도 환상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았으면 최소한 그 차원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만약 특별히 따로 사람이 있고, 별도로 법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삿된 마군인 外道(외도)의 견해입니다.

당신은 깊이 생각하여 다만 이와 같이 공부해 가되,

  ‘이와 같이’ 라고 하는 말은 현상을 바르게 보라.

꿰뚫어 보는 공부. 여기서는 그 공부입니다.

꿰뚫어 보는 것이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 거기서 우리는 뭔가 공부를 그동안 했다는 이 사실 때문에 뭔가 달리 자꾸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뭔가 오해가 되어 있어요.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때때로 고요할 때에 須彌山(수미산), 放下着(방하착)의 두 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분이 수미산,방하착 이라고 하는 두 가지 화두를 소개를 받았는데,

이 때만 하더라도 화두를 어떻게 드는 것이 헤매지 않고, 제대로 초심자가 들 수 있겠는가?

라는 이 문제에 대해서 크게 정리가 덜 됐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것을 견강부회 하느라고 이렇게 두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라고 했다고 해서 두 개를 같이 들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만 들어야 된다.

이것은 주해를 다른 사람의 소견 이고, 대혜 스님은 아닙니다.

 

  여러분들 화두 많이 알지요? 여러분들이 아는 화두 소개할까요?

부처님이 꽃을 들고 있거라. 이것이 선불교의 지론 아닙니까?

한송이의 꽃을 통해서 출발 했다고요. 여러분들 그 화두 알지요?

이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뭐가 이 몸뚱이 끌고 왔느냐 이겁니다.

無자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요.

오늘도 소개 받은 것이 수미산,방하착. 이미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많습니다.

대혜 스님도 그렇지만 과거 고봉 스님등등 많은 스님의 어록을 통해서 보면,

A라는 화두를 들고 있었는데 문득 B라는 화두에 콱 막혀 버려요.

그리고는 C라는 화두에서 눈이 번쩍 뜨여요.

 

  저는 처음에 강원에 있을 때는, 萬法歸一 一歸何處(만법귀일일귀하처)를 가지고 공부를 하다가 정작 선방에 들어가서는 무자 화두를 가지고 공부 했어요.

이 서장 영향입니다.

강원에서는 선요 영향으로 만법귀일일귀하처를 가지고 공부를 했고,

선방에 와서는 서장 영향으로 무자 화두를 몇 년을 하다가 저절로 拈華示衆(염화시중)이 돼버려요.

무자 화두는 어디 가 버리고 그냥 절로 염화시중이 머리에 떠올라서 아무리 들어내려야 들어내지지가 않는 겁니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염화시중을 들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 할 때도 화두의 원조!

염화시중을 소개를 합니다.

또 그것 내용을 다 아니까 설명하기도 쉽고요.

가나오나 꽃 천지니까요.

꽃만 보면 생각나니까 잊어버릴 염려도 별로 없고요.

‘염화시중이라’ 꽃 척보면  ‘염화시중이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왜? 부처님이 낭랑한 음성의 말씀을 하시지 않고 꽃을 들어 보이셨을까?

한두 시간 번쩍 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서 “하나만 들어라. 둘을 번갈아 가면서 들면 안 된다.”

이런 것은 뒷사람들이 붙인 말이고요.

 

  대혜 스님은 분명히 두 개의 화두를 소개 했어요.

원오 스님이 또 그렇게 소개를 했고요.

그러니까 그것을 그대로 이어 받아서 대혜 스님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두 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바로 착실하게 공부를 해 갈지언정 이미 지나간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여기 또 나오네요. 우리가 살아온 업장들. 생각하지 말자 이겁니다.

또한 반드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하고 두려워하면 곧 도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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