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4/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12. 14:05
 

 

무비스님 서장 대강좌 제 1-3 강

 

  “禪(선)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참선하고 있으면 자기가 환하게 보여요.

조선시대에 우리 스님들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니까요.

평생 事判(사판)만 하던 스님이 禪房(선방) 문고리만 한번 잡아도 지옥을 면한다는데 ‘에라 문고리 한번 잡을 것이 아니라, 한철 가서 공부를 할 밖에 없다.’ 나이도 들었고 해서... 선방에 올라가서...

사판 하던 스님이 선방에 올라가면 세금 꽤 내야 돼요.

대중공양도 많이 내야 되고...

  찰떡을 몇 말 내고는 한 철을 지내는 겁니다.

한 달쯤 지내다가 모두들 참선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무릎을 탁 치면서, “이제 알았다.”이러는 겁니다.

 

‘야~ 저 스님이 평생 주지 살고 원주만 산 것이 아니라 공부혼자 독실 하게 많이 했는가 보다.’고 여기 와서 한 달 만에 알았다고 하니까 많이 알았는가 보다. 고...

대중들이 전부 방선해서는 궁금해서 “뭘 알았냐?”고, “뭘 알았냐?”고. 평생에 알았다는 사람 못 봤으니까 신기해서...

20년 전에 내가 돈을 꿔 줬는데,

그것을 누구한테 꿔 줬는지 몰랐는데 이제사 알았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선방 한 철만 지내본 사람이면 다 듣고 아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어낸 말 절대 아니에요.

 

  그 만치 선은 자기 자신을 비춰 준다니까요. 맑게 해 준다니까요. 혹시 중요한 것 잃어버렸는데 찾고 싶으면, 집에 가서 당장에 선 하세요.

재미있는 선 이야기 아주 수두룩합니다.

제가 어디가면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너저리하게 약력을 소개해서 제가 약력을 써다 줬어요.

10대에 동진 출가해서,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하동산스님 말 들어 봤죠? 효봉스님. 한 철 이상씩 살았어요.

그러니 그 후대, 구산스님. 성철스님. 향곡스님 말할 것도 없지요.

전강스님 밑에서는 인천에서도 살고, 용주사에서도 살고, 다 살았어요.

거의 회상을 가지고 있는 스님들 밑에서는 한 철씩. 두 철씩. 세 철씩. 그렇게 다 살았습니다.

 

  거기에 쌓인 이야기들 많아요.

열 달 동안 이거 다 풀어야 되는데 서장 교재도 많고, 할 이야기도 많고... 50년 가까이 걸망 생활을 하면서 선 쪽으로, 敎(교)는 교 쪽으로,

선지식 밑에 다 다니면서 중노릇 하는 혜택이 그거에요.

시간 자유롭고 이동 자유롭고...

한 때는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流浪雜僧(유랑잡승)”이라는 말까지 들었어요. 한 곳에 가만히 안 있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망월사 춘성스님 밑에 살았는데, 우리나라에서 제가 50년 동안 동산스님부터 지금까지 봐 오면서 중 한 사람을 꼽으라면 춘성스님을 꼽겠어요.

아주 감동적이고 대단한 분입니다.

그때 70대였었는데 당신 이불이 없어요. 당신 요가 없어요.

깔고 앉았던 방석하나 배에 걸치고, 탁자 밑에 가서 목침하나 꺼내면 그것이 당신 침구입니다.

대중 방에서 그렇게 우리 같이 잤어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위대한 중이 있었어요.

망월사에 가서 영정에라도 참배 하세요. 그런 분입니다.

 

  敎材(교재)로 들어가겠습니다. 교재가 解題(해제)가 있고 行狀(행장)이 있어요.

해제는 여러분들이 각자 읽으시고, 행장하고 중복이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하니까 해제를 잘 읽으시고... 행장을 살펴보면,

 

대혜스님은 서당에 다니다가 향교에서 동학들 하고 장난을 치다가 벼루를 잘못 던져서 선생님의 모자를 맞혀서 상당히 보상을 많이 하고, 그 길로 출가를 했어요. 16세에 출가를 했습니다. 17세에 비구계를 받고, 19세에 태평주 은적암에 가서 운봉열 선사의 후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 曺洞宗(조동종)의 여러 선사를 참례하고 그 宗旨(종지)를 다 터득 했으나

 

일본에 조동종이 있어요.

默照禪(묵조선) 계통의 宗派(종파)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거기도 이렇게 단순하게 말을 해서 좀 폄하하는 느낌이 듭니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간단하게 말씀 드리면 그래요.

 

선사들을 참례하고 그 종지를 다 터득을 했으나 선사는 오히려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21세에 담당문준 선사를 참례했다. 7년 동안 담당문준 선사를 모시고 크게 知見(지견)을 얻었는데 담당스님께서 임종 하실 때

 

추천한 스님이 있었는데 그가 원오극근 선사입니다.

이렇게 추천해서 원오극근 선사를 참례하게 됩니다.

그래서 원오극근 선사에게 비로소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어서 그 法脈(법맥)을, 담당문준 선사에게서 7년이나 공부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에 만난 원오스님의 제자가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 동안 수많은 스승을 만나서 공부 했겠지요.

그 중에 제일 마음이 기우는 분을 이렇게 “나는 누구 제자다.”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저도 선사들 서암스님. 서옹스님. 참 훌륭한 스님들. 성철스님 등등 많이 모시고 살았지요.

그렇지만 제일 마음이 가는 스님. 또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스님이 경허스님으로 한암스님으로 그리고 탄허스님으로.

탄허스님 밑에 제가 부족한 존재이지만, 자리를 매꾸고 있습니다.

늘 생각하면 그저 공부가 부족한 것이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그런 것도 나이가 들다보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하게 됩니다.

 

스님의 나이 37세에 처음 변경 천녕사에서 원오 선사를 참례하고 겨우 40일이 지났는데 하루는 원오 선사가 당을 열고[開堂(개당)]설법을 할 때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묻되 ‘어떤 것이 모든 부처가 나온 곳입니까?’

 

행장은 고전으로 원래 서장 육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이야기를 합니다. 이 행장은 네 가지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이 앞에 소개가 됩니다.

  첫째, 성불의 문제. 이것이 諸佛出身處(제불출신처). 모든 부처가 나온 곳. “부처가 어디서 나왔나?” “성불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이 말입니다.

말 바꾸면 “어디가 부처가 나온 곳입니까?”하는 말은 “성불 이란 뭡니까?”이 뜻이거든요.

“부처가 됐다는 뜻은 뭡니까?”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지금 불교 상식 가지고,

아니면 인생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누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그 나름대로 대답이 있을 거예요.

 

  “아, 금강경에 보니까 제불과 제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皆從此經出(개종차경출).

다 이 경에서 나왔다고 하더라.” 금강경 읽은 분들은 그렇게 대답하실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대답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운문스님 수준입니다.

여러분들은 운문스님 수준보다 더 높을 수도 있어요.

대답이 그래요. “동산이 물위로 간다.” 동산수상행. 이렇게 되죠. “어떤 것이 모든 부처가 나온 것입니까?”

 

  이것은 제 소견으로 말을 바꾸어서 표현해 보겠습니다.

지금 여기 앉아서, 조계사 회관에 앉아서, “서울이 어디입니까?” 이렇게 묻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묻는다면 ‘저 스님이 돌았나?’ ‘정말 몰라서 묻는가? 누구 놀리려고 묻는가?’ 아니면 ‘저렇게도 모를까? 서울을 저렇게도 모를까?’ ‘벌써 서울에 들어 온지가 언젠데,

서울 하고도 종로 한 복판인데, 여기서 서울을 묻다니?’ 이 질문하고 같아요.

“어떤 것이 부처가 나온 곳입니까?” 한 마디로, 묻는 그 사실이 부처의 작용입니다.

 

  부처가 아니면 물을 수가 없어요.

부처 아닌 존재가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대단히 위대한 존재지요.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부처가 부처를 묻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앉아서 서울이 어디입니까?

하는 질문하고 똑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운문스님이 거기에 되도 않는 소리를 해 버린 겁니다. “동산이 물위로 간다.” 산이 물위로 간다.

그 질문이나 저 질문이나 이 대답이나 그만그만 해요. 좀 이해가 되시죠?

이렇게 풀어주니까... 엉터리로 풀어주니까... 여긴 풀자고 앉았습니다. 이해하세요.

 

  아까 경전을 가지고 대답하는 것을 말씀 드렸는데, 아주 중요한 대답입니다. 왜냐하면 금강경에 일체제불이 이경에서 나왔다. 개종차경출. 그랬다고요.

이 경은 뭔가? 물론 문자반야라고 해서 글자로 된 경전도 이 경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뜻은, 우리가 請法(청법)할 때 그래요.

  此經甚深意(차경심심의) 大衆心渴仰(대중심갈앙). “이 경전의 깊고 깊은 뜻을 대중들이 목말라 듣고 싶어 합니다.” 할 때 이 경전입니다.

그것은 종이로 된 經典(경전)을 펴 놓고는 있지만 사실은,

다 짐작하고 있는 경전. 그러나 指稱(지칭)할 수는 없는 경전.

그저 이심전심으로 아는 경전입니다.

그 정도는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고 알지요.

바로 그 경의 도리를 설명해 달라는 겁니다.

此經甚深意. 이 경전의 깊고 깊은 뜻을 법사님께서는 잘 해설해 주십시오.

대중들은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그까짓 종이로 된 경전.

그거야 글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데요. 그것이 아니죠. 그런 수준이 아니지 않습니까?

  좀 더 부연 설명을 한다면, 我有一卷經(아유일권경)하니. 나에게 한권의 경이 있으니 不因紙墨成(불인지묵성)이라. 종이와 먹으로 된 것이 아니다.

展開無一字(전개무일자). 종이와 먹으로 되어 있으면 펴면 글자가 있을 텐데, 종이와 먹으로 안 되어 있으니까 펴봐야 아무 글자 없어요.

그러면서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입니다.

  제가 좀 저질스런 소리하면 ‘에이 스님, 창피하게 저런 소리 하고 있다.’ 벌써 속에서 광명을 놓고 있어요. 찌푸린 광명을 놓고 있는 겁니다.

또 재미있는 이야기 하면 그냥 하하하~~~ 하면서 그 나름의 광명을 놓고 있어요.

이것이 도대체 무슨 물건인가요? 참 신통방통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이렇게 웃고 울고, 화내고 슬퍼하고, 참 신기한 일 아닙니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이 세상에 神(신)이 있다면 그 보다 더 위대한 신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이 있다면 그 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이 어디 있으며,

부처님이 있다면 그 보다 더 위대한 부처님이 어디 있습니까?

앞에 서론에 인간불교라고 하는 말을 썼는데요.

궁극적으로 우리는 인간불교를 알아야 됩니다.

  행장의 그 문제는 그렇게 해서 넘어가고,

그 다음에 자신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겠다.

天寧(천녕) 이라는 것은 원오스님 자신이거든요.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집에 서늘한 기운이 생긴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야 집에 서늘함을 느끼는 겁니다.

얼마나 그야말로 저절로 그러함입니까? 이것이 무슨 흔적이 있습니까? 아무 흔적도 없는 겁니다.

諸佛出身處(제불출신처). 모든 부처님이 나오신 곳.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든 부처님이 나오신 곳.

  서산스님의 오도송 중에 작야상단풍악터니 어생일각삼승이라...

지난밤에 비바람이 아주 심하게 몰아쳤어요.

새벽에 깨어보니까 그 못에 고기들이 저 한곳에 모여서 헤엄치고 놀고 있더라.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냥 그대로입니다.

털끝 하나도 조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러면 제불출신처. 부처가 나온 곳. 아니, 부처 그 자리. 당체. 지금 기침하고 기침 나오는 그 사실입니다.

아프면 아파하고 죽으면 죽고, 이상한 것은 절대 외도지, 잘못된 생각이고 잘못된 소견이지 그것이 정법이 아닙니다.

 

  옛날에 어떤 친구가 죽을 때, ‘나는 거꾸로 서서 죽어야 되겠다.’ 딴에는 자랑스럽게 그러니까 비구니로 있는 누나가 와서 “이 자식은 살았을 때도 골치 썩히더니 죽어서도 골치 썩힌다고...

욕을 퍼 부어 버리니까  ‘아이고 못 말리는 우리 누님 왔다.”고 그러면서 스르르 넘어졌어요.

거꾸로 서 있으면 장례를 어떻게 치루라고...

죽을 때 되면 고이 누워서 죽는 것이 부처예요. 그것이 산부처예요. 그것이 진짜 부처예요. 안 죽으면 몰라요.

천 년 만년 안 죽고 있으면 봐줄 수 있지요.

그렇지만 이왕 죽을 바에는 고이 죽지, 거꾸로 죽고 앉아서 죽고...

앉아서 죽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억지로 앉히기도 하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냥 여기 脫俗(탈속)해야 돼요. 俗氣(속기)가 없어야 돼요. 그거다 속된 생각입니다. 저절로 그러 해야지요. 자연스러워야지요.

 

  우리가 선을 공부 하는 것은 그런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스럽다는 견해. 그렇다고 아주 범속한 상념에 젖어있는 것을 다 벗어난 사람의 삶이예요.

그 삶을 얼마나 제대로 할 것인가 그 방편으로서 간화선. 화두가 필요한 것이죠. 좌선이 필요한 것이고요.

이것이 재미있고, 이것이 좋고, 이 인생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여기 모였습니다.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집에 서늘한 기운이 생긴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까?

지난밤에 풍우가 몰아치면 고기들은 못가에 모일 수 있는 겁니다.

비가 오면 고기들은 한 쪽으로 모이거든요.

큰물 지면 고기들은 한 쪽으로 모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뭐가 이상할 것이 있습니까? 거기는 한 점의 티끌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겁니다. 거기는 한 명의 티끌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그 말을 듣고 홀연히 앞생각 뒷생각이 끊어지니 원오 선사가 그로 하여금 擇木堂(택목당)에 머물러서 조금도 시중하는 일에 힘쓰지 말고 전심으로 保任(보임)케 하였다.

 

그대로 잘 간수하라는 겁니다. 거기서 깨달았지요. 이 분이 여러 번 깨닫습니다.

 

대혜는 그 뒤에 원오 스님이 방 가운데서 어떤 스님에게 ‘있다는 의미와 없다는 의미가 칡이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다.’는 화두를 물은 것이다.

 

이것이 행장에 있어서의 두 번째 문제. 有(유)와 無(무)의 문제. 있음과 없음의 문제.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 문제 되는 것이 아닙니까?

돈이 있다 없다도 있음과 없음의 문제이고요.

명예가 있다 없다도 있음과 없음의 문제이고요.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도 있음과 없음의 문제이고요.

모두가 헤어짐도 있음과 없음의 문제이고요.

  모든 관계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유. 무입니다. 있음과 없음의 문제. 있다는 의미와 없다는 문제가

 

칡이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다.

 

참 표현 잘해 놨네요. 칡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지요?

러면 나무 따라서 칡은 상당히 높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겁니다.

있음과 없음은 그렇습니다.

올라가면 내려와야지요. 저도 올라왔으니까 내려가야 되고 여러분도 들어왔으니까 나가야 돼요. 이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나무와 칡이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이...

  모든 존재의 현상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있는데도 치우쳐서는 안 되고, 없는데도 치우쳐서는 안 되어요.

그런데 있는 것을 잘 살려야 됩니다. 있는 이것이 妙(묘)입니다.

없는 것이 묘가 아니고요. 우리가 반야심경에서 공부했지만,

무안이비설신의. 안이비설신의 다 없고, 색성향미촉법 다 없다.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없다고 해놓고 우리가 이렇게 버젓이 말하고 듣고 보고 있잖아요?

 

웃고 울고 화내고 싸움박질도 하고, 이렇게 있잖아요? 이 있는 것이 묘라고요.

  이것을 잘 살려야 돼요. 이것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닙니까?

삶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없음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요즘 서양에서 선을 공부라는 리차드칼슨 같은 사람들은 “이 유리컵이 깨어진 것으로 보고 사용 하라.”

 

반야심경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하고 말아요.

“컵이 깨어진 것으로 알고 사용 하라.” 서양 사람들 표현을 참 잘 해요.

우리는 그것을 뜯어서 푼다고 緣起(연기)가 어떻고 中道(중도)가 어떻고 그러지요. 컵이 깨어져 있는 줄로 알고 사용하라 이겁니다. 우리가 이미 죽은 줄 알고 살자 이겁니다.

 

  그것이 납득이 되면 끝이에요. 그것이 납득이 되면 해탈입니다.

걸릴 것 없어요. 당당해요. 하나도 겁날 것 없어요. 이미 죽은 몸인데요.

제가 한번 죽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한번 죽어보니까 이미 죽은 몸으로 알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이 “저 스님 아프고 나더니 영 공부가 달라졌다.”고 그래요. 실지로 달라져요. 왜냐? 죽은 몸이니까요.

서양사람 표현이 참 멋지잖아요. 반야심경 한 편을 “컵이 이미 깨어져 있는 줄 알고 사용하라.”이래 버려요.

이 몸이 죽은 줄 알고 살자 이겁니다.

 

  그러면 이 몸에 딸려 있는 수많은 부속품들. 부속품 많지요?

첫째 돈이 있을 것이고,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명예가 있을 것이고, 뭐도 있고, 뭐도 있고 뭐도 있고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다못해 자기 방도 있을 것이고, 소지품도 있고, 안경도 있을 것이고, 연필도 있을 것이고,

전부가 명예니 돈이니 권세니 아내니 남편이니 자식이니 부모니,

전부가 내 이 한 몸에 딸려 있는 부속품입니다.

몸이 죽었는데 나머지 부속품이야 문제될 것이 있습니까?

몸이 죽어 자빠졌는데 나머지 부속품이야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잖아요?

 

  여기 있음과 없음의 문제,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행장에서 꼭 유의해야 할 것이, “부처란 뭐냐?” 그 문제하고

“있음과 없음의 문제” 있다는 의미와 없다는 의미가

 

칡이 나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 는 화두를 묻는 것을 들었다.

대혜 스님이 드디어 묻기를 “듣건대 화상께서 5조스님 회상에 일찍이 이 화두를 물었다고 하니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오 스님이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니 대혜 스님이 말하기를

“이미 대중들 앞에서 물었는데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원오 스님이 마지못하여 이르기를 “내가 5조에게 묻되 있다는 의미와 없다는 의미가 칡이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다는 뜻이 어떠합니까?”하니,

5조가 말하기를 “그 관계의 미묘함을 본뜨려 해도 본뜰 수 없고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다.”

 

이렇게 대답했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설명은 합니다.

  모든 존재의 연관관계성은 설명은 하지마는 한 마디로 똑 떨어지게 이야기는 안 되잖아요.

선의 묘미가 거기에 있어요.

우리처럼 너절하게 길게 실컷 설명해 놓고도 설명이 부족해서 설명이 불만스러워 하지 않고,

이렇게 간단하게... 이것이 선의 묘미입니다.

 

본뜨려 해도 본뜰 수 없고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다.

 

이러면 되는 것을 그렇게 뭣이 어떻고, 뭣이 어떻고 내가 있음으로 네가 있고,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음으로 이것이 없다.

별별 소리를 다해도 그만 안 되는 겁니다.

정곡을 찌를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또 묻기를

 

“칡이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는데 나무가 넘어지고 칡이 마를 때는 어떠합니까?”

 

서로 관계가 다 떠났다. 그럴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까

 

5조가 말하기를 “서로 따라 온다.”

 

같이 다 죽지요. 서로 따라 오지요.

 

선사가 그 자리에서 환하게 깨달았다. “제가 알겠습니다.”했다.

원오가 여러 가지 인연에 대하여 차례로 힐문하되,

“여러 가지 인연에 대하여”

 

라는 이 말은 과거 조사 스님들이 어떤 법을 들어 보인다.

한 마디로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였는데 왜 꽃을 들어 보였는가?

네가 한 번 일러봐라. 이런 것들이 인연입니다. 이것을 “인연”이라고 그럽니다. 이런 것들을 쭉 물어보니까 환하게 다 대답 하더라 이겁니다.

  一通一切通(일통일체통)이니까요. 하나 통하면 다 통합니다.

어디는 통하고 어디는 못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막힘이 없거늘 원오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너를 속이지 못하겠구나.”고 하며 臨濟正宗記(임제정종기)를 부촉하고 그로 하여금 記室(기실)을 관장하게 하니,

대혜 스님이 이에 원오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원오가 蜀(촉)으로 돌아가니 대혜 스님은 이에 지취를 숨기고 암자를 지어 거처했다.

뒤에 虎丘寺(호구사)에서 여름을 보내며 화엄경을 보다가 제7지 보살이 無生法忍(무생법인)을 얻는 자리에 이르러 湛當(담당) 스님이 보인 바 앙굴마라가 바루를 가지고 아이 낳는 부인을 구제하는 인연을 홀연히 환하게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 스승에게서 완전히 깨닫고 화엄경을 열심히 봤습니다.

여기 사대부 중에 제일 첫째 증시랑에게 보내는 편지에 화엄경이 상당히 장황하게 이야기됩니다.

깨닫고 나서. 또는 “참선 한다.”

하면 그냥 참선 일변도로 경전이나 어록은 다 무시해 버리고,

그거다 모르고 귀찮아서 하는 소리지요.

그렇게 무시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선사는 선과 교에 막힘이 없어야 됩니다.

역대 어느 선사가 선과 교에 막힘이 있었습니까?

육조스님이 무식한 분으로 출발 했지만,

나중에 법문 하는 데는 경전을 수십 가지를 인용하거든요.

수십 가지 경전을 인용한다고요.

  보십시오. 이렇게 깨닫고 화엄경을 열심히 봤어요.

그 전에도 물론 많이 보신 분인데 그렇게 했고...

화엄경을 보시다가 우연히 엉뚱한 앙굴마라 화두에 대해서 깨달은 겁니다.

앙굴마라는 부처님 당시 다른 종교를 믿어서 살인을 많이 했잖아요.

살인을 많이 했는데 그 살인은 기운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업을 잘 지어야 돼요. 살인의 기운이...

그냥 상당히 감동한 겁니다.

그 때는 잡아 가두지도 아니 했는지 저는 이게 의문입니다.

이야기에 의하면 99명을 죽였다 하잖아요?

그런데 왜 그 사람을 처형도 안 시키고 잡아 가두지도 않고 내버려 뒀을까요? 말도 아니죠. 이야기인즉슨 그렇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살인의 기운이 감도니까...

어느 집에 탁발을 가니까 마침 산모가 있었어요.

그 살인의 기운 때문에 도대체 아이를 낳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 부모는,

스님이 왔으니까 어떻게 하든지 이 다급한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앙굴마라는 부처님 뛰어왔어요.

“내가 어느 집에 탁발을 갔는데 이러이러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나 보고 해결해 달라는데 부처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부처님은 알거든요. 저 사람은 살인을 많이한 사람이라 항상 살인의 기운이 감도는데 아무나 모르지요. 몰라요. 트릿 해서 알 수가 있나요?

그러나 어린아이는 아는 거죠.

어린아이는 천연자연 그대로 아닙니까?

비록 뱃속에 있어도 온 대지의 기운을 다 느끼고, 누가 지나가는지 말이 지나가는지 소가 지나가는지 살인자가 지나가는지 그냥 느끼고,

10리밖에 있어도 다 느낍니다.

  그 “氣(기)” 라는 것이요. 우리가 못 느끼고, 못 보고 내 자신이 트릿 하니까 못 느껴서 그렇지, 일체가 다 그 기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기운이 어린 아이니까 정말 맑으니까요.

뱃속에 있으면서 느끼는 겁니다. 어떻게 나올 수가 있어요?

살인자가 밖에 있는데... 못 나오지요. 그래 부처님이 가르쳤잖아요.

“나는 부처님을 만난 이후로 한 사람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이 말만 네가 해라.”

그래서 그 집에 가서 크게

“나는 부처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일이 없습니다.” 이랬다고요. 그러니까 그 말에 참회가 다 되고, 그 기운도 사라지고, 기운이 사라지니까 아이가 순산 했다.

아주 극적인 이야기지요. 

 

  아이 밴 어머니는 김치쪽도 반듯하게 썰어지지 않으면 안 먹고,

김도 반듯하게 썰어지지 않으면 안 먹는 우리 선조들의 태교법이 다 그런 것 아닙니까?

험한 것 안 보고 안 듣고, 그 가까이 안 가고, 뻔히 다 아는 일입니다 그것이... 살인을 99명이나 한 사람이 왔는데 그 기운이 오죽 했겠어요?

 

어쨌든 화엄경 보다가 그 도리를 깨달았다는 겁니다.

참선하다가 깨달았는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네요,

  사후의 문제. 죽음과 사후의 문제에 대한 것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 계속 -

'서장(書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장/대강좌6/무비스님  (0) 2007.09.12
서장/대강좌5/무비스님  (0) 2007.09.12
서장/대강좌3/무비스님  (0) 2007.09.12
서장/대강좌2/무비스님  (0) 2007.09.12
서장/대강좌1/무비스님  (0) 2007.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