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6/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12. 15:03
 

 

무비스님 서장 대강좌 제 2-1 강

 

  지난 시간 행장을 통해서 불교공부를 하면서 우리가 당연히 접해야할 네 가지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諸佛出身處(제불출신처)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가 “성불 하십시오.” “성불 하십시오.”라고 인사하듯이 성불이란 우리 불자들의 지상과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불의 문제. 이것을 물론 각자의 공부. 각자의 살림살이에 따라서 견해가 다르겠지만,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것. 그 다음에 이 세상에는 있음과 없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여기에 건물이 있고, 공간이 있음으로 해서, 다시말해서 있음과 없음에서 공부를 할 수 있고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것.

그 다음에 死後(사후)의 문제. 열반을 통해서 죽음의 문제를 과거 조사스님의 죽음을 통해서 거론을 했습니다.

열반송의 문제. 열반송을 하나씩 지어 보라고 했는데, 지어 보셨을 줄 믿습니다.

 

지금 왜 看話禪(간화선)인가?

하는 이 타이틀로 오늘도 서장으로 공부를 하겠는데요.

그 동안 왜 看話禪인가? 하는 말에는 많은 대답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다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그간 숱한 불교 많이 접해 왔습니다.

기도도 해 봤고, 경도 읽어 봤고, 복도 빌어 봤고, 관세음보살도 불러 봤고, 지장보살도 불러 봤고, 숱한 불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불교로서는 성이차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보다 더 나은 불교. 최고의 불교를 ‘우리가 한번 해 보자’ 하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쉽게 세속적으로 표현하면 ‘불교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 모였다.’ 불교의 고수는 바로 인생의 高手(고수)라고 쉽게 情禮(정례)를 해 봅니다.

 

  교재 41쪽 대혜보각선사서.

1. 증시랑 천유가 질문하는 편지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아시듯이 여기는 수많은 사대부들이 희대의 대 선지식 대혜 스님에게 편지로 서신왕래를 통해서 불교를 질문하고, 선을 질문하고, 인생사를 질문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내용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불고계의 최고의 고수들!

승려가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스님들도 많이 오셨습니다만, 그래도 대다수가 거사분들. 보살님들이 모이셨습니다.

  당시 그야말로 불고계의 최고의 고수들! 다시 말해서 인생의 고수들만 대혜 스님이라고 하는 최고의 선지식에게 불교와, 인생사, 세상사를 질문하고 답하는 내용들로 짜여져 있습니다.

 

처음에 여기 증시랑 이라고 하는 이분은 시랑 벼슬을 한분인데 6부중에 하나를 맡은 호구시랑. 이부시랑. 예부시랑. 병부시랑. 형부시랑. 이렇게 6부가 있었지요.

  우리나라도 한때 그런 직책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를 맡았든 종三품 벼슬을 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장관이지요. 지금 우리 표현으로 하면 장관에 해당되는 분인데요.

이분이 질문한 편입니다. 질문한 편지는 불과 세편밖에 안 됩니다.

질문한 사람의 내용을 알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혜 스님이 어떻게 법문을 하셨는가가 우리의 관심사니까 대혜 스님의 답을 중심으로 우리 교재가 짜여져 있습니다.

 

  법화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의식주 문제만을 위해서 사는 것은 동물이나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서 아주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자고 생명을 유지하는 단순한 삶에만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서 但念水草(단념수초)요 餘無所知(여무소지)라. 그랬어요.

다만 생각하는 것이 오직 먹고 마시고 할 것. 水草. 물과 풀만을 생각한다.

그 외에는 생각 하는바가 없다고 하는 신란한 표현을 사람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동물을 두고 하는 소리 같지만, 사실은 동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뭔가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는 마음에서 불교를 찾았고, 또 시시한 불교는 재미없다. 좀 더 나은 불교. 차원이 다른 불교가 없을까? 그런 마음에서 선불교. 그 중에서도 이 간화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이런 시간을 갖는 것이 다행한 일이고, 당연히 이렇게 좋은 강당에서 강의를 해야 됩니다.

왜 이제야 이런 좋은 강당에서 하는지 내 참 궁금하구만...

 

  이 편지는 1134년에 대혜 스님으로서는 46세에 민중 예양산에 있을 때,

서신 편지로서는 처음 보내게 된 질문하는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대혜 스님이 그 때부터 편지로서 교화를 펴기 시작하고 당신의 사상을 선양하기  시작하고 엮어가게 됩니다.

 

제[開]가 옛날 장사라는 땅에 있을 때 圓悟老師(원오노사)의 편지를 받았는데, 스님에 대하여 칭찬하시기를 ‘늦게 서로 만났으나 얻은 것이 매우 기특하고 훌륭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원오 스님이라고 하는 분이 앞에 행장에서도 보았듯이 대혜 스님의 스승입니다. 늦게 만났지요.

상당히 나이가 서로 들어서 만났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증시랑, 천유. 이 분은 요즘 표현으로 하면 알고족인지 그 당시 선지식들을 곳곳에 찾아다니면서 많이 만났습니다.

그 중에 대혜 스님의 스승인 원오 스님도 찾아뵙고 법문을 많이 들었던 그런 분입니다.

그런데 당신 제자인 대혜 스님을 천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당신을 칭찬 하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 번을 생각한 지가 이제 8년이 되었으나 직접 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오직 간절히 공경하고, 우러러 바라볼 뿐입니다. 처음 편지를 보내니까 이렇게 편지를 보내게 된 사연을 간략하게 적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분은 벼슬을 하면서도 불법에, 인생에 있어서 보다 더 차원 높은 뜻을 많이 갖고 있었던 그런 분입니다.

그야말로 물과 풀만을 생각하고, 그 외에는 아는 바가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과는 다른 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마음을 내어 선지식을 참례하고 이 일을 물었으나 弱冠(약관)의 나이가 된 뒤에는 곧 혼인하고 벼슬하는 일에 쫓겨 공부를 하는 것이 순일 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을 물었으나’ 하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간단하게 불교라고 해 둡시다. 불교에 대해서 물었다.

불교라고 하면 복잡하지요. 解脫(해탈)의 문제. 成佛(성불)의 문제. 生死大事(생사대사)의 문제. 깨달음의 문제. 이것을 다 포함해서 이일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럭저럭 노년에 이르렀으되 들은 것이 없어서 항상 부끄럽고 한탄스러웠습니다. 이것이 자신이 살아온 것과 소감을 간략하게 표현했지요.

그러나 뜻을 세우고 願(원)을 세운 것은 실제 얕은 생각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깨닫지 못한다면 그만이겠습니다만, 깨닫는다면 모름지기 바로 古人(고인)이 친히 깨달은 곳에 이르는 것이 바야흐로 크게 쉬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사실 우리가 불교를 접했으면, 좀 더 나은 차원의 불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살면서 좀 안타까운 점이 절에 다닌지, 또 불교에 출입한지 2년 3년 된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가 안 되겠지만, 10년 20년 30년 40년 되었어도 처음 당신이 상상하고, 당신이 그려놓고, 당신이 절에 올 때 보자기에 싸온 그 불교를 그대로 버리지 못하고, 그냥 그 불교를 40년 50년하고 있습니다.

그 불교를 안고 돌아가실 겁니다.그 점이 참 안타까워요. 당신이 낳은 아이들은 얼마나 잘 성장합니까? 잘 자라지요.

유치원 나오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거기다가 온갖 과외를 다 시켜가면서 빨리빨리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눈을 높이 뜨고,

크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녀를 키웁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의 인생사.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과 직결 되어있습니다.

불교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하고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그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처음에 싸다니던 그 보따리 속에 들어있는 그 불교.

절에 오기 전부터 싸다니던 그 불교. 절에 와서는 그 불교 펴놓고 한참 자기 나름대로 뭘 하다가 그냥 또 들고 가는 겁니다.

들고 가서 집에 갖다 놨다가 또 절에 올 때는 그 보따리 들고 오는 겁니다.

  그러니 스님들의 법문이 귀에 들어갑니까? 경전의 강의가 귀에 들어갑니까? 강의 한다 해도 관심 없어요.

설법을 해도 관심 없어요. 자기 불교가 마음속에 꽉 자리 잡고 있는데 무슨 다른 불교가 들어가겠습니까?

 

폭우가 아무리 쏟아져도 그릇이 엎어져 있으면요? 물 한 방울 고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 있으면, 가랑비에도 물이 고여요.

우리 마음 자세가 그와 같이 중요합니다. 여기 이 분은 그렇습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면 그만이지만,깨닫는다면 모름지기 고인이 친히 깨달은 곳에 이르는 것이 바야흐로 내가 크게 쉬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랬어요. 정말 깨어난 인생을 살고 싶다 하는 그런 말로 대신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마음은 비록 한 생각도 물러나지 않았으나 공부가 끝내 순일하지 못함을 自覺(자각)하니 뜻과 원은 크되 힘이 작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중국 사람들이 잘 쓰는 말입니다.

志願大而力量小也(지원대이역량소야). “뜻과 원은 크지만 내 힘이 작습니다.” 자기를 겸손하게 말할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옛날에 원오 노사께 매우 간청하였더니 노사께서 法語(법어)의 여섯 단을 보이셨습니다.

법어를 여섯 단락을 보이셨는데 그 처음은 바로 이일을 보이시고,  ‘이일’ 이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 바는 없으나 그냥 ‘이일’이라고 표현 하면 불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고 말하면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뒤에는 운문, 조주 스님의 방하착과 수미산 두 인연을 들어서 둔한 공부를 하게 하셨습니다.

비로소 간화선의 냄새가 나기 시작 합니다.

운문 스님은 수미산이라고 하는 화두를 냈고, 조주 스님은 방하착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됐습니다.

이런 알듯 말듯한 큰 스님들의 말씀이 비로소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심거리가 되고, 문제가 되고, 그래서 그 문제를 평생 천근만근의 무게로 짊어지고 다니면서 끙끙대고 있습니다.

지금 하안거 중이죠. 스님들이 2200명 결제하고 계시고, 또 일반불자들이 한 만 여명 선방에서 이런 화두를 들고, 끙끙대고 좌선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가정에서 한두 시간씩 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운문 스님은 수미산이라고 하는 말이 왜 나왔는가?

뒤에 잘 나와 있습니다만,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아니 했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가 허물이니 뭐니 하는 것은 전부 우리가 한 생각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잖아요.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는 허물도 없고 복도 없어요.

아예 허물이니 복이니 할 것이 없어요. 생각을 일으킴으로 해서 생긴 것이니까요.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아니 했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했으니까 수미산이라고 대답했어요.

 

  혹자는 “수미산처럼 많다. 네가 그 질문을 한 것이 벌써 이미 한 생각 일으킨 것이고, 한 생각은 두 생각, 세 생각, 열 생각, 백 생각, 천 생각, 만 생각이 따라오니까 수미산처럼 많지 않으냐?” 이렇게 풀이도합니다.

영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간화선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푸는 것이 아니지요. 이 말의 진정한 뜻은 운문 스님만이 압니다.

  조주 스님이 ‘방하착’ 했는데 “一物(일물)도 不將來時如何(부장내시여하)닛꼬?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아니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까 “내려놓아라.” 이랬어요. 그것이 ‘방하착’입니다. 내려놓아라...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아니 했는데 뭘 내려놓으란 말입니까?” 그러니까 “내려놓기 싫거든 가지고 가거라.”이렇게까지 이야기가 되는데요.

이것도 그냥 순수하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공부가 되지, 이것을 저처럼 이렇게 풀면 공부가 제대로 안 됩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아니 했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수미산” 하면 거기에 그만 은산철벽이 돼서 꽉 막혀버려야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世智辯聰(세지변총)이 발달해서, 세지변총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적인 속된 지혜만 그저 끝없이 발달해서 이 내용 모른 사람 없어요.

어지간히 불교 했다 사람들은 다 알아요.

또 放下着(방하착)도 그렇지요.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아니 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내려놓아라.”

벌써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아니 했다고 하는 그 말은 어마어마한 짐을 짊어지고 온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그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지, 무슨 손에 들고 온 것만 물건이냐? 이런 식으로 풀면 안 되는 겁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냥 “내려놓아라.”하면 내려놓으세요. 내려놓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방하착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조주 스님과의 대화를 떠나서 불교의 명구중에 아주 명구입니다.

“내려놓자” 사랑하는 마음도 내려놓고, 따라서 미워하는 마음도 내려놓고, 하고 싶은 마음도 좀 내려놓고, 내려놓는다고 다 내려놓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뒤에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아이 그러면 허무해서 어떻게 삽니까?” 그것이 空에 떨어질까 염려해서 내려놓지 못한다는 겁니다.

  허무하고 허전한 인생이 될까봐 차마 못 내려놓습니다.

어떻게 자식생각. 남편생각. 아내생각. 친구생각. 내 그동안 사회적으로 쌓아놓은 온갖 명성과 업적. 이런 것을 어떻게 내려놓습니까?

그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사는데 너무 허무할 것 같아서 도저히 못 내려놓겠습니다.

그것이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서 못 내려놨다.

이런 인간 심리를 너무 잘 파악해서 뒤에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일단 내려놓는 것. 이것은 화두로서 말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삶의 지침으로도 방하착이라고 하는 말. 너무 좋습니다.

화두와 관계없이 이것은 꼭 우리가 지니십시오.

다른 것은 내려놓더라도 방하착만은 가지세요.

 

항상 스스로 惺惺(성성)하게 화두를 들어라. 거각하라. 오래고 오래면 반드시 들어가는 곳이 있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신스님의 간절한 마음이 이와 같건마는 둔하고 막힌 것이 지극히 심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 동안 제자하고 인연을 새롭게 맺게 되니까 스승에게서 들은 지도의 내용.

그리고 자기공부. 이것을 여기서 간단하게 피력을 한 대목이지요.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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