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8/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12. 16:23
 

 

무비스님 서장 대강좌 제 2-3 강

 

  지난 시간 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것이, 좀 인생을 의미 있게 살고자 하고, 불교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분들은 가슴을 짓누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삶이, 꼭 부처님의 삶도 아니고 불교의 거울도 아닌데, 각자 자기 마음대로 거울을 하나 만들어 놓고 부처님 마음은, 불교적 삶은 이런 것이라고 잘못 오해하고, 그 거울에다 자신을 비춰보니까 ‘아 이건 나는 죄인이고 이건  크게 인생을 잘못 살았고, 이래서 어쩌나’ 하고 자탄하고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스스로 죄인시 보는, 어떻게 보면 착한 성품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꼭 인생을 바로 보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선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설사 이런저런 도덕적으로 좀 잘못 살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이 자리에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선불교를 만나서 선 법문을 듣는 자리에서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이건 아니에요. 깡그리 잊어버리십시오. 앞도 뒤도 생각하지 말라. 더 이상 뛰어가지 말라. 생각을 이어 가지 말라.

  잘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이렇게 복을 짓고, 회관 짓는데 돈을 얼마 냈었고, 어디 불사에 내가 얼마 했었고 내 나름대로 애써서 힘들게 부지런히 살아왔노라고 하는 그런 상념을 늘 가지고 다니는데 그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살았든 못 살았든, 과거 살아왔던 그거 다 放下着(방하착). 오늘 좋은 것 배웠죠?

방하착 합시다.그거 좋은거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에 誓願(서원)을 세우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든 부처님 앞에 큰 소원 세우기를 ‘이 마음이 견고해서 영원히물러나지 않고, 모든부처님의 加被力(가피력)에 의거해서 선지식을 만나서, 한 마디 말 아래 생사를 한 순간에 잊고,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지혜를 깨달아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서 모든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를 갚게 해 주소서’

이런 원을 세우라고 그랬습니다.

공부 한다면 이런 원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리고 남은 생애가 얼마가 됐든지 또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바로 우리가 이 순간 실행에 옮기고요.

바로 오늘 저녁에 돌아가서 실행에 옮기고, 내일 바로 실행에 옮기고, 이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 참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하기를 오래오래 하면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p. 49

이것은 선재동자의 이야기를 이끌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 원력이라고 하는 것을 이장죽. 증시랑에게 깊이 마음에 새기도록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화엄경. 소위 대경이라고도 하는데요.

불교의 경전중에 최고의 경전으로 꼽는 화엄경의 이야기인데 곧 뜻으로만 인용을 했습니다. 많이 생략을 했지요.

이것을 또 너무 길어서 또 생략을 해야 할 판인데 한 번 쭉 읽으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선재동자는 수행자의 대표입니다.

이 시대가 됐든 그 시대가 됐든 간에 수행자하면 선재동자가 모델입니다.

수행자는 스승을 찾아다니는 것이 첫째 요건이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다니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53선지식을 만나게 되죠. 53선지식 법회 많이 열리고 있지요?

우리 모두가 수행자니까 수행자는 선지식을 찾아간다는 그런 의미로서 53선지식을 이야기를 합니다.

맨 처음에는 문수보살을 만나고, 마지막에는 보현보살을 만나요.

문수는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고, 보현은 실천을 상징하는 것이거든요.

지혜를 구축한 뒤에는 그것이 실천으로 나아가야 된다.

끊임없이 지혜와 실천!

문수 보현이 등장을 해서 화엄경을 이끌어 가고, 그것이 부처님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도 두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으로서 펼쳐 보입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지혜와 그 실천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구축하고, 그 지혜를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이 그 실천이거든요.

세상에는 돈을 벌어서 쓰는 것. 두 가지 아닙니까?

간단해요. 돈 벌고 쓰고 하는 것. 불교도 마찬가지예요.

불교도 지혜를 개발하고 그 지혜를 쓰는 것. 실천으로 옮기는 것. 그래 문수 보현입니다.

이 문수와 보현의 관계를 이야기하기로 하면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다 못할 불교의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보지 않았습니까?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따라서 보리심을 내어 점차 남쪽으로 가서 110개의 성을 지나서 53선지식을 참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미륵보살이 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지내온 여러 선지식으로부터 얻은 가르침을 한 순간에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대혜 스님이 인용 하고자하는 내용입니다.

미륵보살은 만났는데 보현보살은 만나기 전이예요.

미륵보살은 만났는데 손가락 퉁긴다는 것이 이렇게 퉁긴다는 겁니다.

절에서는 화장실에 가서 노크 하는 것도 뚜두리는 것이 아니고 손가락을 퉁기는 겁니다.

  그동안 53선지식에게서 들은 모든 법문을 다 잊어버렸지요.

그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좋은 법문!

최고의 선지식 53명에게 들은 그 어마어마한 법문을 다 잊어버렸어요.

손가락 한번 퉁기는 사이에...

런데 세세생생 지어온 악업이 남아있을 까닭이 있나요?

善業(선업)도 놓쳐버렸는데 惡業(악업)인들 안 놓치고 배기나요?

다 사라졌다 이겁니다. 다 사라졌다.

이것이 비록 화엄경이라는 경전의 이야기지만 아주 참 멋있어요.

불교하고 인연 맺어서 선을 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화엄경 한번쯤 읽어볼 인연 맺는 것도 참 중요한 일입니다.

 

다시 미륵보살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문수보살을 뵙고자 생각했는데 그렇지요. “다시 문수보살을 찾아가라.” 그랬어요.

이에 문수보살이 멀리서 오른손을 펴서 110 유순을 지나서 선재동자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랬는데 다 잊어버렸으니까 “너 지금까지 공부한 것 아무 것도 없다.”이겁니다. “그래 그럼 다시 공부 해야지.” 이렇게 가르쳤어요.

그러니까 선재동자는 미륵보살이 그렇게 말 하니까 그냥 그대로 아무 의심도 없고, 회한도 없고,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도 없고...

“그래요? 그럼 처음부터 다시 가서 수 천 년이 걸리더라도 그 선지식들 다 만나서 공부 해야죠.” 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 문수보살이 척 살펴보고 110 유순 이라고 이것이 수 억 만리의 먼 거리를 손을 뻗어서 선재동자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착하고 착하다. 선남자야, 만약 믿음을 잃었다면, 마음이 庸劣(용렬)하여 근심하고 후회하며, 공덕의 행위를 갖추지 못하고 정진도 하지 않아서, 마음이 한 선근에 집착하며, 적은 공덕에 문득 만족했을 것이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어요? 겨우 한 시간 듣고 힘 든다고 그러고 다음에 올까말까 하는데...

 

  여기 53 선지식 만난 것을 제가 年道數(연도수)를 계산해보니까 수백 년 걸렸어요.

또 어떤 한 분에게는 찾아가는데 12년 걸린 것도 있어요.

12년 가서 불과 몇 시간 그저 법문 들은 겁니다.

그런 예들도 많다고요.

런데 그런 과정을 다 거쳐 왔는데 깡그리 잊어버리고, 그것도 어디 크게 얻어맞았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손가락 탁 퉁기는 사이에 다 잊어버리고는 다시 가서 “그럼 네가 다시 가서 처음부터 문수보살 만나서 그 때 그 선지식 다 그대로 찾아보면 될 것 아니냐?”

그러니까 다시 발길을 돌려서 가는 겁니다.

문수보살부터 가서 만나서 그 53선지식을 다 만나 뵙고 하는 그 순간에 문수보살은 다 알고 있지요.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수행자의 모델이지요.

불자의 모델이 선재동자입니다.

우리 모델은 이렇게 참 근사합니다.

젊은 청년이지요.

동자라고 했지만 어린아이가 아니고, 17~8세된 아주 젊은 청년이 그런 기특한 마음을 냅니다.

 

  뭘 하겠습니까? 여러분들 깨달았다 합시다. 그 다음 뭐 할래요?

어제 살아왔듯이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죠?

밥 먹고 잠자고 직장에 나가고 가족 돌보고...

어제 살았듯이 그렇게 또 사는 겁니다.

오늘 불교 이야기 다 했네요.

그렇게 사는 거라고요.

선재동자가 지가 다 잊었든 안 잊었든 간에 그렇게 선지식 친견하면서 정진하면서 사는 겁니다.

그냥 그것이 삶이라고요.

제가 그랬지요? 선은 그냥 삶이라고요.

선의 7대 정신 있지요?

그런 정신만 갖춰서 그냥 살아가는 거라고요.

그래 어떻게 사느냐? 선적인 삶을 사는 겁니다.

 

  일곱 가지 정신 다 외우시죠?

簡素(간소)하고 脫俗(탈속)하고 自然(자연)스럽고 유현(幽玄)하고 고고(枯高)하고 寂靜(적정)하고 變化無雙(변화무쌍)하고,

이런 등등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옳은 방법으로 願力(원력)과 實踐(실천)을 일으키지도 못하며, 선지식의 보호를 받지도 못하고 이와 같은 法性(법성)과 理趣(이취)와 法門(법문)과 실천과 境界(경계)까지도 통달하여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만족을 했더라면, 작은 공덕에 만족을 했더라면,

한 선근에 집착을 해서 ‘아이구 내가 어떤 스님, 어떤 스님 만나서 공부 다 했는데’ 하고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면, 조그마한 살림살이, 조그마한 마음, 그러한 마음으로 공부를 했더라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겁니다.

그리고 저 周徧知(주변지)와 種種知(종종지)와 근원을 다한 것과 통달하여 아는 것과 趣入(취입)과 解脫(해탈)과 分別(분별)과 證知(증지)와 獲得(획득)도 다 능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을 성취하고, 다시 말해서 불교적인 모든 정진이 다 이루어 졌을 때, 거기에 막 그냥 밝은 하늘에 별빛이 쏟아지듯이 쏟아지는 이런 수익들이, 여기에 쭉 나열해놓은 이것이 저도 뭔지 모르겠어요.

아주 좋은 말만 다 해 놨습니다.

주변지. 종종지. 이취. 법문. 법성. 해탈. 분별. 증지 이런 것을 다 얻지 못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소득이 그냥 쏟아졌는데 만약에 적은 공덕에 만족을 했더라면 그런 소득이 돌아올 수가 없다 이겁니다.

미륵보살이 다시 그 처음 걸었던 길을 가라고 하니까 그냥 그대로 조금의 의심도 없이 뚜벅뚜벅 처음 갔던 그 길을 다시 걸어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 그런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거야 우리 잘 들어서 아시듯이 一念卽是無量劫(일념즉시무량겁)이고,

또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이고,

알고 보면 지금 우리의 이 한 생각 속에 수많은 지옥과 아귀와 축생 이런 것만 있는가 하면, 부처도 있고 보살도 있고,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도 우리의 이 순간 한 생각 속에 다 있을 수 있으니까,

이런 이야기 어려운 것 아니에요.

여기에 선재동자가 쏟아진 많은 소득들.

이것 알고 보면 간단한 겁니다.

우리들 이 순간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문수보살이 이와 같이 선재동자에게 보였는데 선재동자는 바로 한량없는 법문을 성취해서 한량없이 큰 지혜의 광명을 갖추었습니다.

보현보살의 세계에 들어가 그 다음에 보현보살이 등장하지요?

이것은 보현행을 실천한다는 내용입니다.

화엄경은 화엄경의 표현 방식이 있고, 상징하는 바가 많아요.

불교는 상징성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禪詩(선시)나 禪文學(선문학)도 아주 뛰어 나지만, 이 화엄경의 문학성도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깊이가 있고 뛰어납니다.

  무슨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아 이것은 보현보살의 실천덕목을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이렇게 알면 됩니다.

그래서 보현보살의 세계에 들어갔다. 뭐라고요?

문수보살을 통해서 지혜를 성취했으니까 그것이 표현되는 것이죠.

중생을 위해서 표현되는 것이죠.돈을 벌었으면 바로 오늘도 저녁부터 쓰고, 내일도 쓰고, 써야 되거든요.

불교도 알았다면 당장에 집에 가서 식구나 가족이나 친구들 앉혀놓고,

서장에서 공부한 것을 이야기 하세요.

하다못해 방하착 이라도 하나 이야기 하세요.

그렇게 해야 된다고요. 선재동자가 어떻게 하는가 봅시다.

 

한 생각 가운데서 삼천대천세계의 작은 먼지 수만큼의 모든 선지식을 다 만나보고 다 친근하며 공경하여 섬기고 그 가르침을 받아 실천하여 不忘念智(불망념지)로 莊嚴(장엄)한 解脫(해탈)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불망념지입니다.

이것 한번 얻었으면 좋겠더라고요.

그럼 경 한번 보면 다 외우고...

 

보현보살의 털구멍 세계에 들어가서 한 털구멍에 한 걸음을 옮기되 이루 말할 수 없는 微塵數(미진수)의 부처님  세계를 지나서, 보현보살과 같으며 모든 부처님과 같으며세계도 같으며 행위도 같으며 해탈하여 自在(자재)함이 다 같고 둘이 아니며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온 세계. 온 중생과 한 몸이 된 보현보살의 크나큰 願力(원력)입니다.

우리는 제발 한 식구만이라도 내 몸같이 좀 생각을 하자고요.

이웃은 놔두고 한 식구만이라도 좀 내 몸같이 생각을 하면,

그러면 그것이 그야말로 老吾老以及 人之老(노오로이급 인지로)한다고 맹자의 뜻이 우리 늙은이를 늙은이로 섬기듯이 이웃 어른도 우리 어른 섬기듯이 하면 그대로 세계평화지요.

이 보현의 정신은 바로 온 세상 인류를 내 몸과 하나로 보는 것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무 거창하게 해서 얼른 와 닿지가 않겠지요?

이런 때가 되어야 비로소 三毒(삼독)을 돌이켜 三聚淨戒(삼취정계)를 이루며, 이것이 攝善法戒(섭선법계). 攝律儀戒(섭율의계). 攝衆生戒(섭중생계). 그 밑에 주해를 잘 달아 놨네요.

六識(육식)을돌이켜서 六神通(육신통)을 이루며,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가 그대로 神通妙用(신통묘용)이다 이겁니다.

 

삼독이 뭡니까? 탐진치 삼독. 貪慾(탐욕). 嗔心(진심). 癡心(치심). 이것이 전부 중생을 위하는 일로 된다. 이겁니다.

여러분들 탐욕. 진심. 치심 없애려고 해 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없애려고 한들 없어지는 겁니까?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서도 안 돼요. 그것 없으면 삼천세계가 없어져요.

그 동안 들은 불교하고 좀 다르지요?

육식을돌이켜서 육신통을 이룬다. 그랬어요.

육신통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인식하고 좋다 나쁘다 분별하는 그것이 바로 육신통입니다.

 

  煩惱(번뇌)를 돌이켜 菩提(보리)를 이루며, 깨달음. 도. 그것이 뭡니까?

그 지긋지긋한 번뇌 망상이 그대로 깨달음 이고, 도 다. 이겁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무명을 돌이켜 큰 지혜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지혜” “지혜” 하는데 부처님의 깨달음. 깨달은 사람의 지혜 이것이 뭡니까?

그 지긋지긋한 번뇌 무명이 그대로 부처님의 깨달음, 지혜다. 이겁니다.

夢寐(몽매)에도 그리워하던 깨달음의 지혜가 바로 그 지긋지긋한 번뇌 무명이 바로 그 지혜인줄 누가 알았으랴?

 

위에서 말한 한 꾸러미의 일들은 다만 당사자의 마지막 한 생각 진실한 것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제가 그전에 송광사 문수전에서 공부할 때, 위에는 3년 결사한 사람들이 있고, 저는 그냥 일반 선방 대중으로서 문수전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 때는 선방에서 옆에 있는 법당들 다 관리 했어요.

  아주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래 제가 관음전 부전을 봤어요.

문수전에서 나가면 바로 송광사 관음전입니다.

전기가 아직 안 들어왔을 때니까요. 캄캄해요.

그 날따라서 너무너무 캄캄해요.

3시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꽉 끼었던 가봐요.

어느 해 가을이었어요.

구름이 꽉 끼어서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낫겠더라고요.

  익숙한 곳에서는 눈을 감는 것이 차라리 나아요. 눈 떠도 안 보이는 데요.

차라리 그럴 바엔 눈 감고하지.

대강 더듬더듬 세수를 하고, 가사장삼을 입고, 늘 출입하던 곳이니까요.

눈 감고 가도 감각적으로라도 몇 발 걸어서 몇도 방향으로 몸을 틀면 법당을 향하고, 거기 가서 손을 두 번만 음직이면 문고리를 잡고,

거기서 늘 익힌 업이 참 무서워요.

눈을 감고 그렇게 몇 걸음 걸어갔으니까 하나도 착오가 없어요.

눈 뜨고 하는 것 하고 꼭 같더라고요. 그래서 관음전 법당에 딱 들어가서...

여러분들 송광사 가시거든 문수전하고 관음전 확인 하세요. 얼마 안 됩니다. 문수전에서 관음전은...

요즘 문수전에 외국 스님들이 참선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어두운 곳에 가서 관음전 옆문을 열고 들어가서, 몸을 몇 각도로 틀어서 몇 걸음 걸어서 손을 뻗으면 탁자가 나오고, 탁자에서 손을 두 번만 움직이면 성냥통이 손에 잡히지요.

불을 켜면서 눈을 떴다고요. 그러니까 그 캄캄하던 법당이 환하게 밝아졌잖아요. 내가 문을 닫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 불빛에 의해서 어둠이 문틈으로 나간 것도 아닙니다. 문도 아니 열어 놨으니까요. 틈도 없었어요. 그렇게 칠흙같이 어두운 그 어둠이 어디 나간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덩어리 그것이 그대로 밝음이지요.

 

  그래서 무명번뇌가 바로 보리이고, 번뇌가 지혜다. 지혜 따로 있고 번뇌 따로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을 제가 아주 여실하게 깨달았어요.  제가 어둠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겁니다. 그냥 밝음뿐이더라고요. 그 촛불 하나 켰는데 어둠이 어디 나갈 틈이 있어야 나가죠. 나가려면 줄을 서서 나가느라고 한참 걸릴 것 아닙니까? 시간적으로...

  여러분들. 그것 하나 꼭 기억 하세요.

번뇌무명, 온갖 탐 진 치 삼독,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아이고 시기 질투하는 것 때문에 죽겠다고, 어떤 사람은 그런 마음 때문에 얼마나 자학을 합니까?

자기 가족을 학대를 하고, 엄청나게 증오를 하고 그러거든요.

절대 그렇게 증오할 일이 아니고, 미워할 일이 아니고, 부정할 일이 아닙니다. 탐 진 치 삼독을... 그것이 그대로 지혜입니다. 번뇌무명이 그대로 지혜입니다. 여기 그대로 해놨잖아요. 제가 경험한 바입니다.

 

  그래서 그날 예불이고 뭐고 다... 예불 끝났는데 예불할 것이 뭐 있나요?

너무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어요.

아~! 번뇌라는 것이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본래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그래서 그 순간부터 저는 번뇌를 하나도 걱정 안 하고 번뇌 하자는 대로 하고 살아요.

 

  대혜 스님이 이런 증시랑 같은 정말 성실하게 살았고, 또 성실하게 정성껏 자기 그 자존심, 자기의 어떤 경력 다 팽개쳐 버리고, 대혜 스님에게 자기의 그 내장을 통째로 들어 보이면서 법문을 청하는데, 여기에 쏟아 붓는 대혜 스님의 말씀이 어찌 추호라도 거짓이 있을 수 있을 것이며, 추호라도 무슨 방편이 있겠습니까?

방편 없습니다.

그대로 곧이 곧 대로, 사실대로 깨달으신 대로 이야기 하는 겁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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