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10/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12. 17:58
 

 

무비스님 서장 대강좌 제 3-1 강

 

  거의 3000년의 세월이 경과 하면서, 불교가 발전할 수 있는데 까지 발전하고, 우리가 알 수 있는데 까지 알 수 있는 최첨단의 불교를 어떻게 우리가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마 지금 왜 간화선인가?

라는 질문에 일부 부응하는 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가 한 순간 入禪(입선)을 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한 순간 입선을 했을 때의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

어찌 보면 가장 청정하고, 혹 마음속에 망상은 끓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 순간 가장 내 자신을 비울 수 있었고, 온갖 이런저런 복잡한 사회와 내 생활과 환경 속에서 그래도 가장 간단명료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순간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禪佛敎(선불교)가 우리들의 삶에 답하는 정확한 답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10분간, 또는 10초간 잠깐의 입선을 머릿속에 상기하면 불교적인 가장 지고한 삶. 청정한 삶. 텅 빈 삶. 깨끗한 삶. 그것이 부처의 삶이라고 하든지 조사의 삶이라고 하든지 그런 삶이 바로 이러한 순간의 삶이구나.

우리가 좌선을 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할 때도, 이것이 연결 되어야 되고 지속 되어야 되는데, 요는 그것이 문제겠지요.

 

일부러 1분이든 2분이든 입선을 하면 그것이 유효하고, 입선을 놓아 버리면 그만 그것이 무효해서 그만 복잡하고, 시시비비와 온갖 희로애락이 뒤범벅이 된 일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문제겠지요.

우리가 그런 일상 속에서 한 1분간, 연습했던 그런 깨끗하고 청정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의 순간을, 어떻게 지속시키느냐 견지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과제라면 큰 과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書狀(서장)이라는 이 교재로 看話禪(간화선)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이런 법회를 개설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서장은 최초의 간화선의 지침서이고, 지금까지도 이만한 지침서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머리로 이것을 다시 간추려서 더 선명하게 이해시키는 데는, 그래도 어딘가 좀 量(량)에 비해서 부족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오늘도 유인물을 살펴봅시다.

 

看話禪(간화선) 이런 것이 정리가 되면, 자신의 선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혹 가족이나 이웃이나 어느 단체나 어떤 소모임에서 간화선을 좀 이야기할 수가 있을 거예요.

지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장을 일 년 읽어봐야 정리가 되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장을 공부하되 좀 더 간추려진. 좀 더 선명한 이해를 위해서 정리를 해봅니다.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이런 것만 정리가 되면 어디 가서 어떻게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길이 라고 생각이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간화선- 화두를 유심히 그리고 면밀히 보며 참구하는 참선 공부.

다 아는 이야기지요?

화두(話頭)란 공안(公案). 고칙(古則-옛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별 뜻이 없는 어조사입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헤집고 파헤치다 보면, 머리 頭(두)자. 별것 아닌 것도 머리에 걸려요.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노파심으로 이렇게 해석을 해놨습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참말을 화두라고 합니다.

또한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나라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어떤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공안” “공안”그래요. 절대적인 원칙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만인이 따라야 되고, 만인의 일 처리는 이 관청에서 정해 놓은 공문서에 의해서 처리를 해야 잘못 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즉 참 이치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

예를 들어서 꽃을 들어 보였다든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든지,

방망이를 썼다든지 할을 했다든지 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혹 어떤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진리의 바른 법령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듣고 하여 알거나 깨닫게 되고 알지 못하면 부득이 참구(參究) 하게 됩니다.

참구하는 것을 ‘화두를 의심한다.’ 또는 ‘화두를 본다[看].’ ‘화두를 든다[擧].’라고도 합니다.

“화두를 본다.” “看話(간화)”라고 그러지요.

“화두를 든다.” 들 擧(거)자도 많이 씁니다.

의심한다. 본다. 든다.

이것이 서장에서 자주 나오고, 우리가 보통 禪房(선방)에서 또는 참선하는 현장에서 제일 많이 등장 하는 말이 이 말입니다.

“화두를 의심한다.” “화두를 본다.” “화두를 든다.”그렇게 해요.

타이틀을 간화선이라고 제목을 달았지만,

이 看(간)자는 그냥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看話(간화). 그냥 보는 정도가 아니고, 눈 目(목)자 위에 손 手(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저쪽에서 불빛이, 지금 불빛이 정상적으로 잘 비추니까 제가 손을 이마에 얹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정면에서 불빛이 나를 비추고 있다면, 제가 여러분들을 보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그럴 때 불빛을 가리고 유심히 보면 그 때 보입니다.

  이 看(간)자는요. 그냥 대충 보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꽃을 들었다.” 하면

‘아 꽃을 들었는가 보다.’ 하면 看(간)이 아닙니다.

‘꽃을 들었어?’ 이렇게 “왜?”

라고 하는 말이 붙으면 한 걸음 퇴보해서 참구하는 것이 됩니다.

“꽃을 들었단다.”하면 거기에서 그냥 숨이 멈추는 겁니다.

죽든 말든 거기에서 그냥 숨이 거기서 딱 멈춰야 돼요.

숨이 멈춘다는 말은 모든 思考(사고). 思量分別 (사량분별)이라고 그럽니다.

  모든 의식의 진행이 멈춰야 됩니다.

그것이 제대로 화두에 임하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되기가 참으로 어려워요.

 

예를 들어서 1억짜리 수표를 오늘 은행에 갖다 넣으려고 옷을 입으면서 책상 위에다 얹어 놨어요.

옷을 입고 수표를 지갑에다 넣으려고 생각을 하고 1억짜리 수표를 얹어 놨거든요.

그런데 옷을 입고 돌아서니까 없어요.

그 때 여러분들 숨 멈춥니다.

1억짜리만 해도 숨이 딱 멈춰요.

숨 안 멈추는 장사 있겠어요?

방에는 아무도 없어요.

부인도 들어온 적이 없고 남편도 들어온 적이 없고, 아이들은 벌써 학교에 갔고요.

틀림없이 혼자 금방 빼놓고 다시 새 주머니에다 넣으려고 준비를 하고 옷을 입으면서 돌아섰는데 없다면 그때 숨이 멈추듯이,

그때 온갖 사량 분별과 의식의 진행이 올 스톱 되듯이 그렇게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게 들어가야 된다고요.

 

그것이 보통 우리가 “화두를 든다.”고 할 때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바람직한 자세라고요.

왜? 꽃을 들었을까?

왜? 없다고 했을까?

왜? 왜?

이렇게 하다보면 나중에 소위 念話頭(염화두)니 誦話頭(송화두)니,

염불 하듯이 화두를 외우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화두하고 전혀 거리가 먼 것입니다.

 

看(간)자가 아주 심도 있게 유심히.

설사 광선이 나를 비춘다 하더라도 그 광선을 꿰뚫고 사물을 볼 수 있는 정도로 꿰뚫어보는 자세인데요.

  오늘 여기 간화선에 대한 모든 것을 다,

和盤托出(화반탁출). “떡을 쪄서 손 하나 안대고 소반 채 다 들어내 논다.”

이것이 조사스님들이 잘 쓰는 말입니다.

소반 채.

한 숟가락도 떠먹지 않고 그대로 다 들어내 놓는 것을 화반탁출이라고 하는데요.

그야말로 화두에 대한 모든 비밀을 화반탁출 하는 시간입니다.

 

여기에 『소염시(小艶詩)』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 시는 뒤에 설명을 하겠지만,

  이 시는 오조법연선사가 진제형이라는 거사에게 선을 이야기하기 위한 방편으로 처음 인용한 이후 선가에서 격외언어(格外言語)로 널리 애용되고 있습니다.

법연선사가 진제형에게 소염시를 들어 말할 때 제자인 원오극근선사.

우리의 스승.

대혜스님의 스승이 원오극근선사 아닙니까?

 

   그래서 이 시를 일부러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 공부와 연관이 있는 시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필히 이 시의 저의를 알아야 되고요.

저의를 알아야 됩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이 시의 저의를 알아야 됩니다.

이 시의 저의를 모르고 참선하면 말짱 헛것입니다.

 

원오극근선사(대혜스님의 스승)가 창 밖에서 이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선지(禪旨)나 심요(心要)는 말이나 글로 표현할 일이 아닙니다.

말이나 글이나 어떤 행위는 불가피한 방편일 뿐입니다.

모든 화두가 이 방편에 해당합니다.

모든 화두는 목적이 아닙니다.

방편입니다.

 

흔히 선가에서 ‘콧구멍을 밟아버린다.

답착비공(踏着鼻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본을 타파한다는 말입니다.

근본이 무엇이겠습니까?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無.

이것 모두 근본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부 거품입니다. 진짜 물은 따로 있습니다.

 

사자는 사람을 물고 똥개는 흙덩이를 따라간다.[獅子咬人(사자교인) 韓盧逐塊(한노축괴)] 흙덩이를 사자에게 던지면 사자는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물어요. 그런데 똥개는 흙덩이가 먹을 것인냥 킁킁 거리면서 지 죽이려고 던졌는데도 불구하고, 똥개는 흙덩이를 따라갑니다.

이것이 조사스님들의 그야말로 寸鐵殺人(촌철살인)과 같은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화두라고 하는 것도 화두의 근본. 踏着鼻孔.

화두의 근본을 밟아서 죽여 없애야 하는 것이지,

그 말을 쫓아가면 그야말로 염불이 돼버리고 맙니다.

  염불하면 차라리 부처님의 명호니까 공덕이라도 있지요.

“간시궐(乾屎橛).” 하면 똥 막대기라는 말이니까 그것은 외워 봐도 공덕도 되지 않아요.

 

우리 고사에 ‘守株待兎(수주대토)’ 라는 말이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 나갔는데요.

하루는 토끼가 지나가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서 죽었어요.

농부는 토끼를 한 마리 공짜로 주웠다고요.

그 다음부터 농부는 농사는 작파하고, 그 나무 그루터기 옆에 계속 앉아서 기다리는 겁니다.

‘토끼가 지나가다가 죽으면 하루 일하는 것보다 쉽다.’해서 계속 기다리는 것. 

 

  우리 프로들 한 2000명이 내일 모레 해제니까 아직은 정진하고 있어요.

아마추어 참선인들 한 만 명 정도 되는 숫자가 어쩌면 그 농부처럼 그 나무 그루터기 옆에서 토끼가 지나가다가 넘어져 죽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들은 혹 그렇게 공부하고나 있지 않을까?

여기서는 간화선 이야기니까요.

그야말로 화반탁출 해서 이야기할 것 다 해야 돼요.

그런 것을 우리가 한번 점검 해봐야 됩니다.

설사 화두를 드는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어떤 불교적인 신행생활을 혹시 그런 식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그런 식으로...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고 해서 그때. 약으로 치면 初湯(초탕).

초탕 마시고 병을 고친 사람은 있어요.

그 때는 그 농부가 처음 토끼를 주운 날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누가 그 소문 듣고 거기 가서 앉아 있으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는가?

혹시 우리가 화두를 한다는 것이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아닌가?

다른 불교적인 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쨌거나 화두의 사례는 흔히 1700 공안이라고 해요.

 

염화시중(拈花示衆)이라든지

시삼마(是甚徼)라든지,

지난번에 우리가 공부했던 방하착(放下着).

수미산(須彌山).

무(無).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간시궐(乾屎橛).

이런 등등을 소개할 수가 있습니다.

뜰 앞에 잣나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 그랬어요.

 

화두의 비밀.

이런 말도 아마 감히 누가 함부로 못 쓰는 말입니다.

화두의 비밀이라니요?

화두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는 깜짝 놀랄 일입니다.

화두의 비밀이라니요?

이 점을 하나만 가지고도 오늘 아주 빛나는 날입니다.

 

  이것이 소염시와 연결이 된 것인데요.

당나라의 현종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양귀비가 정인(情人)인 (안록산 난을 일으킨 내용이지요.)

안록산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그린 소염시다.

송나라 때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던 시다.

양귀비는 현종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비밀리에 안록산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깊어지자 안록산은 몰래 양귀비의 처소를 찾곤 했다.

 

  선사들도 틈이 많고 여유가 있고, 그리고 어찌 보면 지극히 인간적 이기도한 것이, 선사들이 도를 나누는 그 준엄한 자리에 양귀비와 안록산이 바람피우는 시로 선을 가르쳤어요.

그 말에 또 깨달아요.

대혜스님의 스승, 원오극근선사가 그 말에 또 깨달은 겁니다.

재미있잖아요. 절 집안.

특히 “禪師(선사)”하면 그냥 근엄하고 무섭고 서릿발 같고...

 

  선의 7대 정신을 이야기할 때 孤高(고고)라는 말이 있지요.

고고하고 유연한 것.

이것만 우리가 볼 때, 그런 것도 아니에요.

변화무쌍 합니다. 이 선사가 어디로 튈지 몰라요.

그러니까 이 소염시를 하늘같은 선사들이 소염시를 거침없이 인용하는 겁니다.

 

다시 소염시로 돌아가서.

아름다운 그 맵시,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리지 못하리니, 깊고 깊은 규방에서 내 마음을 알리노라.

  자주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소옥에겐 일이 없고

  오직 님께 제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

일단풍광화불성(一段風光畵不成) 

   동방심처진여정(洞房深處陳予情) 내 정을 알린다. 내 마음을 알린다.

빈호소옥원무사(頻呼小玉元無事)라.

 

  소옥은 양귀비의 시녀입니다. 몸종이예요.

“소옥아”는 한국식이고 “소옥”  “소옥” 이랬어요.

우리식으로 하면 “소옥아”했겠지요.

그런데 소옥이는 바로 옆이 있어요.

그런데 큰 소리로 “소옥아” “소옥아”자꾸 부르는 겁니다.

소옥에게는 사실 볼 일이 없어요.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라.

오직 님께 제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

내가 이렇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저 담 넘어 숨어 있는 안록산. 빨리 담 뛰어 오시오.

자기를 표현하는, 자기를 들어내는 말입니다.

 

  소염시의 내용처럼 양귀비가 시녀인 소옥을 부르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편이지 소옥을 찾는 것은 아니다.

양귀비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을 알았다면 안록산도 곧 자신을 드러내는데 지체하지 않아야 한다.

이 말에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임제스님이, 우리 모두는 임제스님의 후손입니다.

임제스님이 ‘불교가 무엇입니까?’ 하고 황벽스님께 가서 물었어요.

그랬는데 황벽스님은 그 많은 8만 대장경을 놔두고, 몽둥이로 후려쳤어요.

황벽스님은 아주 장사입니다. 몽둥이도 보통 몽둥이가 아닙니다.

20번을 후려쳤어요. 그것을 무려 세 번이나 했어요.

그것을 우리가 화반탁출.

속까지 다 드러내서, 다시 말해서 화두의 비밀을 이야기하기로 하면 바로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고, 그것 밖에 달리 불교가 없습니다.

그것 밖에 달리 도가 없습니다. 도라면 그것이 도이고, 불교라면 바로 그것이 불교입니다.

 

  “소옥아”라고 불렀습니다.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똑 같은 말이지요.

이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앞에서 오조 법연스님이 이것을 설명 했지요?

장제형의 이야기 거사.

여기에 거사님들 보살님들 스님들도 여러분 계시지만,

일반불자들이 많으니까 더 잘 어울리네요.

장제형이라고 하는 법무관쯤 되는 거사분이 원오스님에게 법을 물었는데 오조 법연스님이 이 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소옥아” “소옥아”라고 불렀지만, 어디 소옥이가 옆에 있는데요뭘...

소옥이가 귀먹었나요?

물 다 떠다줬고 옷 갖다 줬고 차 다려 줬고 할 일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계속 소옥이 부르는 겁니다.

그와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어지간히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면 이 말에 다 아는 것이지요.

“아~!”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뭐라고 말을 했던 지체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임제스님은 그렇게 60방망이를 얻어맞고도,

자기를 드러낼 줄을 몰랐어요. 지체 했어요.

여기는 안록산이가 지체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지체하거나 머뭇거리면 자신을 드러낸 양귀비의 처지와 그 심사가 어떠하겠는가?

“에이 오늘 장사 글렀다.” “오늘 틀렸다.”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계속 쫓겨난 것입니다.

계속 쫓겨난 것이라고요.

그래서 엉뚱하게도 저~ 멀리 대우스님한테 가서 그때야,

그때야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 번 콱콱 쥐어박았어요.

그때는 몇 달이 걸린 뒤입니다. 황벽스님한테 그렇게 60방망이를 얻어맞고는, 아무런 자기표현을 할 길이 없었어요.

할 줄 몰랐으면 못해야지요.

 

  “소옥아” “소옥아” 아무리 불러도 안록산이가 그 소식을 모르면, 감히 담을 못 뛰어넘어 옵니다.

그 소식을 알면 얼른 뛰어넘어 오는 겁니다.

그 말을 알아들으면요.

양귀비가 자기를 표현 했으면 안록산이도 자기를 표현해야 옳을 것 아닙니까? 아마 안록산도 처음에는 몇 번 그 소옥이를 부르는 소리를 못 알아들었을 겁니다.

나중에야 알았지요.

 

만약 안록산이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담장 밖에서 ‘소옥이를 왜 부르는가?’ 이뭐꼬? 無라? 간시궐이라? 잣나무라? 판치생모라?

(1700가지 화두를 다 갖다 들이대도 소용없어요.)

하면서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뜻을 몰라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 말을 참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이구 양귀비가 배가 아픈가?’

 ‘소옥이가 없는가?

없어서 저렇게 부르는가?’

‘있어도 배가 아파도 많이 아파서 저렇게 자꾸 부르겠지?’

별별 궁리를 다 할 겁니다.

별별 참구를 다 할 겁니다.

화두의 실체란 이런 것입니다.

 

부처를 묻고, 불법을 묻고, 조사를 묻더라도 다만 그 묻는 존재가 드러났을 뿐이고 어떻게 답을 하던 석가모니 같이 꽃을 들었든,

구지화상 같이 손가락을 들었든,

황벽스님 같이 몽둥이로 후려 갈겼든,

그 외 1700가지 온갖 화두들.

이런 것은 답을 하는 존재가 드러났을 뿐 그 외에는 달리 다른 것이 없다. 무어라고 답을 했든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말 쫓아가는 똥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지요.

말 하는 그 놈을 무는 사자가 되어야 되고, 답착비공(踏着鼻孔)이라 그랬지요?

  근본을 밟을 줄 알아야지,

庭前柏樹子(정전백수자)라고 했다.

정전백수자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는데, 백림사엔가 가보니까 잣나무가 아니고 측백나무더라.

이 柏자는 측백나무 백자라고도 쓴다.

그래서는 지대방에서 야단입니다.

측백나무면 어떻고 잣나무면 어떻습니까?

소나무라면 또 어때요?

버드나무라고 해도 상관없는 겁니다.

잣나무가 아니고 측백나무백자라고 해서 얼마나 선방에서 한참 왈가왈부 했는지 말도 못해요.

지대방이라는 데가 아주 대단한 곳입니다.

거기가 아주 재미있는 동네거든요.

그야말로 殺佛殺祖(살불살조) 하고,

온갖 세상 사람들 과거에 부처고 조사고 세상 돌아가는 모든 정보가 다 제공이 되고,

죽이고 살리고 거기서 다 하는 동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 측백나무다. 아니다 잣나무다. 옛날부터 잣나무라고 알았다고 해서 그냥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아직도 해결 못하고 있어요.

측백나무라 했든, 잣나무라 했든, 그 말하는 그 놈이 중요한 것이지, 무슨 나무라고 했느냐?

이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소옥아” 소옥이 한테 뜻이 있나요?

소옥이 부른 그 속을 알아차려야지요.

소옥이는 별 의미 없어요.

소옥이 옆에 있는 데요.

옆에 두고 부르는 거니까요.

이제 화두 다 아시겠지요?

화두의 실체를, 화두의 비밀을 다 아시겠지요?

 

  이것은 옛날에 이야기 다 한 것입니다.

선방에 다니는 사람치고 이 이야기 모르는 사람 없어요.

선방 수좌치고 소염시 못 외우는 사람 없어요.

육조스님 밑에 남악스님. 남악 밑에 마조스님.- 백장스님.- 황벽스님.- 임제스님 이렇게 내려옵니다.

한국 불교도 이 법맥을 이어서 내려오는데 대주혜해 선사가 처음에 마조스님한테 참배하러 갔어요.

“어디서 왔느냐?”

  “월주의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무엇하러 왔는가?”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에 있는 보물창고는 돌보지 않고 집안을 내팽개쳐 놓고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인가?

내가 있는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구하려 하는가?”

대주선사가 마조에게 절을 올리고 여쭈었다.

“어떤 것이 제 집에 있는 보물창고입니까?” 잘 들으세요.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그대가 바로보물창고이다.

 

  묻고 있는 그 사실 “소옥아”라고 부르는 그 사람.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소옥아라고 불렀든, 무비야라고 불렀든 의미 없어요.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조금도 모자라지 않고,

마음껏 쓸 수 있는데 어찌하여 밖으로만 그것을 구하려하는가?”

거기에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요.

그리고 마음껏 쓸 수 있어요.

  무량대복이 그 안에 있고, 8만4천 신통이 거기에 있어요.

가장 성공한 인생이 바로 그 자리에 있다고요.

최고의 삶이 바로 거기에 있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대주선사는 자기의 본래의 마음을 깨닫고 뛸 듯이 기뻐하며 예배하고 떠났다.

영리한 사람은 이렇게 한 마디 일러주면 끝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조사스님들에 이르기까지 깨달은 사람들  의 안목은 시종일관 바로 그겁니다.

자기보물. 이것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것을 일깨워 주려고 보여줬고, 60방망이 후두두려 패면서 보여줬고, 맞아도 모르니까 엉뚱한데 가서 그때사 눈을 뜨고는 표현을 했는데요.

세 번 물으러 갔다가 세 번 맞은 영향이 있어서 주먹으로 세 번 허리를 쾅쾅 쥐어박으면서 표현을 한 겁니다.

참으로 근사하잖아요?

정말 멋있잖아요.

 

  비록 큰 눈을 뜨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 선불교, 선문답에 맛을 들이면요?

다른 것 보기가 싫어요.

선문답 기록해 놓은 禪書(선서)가 그렇게 재미있고 멋있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좋은 대승 경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좀 너저분하거든요. 사실은...

너무 친절하고요.

그런데 선문답은 친절하지가 않아요.

아주 간단명료해요.

그리고 또 의미심장하다고요.

  우리의 자랑. 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이 모은 직지심체요절.

얼마나 세계적인 보물이라고 떠들고 야단입니까?

그 제목이 뭡니까?

白雲和尙抄錄(백운화상초록) 直指心體要節(직지심체요절)인데요.

直指心體. 이것이 뭐예요?

과거칠불에서부터 저~ 밑에 조사들의 가르침을 전부 다 뽑아놨어요.

다~요약해 놓은 겁니다.

절요예요. 그야말로 요절입니다.

아주 요긴한 절목만 딱 갖다 놨는데요.

그것을 한 마디로 直指心體다.

‘우리들의 心體를 바로 가르친 것이다.’ 이것 밖에 달리 없어요.

  백운화상은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모든 가르침을 “直指心體”라고 보신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 선불교전통이 뭐지요? 直指人心(직지인심) 見性成佛(견성성불)이잖아요. 백운화상은 그것을 直指心體. 이렇게 더 분명하게 했어요.

直指人心이나 直指心體나 그것이 그것이지만, 直指心體라.

그것이 금속활자가 어떻게 되었고, 독일의 쿠텐베르크 보다 80 몇 년이나 앞섰고, 이거 떠드는 것도 좋은데 그 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좀 알려고 했으면 좋겠어요.

그 속에 담겨있는 뜻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그러면 直指心體입니다.

심체를 바로 가리킨 것입니다. 전부.

시종일관 모든 가르침이 바로 심체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럼 불교 다예요. 간단해요. 불교 간추리기가 좀 좋아요?

그 보다 더 간단한 것은 黃檗佛法無多子(황벽불법무다자).

황벽불법 참 간단하구나.

주먹으로, 방망이로 후두려팬 것.

그냥 자기 드러낸 겁니다.

자기 드러내는데 손가락을 세웠든, 꽃을 들었든, 안경을 들었든 이것은 내 심체를 드러낸 겁니다.

내 심체가 없이는 이런 동작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시겠지요?

손가락을 들어도, 꽃을 들어도, 안경을 들어도 이것은 곧 내 심체입니다.

나라고요. 그것 봤으면 끝입니다.

‘저 스님이 안경을 바꿔 달라는 뜻인가?’

‘수건 갖다가 좀 닦으라는 뜻인가?’

이렇게 되면 8만4천 법문이 벌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제가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불교가 한 눈에 확 들어오시죠?

 

  팔만대장경을 모셔놓은 해인사에 여러분들 가보셨지요?

거기에 주련에 혹시 이 구절을 보셨어요?

그 많고 많은 팔만대장경에서 가장 값진 말.

팔만대장경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圓覺道場何處(원각도량하처) 現今生死卽是(현금생사즉시).

이것은 팔만대장경을 요약한 말이라고 제가 정리를 했는데요.

圓覺道場이 뭡니까?

부처님이, 조사스님들이 깨닫고, 그 깨달음의 세계를 펼쳐놓은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그것이 어디 있느냐?

저기 나무에다 새겨놓은 나무가 圓覺道場이냐?

그렇다손 치자. 그 안에 다 설명이 돼 있으니까...

  그럼 그 주된 뜻이 뭐냐? 現今生死卽是다.

지금 우리 한마음 가지고, 이 생각, 저 생각, 이 생각이 일어나면 이요.

다음 생각에서 그 일어났던 생각이 사라지면 입니다. 現今生死입니다.

“호흡” “호흡” 이것도 생사입니다.

가고오고, 가고오고, 이것도 생사입니다.

現今生死. 부단히 하루에도 수십만 번, 수백만 번 생사를 반복하고 있고, 그러다가 한100여년쯤 가까워 오면 큰 생사 한 번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루 중에는 잠들고 깨고, 잠들고 깨는 것도 하루의 생사입니다.

또 한 순간의 생사는 이 생각 일어났다 저 생각으로 바뀌고, 또 호흡도 생사입니다.

이것을 통틀어서 現今生死라고 그럽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이 마음.

이 심체로 살아가는 그 삶을 現今生死라고 한다고요.

現今生死가 바로 圓覺道場이다 이겁니다.

지금 이 마음.

이 삶으로 살아가는 이 모습 그대로 圓覺道場이다.

圓覺道場이 어디 있더냐?

바로 現今에 죽고살고, 죽고살고 하는 이 순간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卽是다.

 

  오늘 팔만대장경을 졸업 했어요.

이 한 마디로 졸업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直指心體도 기억 하세요.

우리의 자랑스런 백운화상께서 편집하시고, 또 청주에서 그렇게 최초의 금속활자로 활자본을 만들어서 세계에 아주 자랑꺼리.

얼마전에 유엔에서 전시를 했대요.

뉴스에도 났었는데 금속활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발명이 돼서, 우리가 지금 어깨가 우쭐한 내용이 直指心體입니다.

그것은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이 깨달은 말씀을 그대로 집약한 것입니다.

상 하 두 권으로 집약했는데 그것이 뭐냐?

바로 우리 心體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 외에 달리 다른 것은 없습니다.

어떤 말씀도 우리 심체를 가리킨 것이지, 다른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화두인들 거기서 뭐가 벗어났겠어요?

뭐가 벗어날 일이 있겠어요? 화두인들...

그 어떤 기상천외한 표현을 썼다한들 벗어날 이유가 어디 있겠으며, 벗어난들 어디 가겠습니까?

그것을 벗어난들 어디 가겠느냐 이겁니다.

불교에는 온갖 방편이 많고 거품이 많아서, 우리 초보자들은 방편 쫓아가고 거품 속에서 헤매느라고 도대체 정리가 안 되는 겁니다.

또 聖人(성인)의 말씀이고 부처님말씀이니까 겁이 나서 해석도 함부로 못하겠고요.

 

  우리 불교의 경전은 괜찮아요.

다른 종교의 경전은 아주 대단해요.

손 올려놓고 뭐도 하고 그러지만, 우리 불교의 경전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초보 불자들은 아주 신성시 합니다. 아주 신성시해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좋아요.

그러나 존경하는 것으로서, 신앙의 대상으로서 그쳐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경전 종이는 화장지로 쓰기도 불편합니다.

그런 겁니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우리 불자들은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툭 트여야 됩니다.

 

  다른 종교 믿는 것처럼 갑갑하게 살지 말고, 툭 터지게 시원시원하게 사셔야지,

이렇게 시원시원한 사람들의 가르침을 배우는 우리 불자가 갑갑해서야 불자된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서장 강의가 세 번째인데요.

간화선이라는 타이틀을 걸어 놨기 때문에 정리를 해서 간화선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고,

간화선의 숨은 뜻은 무엇이고, 화두의 숨은 뜻은 무엇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서 이런 말씀을 정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간화선을 공부하는데 세 번이나 왔으니까, 정리해서 간화선에 대해서 어디 가서 말씀 드릴 수도 있고, 가르칠 수도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알고 앉아서 좌선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헛 시간이 안 되고 허물이 없습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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