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12/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21. 13:46
 

 

무비스님 서장 대강좌 3-3

 

  증시에게 답한 두 번째 편지 중간,

대혜스님께서는 경전도 다 섭렵하시고, 또 당시까지의 깨달은 선지식들의 모든 어록들을 다 섭렵하셔서 이 서장이 한낱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치지 않고, 경전과 어록.

거기에다 당신의 깨달음의 안목을 피력 하셨고, 구체적으로 우리가 당장의 한 마디에 깨달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서 당시까지의 불교가 가장 발전된 소위 불교로서 看話禪(간화선).

 

話頭(화두)를 유심히 관찰하고 살피는,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떨어 버리는 아주 간단하고 소박하고, 깊이 있고 고고하게 갖추어가는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서장이 간화선의 지침서로서, 비록 간화선이라는 것이 하나의 방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가장 첨예한 방편이,  발전된 방편으로서 오늘 날 까지 우리에게 이렇게 효용이 큰 가치를 하고 있습니다.

 

p. 57.

암두 스님이 말하기를 “물건을 물리치는 것이 상(上, 道人)이 되고 물건을 쫓아가는 것이 하(下, 衆生)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경계입니다.

나 아닌 모든 다른 것은 경계이고 대상입니다.

그것을 물리친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지요.

물건을 쫓아간다는 것은 거기에 끌려가지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上이다. 下다. 道人이다. 衆生이다. 이런 표현은 좀 그렇네요.

 

또 말하기를 “종지(宗旨)는 모름지기 한 글귀를 알아야 하니, 宗旨.

근본 종지는 한 글귀를 알아야 된다.

종지라는 말을 불교에서 잘 쓰는데 참 좋은 말입니다.

으뜸가는 宗자지요. 이것이 한 건물의 가장 중심이 되는 위치를 뜻합니다.

그 근본 취지를 알아야 된다는데, 그 근본 취지는

모름지기 한 글귀를 알아야 한다. 그랬어요.

무엇이 한 글귀인가? 여기 해석을 합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를 바른 글귀[正句]라고 한다. 정구라고 한다. 생각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호흡이 뚝 끊어질 때. 1억짜리 수표를 놨는데 금방 없어졌어요.

돌아보니까 없다 이겁니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숨이 끊어져요.

화두가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개가 불성이 없다니 “없다.”하면 그것이 “왜 없다 했는가?”가 아니고, “없어?” “없어?”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1억짜리 수표가 없어졌다. “어??” 그때부터 숨이 올 스톱 되어 있어요.

그때 숨이 끊어져도 안 죽어요.

이상하게... 안 죽는다고요.

 

  화두가 그렇게 접어들면 며칠 안 갑니다. 3일. 길어야 7일이라고,

禪要(선요)에서 그렇게 했어요.

길어야 7일이고 3일이면 끝난다.

정 둔한 사람은 한철.

그런 정도로 이야기 해 놨습니다.

둔하면 한철까지는 가는데 대개 일주일이면 끝난다고 했어요.

 

예를 들어서 1억짜리 수표가 금방 없어졌는데 그 사람이 출근을 하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못합니다.

잠이 오겠습니까?

밥을 먹겠습니까?

잠도 안 오고 밥 못 먹습니다.

출근이 문제입니까?

평생 모아도 월급쟁이는 못 모을 것인데요.

어떻게 출근 하겠습니까?

출근하면 뭐해요?

그 까짓 것... 돈 1억 잃어버리고...

그렇게 들어가면 일주일이면 끝납니다.

그렇게만 들어가면...

 

  부처님이 꽃을 들었습니다.

평소에는 설법 잘 하시더니 오늘은 왜 입이 다물어졌나?

입에 마비가 생겼나?

왜 꽃을 들었는가?

이렇게 따지는 것이 아니고, “꽃??” 그리고 숨이 딱 멈춰야 됩니다!

 

구지선사의 손가락 알지요? “손가락??” 이러고 숨이 그냥 끊어져야 됩니다.

사량 분별. 일체 의식의 진행이 뚝 끊어져야 되는데 ‘저 손가락 왜 들었을까?’ ‘어디가 아픈가?’ 이렇게 되면 3년도 가고 10년도 가고 30년도 가는 겁니다.

 

  그 순간 들었을 때, “소옥아”이렇게 불렀을 때 척. 담 뛰어 넘는 소리가 나야 됩니다.

제대로 알아들으면 척. 담 뛰어 넘지요. 머뭇거리지 않아야 됩니다.

누구처럼 머뭇거리지 않아야 됩니다. 그렇게 다 이야기 해 놨잖아요.

이렇게 알고 화두를 들면, 상당히 소득이 있을 겁니다.

 

지금 화두 들고 열심히 정진하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혹 실수로 깨달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찌된 심판인지 실수로라도 깨달았다는 소식을 못 들었습니다.

“실수로 깨달았다.”

이 소리도 여태, 수 십 년 동안 못 들었어요.

그것이 어떻게 해서 실수로라도 깨달을 수가 있어야 될 텐데, 그 많은 사람이 그 오랫동안 하면...

이미 다 깨달아 버려서 깨달을 것이 없어서 그런지, 이것을 우리가 잘 점검을 해 봐야 됩니다.

 

  그럼 깨닫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알아야 됩니다.

“깨닫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앞으로도 말씀드릴 수가 있을 겁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를 바른 정구라고 한다.

그러니까 모름지기 한 글귀를 알아야 하는데 무엇을 한 글귀라고 하는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 “억” 하고 그만 숨이 딱 멈춰진 그 상태입니다.

또한 이마에 머무는 것.거정(居頂)이러는데, 최고의 자리에 있는 것.

이것을 이마에 머무는 것이라고도 표현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경지입니다.

또한 머묾을 얻었다 득주(得住). 비로소 머묾을 얻는다.

계속 흘러가지요. 계속 흘러가는데 “억”하고 숨이 멎었을 때 그때는 흘러가지 않습니다. 호흡이 쉬어지지 않아도 죽지도 않아요.

생각이 어디로 흘러갈 까닭이 없어요. 머문다고요.

평소에는 無所住(무소주)입니다. 머물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겁니다.

계속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본마음의 모습이 계속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강의를 잘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마음대로 생각 다 그냥 어디로 보내고, 어디로 보내고 여기 앉아서 온갖 친구, 온갖 볼 일 다 보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本領(본령)입니다. 마음의 본모습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무소주잖아요. 應無所住(응무소주) 而生其心(이생기심)하라고 했잖아요.

 

마음이 본래 그렇게 생겼어요.

그런데 그것을, 예를 들어서 忠(충)을 하라. 孝(효)를 하라. 뭐를 하라. 뭐를 하라. 딱 한 곳에 매달아 놓으려는 가르침이나 그런 사상은 틀린 겁니다.

잘못 된 것입니다. 어디에 목을 매달고 살아야 되는 줄 알았는데, 應無所住 而生其心.

우리 마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도록 되어 있다.

 

  저는 눈만 아니면... 세상의 체면과 눈만 아니면 벌써 어떻게 되었지요

사실은... 안 그래요? 마음 하자는 대로 했으면 벌써...

이대로 있겠어요? 이대로 있을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세상 체면이 있어서 그냥 그렇게...

 

원래 우리 마음은 應無所住 而生其心입니다. 머물지 않게 되어 있다고요.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것은 머묾입니다. 진짜 그것은 머물러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방편이라고요. 그러니까 화두를 들어서 한생각도 사량 분별심이 뚝 끊어졌을 때는 머무는 겁니다.

최고의 방편입니다.

방편치고는 최고의 방편이라고요. 그것을 강요하는 겁니다.

이 간화선에서는 그것을 강요하는 겁니다. 우리 마음은 머물지 않는 것이 본령인데, 머물기를 강요하는 것이 간화선입니다. 강요해요.

이것은 진짜 강요입니다.

 

머묾을 얻었다고 하며, 또한 역력(歷歷)하다고 하며, 또한 성성(惺惺)하다고 그때 “화두가 역력하다.” “화두가 성성하다.” 그 생각 하나 뿐이니까요. “無” 하면 그 생각 하나 뿐입니다. 왜 무라고 했느냐?

부처님은 有情(유정) 無情(무정)이 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는 왜 없다고 했느냐? 이렇게 그냥 염불 하듯이 그렇게 해나가면 이것은 벌써 아닙니다.

그것은 뭐죠? 무소주입니다. 應無所住 而生其心입니다.

보통 마음입니다. 그것은 평상심입니다.

 

  그런데 간화선은 평상심 아닙니다. 평상심을 반역하는 겁니다.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래 得住라고 하는 것이지요. 머묾을 얻었다.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위에 뭐라고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 이렇게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화두 든다.”하는 그 마음과 화두를 들지 않는 우리 평소의 평상심과 아시겠지요?

그 화두를 들지 않는 평상심은 물흐르듯이 그렇게 흘러가는 겁니다.

흘러가고, 굳이 화두라는 이방편으로 우리가 새로운 차원의 정신세계로 몰입해 본다고 마음을 작정하고...

 

  요즘 [단기출가]도 있고, [시민선방]도 있고 많지요?

[토요 참선회]도 있고, [철야 정진회]도 있고요.

거기에 들어가서 할 때는 무소주를 주로, 머물지 않는 것을 머무는 것으로 한 번 다잡아보는 겁니다.

이거 한 번 해볼 필요 있습니다. 해볼 필요 있어요.

해보면 별별 현상이 일어납니다.

몇 년 전에 빌려줬던 돈도 기억나고요.

온갖 것이 다 기억난다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아주 이상한 정신적인 현상이 벌어집니다.

정신도 상당히 강력해지고요.

깨닫는 것은 차치하고... 이 마음 상태가 이상해져요.

아주 상당히 변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의식에 근육이 생깁니다. 뼈가 생겨요.

근육이 생겼다가 그것이 뼈로 되어요.

체조 같은 것을 안 하다가 하면 근육이 생기지요? 알통이 생겨요.

우리 어릴 때 해보면 조금 생기면 알통 자랑한다고요.

 

  그와 같이 우리 정신에 알통이 생깁니다.

화두 드는 훈련하면요.

그것은 제가 하듯이 하는 화두 드는 것이지요.

제대로 드는 화두가 아니고요. 그냥 억지로라도 마음을 붙잡아 매어 보는 것. “왜 無라고 했을까?” “왜 無라고 했을까?”

이렇게 계속 흩어지는 마음을 한 곳에다 집중시키는 훈련을 끊임없이 하루에 10시간쯤 해 보세요.

그것을 한 철을 하니까 사람이 싹 달라지더라고요.

정신에 근육이 생기고, 뼈도 생기려고 해요.

그리고 정신이 박력이 있다고 할까? 강하다고 할까?

아주 다이나믹 해져서 밀어붙이고.

자기 성격을 표현하는데 적극적이 되더라고요.

 

  이것은 제가 처음에 한 철간 경험해본 것입니다.

옛날은 그렇게 부드럽고 사람이 그렇게 좋고 호인이라고 하고 자비롭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본래심이 나타나 버려요. 본래심이...

그리고 화 낼 때 팍 화내고 웃을 때 파악 웃어버리고요.

자기표현을 적극적으로 하게 돼요. 저도 놀랐지요.

억지로 화두 드는 일도 그렇게 정신에 변화가 옵니다.

그래서 ‘아 우리 육신만 단련한다면 근육이 생기고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니구나!’ 육신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정신도 단련하니까 거기에 근육이 생기고 힘이 생기고 심지어 뼈까지 생긴다고요.

이거 아니 해본 사람은 경험 못해요.

한철만 독하게 한번 해보세요.

해보면 그런 정신의 변화가 생깁니다.

그래서 得住라고 했고, 여기 一句라는 것이 화두 드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대혜스님도 암두스님 말씀을 인용을 했습니다.

 

역력(歷歷)이라고 하고 성성(惺惺)이라고 한다. 또 “이러한 때”

이것은 뭐라고 뭐라고 표현을 못해서 “이러한 때”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때를 가지고 일체의 시비를 모두 타파하여 그렇지요.

이렇게 되면 옳다 그르다하는 것이 뚝 끊어지지요.

우리 한 생각이 딱. 머물러버리면, 흘러가던 마음이 흘러가지 않고 한곳에 딱. 집중되면 거기에 시비가 붙을 수가 없지요.

善惡(선악)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너다 나다 하는 것이 붙을 수가 없어요.

 

일체의 시비를 모두 타파하여 겨우 이러하면 문득 이러하지 않아서 옳은 것도 깎아버리고 그른 것도 깎아버려야 합니다.

다 깎여져요. 없어져요. 옳다 그르다가 다 떠나 버려요. 떠나 버린다고요.

저절로 내 마음에서 다 올 스톱 돼버려요. 잘 났다. 못 났다. 있다. 없다 이런 것이 다 스톱 되어버린다고요.

 

한 덩어리의 불과 같아서 닿으면 바로 타버릴 것이니, 어느 곳을 향할 것입니까?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와 같아요.

종이나 책을 넣으면 금방 불이 돼버려요.

눈이 펑펑 쏟아지더라도 그 눈송이가 불이 돼버려요.

여러분들 눈이 타는 것 봤어요?  눈이 타요. 불꽃을 일으키면서 탄다니까요.

밖에서 우리가 장작불을 많이 지펴 놓찮아요?

그럴 때 눈이 갑자기 쏟아져요.

그러면 눈이 불꽃을 일으키면서 타요. 그렇게 됩니다. 우리의 사량 분별과 옳다, 그르다.

온갖 사량 분별과 망상 번뇌는 우리 한 생각이 딱.

한곳으로 집중 될 때는 어떤 생각도 어떤 사량 분별도 거기 와서 다 타버려요. 홀랑 다 타버려요.

그런 표현이 서장 외에도 선 지침서에는 수없이 많습니다. 있어요.

 

  如一團火相似(여일단화상사)라.

한 덩어리의 불과 같아서, 接着遍消(접착편소)라.

닿기만 하면 다 타버린다.

가까이 오기만 하면 다 타버린다.

그리고 또 이런 표현도 있어요.

파리가 어디 안 붙는 데가 없지요?

임금님 밥상에 붙는 것이 파리지만, 불 위에는 못 붙지요.

불 위에 붙으면 타 버리잖아요.

파리가 임금님 밥상에도 겁 없이 붙지만, 불덩어리 위에는 타버린다 이겁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의식의 세계가 화두라고 하는 한곳으로 몰록 들어가면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차원이 있습니다.

임제스님이 후두려 맞았을 때, 몰랐잖아요. ‘왜 때렸을까?’ ‘왜 때렸을까?’

우리는 할 수없이 ‘왜 때렸을까?’ ‘왜 때렸을까?’ 이 차원입니다.

꽃을 들어 보였을 때 가섭존자는 빙긋이 웃었지요.

그것은 아주 지금 우리 몫이 아니지요.

우리 몫이 아니니까 지금 우리는 부처님이 ‘왜 꽃을 들었을까?’ 이 차원입니다.

 

 그럼 그 차원만으로도 밀어붙입니다.

계속 밀어붙입니다. ‘왜 꽃을 들었을까?’라고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것을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작정을 하고 한번 해보세요.

그러면 정신에 아주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에 겁이 없어져요.

  소극적인 마음이 적극적으로 되고, 시시한 심리적인 어떤 병은요.

싹 다 고쳐요.

억지로 밀어붙이는 공부도, 소소한 마음병은 다 고쳐져요.

아주 대단한 근육이 생깁니다.

정신에 근육이 생깁니다.

근육이 뼈가된다 이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운동만 하면 우리 몸에 알통만 생기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화두를 집중적으로 하니까 정신에 뼈가 생겨요.

정신이라는 것이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형체가 없는데 근육이 생겨요.

경험 아니해본 사람은 이런 소리 못해요.

  저도 선방에 한 10년 다닌 이후로 사람이 달라졌고 박력이 있어졌지요.

하하하하하하~~~

그렇더라니까요.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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