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13/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21. 14:54
 

 

무비스님 서장 대강좌 제 3-4 강

 

  그렇더라니까요.

겁이 없어요.

무식해도 겁이 없어요.

어떤 이는 그냥 들이밀어요.

세상을 사는데요.

그것 아주 중요해요.

작정을 하고 한 철만...

3개월만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우리 같은 경우는 처음에 예를 들어서 처음에 10시간. 12시간을 한 철을 용맹정진한 적도 있어요.

한 철을 용맹정진! 정진이 온전히 되지는 않지요.

온전히 되든 안 되든 그것은 제쳐놓고 그냥 해 보는 겁니다.

내 힘닿는데 까지 한 철간 해 보는 겁니다.

잠 안자고 그냥... 머리를 벽에 박기도 하고요.

하도 졸려서 포행 한다고 돌다가 오대산 같은데 눈이 많이 오잖아요.

거기에 잠깐 앉았다 누워서 눈을 자꾸 덮는 거예요.

이불이라고 자꾸 눈을 끌어 들이는 거예요.

 

  입선 죽비를 쳤는데 사람이 안 오는 겁니다.

이상하다. 화장실에 가 봐도 없고요.

마당에 돌아다녀 보니까 눈을 자꾸 끌어 덮고 있는 거예요.

그렇더라도 하는 거예요 그냥...

저러다 병 안 날까?

그런 것 걱정 하면 공부인 아닙니다.

걱정하지 말고 그냥... 크게 병 안나요.

왜냐? 정신에 근육이 생겼기 때문에요.

 

한 덩어리의 불과 같아서 닿으면 바로 타버릴 것이니,

참 이것 멋진 말이지요.

어느 곳을 향할 것입니까? 지금 사대부가 사량과 계교로 소굴을 삼아

이것이 머리 돌리는 겁니다. 머리 굴리는 겁니다.

이 생각 저 생각하고 그 동안 배운 지식들, 얼마나 많습니까?

별별 지식들이 다 동원이 되는 겁니다.

‘야~ 이거 無라?

무의 철학인가?’

‘道交(도교)의 무의 철학하고 어떤가? 저떤가?’하고,

왜 없다고 했는가? 진짜 없는가?

그런 것을 여기 다 이야기 해놔요.

그런 생각들을 사량과 계교. 그래요.

 

  그것을 소굴을 삼아 살 곳으로 삼아

이러한 말을 들으면 곧 말하기를 ‘공(空)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합니다.

지가 공에, 공 맛도 못보고 혹시 그것도 한 생각 뚝 끊어져서 아무 생각도 없는 데로 이 의식을 몰고 가면, 이것이 공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큰일 나는 것이 아닌가?

공 맛도 못 본 놈이 그러고 있다고요.

한 생각을 모으고 들어가는 것을...

옛날에 쥐 잡을 때 소 뿔. 소뿔을 가지고 쥐 잡는다대요.

 

소뿔 저~ 안에다가 냄새나는 먹을 것을 놔두면 쥐가 그 냄새 맡고,

큰 물 소뿔 있잖아요.

그걸 따라서 들어온다는 겁니다. 들어와도 없지요.

계속 끝까지 들어와서는 머리가 딱 박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쥐가 그만 그 속에서 죽는대요.

그것이 쥐틀입니다.

옛날 쥐틀이 소뿔이라고요.

 

  우리가 화두를 들고, 일부러 의식을 몰아가는 것이 그와 같은 거라고요.

이제 화두 드는 것이 좀 그려지지요?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옴짝달싹 못해서 거기서 죽어야 돼요.

쥐처럼 거기서 죽어야 됩니다.

우리 의식이 거기서 한 마음 한 덩어리가 되어야 됩니다.

불덩어리 처럼요.

거기서 머물러야 돼요.

그런데 괜히 가보지도 않고, ‘空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어디서공에 떨어지면 안 좋다는 소리는 어디서 들었는가?

 

비유하건대 이것은 배가 전복(顚覆) 되지도 않았는데, 먼저 물로 뛰어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심히 불쌍한 일입니다.

배가 출렁출렁 하니까 배가 넘어 가는 것 같다고 물로 뛰어드는 겁니다.

그래서 허부적 허부적하는데 배는 멀쩡하거든요.

그거 어떻게 되겠어요?

 

최근에 강서(江西)에 이르러서 여거인(呂居仁)을 만나니 그가 마음을 이 인연에 둔 지가 오래되었으나, 또한 이 병이 깊었습니다.

사량 분별의 병입니다.

여거인 이라고 하는 사람.

거사 분들이 많이 등장하지요.

 

어찌 그분이 총명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제가 일찍이 말하기를 “당신이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니,

능히 두려움을 아는 자는 공합니까?

공하지 않습니까?

시험 삼아 한번 일러보십시오.” 하였습니다.

참 이거 멋진 말입니다.

이거 줄 쫙 입니다! 두 줄 쫙~

 

  모든 것이 공하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공한 면이 있기야 있어요.

있지만 이 말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니 그 두려워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공합니까? 공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뭐냐? 이겁니다.

지금 두려워하는 그 놈은 뭐냐? 이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부정합니까?

 

   근래에 여래장 사상 가지고 한참 왈가왈부 하지요?

무아(無我) 가지고 왈가왈부 하고요.

아무리 무아다.

여래장이 있다 없다

래도 무아다 라고 하는 그 놈은 뭐냐? 이겁니다.

아니 경전 다 제쳐놓고, 지금 이제 경전 가지고 이야기할 계제가 아니잖아요.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경보다도 좀 앞서면 안 되나요?

경보다도 한걸음 앞서면 안 되냐고요.

경도 사람이 한 건데요.

경은 제쳐놓고 지금 당장에 눈앞에서 우리가 검증할 수 있는 것으로 해보자고요.

지금 “무아다.” “공이다.” “뭐다.”하는 그 놈은 뭐냐? 이겁니다. 그 놈은...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겠느냐 이겁니다.

이것을 여래장이라고 하든지, 불성이라고 하든지, 무슨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다.

이름 안 붙여도 좋다 이겁니다.

개똥이 소똥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이것은 우리가 부정 못하지 않느냐?

지금 시시비비 하는 이 사실.

이것은 부정하지 못하지 않느냐? 알고 보면 간단해요.

無我(무아)라고 했든, 唯我(유아)라고 했든, 緣起(연기)라고 했든, 空(공)이라고 했든, 그까짓 소리는 아무 의미 없어요.

지금 말하고 있는 것. 옳다 그르다 화내고 웃고 불고 슬퍼하는 이 사실.

이렇게 온 우주에 꽉 차 있는 것.

이렇게 홀로 있는 것. 이것만 있는 것.

지금 이것만 있으므로 孤明(고명)이라고 그래요.

이것만 있는, 이렇게 크게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부정 하겠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 봐요. 멋지잖아요?

두려움을 아는 자는 공합니까? 공하지 않습니까?

시험 삼아 한번 일러보십시오.

그 분이 생각해서 계교로 대답하고자 하기에, 이때에 한번 할(喝)을 했더니,

뭐라고 대답할까?

뭐라고 대답할까?

온갖 지식을 주워섬기려고 하는데, 이때에 한번 할을 했다 이겁니다.

지금까지 아득하여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옥아”라고 불렀는데 ‘왜 소옥을 옆에다 두고 불렀는가?’

이렇게 나가기 시작하면 돌아올 길이 참 막연합니다.

그래도 차선책으로 ‘왜 소옥이를 불렀는가?’

이렇게라도 하면 정신에 근육이 생겨요.

그리고 사람이 달라져요.

우리는 차선책이라도 쓸 수밖에 없지요.

우리 그릇이 거기까지고, 우리 근기가 거기까지니까 그래서 모두 선방에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지요.

 

이는 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앞에 문득 놓여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만든 것이지, 다른 일에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깨닫고 말고 할 것이 없어요.

깨닫고 말고 할 것이 없다고요.

소옥이라고 부르면서 양귀비가 자기를 표현 했으니까 안록산이는 담만 뛰어 넘어가면 그뿐입니다.

거기에 깨닫고 말고 할 것이 있어요?

양귀비도 자기표현 했고, 안록산이도 자기표현 했어요.

황벽스님이 그렇게 후두려 패면서 자기표현 했는데, 그때는 몰랐지요.

몰라서 엉뚱하게 몇 달 뒤에 대우스님한테 가서 주먹을 내지르면서 그때야 자기표현 했어요.

부처님이 3000년 전에 꽃을 들었는데, 부처님의 자기표현을 가섭존자는 알아듣고 빙그레 웃으면서 자기표현 했어요.

맞장구를 쳤어요.

우리는 아직도 맞장구를 못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맞장구를 쳐야 되는 겁니다.

담을 뛰어 넘든지...

 

당신이 시험 삼아 이와 같이 공부를 해 가서, 날이 가고 달이 깊어지면[日久月深] 저절로 잘 계합할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가지고 쉬기를 기다린다면, 미륵부처가 하생(下生)할 때까지 참구(參究)해 가더라도, 또한 능히 깨달음을 얻지 못하며, 또한 쉼을 얻지 못하고 점점 미혹함만 더할 것입니다.

 

  평전화상(平田和尙)이 말하기를 이것은 또 알음알이 문제에 대해서, 알음알이가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辭典(사전)으로 計巧(계교). 思量(사량). 分別(분별)하는 것. 의식으로 이리저리 마음을 헤아리는 것.

“신령한 광명이 어둡지 아니하여 만고에 아름다우니, 이 문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知解]를 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 아주 유명한 말이지요.

 

다음 페이지에(60쪽)

平田和尙(평전화상)이 曰(왈)

神光(신광)이 不昧(불매)하야 萬古徽猷(만고휘유)니

入此門來(입차문래)인댄 莫存知解(막존지해)하라.

유명한 말입니다.

큰절 입구에 가면 대개 이런 주련 하나는 써 붙여 놨어요.

 

  세속에서 박사학위 10개 20개 받은 것.

가짜 박사인지 진짜 박사인지 받은 것 다 내려놓고,

‘여기서는 다 내려놔라.’ 여기서는 진짜이든 가짜이든 별 의미 없다 이겁니다. 다 내려놓고, 入此門來인댄 莫存知解하라.

우리 불교 문에 이것은 절문(寺門)이 아니고 佛敎門(불교문)에 들어오려면 지식. 지해. 박사학위. 가짜진짜. 한국박사든지 미국박사든지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莫存知解라고 했잖아요. 지해가 뭡니까?

박사학위증 10개입니다. 알음알이. 그동안 보고 듣고 배우고 외우고해서 아는 것. 이것 두지 말라. 이것이 제일 문제다 이겁니다.

이것이 문제는 문제네요

요즘도... 도를 아는데도 문제고 세상살이에도 문제고요.

그것 한 구절 외웁시다.

 

또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이 일은 유심(有心)으로도 구할 수 없으며, 무심(無心)으로도 얻을 수 없으며, 말로도 지을 수 없으며, 말 없음으로도 통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밑에 원문이 좋네요. 此事(차사)는 不可以有心求(불가이유심구)며 不可以無心得(불가이무심득)이며 不可以語言造(불가이어언조)며 不可以寂黙通(불가이적묵통)이라.

아주 이것 참. 말이지만, 어디까지나 말이지만 정말 주옥같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진흙에 들어가고 물에 들어가는 노파의 가장 최고의 가르침인데, 진흙에 빠진 사람 구하려면 진흙에 들어가야 되고, 물에 빠진 사람 건지려면 물에 들어가야 됩니다.

老婆心(노파심). 자비의 최고 극치에 이르는 말이지요.

가끔 참선하는 사람이 다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지나치고, 특별히 이것이 무슨 도리인지를 자세히 살피지 않습니다.

  莫存知解(막존지해).

 

가짜든 진짜든 아는 것 좀 내려놔라.

알음알이 좀 제발 내려놔라.

아는 것 자랑하고, “아 나는 무슨 학교 나왔네 어쨌네.” 그러면 지대방에서 앉아서 뭐라고 하느냐? “아이고 저 중은 쌈지가 덜렁덜렁 해”이런다고요.

옛날에 쌈지차고 다녔잖아요? “쌈지가 덜렁덜렁한다.”

속물이 안 빠졌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절에 들어가면 俗物(속물)이 빠지고 衆物(중물)이 들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중물이 들었다.” “안 들었다.”  “들었다.” “안 들었다.” 이러는 겁니다. 20년, 30년 나이가 50대쯤 접어들면요.

그때는 “저 사람 아직도 중물이 안 빠졌어”이래요.

처음에는 중물이 안 들었다고 핀잔을 주더니,

또 나중에 세월이 한참 가니까 중물이 안 빠졌다고 이야기를 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래 되어야 돼요.

 

  중물이 빠져야 됩니다.

저도 중물 빼려고 무척 애를 쓰지만, 어려서 와가지고 중물이 너무 들어서는 도대체가 잘 안 빠집니다.

그것이 中道(중도)입니다.

중도가 별것 아닙니다.

어디에 치우치지 않는 것. 우리 중도. 공부 했지요?

어떤 좋은 경지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출가한 사람이 세속적인 마음과 사고에 치우쳐 있어서 쌈지가 덜렁덜렁하면 그 꼴이 뭡니까?

그런데 상당히 공부 했다고 하는데도 아직도 중물이 안 빠져서,

“아~ 중은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되고...”

그 아만심. 자존심. 독 오른 독사뱀처럼 고개 쳐들고 안하무인이 되면 도 닦는 사람이 그것은 또 무슨 꼴입니까?

그것도 아니거든요. 그것은 다 편견이고 치우친 삶이지요. 모양새가 아니지요.

 

만약에 힘줄과 뼈가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 거착(擧着)하는 것을 듣고는 ‘힘줄과 뼈가 있는 사람’ 여기 말 나왔네요?

정신에 힘줄과 뼈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조금 거착 하는 것을 듣고는 꽃을 들었든지 손가락을 들었든지 개가 불성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을 들었든지 간에...

 

바로 금강왕의 보검을 가지고 단번에 이 네 갈래 갈등을 끊어버린다면, 생사의 길도 또한 끊어지며, 범인과 성인의 길도 또한 끊어지며, 계교하고 사량하는 것도 또한 끊어지며, 득실시비(得失是非)도 끊어져서 그 사람의 본분자리가 앉은자리, 선 자리지요.

본분자리가 분명하고 깨끗해서 잡을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어찌 쾌활하지 않으며, 이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四路(사로) 갈등은 앞에서 말했던 유심(有心). 무심(無心).

유언(有言 言語). 무언(無言 寂黙)

이런 말을 네 갈래 갈등. 밑에 주해를 달아 놨네요.

그렇습니다. 일체 것이 다 끊어집니다.

그러니까 뭔가 한 마디 딱. 들면 거기에서 끊어져야 된다고, 숨이 막혀야 된다고, 숨이 올 스톱 돼야 된다고 제가 그랬잖아요. 바로 그겁니다.

거기에 무슨 얻고 잃고 득실시비가 어디 있으며, 있고 없음이 거기에 붙을 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보지 않았습니까? 옛날에 관계화상(灌谿和尙)이 처음 임제스님을 참례할 때 관계스님이 임제스님을 참례한 거예요.

임제스님이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문득 법상[繩床]에서 내려가 사람이 오는데 바로, 法床(법상)이 아니라 앉아 있던 자리예요. 繩床(승상)이라고 했네요. 승상이란 그냥 스님들이 앉는 자리입니다.

적당한 평상이나 의자 같은 겁니다.

내려가 곧바로 가슴을 움켜잡으니, 멱살을 탁 잡은 겁니다.

제가 그동안 말씀드린 그 내용 가지고 충분히 가늠이 갑니다.

이것이 짐작이 되는 내용입니다.

딱 잡았다 이겁니다. “소옥아”하고 불렀습니다.

 

관계화상이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소옥아”라고 부르니까 담 뛰어 넘어오는 소리가 “쿵”하는 겁니다.

임제스님이 그가 이미 투철히 깨달았음을 알고 곧 밀어내서 다시 말로 상량함이 없었습니다.

뭘 재차 물어보고 그렇게 아니 했다는 겁니다.

이미 끝났는데요. 꽃을 들었는데 빙긋이 웃었으면 끝났지 거기에 무슨 “너왜 웃었느냐? 뜻이나 알고 웃었느냐?”이럴 까닭이 없잖아요.

 

  이때 관계화상이 어찌 알음알이로 서로 상대하여 얻었겠습니까?

여기에 무슨 알음알이. ‘저게 왜 저랬을까?’ 하고 온갖 지식을 동원했을 까닭이 없지요.

옛날에는 이와 같은 모범이 있었는데, 지금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가지고 공부하지 아니하고 다만 헤아리고 비교하는 거친 마음으로 공부합니다.

어쩔 수 없지요. 이것이 차선책이니까요.

 

관계화상이 처음에 만약 조금이라도 깨달음과 증득함과 쉬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앞에 있었다면, 가슴이 움켜잡혔을 바로 그때 깨달았다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문득 손발을 묶고 휘둘러 한 바퀴를 돌아오더라도 또한 쉼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힘차게 다리가 부러져라고 크게 뚜두려패야만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손가락 딱 들면 됩니다.

손가락 들어서 안 되는 것을 온 지구를 다 돈다고 그것이 되나요?

여기의 말이 그 말입니다. 멱살을 한번 딱 잡았는데, 딱. 알았으면 됐다 이겁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안 통하면 손발을 묶고 온 세계를 막 끌고 다닌다 하더라도 이것이 될 일이 아니다 이것이지요.

그럼 흔히 선방에서 하는 말로 “更參三十年(갱참삼십년)”하라고 합니다.

“다시 30년을 참구해라.”

 

일상에 계교하고 안배하는 것도 식정(識情)이며, 알음알이다 이겁니다.

계교하고 안배하는 것은, 안배(安排)는 갖다 꿰어 맞추는 겁니다.

‘이것은 노자의 무의 철학하고 흡사한데’ 하고 맞추는 것을 안배라고 합니다.

계교(計較)는 혼자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고요.

생사를 따라 옮겨 흐르는 것도 또한 식정이며,

보통 사람들의 의식은 늘 흘러가잖아요. 경계 따라서 흘러가지요.

그것도 역시 식정(識情)이다 이겁니다. 보통 의식이다 이 말이지요.

두려워하는 것도 또한 식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병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서 생멸하니, 죽었다 살아났다 하니,

경교(經敎) 가운데에 이른바 ‘식정을 따라 행하고 지혜를 따르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그래요.

 

식정이라는 것이 우리 보통생각. 보통 사람들의 의식을 식정이라고 하고, 거기에 한 눈을 더 뜨고 사물을 판단하는 것은 지혜라고 하지요.

여기에 보면 그것을 나눠 놨어요.

식정을 따라 행동하고 지혜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요는 한 눈을 더 뜨고 지혜로서 살아가는 것.

이 때문에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면목(本來面目)에 어두우니[愚昧]

이것이 우리의 참 생명이지요.

本來面目이라고도 하고, 本地風光이라고도 하는데 本地風光은 뭡니까?

본래의 경치다 이 말입니다. 본 경치.

우리 마음의 본 경치가 있어요. 그것이 또 참 얼굴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량 분별로 말하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면서 또 이 사실이 아니고, 이 사실이 아니면서 또 이 사실입니다. 좀 알쏭달쏭 한데요.

 

  “스님. 그러면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대화하고, 시간되면 집에 갈 줄 아는 이것하고 본지풍광 본래면목하고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것 좀 알쏭달쏭하잖아요. 사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것뿐입니다.

손 흔들고 손 흔드는 줄 아는 것. 지금 이것뿐입니다.

말하면 말하는 것 듣고, 거기에 그 나름대로 이해를 하고 하는 이것뿐인데 이것 말고 본래면목. 본지풍광. 달리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러나 또 “이것뿐이다.”라고만 알면 거기에는 또 문제가 있어요.

이것을 떠나서 있는 것은 아닌데... 이것이 우리가 해결해야할 과제입니다.

보고 듣는 이것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니면서 또 이것이 모두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해결해야할 과제라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본래면목에 어두우니 만약 한 때라도 놓아서 일체 헤아리고 비교하지 않으면, 한 순간이라도 이 말입니다.

홀연히 알음알이가 사라져 콧구멍을 밟아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踏着鼻孔(답착비공)이라고 제가 유인물에서 말씀드렸지요? 콧구멍.

생명의 근본 뿌리를 우리가 콧구멍이라고 그러지요?

鼻底(비저)라는 말을 쓰듯이, 이것이 바로 “밟아 버린다.”하는 것은 생사해탈을 말하는 것이고, 온갖 문제해결을 말하는 것이고, 근본을 타파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이 정식이 진공묘지(眞空妙智)가 되어 다시 특별히 얻을 지혜도 없습니다.

그랬잖아요. 정식은 보통 사량 분별입니다.

眞空妙智 라고 하는 것은 本來面目.本地風光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하는 것이 그대로 本來面目이 되고,

本地風光이 되어서 특별히 얻을 지혜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특별히 얻을 것이 있으며 증득할 바가 있으면, 또한 도리어 옳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미혹할 때에 동쪽을 불러 서쪽이라고 하다가, 깨닫고 나서는 서쪽이 문득 동쪽이어서 따로 동쪽이 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공부하는데 아주 알쏭달쏭하면서도 긴가민가싶기도하고, 또 이것이 확실하지 않는 문제를 하나 던졌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식정(識情)이라고 하는 것. 보통 우리들의 의식과 깨달음의 안목에서 보는 의식을 여기서 眞空妙智. 本地風光.本來面目. 이런 말을 썼는데요.

이것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을 여기서 약간 언급을 했지요?

이 정식이 眞空妙智가 되어 다시 특별히 얻을 지혜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로서 따로 특별히 정신세계가 있지는 않다 이겁니다. 결국은 이거예요.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 능력. 이 사실인데요.

이 사실 외에 다른 것이 달리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인데, 이 사실이 가슴에 콱 뚫고 들어오지가 않아요.

맴돌고 있어요. 밖으로 맴돌고 있어요. 한마디로 소신이 없어요.

거기에 대한 소신이...“아! 이거다!!”하는 소신이 없어요.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 모든 것입니다. 전부입니다.

전부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소신이 없어요.

확신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 이야기가 만약 특별히 얻을 것이 있으며 증득할 바가 있으면, 또한 도리어 옳지 못합니다. 그랬어요.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에서 더 이상은 없다는 겁니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비유를 들어서 동과 서를 잘못 알고 있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서쪽이 문득 동쪽이고 따로 동쪽이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 중생. 중생이라고 합시다.

저는 중생이라는 말을 잘 안 쓰지만...

“사람”이라는 말을 씁니다. 왜냐? 중생의 의식이 부처의 의식인데, 중생의식 따로 놔두고 부처의식이 따로 없거든요.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람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사람의식일 뿐입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하는 것  뿐이라고요.

불교를 제대로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그 문제가 지금 제일 큰 과제인데, 그것을 여기서 짚어나가는 것입니다.

잘 한 번 심사숙고 해보시기 바랍니다.

좀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잠깐 질문 받겠습니다.

  - 계속-

'서장(書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장대강좌15/무비스님  (0) 2007.10.17
서장/대강좌14/무비스님  (0) 2007.09.21
서장/대강좌12/무비스님  (0) 2007.09.21
서장/대강좌11/무비스님  (0) 2007.09.14
서장/대강좌10/무비스님  (0) 2007.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