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11/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14. 17:20
 

 

무비스님 서장 대강좌 제 3-2 강

 

지난 시간에 증시랑이라는 분의 편지를다 끝내지 못했는데 53쪽.

이것은 정성의 문제입니다.

精誠(정성). 정성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지요.

誠연구단체라는 것도 있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일에든지 정성을 다하는 것보다 더 값진 일은 없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정성을 다하는 것! 무엇을 하던지 정성을 다하는 것이 참 중요하지요.

그래서 저도 강의 하루하기 위해서 한 달 동안 정성을 들이고 올라옵니다.

그냥 올라오지 않습니다.

 

받아 보니,당신이 편지를 보낼 때에 모든 성인을 위하여 향을 사르고, 멀리 암자 쪽으로 예배를 했다고 하였습니다.

참 좋은 자세지요?

그대의 정성스런 마음이 지극히 간절합니다.

이것이 정성이 아니면 성인들에게 향을 사르고, 예배를 하고 북쪽에 대혜스님이 계신다면 북쪽을 향해서 향을 사르고, 예배를 하고...

우리가 객지에 살 때, 정월 초하루 되면 부모가 계신 곳을 향해서 절을 한다든지, 또 스승 계신 곳을 향해서, 세배를 못 가면 그 쪽을 향해서 예배를 한다든지, 또 우리가 북 쪽을 향해서 세배를 올리는 사례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정성이지요.

 

서로 떨어진 거리가 비록 많이 멀지는 않지만 만나서 말하지 못했으므로 뜻 따라 손 따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지럽게 쓰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편지가 좀 길어졌으니까요.

뜻 따라 손 따라 내 마음 가는 데로 손 가는 데로 한껏 썼다는 말입니다.

당신 정성이 그렇게 지극하니까 난들 그냥 있을 수 있나?

비록 번거로우나 또한 성의와 지극한 마음에서 나와서 한 마디의 말과 한 글자도 서로 속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대를 속인다면 이것은 제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나도 진실을 쏟아서 이렇게 답을 보낸다는 말입니다.

또 기억해 보니 선재동자 이야기가 전번에 나왔지요?

 

선재동자가 적정바라문(寂靜婆羅門)을 만나고 성어해탈(誠語解脫)을 얻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보살이 아뇩보리(阿褥菩提)에서, 과거에도 이미 물러남이 없었고, 현재에도 물러남이 없으며, 미래에도 물러나지 않아서, 구하는 것을 이루지 않음이 없었던 것은 다 성실함이 지극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정성 문제를 대혜스님께서 말씀하다 보니까 앞에서 화엄경의 선재동자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또 기억이 나서, 편지를 써 내려가다가 화엄경에 성실함.

정성의 지극함 때문에 이 최적정바라문이성어해탈을 얻게 된 사례를 여기서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지요.

정성 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요.

 

당신이 이미 대나무 의자와 포단으로 친구를 삼는다고 하니,

이것은 좌선입니다.

좌선할 때 절에서는 좌복이라고 합니다.

세속에서는 방석이지요.

방석 위에 앉아서 좌선하는 것으로서 친구를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화엄경에다 배대를 해보면 선재동자가 최적정바라문(最寂靜婆羅門)을 만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선재동자가 최적정바라문을 만났으면 이제는 공부는 떼 논 당상이다 이겁니다. 당신이 그 정도로 열심히 좌선을 한다면 깨닫는 것은 떼 논 당상이다.

염려할 것 없다 이것이지요.

 

또 운문(雲門)에게 편지를 보낼 때 모든 성인을 대하고 멀리서 예배 한 뒤에 보낸 것은 다만 저를 믿은 것이니, 이것은 정성이 매우 지극한 것입니다.

다만 자세히 들으십시오.

다만 이 같이 공부를 해 가면아뇩보리(阿褥菩提)를 틀림없이 원만(圓滿)히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증시랑에게 보낸 편지.

이것은 증시랑에게 당신이 그렇게 정성을 보냈고, 나도 정성을 표현 했습니다는 말만 했지만, 속뜻은 앞으로 계속 문제해결의 열쇠는 정성을 들이는데 있습니다.

이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됩니다.

  유인물에서 화두의 비밀과 화두의 모든 열쇠.

그야말로 和盤托出(화반탁출) 해서 다 드러냈지만, 여기에 우리의 마음이 담기지 않고, 정성이 담기지 않는다면 그렇게 친절하게 가르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요는 정성이지요.

그만치 우리가 마음을 담고 정성을 담았을 때, 그것이 내 살림살이가 되고, 내 인생이 되고, 내 공부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증시랑에게 답함

  이분하고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어요.

이것은 발심한 것을 찬탄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당신은 부귀하되 부귀에 굴복 당하지 않았으니, 전생에 반야의 種智(종지)를 심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에 혹시 큰 그룹 회장님 안 계시죠?

제가 보기에 없는 것 같아요.

아니면 장 차관도 없지요? 있어요?

장 차관이나 큰 그룹 회장쯤 되면, 전부 거기에 굴복 당해서...

설령 과거에 그렇게 살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항상 相(상)으로 남아있고, 그것이 자기의 我相(아상)으로 남아있어서 더 이상 발전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 聖人(성인)들의 최고의 가르침! 인생 최고의 지침서인 이런 서장 같은 것. 참선 공부 같은 것에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어요.

그런 마음을 내지를 않습니다. 세상에서 뭐 좀 했다는 아상이 있어서...

사업 좀 어쩌다가 잘 되어서...

혹 재수 있거나 줄을 잘 타서 돈 좀 벌었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아상이 꽉차버려요.

 

  여기 이 분은 시랑벼슬. 대단한 벼슬인데요.

그야말로 부귀하되 부귀에 굴복 당하지 않고, 벼슬을 했고 부귀를 했는데, 거기에 굴복 당한다고 표현했어요.

거기에 도취해서 살아가는 그것은, 자신은 도취해서 자랑스럽게 살지만, 聖人이 보기에는 굴복당한 것입니다.

그것이 從(종) 이 된 것입니다.

노예가 된 것입니다.

한 번 그렇게 회장이 되고, 한 번 그렇게 장 차관이 되면 그 다음 부터는 노예가 돼버립니다.

‘내가 장관 이었는데...’

‘내가 과거에 뭐였는데...’하고서 그것이 굴복당하고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슴깊이 새겨야할 표현입니까?

굴복당한 것입니다.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 주인이 되어서 그 알량한 돈이나 재산이나 벼슬에 굴복 당해서 자기 인생을 거기에 내동댕이친다면 말이 아니지요.

인생에 눈을 뜬 사람은 그렇게 굴복 당하는 것이 아니지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칭찬하는 것입니다.

발심을 찬탄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전생에 반야의 種智를 심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그렇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시간을 갖는 것이 반야의 種智를 심는 일이 되겠지요.

다만 중간에 이 뜻을 잊어버리고 예리한 聰明(총명)의 장애를 받아 얻을 것이 있다는 마음이 앞에 문득 가로 놓이게 됐습니다.

이것이 문제라면 문제라는 것입니다.

 

聰明과 有所得心(유소득심)은 病(병)입니다.

뭔가 얻을 것이 있다는 그것이 병이 돼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머리가 영리했으니까 그 총명한 머리로 이래저래 계산하고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반야심경 외웠지만, 반야심경의 핵심은 무소득입니다 무소득.

얻을 바 없다는 以無所得(이무소득).

그래서 삼세제불이 이무소득. 무소득 때문에 삼세제불은 이렇게 했고, 또 무소득 때문에 보리살타는 이렇게 했다고 해서 무소득이 중심에 딱 있고, 양쪽으로 부처와 보살이 어떻게 어떻게 됐다고 반야심경을 도표로 그리면 딱 중심에 이무소득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출발을 하니까 그것이 문제라고 그랬습니다.

 

그 때문에 바로 끊어버리는, 빠르고 중요한 고인의 가르침의에 따라 한 칼에 두 동강을 내어서 곧 쉬지 못할까 염려합니다.

그러니까 이 분의 편지를 딱 보고, 감정을 해보니까 바로 이 분의 병과 염려스러운 점이 이 점이더라 이것이지요.

이 病은 賢士大夫(현사대부)뿐만이 아니라 오래된 스님들도 또한 그러하여,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스님들도, 전문적으로 공부 한다는 스님들도 대개 그런 병에 사로잡혀 있더라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힘을 더는 곳에 나아가 공부하지 않습니다.

힘을 더는 곳이 힘을 얻는 것이고, 힘을 얻는 것이란 바로 힘이 덜리는 것이다. 省力處(생력처)가 得力處(득력처)이고, 得力處가 省力處라는 말이 서장에 자주 나옵니다.

“힘을 얻었다.”하면 힘이 덜 들지요.

운전 처음 배울 때 그렇지요.

처음에는 힘이 잔뜩 들다가 나중에는 옆에 다 살피면서 곧잘 갑니다.

그것이 힘을 얻어서 그런 겁니다. 힘이 덜 드는 겁니다. 공부에도 그래요.

공부도 처음에는 좀 힘이 들지요. 좀 하다보면 힘이 덜 들어요. 힘이 덜 든다는 것은 힘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힘을 얻었다는 것은 따로 근육이 생기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불교공부는... 힘이 덜 들어요. 쉽게 돼요.

더운 날씨이지만, 이런 곳에 오는 것도 자꾸 “간다.”는 마음을 한 번 딱 작정을 해버리면, 오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아이고, 그 더운데 어떻게 가느냐?”고, “얼마나 힘 드느냐?”고, 힘 안 든다고요. 쉽게 와져요. 그것이 득력입니다.

벌써 힘을 얻었기 때문에 힘을 안 들이고 오는 겁니다.

 

다만 총명과 의식, 계교와 사량으로 밖을 향해 달려가 구하며, 선지식이 총명과 의식 계교와 사량하는 밖을 향하여 本分(본분)의 糧食(양식)을 언뜻 듣고는 本分의 양식. 이겁니다.

本分의 양식을 언뜻 듣고는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불법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황벽스님이 몽둥이로 후려쳤어요.

이것이 本分의 糧食입니다.

본분이 우리 心體(심체)예요.

심체의 양식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장경도 양식이지만, 꽃을 들어 보인 것이 진짜 본분의 양식입니다.

이런 것이 진짜 좋은 양식이라고요.

그것하나 잘 먹으면 다른 것 안 먹어도 됩니다.

그것을 제대로 소화를 못하니까 우리가 팔만장경을 다 뒤져도 배가 고픈 겁니다. 허기진다고요.

그런데 부처님이 꽃 든 것.

그것을 하나 잘 소화 해버리면 그 다음에 안 먹어도 돼요.

평생 안 먹어도 됩니다. 세세생생 안 먹어도 된다고요. 아시겠지요?

이제 뭔가, 이 선불교가 그림이 어렴풋이 그려지죠?

 

양식을 언뜻 듣고는 많은 사람들이 대면하고서도 어긋나 지나칩니다.

‘부처님이 저 꽃을 처음 봤는가?’

‘부처님이 저 꽃을 왜 들었는가?’

‘우리 구경시켜주려고 들었는가?’

이런 식으로 버리는 겁니다.

꽃을 들어 보인 것은 그야말로 우리 본분의 양식인데요.

그것을 덥석 먹고 소화를 해버려야 되는데 ‘부처님이 꽃을 왜 들었는가?’이렇게 어긋나 지나치고 마는 것이지요.

 

옛 부터 고덕(古德)이 실법(實法)을 사람에게 준다고 하니, 실다운 법. 사실은 무소득이잖아요.

반야심경만 해도 무소득인데 이 선불교는요.

반야심경보다 한참 높아요.

한참 높은 것이 선불교입니다.

반야심경도 무소득인데 선불교야 말할 것도 없지요.

 

  실법을 사람에게 준다고 하니 조주의 방하착(放下着)과 운문의 수미산(須彌山)의 류가 이것입니다.

이것도 본분의 양식입니다.

진실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

런데 그것을 덥석 먹고 소화를 해야 되는데 ‘수미산?’ ‘방하착?’ ‘왜 수미산이라고 했는가?’ ‘왜 방하착이라고 했는가?’ 이렇게 해서...

안 되면 할 수가 없지요.

그렇게라도 해야지요. 

렇게라도 해야지요. 안 되면...

그렇게라도 하느라고 이 더운 여름에 용맹정진.

지금 한창 용맹정진의 피치를 올리고 있습니다.

안 되면 그렇게 해야지요.

그것이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것이 좋은 방편이라고요.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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