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6 계행이 청정해야 명성을 얻는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6:43
06 계행이 청정해야 명성을 얻는다 오조 법연(五祖法演)스님 / ?∼1104 
 

 1. 요즈음 총림에서 도를 배우는 인재들이 명성을 드날리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계행〔梵行〕이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됨은 진실하고 바르지 못하면서 구차하게도 명예·이익·음식을 구하려고 화려한 겉치레만 벌여놓다가 마침내는 식자(識者)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므로 도를 덮어버린 상태에서는 부처님이나 조사와 같은 도덕을 가졌다 해도 듣고 보는 사람들이 의심하며 믿어주질 않게 된다. 그대들이 뒷날 초암(草庵)을 짓고 살거든 이 점을 힘쓰도록 하라. 『여불감불과서(與佛鑑佛果書)』

2. 스승 방회(方會:996∼1049)스님께서 처음 양기산(楊岐山)에 머무실 때, 집이 낡아 서까래가 무너져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다. 그런데다가 마침 늦겨울이라 싸락눈이 침상에 가득하여 편안히 거처하질 못하였다. 납자들이 정성껏 수리하겠다고 하였으나 스승께서는 물리치며 말씀하셨다. 
"우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감겁(減劫:복과 수명이 줄어드는 시기)에는 높은 언덕 깊은 골이 모두 뒤바뀌어 항상하지 않으리라'하셨으니, 어떻게 뜻대로 다 만족하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출가하여 도를 배우느라 손발이 편안치 못한 채 이미 사오십의 나이가 되어버렸다. 어쩌자고 공부는 등한히 하면서 집짓는 일에 더 신경을 쓰느냐." 하며 끝내 따르지 않으시고, 다음날 법당에 올라 노래로 말씀하셨다.

내 잠시 머무는 집 담벽은 헐어
침상 가득 흩뿌려진 진주빛 눈발
움츠러든 목을 하고 가만히 탄식하노라
나무 밑에 살았던 옛사람을 되새기자고
楊岐乍住屋壁疎 滿牀盡撒雪珍珠
縮却項暗嗟 蒜憶古人樹下居 『광록(廣錄)』

3. 납자는 마음의 성(城)을 지키고 계율을 받들되 밤낮으로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어떠한 실천도 사려를 벗어나지 않고, 어떠한 사려도 실천을 넘어서는 안되니, 시작에서 끝맺음까지를 농부의 밭두덕처럼 분명하게 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탄연집(坦然集)]

4. 이른바 총림이란 성인과 범부들이 도를 닦으며 인재를 길러내는 곳으로서 교화가 여기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무리짓고 모여 산다 해도 통솔하여 다스리는 데에는 각각 자기 스승을 계승해 왔다. 그런데 요즈음 몇몇 총림에서는 옛성인의 법도를 지키는 데는 힘쓰지 않고, 좋고 싫은 치우친 감정으로 대부분 주관적인 척도를 가지고 상대를 뜯어고치려 하니, 후배들에게 무엇을 본받게 하려는가.[탄연집(坦然集)]

5. 중생을 이롭게 하고 도를 전수하는 데는 적임자를 얻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나 사람을 알아보기란 성현도 어렵게 여겼던 일이다. 말만 듣고는 행실을 보증하지 못하며, 행동만 구한다면 재능을 빠뜨릴까 염려스럽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사귀어 상대방의 모든 것을 자세하게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그 목표와 실천, 도량과 재능을 잘 관찰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도를 지켜 홀로 있을 땐 간직하고, 행세할 땐 펴는 자인 줄 알아볼 수 있다. 또한 명예를 팔고 외모나 꾸미는 자도 그 거짓이 용납되지 않게 되니, 비록 몰래 한다 해도 그 내막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세히 살피고 주의깊게 듣는 일은 원래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남악 회양(南嶽懷讓:754∼815)스님은 6조 대감(六祖大監)스님을 뵙고 나서도 15년이나 잡일을 했으며, 마조(馬祖:709∼788)스님도 남악스님을 10여 년이나 모셨던 것이다. 옛 성인들이 도를 전수하고 받는 일은 실로 천박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로써 알 수 있다.
마치 이 그릇의 물을 저 그릇에 쏟아붓듯 해야 비로소 큰 법을 감당해서 계승할 수 있다. 
이를 세속일로 치자면 가문을 감당할 만한 덕 있는 자손을 뽑아 조상의 유풍을 기리고, 농가에서 파종할 때 땅의 상태를 살피는 격이다. 이것이 자세히 살피고 주의깊게 듣는 이치의 분명한 사례이다. 어떻게 교묘한 말과 좋은 얼굴빛, 편벽된 아첨으로써 선발되었겠는가. 『원오서(圓悟書)』

6. 주지(住持)의 요점은 은혜와 덕 두 가지를 겸비하는 데 있으니, 이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안된다. 은혜롭기만 하고 덕이 없으면 대중이 공경하지 않고, 덕스럽기만 하고 은혜가 없으면 대중이 그리워하질 않는다.
은혜로운 이를 대중이 생각해 준다는 것을 알고 여기에 덕을 보충한다면 베푸는 은혜가 상하를 편안하게 하고 사방에서 오는 납자를 이끌어 줄 만하다. 덕 있는 이를 공경할 만하다
는 것을 알고 거기에 은혜를 보태면 지닌 덕이 선각(先覺)을 계승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지도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훌륭한 주지는 덕을 기름으로써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베품으로써 덕을 지닌다. 
덕스러우면서도 은혜를 기를 수 있으면 굴욕스럽지 않고, 은혜로우면서도 덕을 실천하면 은택(恩澤)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덕과 은혜가 함께 쌓여가며 맞물려 시행되는 것이다.
이쯤되면 굳이 덕을 닦지 않아도 불조와 같은 공경을 받고, 은혜를 수고롭게 허비하지 않아도 대중이 부모 그리워하듯 한다. 그러므로 도를 깨닫고자 하는 수행자라면 누구라서 이런 사람에게 귀의하지 않겠는가? 도덕을 전수하고 교화를 일으키려는 주지라면 이러한 요점에 밝지 못하고서는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여불안서(與佛眼書)』

7. 법연스님이 해회(海會)로부터 동산(東山)으로 옮겨가자, 태평 불감(太平佛鑑:1059∼1117)스님과 용문 불안(龍門佛眼:1067∼1120) 스님이 산마루에 나아가 살피고 맞이하였다. 법연스님은 나이가 지긋한 주사(主事)들을 모이라 하고 차와 과일을 준비하여 밤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법연스님이 불감스님에게 물었다.
"서주(舒州)고을은 풍년이 들었느냐?"
"풍년입니다."
"태평주(太平州)도 풍년이냐?"
"그렇습니다."
"그밖의 다른 농지에서는 벼를 어느 정도 수확하였느냐?"
불감스님이 잠시 생각해 보고 대답하려고 머뭇거리자 법연스님은 정색을 하며 엄한 목소리
로 꾸짖었다.
"그대들은 외람되게도 한 절의 소임을 맡고 있다. 그러니 큰 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마음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해마다 소용되는 상주물(常住物)을 계획함은 전 대중이 걸린 문
제인데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나머지 세세한 일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산문에서 일 
맡은 이라면 인과(因果) 알기를 우리 스승(양기스님)께서 자명(慈明:985∼1039) 노스님을 보
좌하셨듯 해야 할 것이다. 그대들은 상주물이 산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느냐?"
법연스님은 평소에 말과 행동이 엄격하고 날카로왔으므로 불감스님이 제자의 예(禮)를 깍
듯이 한다고 너그럽게 대하였는데도 이 정도였던 것이다. 옛사람도 `스승이 엄해야 배우는 
도가 높아진다'라고 하였다. 동산 문하에 고매한 도와 인격을 지닌 법손들이 많았던 이유는 
실로 근원이 깊어 지류도 길었기 때문이라 하겠다.[경룡학여고암서(耿龍學與高庵書)]

8. 법연스님은 제대로 해나갈 만큼 절개와 의리를 가진 납자에게는 방안에서도 엄하게 거절하
며 말과 얼굴빛을 보내지 않았다. 한편 편협하여 삿되게 아첨하고, 하는 짓이 외람되고 좀스
러워 가르치지 못할 자를 더욱 애지중지하였으니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 아, 
스님의 처신에는 반드시 도가 있었으리라.

9. 옛사람은 자기 허물 지적받기를 좋아하고, 덕담을 들으면 기뻐했다. 또한 관대하게 포용하
기를 잘 했고, 남의 단점을 보아주는 데 너그러웠다. 겸손하게 친구와 사귀고 부지런히 대중
을 구제하며 이해관계로 변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 빛이 찬란하게 고금을 비추는 것
이다. 『답영원서(答靈源書)』

10. 법연스님이 불감스님에게 말하였다.
"주지의 요점은 대중에게는 넉넉하게 하고 자기 처신은 간소하게 하는 데 있다. 그 나머지 
자잘한 일은 그리 신경쓸 것 없다.
매우 정성을 들여 사람을 채용하고, 정중한 쪽으로 말을 가려 쓰도록 주의해야 한다. 말이 
정중하게 보이면 주지는 자연히 존대받고, 대중에게 정성을 쏟으면 대중이 저절로 감동한다. 
주지가 존대받으면 근엄하지 않아도 대중이 복종하고, 대중이 감동하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
이 저절로 된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훌륭한 사람, 어리석은 자가 각각 속마음을 털어놓고 
크고 작은 일에 모두가 자기 힘을 분발하게 된다. 그러니 세력을 가지고 협박과 공갈로 몰
아부쳐서 어쩔 수 없어 따르게 하는 것과 어찌 만배 차이뿐이겠는가." 『견섬시자일록(見蟾
侍者日錄)』

11. 법연스님이 정공 거사(淨空居君) 곽공보(郭功輔)에게 말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원래 일정하게 지키지 않으면 외물에 따라 날로 변한다. 예로부터 불법이 
융성하고 쇠퇴하는 데는 운수탓도 있긴 하나, 흥하고 쇠하는 이치는 다 교화에 달려 있다.
옛날 강서(江西) 남악(南嶽)의 모든 스님께서 중생을 이롭게 할 때, 맑은 도풍으로 일으키
고 청정으로 절제하였으며, 도덕을 베풀고 예의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납자로 하여금 보고 
듣는 것을 가려 사벽(邪僻)을 막으며, 정욕〔嗜慾〕과 물욕〔利養〕을 다 끊게 하였다. 때문
에 날마다 선을 실천하고 허물을 멀리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도덕이 완전해졌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은 옛사람보다 훨씬 못하다. 기어코 이 불도를 참구하고자 한다면 모름
지기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깨닫고야 말겠다는 뜻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그런 뒤에 재앙이
나 잘잘못은 하늘에 맡기고 구차하게 면하려 해서는 안된다. 안되리라고 미리 근심하여 해
보지도 않아서야 되겠는가. 털끝만큼이라도 주저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가슴 속에 싹텄다 하
면 금생에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천생만겁을 지낸다 할지라도 성취될 날이 없을 것이다." 
『탄연암집(坦然庵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