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5 대중을 받드는 요점을 말하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6:42
05  대중을 받드는 요점을 말하다  법원 녹공(法遠錄公)스님 / 1990∼1067 
 

 1. 옛사람은 스승을 가까이 모시고 벗을 골라 사귀며 밤낮으로 감히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부엌에서 밥 짓고 절구질하며 남 몰래 천한 일을 하는 고생까지도 꺼려하지 않았다. 나도 섭현(葉縣)에 있으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다 해본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한 번이라도 이해관계를 따지고 잘잘못을 비교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배반하느냐 의지하느냐에 있어서 구차한 태도로 편안함을 구하느라 못할 짓이 없었을 것이다. 우선 자기 처신이 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도를 배울 수 있겠는가. 『악시자법어(岳侍者法語)』

2. 천지만물은 모두 쉽게 태어난다. 그러나 가령 하루를 따뜻하게 해주고 열흘을 차갑게 한다면 살아날 수 있는 생물은 없을 것이다.
위 없는 오묘한 도는 밝고 밝아 아주 가까이에 있으므로 보기 어렵지 않다. 요컨대 뜻을 굳게 세우고 힘써 실천한다면 그 자리에서 완성을 기대해 볼 만하다. 그러나 혹 하루 믿다가 열흘 의심하며, 아침에는 부지런을 떨다가 저녁에는 꺼려한다면 어찌 유독 목전의 것만 보기 어렵겠는가. 목숨이 끝날 때까지 도를 등질까 염려스럽다. 『운수좌서(雲首座書)』

3. 주지(住持)하는 요령에는 취사(取捨)를 살핌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판단함은 마음 속에서 결정되고, 안위(安危)의 싹은 바깥 환경에서 판정된다. 그러나 편안함이나 위태로움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점진적으로 쌓여서 되는 것이므로 반드시 살펴야 한다.
도덕과 예의로 주지를 하면 도덕과 예의가 쌓이고, 각박함으로 주지를 하면 원한이 쌓이게 된다. 원한이 쌓이면 권속과 사부대중이 등지고 떠나며, 예의와 도덕이 쌓이면 안팎이 기뻐하며 감복한다. 그러므로 도덕과 예의가 대중에게 두루 미치면 권속과 사부대중이 기뻐하고, 각박함과 원한이 극에 이르면 안팎이 슬퍼하니 슬픔과 기쁨에 따라 재앙과 복이 내려진다.[여정인진화상서(與淨因臻和尙書)]

4. 주지하는 데는 세 가지 요령이 있으니, 어짐〔仁〕·총명함〔明〕·용기〔勇〕이다. 어진 자는 도덕을 행하여 교화를 일으키고 상하를 편안하게 하여 오가는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총명한 사람은 예의를 지키고 안위(安危)를 식별하며 훌륭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살피고 시비를 분별한다. 용기있는 사람은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고, 한번 했으면 의심치 않으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이를 반드시 제거한다.
어질기만 하고 총명하지 못하면 마치 밭이 있어도 갈지 않는 것과 같고, 총명하기만 하고 용기가 없으면 싹은 자랐으나 김을 매주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용기만 있고 어질지 못하면 거둬들이는 것만 알 뿐 파종할 줄은 모르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를 다 갖추면 총림이 일어나고 하나가 모자라면 기울 것이며, 두 가지가 부족하면 위태롭고, 셋 중에 하나도 없으면 주지의 도는 폐지될 것이다. 『여정인진화상서(與淨因臻和尙書)』

5.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훌륭함과 어질지 못함은 마치 물과 불이 한 그릇에 섞이지 못하며 추위와 더위가 동시일 수 없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대체로 타고난 분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인재는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단정하고 도타와 도덕과 인의만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모든 언행에 있어서 혹 대중의 뜻에 부합되지 못할까, 또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지 못할까를 염려할 뿐이다. 한편 어질지 못한 사람은 간사·음험·속임수·아첨으로 자기를 뽐내고 능력을 과시하며, 오욕에 빠져 이익에 구차하면서 아무것도 되돌아볼 줄 모른다.
그러므로 선림(禪林)에서 훌륭한 사람을 얻으면 도덕이 닦이고 기강이 확립되어 드디어는 법석(法席)을 이루지만, 그 사이에 하나라도 어질지 못한 자가 끼어들어 대중들을 교란시키면 안팎이 편안하지 못할 것이니, 큰 지혜와 예의법도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혜와 어리석음, 훌륭함과 어질지 못함의 우열이 이러하니 어떻게 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혜력방화상서(惠力芳和尙書)』

6. 웃사람인 주지는 겸손하게 아랫사람을 이끌어주며, 일 맡은 아랫사람은 마음을 다해 웃사람을 받들어야 하리니, 위아래가 화목하면 주지의 도가 통한다. 웃사람이 교만하게 높은 체하면 아랫사람은 태만하여 자연히 소원해지리니, 위아래가 마음이 통하지 못하면 주지의 도는 막히게 된다.
고덕(古德)들은 주지하는 중에 한가하여 일이 없으면 납자들과 부드럽게 극진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때 하신 일언반구까지도 전기(傳記)에 실려 지금까지도 읽혀진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는 웃사람의 마음이 아랫사람에게 통하게 하고자 하여 도가 막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납자들의 재능과 품성이 어떠한지를 미리 알아 모두 도리에 맞게 진퇴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상하가 화목하고도 엄숙해져서 먼 곳 가까운 곳 모두가 존경하니 총림이 잘 되는 이유가 여기에 달렸을 뿐이다. 『여청화엄서(與靑華嚴書)』

7. 법원스님이 도오사(道吾寺) 가진(可眞)스님에게 말하였다.
"배움이 아직 도에 이르지 못하였는데도 자기의 견문을 자랑하고 궁극의 도리를 깨달았노라고 과장하면서 말재주를 가지고 잘났다고 떠드는 자는 마치 더러운 변소간에 단청을 바른 것처럼 악취만 더할 뿐이다." 『서호기문(西湖記聞)』

8. 법원스님이 수좌 오조 법연(五祖法演:?∼1104) 스님에게 말하였다.
"마음은 한 몸의 주인이며 만행의 근본이다. 마음을 오묘하게 깨닫지 못하면 허망한 생각이 스스로 생기고, 허망한 생각이 스스로 생기고 나면 이치를 보아도 분명치 못하며, 이치를 보아도 분명치 못하면 시비가 요란하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스리자면 반드시 오묘한 깨달음을 구해야 한다.
오묘하게 깨닫고 나면 정신은 여유롭고 혈기는 안정되며, 태도와 용모는 공경스러우면서도 씩씩하여 망상이 모두 녹아서 진심(眞心)이 된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다스려가면 마음은 스스로 영묘(靈妙)해진다. 그런 뒤에 상대방을 인도하고 미혹함을 지적한다면 누구라서 교화되지 않겠는가." 『부산실록(浮山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