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1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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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 1 권
  
   미륵보살(彌勒菩薩) 지음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강명희 번역
  
  
1. 본지분(本地分)
  1)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
  
  무엇을1) 유가사지(瑜伽師地)2)라고 하는가?
  
1) 이하는 17지(地)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설하는 부분이다.
2) 유가(瑜伽)의 원어는 산스크리트의 남성 명사로서 Yoga이며, 여성명사로 표현하면 유기(瑜祇 : Yog )라고 한다. 한역으로 상응(相應)이라고 번역한다. 『유가사지론석(瑜伽師地論釋)』에서는 "일체승(一切乘)의 경행과(境行果) 등의 일체 모든 제 온(蘊)을 모두 유가라고 이름한다. 일체가 모두 방편선교(方便善巧)와 상응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유가사지론석(瑜伽師地論釋)』에서는 네 가지의 유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경유가(境瑜伽) - 일체의 경(境)은 무전도(無顚倒)의 성(性), 불상위(不相違)의 성(性), 능수순(能隨順)의 성(性), 구경취(究竟趣)의 성(性)으로서 올바르게 교리의 행과(行果)와 상응하기 때문에 경유가(境瑜伽)라고 한다. ② 행유가(行瑜伽) - 일체의 행(行)은 서로 상응하고, 정리(正理)로 지칭되고, 정교(正敎)에 수순하고, 정과(正果)로 나아가기 때문에 행유가(行瑜伽)라고 한다. ③ 과유가(果瑜伽) - 일체의 과(果)는 서로 수순(隨順)하고, 정리(正理)에 화합하고, 정교(正敎)에 수순하고, 정인(正因)으로 지칭되기 때문에 과유가(果瑜伽)라고 한다. ④ 교유가(敎瑜伽) - 일체삼승(一切三乘)의 성교(聖敎)는 정리(正理)로 지칭되고, 정행(正行)에 수순하고, 정과(正果)를 이끌어내기 때문에 교유가(敎瑜伽)라고 한다. 사(師)란 산스크리트어 c rya(;阿遮羅)의 한역으로 아차리(阿闍梨) 아차리아(阿遮梨耶) 등으로 음사되며, 궤범사(軌範師) 정행(正行) 교수(敎授) 등으로 의역된다. 유가사(瑜伽師)의 명칭에 대하여 『유가사지론석(瑜伽師地論釋)』에서는 두 가지로 풀이되는데,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3승(乘)의 행자(行者)가 문(聞) 사(思) 등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유가(瑜伽)를 익히고 행하며, 분(分)에 따라서 만족하고 전전(展轉)하여 모든 유정을 조화(調化)하기 때문에 유가사(瑜伽師)라고 한다. ② 모든 여래(如來)는 유가(瑜伽)를 완벽하게 증득하고,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이 유가(瑜伽)를 지니게 하며, 일체의 성제자(聖弟子) 등을 조화(調化)롭게 하여 그로 하여금 차제(次第)로 정행(正行)을 닦게 하기 때문에 유가사(瑜伽師)라고 한다. 지(地)란 산스크리트어 Bh mi의 의역(意譯)으로서 생성(生成)하여 머무른다[住持]는 뜻이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는 처음 5식신지(識身地)부터 마지막의 무여의지(無餘依地)에 이르기까지 범(梵)과 성(聖)의 인과(因果)를 모두 갖추고, 모두 함께 능히 생성하고 머무름[住持]이 지(地)와 비슷한 종류이므로 지(地)의 명칭을 따서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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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지(地)를 말한다.
  무엇 등을 17이라고 하는가?
  올타남(嗢拕南)3)에서 이르길
  
  오식상응(五識相應)4)과 의(意)와
  유심유사(有尋有伺) 등의 세 가지5)
  삼마지(三摩地)6)와 함께 함[俱]7)과 그렇지 않음[非]8)
  유심지(有心地)와 무심지(無心地)이며
  
3) 산스크리트어 Ud na의 한역(漢譯) 음사로서 집시(集施) 또는 자설(自說)이라고도 번역된다. 축약된 말로서 많은 법(法)의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게송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4) 5식(識)이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식(身識)을 말한다. 식(識)이란 체취(體聚)의 뜻으로서 5식 각각의 자체(自體)를 의미하며, 신(身)이란 5식을 한데 묶어서 하나[一聚]로 하기 때문에 신(身)이라고 하는 것이며, 상응이란 섭속(攝屬)의 뜻으로서 5식신(識身)에 포함되는 법을 설하기 때문에 5식신상응(識身相應)이라고 하는 것이며, 지(地)란 경계(境界)의 뜻으로서 5식신은 유가관행자(瑜伽觀行者)의 소행(所行)의 경계가 되므로 5식신상응지(識身相應地)라고 하는 것이다.
5)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 무심유사지(無尋唯伺地)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의 세 가지 지(地)를 의미한다.
6) 범어(梵語) Sam dhi의 음사어[音譯]로서 보통 등지(等持)라고 의역(意譯)된다. 이는 정(定)의 다른 이름으로서, 정(定)을 닦으면 마음이 한 경계에 머물러서 산란하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평등하게 마음을 유지하여 경계에 나아가기 때문에 한역(漢譯)에서는 등지(等持)라고 번역한 것이다.
7) 삼마희다지(三摩 多地)를 의미한다.
8) 비삼마희다지(非三摩 多地)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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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識相應意  有尋伺等三
  三摩地俱非  有心無心地
  
  문(聞)과 사(思)와 수(修)로 세워진 것9)
  이와 같이 삼승(三乘)10)
  유여의지(有餘依地)와 무여의지(無餘依地)를 갖춘 것이니
  이것을 17지(地)라고 하네.
  聞思修所立  如是具三乘
  有依及無依  是名十七地
  
  첫째는 5식신상응지(識身相應地), 둘째는 의지(意地), 셋째는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 넷째는 무심유사지(無尋唯伺地), 다섯째는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 여섯째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 일곱째는 비삼마히다지(非三摩 多地), 여덟째는 유심지(有心地), 아홉째는 무심지(無心地), 열째는 문소성지(聞所成地), 열 한째는 사소성지(思所成地), 열 둘째는 수소성지(修所成地), 열 셋째는 성문지(聲聞地), 열 넷째는 독각지(獨覺地), 열 다섯째는 보살지(菩薩地), 열 여섯째는 유여의지(有餘依地), 열 일곱째는 무여의지(無餘依地)이다. 이와 같이 열 일곱 가지를 간략히 설하여 유가사지(瑜伽師地)라고 한다.
  무엇을11) 5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라고 하는가?
  5식신(識身)의 자성(自性) 그것12)의 소의(所依) 그것의 소연(所緣) 그것의 조반(助伴)13) 그것의 작업(作業)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을 총괄하여 5식신상응지(識身相應地)라고 한다.
  무엇14) 등을 5식신(識身)이라고 하는가?
  
9) 문소성지(聞所成地) 사소성지(思所成地) 수소성지(修所成地)를 의미한다.
10) 성문지(聲聞地) 독각지(獨覺地) 보살지(菩薩地)를 의미한다.
11) 이하는 5식신지(識身地)에 대하여 종합적 해설을 하는 부분이다.
12) 5식신(識身)을 의미한다.
13) 범어 Sa yukta의 의역(意譯)으로서 도움을 주거나 부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14) 이하는 5식신지(識身地)의 하나 하나를 나누어 해설한다. 그 첫 번째로 안식(眼識)의 다섯 가지 상(相), 즉 자성(自性) 소의(所依) 소연(所緣) 조반(助伴) 작업(作業)에 대하여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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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이다.
  무엇을15) 안식(眼識)의 자성(自性)이라고 하는가?
  안[眼 : 眼根]을 의지하여 색(色)을 요별(了別)16)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17)의 소의(所依)란 구유의(俱有依)18)는 안근[眼 : 眼根]을 말하고, 등무간의(等無間依)19)는 의근[意 : 意根]을 말하고, 종자의(種子依)20)는 이것21)의 일체종자(一切種子)를 집수(執受)하는 소의(所依)로서 이숙(異熟)에 포함되는[所攝]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을 간략히 두 가지 소의(所依)로 설명하면 색(色)22)과 비색(非色)23)이다. 안근[眼;眼根]은 색(色)이며 나머지24)는 비색(非色)이다. 안[眼 :
  
15) 이하는 5식신지(識身地)에 대한 별석(別釋)이다.
16) 식(識)이 대상의 경계를 요지판별(了知辦別)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심왕(心王)의 인식작용을 의미한다.
17) 안식(眼識)을 가리킨다.
18) 소의(所依)에는 세 가지, 즉 구유의(俱有依) 등무간의(等無間依) 종자의(種子依)가 있다. 이 가운데에 구유의(俱有依)란 식(識)과 동시(同時)와 구시(俱時)에 있는 근(根)을 의미한다. 안식(眼識)이 일어나는 데에는 안근(眼根)인 생리적 기관을 소의(所依)로 하고 소의(所依)의 안근은 능의(能依)의 안식(眼識)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구유의(俱有依)라고 하는 것이다.
19) 첫 번째의 안식(眼識)이 현재 있을 때에는 두 번째의 안식은 현재에 생겨날 수가 없다. 현재 있는 첫 번째의 안식이 사라져야만 두 번째의 안식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첫 번째의 안식이 과거로 물러날 때 자신이 점하고 있는 현재의 위치를 두 번째의 안식에게 물려주고 이끌어 주는 작용을 등무간연(等無間緣)라고 하고, 의근(意根)이라고 이름한다. 그래서 소의(所依)의 등무간연인 첫 번째의 안식의 심 심소법(心心所法)과 두 번째의 심 심소법(心心所法)은 체(體)와 용(用)의 관계와 같아서 제 3의 심 심소(心心所)가 개입할 수가 없을 정도로 간격이 없기 때문에 등무간(等無間)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20) 종자(種子)란 제8식(第八識)에 섭장(攝藏)되어 있으며, 친히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의 현행(現行)을 생기게 하는 공능차별(功能差別)을 의미한다. 안식(眼識)이 생길 때에는 안식의 종자에 의지하게 되므로 종자의(種子依)라고 하는 것이다.
21) 안식(眼識)을 가리킨다.
22) 변애(變礙)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물질(物質)을 의미하나, 불전(佛典)에서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의 5근(根)과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의 5경(境) 및 무표색(無表色)을 합쳐서 색(色)이라고 통칭한다.
23) 색(色)과 반대되는 것으로 변애(變礙)의 작용이 없는 심(心) 심소법(心所法)을 비색(非色)이라고 한다.
24) 등무간의(等無間依)와 종자의(種子依)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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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眼根]은 4대종(大種)25)으로 만들어진 것[四大種所造]이며, 안식이 의지하게 되는[眼識所依] 정색(淨色)26)으로서 무견유대(無見有對)27)이다. 의근[意;意根]는 안식(眼識)과 계속 연결되어 있는[無間]28)의 과거식(過去識)을 말하며,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은 무시시래(無始時來)로 희론(戲論)29)을 즐겨 집착하여[樂著] 훈습(薰習)한 것이 원인[因]이 되어서 생기는 것[所生]으로서 일체종자(一切種子)의 이숙식(異熟識)을 말한다.
  그것30)의 소연(所緣)이란 색(色)으로서 유견유대(有見有對)31)를 말한다. 여기32)에 다시 여러 가지를 간략히 설명하면 현색(顯色)과 형색(形色)과 표
  
25) 일체의 물질(物質)을 능히 만들기 때문에 능조(能造)의 4대종(大種)이라고도 한다. 견성(堅性)을 능히 지니는 지대(地大)와 습성(濕性)을 능히 지니는 수대(水大)와 난성(煖性)을 능히 지니는 화대(火大)와 동성(動性)을 능히 장양(長養)하는 풍대(風大)를 4대(四大)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4대(大)는 물질이 생겨나는 것을 도와서 능히 만드는 인(因)이 되기 때문에 종(種)이라고 하며, 모든 물질을 두루 만들기 때문에 대(大)라고 한다.
26) 정(淨)이란 정명(淨明)의 뜻이며, 안근(眼根)은 정명(淨明)과 같은 주보(珠寶)의 빛과 같다. 또한 5근(根)은 5경(境)을 비추어 주는 영묘(靈妙)한 작용을 하기 때문에 정색(淨色)이라고 하는 것이다.
27) 견(見)은 나타나 보이는 시현(示現)의 뜻이며, 유견(有見)은 방소(方所)가 있어서 여기에 있다거나 저기에 있는 따위의 시현되는 대상의 법을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무견(無見)은 이와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對)는 장애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유대(有對)란 예를 들어 손과 손이 마주치거나 물건과 물건이 마주치면 서로 장애가 되어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와 같이 장애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무대(無對)는 이와 반대되는 것이다. 『본론(本論)』에서는 안근(眼根) 등의 오근(五根)은 육안(肉眼)이 미치지 않고 방소(方所)를 시현(示現)하지 않기 때문에, 무견(無見)라고 하고, 장애를 대하기 때문에 유대(有對)라고 한다.
28) 안식(眼識)과 계속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29) 제7식(第七識)의 유루분별심(有漏分別心)과 언어(言語)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분별심과 언어의 능훈습력(能熏習力)으로 인하여 제8식(第八識)에서 종자를 훈습(薰習)하는데, 이를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 하며, 이 종자의 잠재되어 있는 공능(功能)으로 인하여 뒤에 다시 제 온(蘊)이 생겨나올 수 있는 원인이 된다.
30) 안식(眼識)을 가리킨다.
31) 유견유대색(有見有對色)을 말하며, 12처(處) 18계(界)의 색처(色處)를 말한다. 이 때 유견유대(有見有對)라고 하는 것은 가히 볼 수 있는 것[可見]으로서 침입할 수 없는 성품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32) 유견유대(有見有對)의 색(色)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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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表色)의 세 가지가 있다. 현색(顯色)이란 푸르고[靑] 누렇고[黃] 붉고[赤] 희고[白] 빛[光] 그림자[影] 밝음[明] 어두움[闇] 구름[雲] 연기[煙] 티끌[塵] 안개[霧] 공일현색(空一顯色)33)을 말한다. 형색이란 길고[長] 짧고[短] 모나고[方] 둥글고[圓] 굵고[麤] 가늘고[細] 곧고[正] 곧지 않고[不正] 높고[高] 낮은[下] 색(色)을 말한다. 표색(表色)이란 취하고[取] 버리고[捨] 굽히고[屈] 펴고[伸] 가고[行] 머무르고[住] 앉고[坐] 눕는[臥] 이와 같은 등의 색(色)을 말한다.
  또한 현색이란 색이 완전히 드러났을 때에[顯了], 안식의 소행(所行)34)을 말한다. 형색이란 색이 모아졌을 때에[積集], 길고 짧은 것 등으로 갈라지는[分別] 상(相)을 말한다. 표색이란 이 모아진[積集] 색이 생멸상속(生滅相續)하고, 달라진[變異] 인(因)에 의하여 먼저 생긴 곳[先生處]에서 거듭 생기지 않고, 다른 곳[異處]에 전전하며 생기는 것인데, 무간(無間)35) 혹은 유간(有間)36) 혹은 가깝게 또는 멀게 차별이 생기는 것이며, 혹은 이 곳37)에서 달라져서[變異]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를 표색이라고 한다.
  또한 현색(顯色)이란 빛과 밝음 등의 차별(差別)을 말하고, 형색(形色)이란 길고 짧은 것 등으로 모아지는 것[積集]의 차별을 말하고, 표색(表色)이란 업의 작용[業用]38)을 의지로 하여 구르고 움직이는 것[轉動]의 차별을 말한다.
  이와 같은 모든 현색 형색 표색은 바로 안근[眼 : 眼根]의 소행이며 안근의 경계이며, 안식(眼識)의 소행(所行)이며 안식의 경계(境界)이며 안식의 소연(所緣)이며, 의식(意識)의 소행이고 의식의 경계이며 의식의 소연이다.
   이를 차별이라고 한다.
  
33) 맑은 하늘이 드러날 때에 하늘의 허공에 나타나는 유리색(瑠璃色)을 의미한다.
34) 안식(眼識)의 소행(所行)이란 심식(心識)이 여러 가지를 살피면서 유력(遊歷)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35) 무간(無間)이란 하나의 업(業)이 상속(相續)하여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36) 유간(有間)이란 사이에 끊어짐이 있는 것으로 곧 중도(中途)에 끊어졌다가 다음 번에는 다시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37) 이곳이란 먼저 생긴 곳을 의미한다.
38) 사업(思業)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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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이 색에는 다시 호현색(好顯色)39)과 악현색(惡顯色)40)과 구리현색(俱異顯色)41)의 세 가지가 있다. 색과 흡사하게 현현(顯現)42)한다.
  그것[眼識]의 조반(助伴)이란 그것과 함께 있으면서[俱有] 상응하는 여러 가지의 심소유법(心所有法)43), 즉 작의(作意)44) 촉(觸)45) 수(受)46) 상(想)47) 사(思)48)와 그 밖에 안식과 함께 있으면서[具有] 상응하는 여러 가지 심소유법들[心所有法]을 말한다. 또한 이 제 법(法)은 동일한 소연(所緣)이지만 동일한 행상(行相)이 아니며, 함께 있고[俱有] 상응하면서도 하나 하나49) 전전하며, 또한 그 일체는 각각 자기[自]의 종자(種子)로부터 생겨난다.
  그것[眼識]의 작업(作業)이란 여섯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오직 자신의 경계[自境]의 소연을 요별(了別)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첫 번째 업[初業]이라고 한다. 오직 자상(自相)만을 요별하고50), 오직 현재만을 요별하며51), 오직 한 찰나만을 요별한다52). 또 두 가지 업이 있다. 의식을 따라 구르
  
39) 겉으로 보기에 좋게 드러난 색을 말한다.
40) 겉으로 보기에 나쁘게 드러난 색을 말한다.
41) 호현색(好顯色)도 악현색(惡顯色)도 아닌 현색(顯色)을 의미한다.
42) 일체(一切)의 유위법(有爲法)은 중연소생(中椽所生)의 의타기성(依他起性)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색(色)과 흡사하게 현현한다고 한다.
43) 심(心), 즉 심왕(心王)의 부수적인 마음의 작용을 의미하며, 촉(觸) 작의(作意) 수(受)상(想) 사(思) 등은 심왕 소유의 권속(眷屬)이므로 심소유(心所有)라고 하며 간략하게 심소(心所)라고도 한다.
44) 5변행심소(遍行心所) 가운데에 하나로서 심(心)을 경각시켜서 대경(對境)에 나아가도록 하는 작용을 한다.
45) 5변행심소(遍行心所) 가운데에 하나로서 심(心) 심소(心所) 및 근(根)과 경(境)의 세 가지를 화합시켜서 적의(適意) 부적의(不適意) 적의도 부적의도 아닌 경[非適意非不適意境]을 취하는 작용을 한다.
46) 5변행심소(遍行心所) 가운데에 하나로 거스르고[違], 수순하며[順], 거스르지도 않고 수순하지도 않는 중간의 경계를 영납(領納)하여 고(苦) 낙(樂) 사(捨)를 아는 작용을 한다.
47) 5변행심소(五遍行心所) 가운데에 하나로서 경(境)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상(像)을 취하여 받아들이고 언어로 표현하여 대경(對境)을 명명(命名)하는 작용을 한다.
48) 5변행심소(遍行心所) 가운데에 하나로서 신(身) 어(語) 의(意)의 3업(業)의 작용을 하며, 업의 체(體)에 해당한다. 심리학(心理學)에서 말하는 의지(意志)에 상당(相當)한다.
49) 심소유법(心所有法)의 하나 하나를 말한다.
50) 여섯 가지 안식(眼識)의 작업(作業) 가운데에 두 번째의 작업을 말하는 내용이다.
51) 여섯 가지 안식의 작업 가운데에 세 번째의 작업을 말하는 내용이다.
52) 여섯 가지 안식의 작업 가운데에 네 번째의 작업을 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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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선(善) 염(染)53)에 따라 구르며, 일으킨 업[發業]에 따라 구른다54). 또한 능히 애(愛)와 비애(非愛)의 과(果)를 취하니, 이것이 여섯 번째 작업[業 : 作業]이다.
  무엇을55) 이식(耳識)의 자성(自性)이라고 하는가?
  이근[耳 : 耳根]에 의지하여 성(聲)을 요별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耳識]의 소의는 구유의(俱有依)는 이근이며, 등무간의(等無間依)는 의근[意 : 意根]이며, 종자의(種子依)는 일체종자의 아뢰야식이다.
  이근은 4대종으로 만들어진 것[四大種所造]이며, 이식이 의지하게 되는[耳識所依] 정색(淨色)으로서 무견유대(無見有對)이다. 의(意) 및 종자(種子)란 앞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그것[耳識]의 소연(所緣)은 성(聲)으로서 무견유대(無見有對)56)를 말한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소라고둥 소리 크고 작은 북 소리 춤 소리 노랫소리 여러 가지 음악 소리 울부짖는 소리[俳戲叫聲] 여자 소리 남자 소리 바람이 스치는 숲의 소리 명료한 소리 명료하지 않은 소리 뜻이 있는 소리 뜻이 없는 소리 상중하(上中下)의 소리 강하(江河) 등의 소리 투쟁하면서 떠드는 소리 수지(受持)하여 연설하는 소리 논의결택(論議決擇)하는 소리 등 이와 같은 종류의 많은 소리가 있다. 이를57) 세 가지로 간략히 하면, 즉 집수대종(執受大種)에 의한 소리58) 불집수대종(不執受大種)에 의한 소리59) 집수불집수대종(執受不執受大種)에 의한 소리60)이다. 처음
  
53) 선(善) 악(惡) 무기(無記)의 3성(性) 가운데에 선(善)과 악(惡)을 말한다.
54) 여섯 가지 안식의 작업 가운데에 다섯 번째의 작업을 말하는 내용이다.
55) 이하는 5식신지(識身地)의 하나 하나를 나누어 해설하는 것이다. 그 두 번째로 이식(耳識)의 다섯 가지 상(相), 즉 자성(自性) 소의(所依) 소연(所緣) 조반(助伴) 작업(作業)에 대하여 설명한다.
56) 무견유대성(無見有對聲)을 의미한다.
57) 앞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소리들을 말한다.
58) 집수(執受)는 신근(身根)의 각수(覺受)를 생기게 함을 의미하므로, 유정(有情)의 육체로부터 생겨나는 언어 박수 등의 소리를 집수대종(執受大種)을 인(因)으로 하는 소리라고 한다.
59) 불집수(不執受)는 각수(覺受)가 없는 것을 의미하므로 무감각의 4대종(大種)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자연의 여러 가지 소리를 불집수대종(不執受大種)을 인(因)으로 하는 소리라고 한다.
60) 손으로 북을 쳐서 나는 소리와 같이 유정물(有情物)과 무정물(無情物)이 만나서 소리를 집수불집수대종(執受不執受大種)을 인(因)으로 하는 소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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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61)은 오직 안[內]의 것을 연(緣)하는 소리이며, 다음 것62)은 밖[外]의 것을 연(緣)하는 소리이며, 마지막 것63)은 안팎[內外]의 것을 연(緣)하는 소리이다.
  여기에도 가의(可意)의 소리 불가의(不可意)의 소리 구상위(俱相違)의 소리64)의 세 가지가 있다. 또한 소리[聲]에는 즉, 울음 소리 말 울부짖음 드러내는 말 등의 차별적인 이름이 있다.
  이는 이근의 소행(所行)이며 이근의 경계이며, 이식(耳識)의 소연(所緣)이며 이식의 경계이며 이식의 소연이며, 의식의 소행이며 의식의 경계이며 의식의 소연이다.
  조반(助伴) 및 업은 안식의 경우와 같음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65) 비식(鼻識)의 자성이라 하는가?
  비근[鼻 : 鼻根]에 의지하여 향(香)을 요별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鼻識]의 소의(所依)는 구유의(俱有依)는 비근이며 등무간의(等無間依)는 의근[意 : 意根]이며 종자의(種子依)는 일체종자의 아뢰야식을 말한다. 비근은 4대종으로 만들어 진 것[四大種所造]이며, 비식이 의지하게 되는[鼻識所依] 정색(淨色)으로서 무견유대(無見有對)이다. 의(意) 및 종자(種子)는 앞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그것[鼻識]의 소연이란 향(香)으로서 무견유대(無見有對)66)를 말한다. 여기에도 즉 호향(好香) 악향(惡香) 평등향(平等香)67)의 여러 가지가 있으
  
61) 집수대종(執受大種)에 의한 소리를 말한다.
62) 불집수대종(不執受大種)에 의한 소리를 말한다.
63) 집수불집수대종(執受不執受大種)에 의한 소리를 말한다.
64) 구상위(俱相違)란 듣기 좋은 가의(可意)의 소리도 아니고, 듣기 나쁜 불가의(不可意)도 아닌 불고불락(不苦不樂)의 무기(無記)의 소리를 의미한다.
65) 이하는 5식신지(識身地)의 하나 하나를 나누어 해설하는 가운데에, 그 세 번째로 비식(鼻識)의 다섯 가지 상(相), 즉 자성(自性) 소의(所依) 소연(所緣) 조반(助伴) 작업(作業)에 대하여 설명한다.
66) 무견유대향(無見有對香)을 의미한다.
67) 호향(好香)도 악향(惡香)도 아닌 향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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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냄새맡아서 알게 되는 뿌리 줄기 꽃 잎사귀 과실의 향, 이런 등등의 많은 종류의 여러 가지 향(香)이 있다.
  또한 냄새[香]란 이른바 코로 맡는 것[鼻所聞]과 코로 취하는 것[鼻所取]과 코로 냄새맡는 것[鼻所嗅] 등의 차별적인 이름이 있다.
  이것은 비근의 소행이며 비근의 경계이며, 비식(鼻識)의 소행이며 비식의 경계이며 비식의 소연이며, 의식의 소행이며 의식의 경계이며 의식의 소연이다.
  조반(助伴) 및 업(業)은 앞의 경우와 같음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68) 설식(舌識)의 자성(自性)이라고 하는가?
  설근[舌 : 舌根]에 의지하여 미(味)를 요별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舌識]의 소의(所依)는 구유의(俱有依)는 설근이며 등무간의(等無間依)는 의근[意 : 意根]이며 종자의(種子依)는 일체종자의 아뢰야식이다. 설근은 4대종으로 만들어진 것[四大種所造]이며, 설식이 의지하게 되는[舌識所依] 정색(淨色)으로서 무견유대(無見有對)이다. 의(意) 및 종자(種子)는 앞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그것[舌識]의 소연(所緣)은 미(味)로서 무견유대(無見有對)69)를 말한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즉 쓰고[苦] 시고[酢] 맵고[辛] 달고[甘] 짜고[鹹] 싱거운 것[淡]이 있고, 가의(可意), 불가의(不可意), 혹은 사(捨)70)의 처소(處所)가 있으며, 설근이 맛보는 대상[所嘗]이 있다.
   또한 미(味)란 이른바 맛보겠다, 삼키겠다, 씹겠다, 마시겠다, 핥겠다, 빨겠다, 수용하겠다는 등의 위와 같은 차별적인 이름이 있다.
  이것은 설근의 소행이며 설근의 경계이며, 설식(舌識)의 소행이고 설식의 경계이고 설식의 소연이며, 의식(意識)의 소행이며 의식의 경계이며 의식의 소연이다.
  
68) 이하는 5식신지(識身地)의 하나 하나를 나누어 해설하는 가운데에, 그 네 번째로 설식(舌識)의 다섯 가지 상(相), 즉 자성(自性) 소의(所依) 소연(所緣) 조반(助伴) 작업(作業)에 대하여 설명한다.
69) 무견유대미(無見有對味)를 의미한다.
70) 가의(可意)도 아니고 불가의(不可意)도 아닌 맛[味]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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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반(助伴) 및 업(業)은 앞의 경우와 같음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71) 신식(身識)의 자성(自性)이라 하는가?
  신근[身 : 身根]에 의지하여 촉(觸)을 요별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身識]의 소의(所依)는 구유의(俱有依)는 신근이며 등무간의(等無間依)는 의근[意 : 意根]이며 종자의(種子依)는 일체종자의 아뢰야식이다. 신근은 4대종으로 만들어진 것[四大種所造]이며, 신식이 의지하게 되는[身識所依] 정색(淨色)으로서 무견유대(無見有對)이다. 의(意) 및 종자(種子)는 앞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그것[身識]의 소연이란 촉(觸)으로서 무견유대(無見有對)72)를 말한다. 여기에도 즉 땅[地] 물[水] 불[火] 바람[風]과 가벼운 성질[輕性] 무거운 성질[重性] 미끄러운 성질[滑性] 껄그러운 성질[澁性] 차가움[冷] 배고픔[飢] 목마름[渴] 배부름[飽] 힘 있음[力] 힘 없음[劣] 느슨함[緩] 급함[急] 병듦[病] 늙음[老] 죽음[死] 간지러움[] 답답함[悶] 끈끈함[粘] 고달픔[疲] 쉼[息] 연약[軟怯] 기운[勇]의 여러 가지가 있으며, 위와 같은 종류의 여러 가지 촉(觸)이 있다.
   여기에도 즉 호촉(好觸) 악촉(惡觸) 사(捨)의 처소의 촉[處所觸]73)의 세 가지가 있으며, 신근[身]이 감촉하는 대상[所觸]이 있다.
   또한 촉(觸)이란 즉 어루만지고 부딪치고 혹은 단단하고 부드럽고 혹은 움직이고 따뜻한 등의 이와 같은 차별적인 이름이 있다.
  이는 신근[身 : 身根]의 소행(所行)이며 신근의 경계이며, 신식(身識)의 소행이며 신식의 경계이며 신식의 소연이며, 의식(意識)의 소행이며 의식의 경계이고 의식의 소연이다.
  조반(助伴) 및 업(業)은 앞의 경우와 동일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71) 이하는 5식신지(識身地)의 하나 하나를 나누어 해설하는 가운데에, 그 다섯 번째로 식식(身識)의 다섯 가지 상(相), 즉 자성(自性) 소의(所依) 소연(所緣) 조반(助伴) 작업(作業)에 대하여 설명한다.
72) 무견유대촉(無見有對觸)를 의미한다.
73) 호촉(好觸)은 닿아서 낙수(樂受)를 일으키는 촉(觸)이며, 악촉(惡觸)은 닿아서 고수(苦受)를 일으키는 촉(觸)이며, 사처소촉(捨處所觸)은 닿아서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을 일으키는 촉(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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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74) 안근[眼 : 眼根]이 무너지지 않고75), 색(色)이 앞에 나타나고[現在前]76), 능생(能生) 작의(作意)77)가 바로 일어나지 않으면78) 소생(所生) 안식(眼識)79)은 결코 생겨날 수 없다.
  반드시 안근이 무너지지 않고 색(色)이 앞에 나타나며[現在前] 능생(能生) 작의(作意)가 곧바로 다시 일어날[現起] 때에 소생[所生]의 안식(眼識)도 비로소 생겨날 수 있다. 안식(眼識)이 생기는 것과 같이, 그 밖의 식신(識身)도 위와 같음을 알아야만 한다.
  다음에80) 안식(眼識)의 생겨나기 때문에 세 가지 심(心)을 가히 얻을 수 있으니, 그 차례대로 말하면 솔이심(率爾心)81)과 심구심(尋求心)82)과 결정심(決定心)83)이다. 처음 것84)은 안식(眼識)이며, 두 번째 것85)은 의식(意識)에 존재하며, 결정심(決定心)86) 뒤에 마침내 염(染) 정(淨)87)이 있고88) 이 이후에야 등류(等流)의 안식(眼識)89)이 있어서90) 선(善)과 불선(不善)이 구르게
  
74) 이하는 5식(識)과 근(根) 경(境) 작의(作意)의 관계를 밝힌다.
75) 안근(眼根)이 결함없이 구족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76) 대상의 경계(境界)가 현재 나타나야 하는 것을 말한다.
77) 능생(能生)의 작의(作意)는 소생(所生)의 안식(眼識)와 능(能) 소(所)의 관계로 주관과 객관의 관계이며, 능생(能生)이란 능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78) 자동적으로 대상에 취하는 의도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79) 능동(能動)의 작의(作意)에 의하여 일어나게 되는 피동(被動)의 안식(眼識)을 의미한다.
80) 이하는 5식(識)과 솔이심(率爾心) 심구심(尋求心) 결정심(決定心) 염정심(染淨心) 등류심(等流心)의 5심(心)과의 관계에 대하여 밝힌다.
81) 솔이심(率爾心)이란 안식과 동시에 의식이 갑작스러운 대경(對境)에 맞닥뜨렸을 때의 갑작스러운 심리상태를 말한다.
82) 심구심(尋求心)이란 솔이심 다음으로 의식이 대경(對境)에 대해서 무언가를 희망하고 추구하는 단계의 마음을 말한다.
83) 결정심(決定心)이란 추구심 다음으로 의식이 대경(對境)에 대해서 무엇인지를 알고 인가하고 결정하는 단계의 마음을 말한다.
84) 솔이심(率爾心)을 가리키며, 5심(心) 가운데에 첫 번째의 심(心)이다.
85) 심구심(尋求心)을 가리키며, 5심(心) 가운데에 두 번째 심(心)이다.
86) 5심(心) 가운데에 세 번째 심(心)이다.
87) 염(染) 정(淨)이란 번뇌에 물들고 번뇌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정심 다음에 의식이 대경(對境)에 대해서 악심(惡心)을 일으키거나 혹은 선심(善心)을 일으키는 단계의 마음을 의미한다.
88) 5심(心) 가운데에 네 번째의 심(心)이다.
89) 염정(染淨)의 의식(意識)이 끌어당긴 것에 의해서 이후에 의식 뿐만이 아니라 안식(眼識)도 또한 염정(染淨)의 선(善) 악(惡)에 대해서 상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등류(等流)의 어원적 의미는 등동(等同) 유류(流類)이며, 전념(前念) 후념(後念), 염정선악(染淨善惡), 동성동류(同性同流)의 뜻도 있다.
90) 5심(心) 가운데에 다섯 번째의 심(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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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다.
  그래서 저것[眼識]이 자기의 분별력에 의지하지 않고 내지 이 의식[意 : 意識]도 나머지 경(境)에 나아가지 않는 이와 같은 때에 이르러야 안식[眼 : 眼識]과 의식의 두 식(識)은 선(善) 혹은 염(染)에 상속하여 구르는 것[轉]이다. 안식(眼識)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신식(身識)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만 한다.
  다음에91) 5식(識)의 소의(所依)는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의 탈것과 같으며, 소연(所緣)은 하는 일과 같으며, 조반(助伴)은 동반자[同侶]와 같으며, 작업(作業)은 스스로의 공능(功能)과 같음을 관(觀)해야만 한다. 또한 5식(識)의 소의(所依)는 집에 머무는 자의 집과 같고, 소연(所緣)은 수용하는 대상과 같고, 조반(助伴)은 심부름꾼과 같고, 작업(作業)은 작용(作用)과 같은 차별이 있음을 관찰[觀]해야만 한다.
  2) 의지(意地)92)
  이미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를 설명하였다.
  무엇을93) 의지(意地)라고 하는가?
  여기에서도 5상(相)이 있음을 알아야만 하니, 즉 자성(自性)때문이요, 그것94)의 소의(所依)때문이요, 그것의 소연(所緣), 그것의 조반(助伴), 그리고
  
91) 이하는 5식(識)의 5상(相)을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92) 전절(前節)에서는 8식 가운데 전5식(前五識)을 설하였고, 지금부터는 제6, 제7, 제8의 세 가지 식(識)을 설하는 데 있어서, 세 가지 식은 공통적으로 의근(意根)에 포함되기 때문에 의지(意地)에서 설명한다. 이를 원래는 '의식신상응지(意識身相應地)'라고 해야 5식신상응지(識身相應地)에 배대하여 볼 때 맞는 명칭이지만 지금은 '식신상응(識身相應)'의 네 글자를 축약하여 의지(意地)라고 한다.
93) 5식신상응지(識身相應地)와 같이 의지(意地)의 5상(相), 즉 자성(自性) 소의(所依) 소연(所緣) 조반(助伴) 작업(作業)에 대하여 밝힌다.
94) 의지(意地)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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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의 작업(作業)때문이다.
  무엇을 의(意)의 자성(自性)이라고 하는가?
  심(心) 의(意) 식(識)을 말한다.
  심(心)이란 일체종자(一切種子)의 소수의지성(所隨依止性)95)이며 소수의부의지성(所隨依附依止性)96)으로서 본체[體]는 능히 집수(執受)하는 이숙에 포함되는[異熟所攝]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의(意)란 항행의지성(恒行依止性)의 의(意)97)와 그리고 6식신(六識身)의 무간멸(無間滅)의 의(意)를 말한다.
  식(識)이란 현전(現前)에서 소연(所緣)의 경계(境界)를 요별(了別)하는 것이다.
  그것98)의 소의(所依)로는 등무간의(等無間依)는 의근[意 : 意根]이고 종자의(種子依)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일체종자(一切種子)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그것의 소연(所緣)이란 그 상응하는 것[所應]에 따른 일체법(一切法)이다. 불공인 경우[不共者]99)의 소연(所緣)은 즉 수(受) 상(想) 행온(行蘊)100)과 무위(無爲)와 무견무대색(無見無對色)101)과 6내처(六內處)102)와 그리고 일체종자(一切種子)이다.
  그것의 조반(助伴)이란 작의(作意) 촉(觸) 수(受) 상(想) 사(思)103)
  
95) 유루종자(有漏種子)는 본식(本識)에 따라서 유루무기(有漏無記)가 되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용(用)은 체(體)에 의지한다는 뜻이다.
96) 이러한 종자(種子)는 본식(本識)에 의지하더라도 선(善) 염(染)들을 일으키는 공능(功能)이 달라서 같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의부(依附)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97) 제7식을 의미한다.
98) 의식(意識)을 가리킨다.
99) 전5식(前五識)과 공통하지 않는 의식 특유의 대경(對境)을 의미한다.
100) 색온(色蘊)과 수온(受蘊)과 상온(想蘊)과 행온(行蘊)을 의미하며, 식온(識蘊)을 제외한 것은 다음의 6내처(六內處) 중에 의처(意處)가 있기 때문이다.
101) 무견무대색(無見無對色)은 무표색(無表色)을 의미한다.
102) 6근(六根) 즉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6내처라고 한다.
103) 작의(作意) 촉(觸) 수(受) 상(想) 사(思)는 5변행심소(遍行心所)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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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欲) 승해(勝解) 염(念) 삼마지(三摩地) 혜(慧)104)와 신(信) 참(慚) 괴(愧)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 정진(精進) 경안(輕安) 불방일(不放逸) 사(捨) 불해(不害)105)와 탐(貪) 에(恚) 무명(無明) 만(慢) 견(見) 의(疑)106)와 분(忿) 한(恨) 복(覆) 뇌(惱) 질(嫉) 간(慳) 광(誑) 첨(諂) 교(憍)) 해(害) 무참(無慚) 무괴(無愧) 혼침(惛沈) 도거(掉擧) 불신(不信) 해태(懈怠) 방일(放逸) 사욕(邪欲) 사승해(邪勝解) 망념(忘念) 산란(散亂) 부정지(不正知)107)와 악작(惡作) 수면(睡眠) 심(尋) 사(伺)108)를 말한다. 이러한 등의 것들은 함께 있으면서[俱有] 상응(相應)하는109) 심소유법(心所有法)이며, 이를 조반(助伴)이라고 이름한다.
  동일(同一)한 소연(所緣)이면서도 동일한 행상(行相)은 아니라서, 일시(一時)에 함께 있으면서도[俱有] 하나 하나 구른다110). 각자의 종자로부터 생겨나면서도 서로 상호 상응하여 (능연[能緣]의) 행상(行相)이 있고 소연(所緣)이 있으며 소의(所依)가 있다.
  그것111)의 작업(作業)112)이란 즉 능히 자기의 경계[自境]의 소연(所緣)을 요
  
104) 욕(欲) 승해(勝解) 염(念) 삼마지(三摩地) 혜(慧)는 5별경심소(別境心所)를 나타낸다.
105) 신(信) 참(慚) 괴(愧)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 정진(精進) 경안(輕安) 불방일(不放逸) 사(捨) 불해(不害)는 선심소(善心所)를 나타낸다.
106) 탐(貪) 에(恚) 무명(無明) 만(慢) 견(見) 의(疑)는 6대번뇌(大煩惱)를 나타낸다.
107) 분(忿) 한(恨) 복(覆) 뇌(惱) 질(嫉) 간(慳) 광(誑) 첨(諂) 교(憍) 해(害) 무참(無慚) 무괴(無愧) 혼침(惛沈) 도거(掉擧) 불신(不信) 해태(懈怠) 방일(放逸) 사욕(邪欲) 사승해(邪勝解) 망념(忘念) 산란(散亂) 부정지(不正知)는 22수번뇌(隨煩惱)를 나타낸다.
108) 악작(惡作) 수면(睡眠) 심(尋) 사(伺)는 4부정심소(不定心所)를 나타낸다.
109) 심왕(心王)과 구유(具有)하고 상응(相應)한다는 뜻이다.
110) 모든 심소유법(心所有法)은 심왕(心王)에 따라 다니는 것이지만 그 하나 하나의 행상(行相)은 동일하지 않고 그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111) 의식(意識)을 가리킨다.
112) 이하는 의식(意識)의 작업(作業)을 밝히는 것으로 여기에는 2문(門)이 있다. 2문(門) 가운데의 그 첫 번째는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작업(作業)을 밝히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의식이 전5식(前五識)과 함께하지 않는 불공업(不共業)에 대하여 밝히는 것이다. 다음의 일단(一段)은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작업(作業)을 밝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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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하는 것을 말하니, 이것을 첫 번째 업[初業]이라고 한다. 다시 능히 자상(自相) 공상(共相)113)을 요별하고,114) 능히 과거[去] 미래[來] 현재세[現世]를 요별하고,115) 다시 찰나에 요별하고 혹은 상속하여 요별한다.116) 다시 구르고[轉] 따라서 구르면서[隨轉] 청정하고[淨]과 청정하지 않는[不淨] 일체법(一切法)의 업(業)을 일으킨다117). 다시 능히 탐애[愛]와 비탐애[非愛]의 과보[果]를 취하고,118) 다시 능히 다른 식신(識身)119)을 이끌며 또한 능히 인(因)이 되어 등류(等流)의 식신(識身)120)을 일으킨다.
  또한 제 의식(意識)121)은 다른 식신(識身)에 비해서 뛰어난 작업(作業)이 있다. 즉 소연(所緣)을 분별하고, 소연(所緣)을 심려(審慮)하며, 취(醉)하거나, 미치거나[狂], 꿈꾸거나[夢], 깨어나거나[覺], 기절하거나[悶], 성성하거나[醒], 혹은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능히 일으키거나, 능히 이욕(離欲)하거나, 이욕(離欲)에서 물러나거나, 선근(善根)을 끊거나, 선근(善根)을 잇거나, 죽거나[死] 태어나는[生] 등을 말한다.
  무엇을 소연을 분별하는 것이라 하는가?
  일곱 가지의 분별 즉 유상분별(有相分別) 무상분별(無相分別) 임운분
  
113) 자상(自相)이란 사법(事法)의 자체 특유의 상(相)이다. 즉 색(色) 성(聲) 향(香) 미(味) 등의 각자 특유의 상(相)으로서 다른 것과 공통하지 않는 대경(對境)을 의미한다. 공상(共相)이란 제 법(法)과 공통하는 것으로서 즉 무상(無常) 고(苦) 공(空) 등과 같은 상(相)이며 이는 일체 유위법(有爲法)에 공통된 상, 즉 공상(共相)이다.
114)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두 번째 작업(作業)이다.
115)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세 번째 작업(作業)이다.
116)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네 번째 작업(作業)이다.
117)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다섯 번째 작업(作業)이다.
118)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여섯 번째 작업(作業)이다.
119) 5식신(識身)을 말한다.
120) 5식신(識身)을 말한다.
121) 이하는 의식의 작업(作業) 가운데의 그 두 번째로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과 함께하지 않는 불공업(不共業)에 대하여 밝힌다. 여기에서는 소연분별(所緣分別) 소연심려(所緣審慮) 취(醉) 광(狂) 몽(夢) 각(覺) 민(悶) 성(醒) 신업(身業)과 어업(語業) 이욕(離欲) 이욕퇴(離欲退) 단선근(斷善根) 속선근(續善根) 생사(生死)의 열 네 가지 문(門)으로 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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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任運分別) 심구분별(尋求分別) 사찰분별(伺察分別) 염오분별(染汚分別) 불염오분별(不染汚分別)에 의한다.
  유상분별(有相分別)이란 먼저 받아들인 대상[先所受義]122)에 대하여 제 근(根)을 성취하고123) 명언(名言)을 잘 아는 자(者)가 일으키는 분별을 말한다.
  무상분별(無相分別)이란 먼저 끌어당긴 것[先所引]124)에 따르는 것이며, 명언(名言)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 등이 지니고 있는 분별을 말한다.
  임운분별(任運分別)이란 현전(現前)의 경계에 대하여 경계의 세력에 따라서 자연스럽게[任運] 구르는 모든 분별을 말한다.
  심구분별(尋求分別)이란 제 법을 관찰(觀察) 심구(尋求)해서 일어나게 되는 분별을 말한다.
  사찰분별(伺察分別)이란 이미 심구(尋求)하고 이미 관찰(觀察)한 것을 사찰(伺察)하고 안립(安立)해서 일어나게 되는 분별을 말한다.
  염오분별(染汚分別)이란 과거를 되돌아보고 연연해하는 것과 함께 작용하고[俱行] 미래를 즐기는 것과 함께 작용하며 현재를 집착하는 것과 함께 작용하는 모든 분별과, 욕분별(欲分別)이나 에분별(恚分別) 혹은 해분별(害分別)의 하나 하나의 번뇌나 수번뇌(隨煩惱)에 따라 상응해서 일어나게 되는 분별을 말한다.
  불염오분별(不染汚分別)이란 선(善)과 무기(無記)이며, 출리분별(出離分別) 무에분별(無恚分別) 불해분별(不害分別)의 하나 하나의 신(信) 등의 선법(善法)과 상응하거나 혹은 위의로(威儀路)125) 공교처(工巧處)126) 및 모든 변화(變化)127)가 소유하고 있는 분별을 말한다.
  위와 같은 종류를 소연(所緣)을 분별(分別)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소연(所緣)을 심려(心慮)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여리(如理)의 소인(所引) 비여리(非如理)의 소인(所引) 비여리비불여
  
122) 대상[義]이란 범어 Artha의 의역(意譯)으로서 경계라는 뜻이다.
123) 신체가 완벽하게 결함없이 성장하여 구족한 것을 의미한다.
124) 과거의 소연경(所緣境)에 생각없이 끌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125) 행(行) 주(住) 좌(坐) 와(臥)의 4위의를 일으키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126) 예술 가곡 등을 일으키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127) 선정(禪定) 신통력(神通力)으로서 하나의 경계를 변화하는 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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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非如理非不如理)의 소인(所引)을 말한다.
  여리(如理)의 소인(所引)이란 진실(眞實)이 아닌 유(有)를 증익(增益)하는 4가지의 전도(顚倒), 즉 무상(無常)을 항상함[常]이라고 전도하고, 괴로움[苦]을 즐거움[樂]이라고 전도하며, 깨끗하지 않은 것[不淨]을 깨끗함[淨]이라고 전도하고,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전도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모든 사견(邪見) 즉 '베풀 필요 없다[無施與]' 등의 모든 사견(邪見)의 행(行)과 같이 여러 진실유(眞實有)를 손감(損減)하지 않는 것이다. 법주지(法住智)128)가 여실(如實)하게 제 소지사(所知事)129)를 요지(了知)한다거나 매우 청정한[善淸淨] 출세간의 지혜[出世間智]가 여실하게 소지(所知)130)의 제 법(法)을 깨달는[覺知] 이와 같은 것들을 여리(如理)의 소인(所引)이라고 한다.
  위와 서로 다른 것을 비여리(非如理)의 소인(所引)인줄 알아야 한다.
  비여리비불여리(非如理非不如理)의 소인(所引)이란 무기(無記)의 지혜[慧]를 의지하여 제 법(法)을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것[審察]을 말한다.
  위와 같은 것을 소연(所緣)을 심려(審慮)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취함[醉]이라고 하는가?
  의지(依止) 성품[性]이 약[羸劣]하기 때문에, 혹은 익숙하지 않은데도 (술을) 마셨기 때문에, 혹은 너무 자주 마셨기 때문에, 혹은 지나친 양을 마셨기 때문에, 곧 취해서 어지러운 것[醉亂]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미침[狂]이라고 하는가?
  먼저 지었던 업[先業]에 이끌렸기 때문에, 혹은 여러 가지 계[諸界]의 착란(錯亂) 때문에, 혹은 놀라고 두려워서 의지[志]를 잃었기 때문에, 혹은 말마(末摩)131)를 맞았기 때문에, 혹은 귀신과 도깨비[鬼魅]에 홀려서 전광(癲狂)132)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128) 교법(敎法)에 의하여 생기에 되는 지혜를 의미한다.
129) 알아야 할 대상의 현상들을 의미한다.
130) 알아야 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131) 사혈(死穴) 또는 사절(死節)이라고 번역한다. 우리 몸 안에 사혈은 64곳 혹은 120곳이 있는데, 이 곳을 정통으로 맞게 되면 죽게 된다.
132) 미치거나 지랄병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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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꿈을 꾸는 것[夢]이라고 하는가?
  의지(依止)의 성품[性]이 약[羸劣]하기 때문에, 혹은 피로[疲倦]나 과실(過失) 때문에, 혹은 지나치게 먹는 것에 빠졌기[沈重] 때문에, 혹은 암상(闇相)133)을 작의(作意)하고 사유하였기 때문에, 혹은 일체의 사업(事業)을 휴식(休息)하였기 때문에, 혹은 수면(睡眠)을 자주 익혔기[串習]134) 때문에, 부채질[搖扇]이나 명주(明呪)나 약이나 신통과 같은 다른 것135)에 이끌렸기 때문에, 혼몽(惛夢)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깨어남[覺]이라고 하는가?
  잠을 푹 잔 사람[睡增者]이 피극(疲極)136)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137), 할 일이 있는 사람[所作者]이 미리 잠 잘 시간을 잡았기 때문에, 혹은 다른 것138)에 이끌려서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기절[悶]이라고 하는가?
  바람과 열로 어지럽기 때문에, 혹은 매를 맞았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설사[痢]를 계속하거나 출혈(出血)과 같이 쏟았기 때문에, 혹은 극히 과로했기 때문에, 기절[悶絶]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성성[醒]이라고 하는가?
  기절하였다가 다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신업(身業) 어업(語業)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는가?
  즉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일으키는 지(智)139)가 먼저 작용[前行]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욕(欲)이 생기기 때문에, 다음으로 공용(功用)이 일어나기 때문에, 다음으로 공용에 수순(隨順)함을 우선으로 하여 신(身)과 어(語)의 업풍(業風)이 구르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 신업(身業) 어업(語業)을 일으
  
133) 눈을 감고 흑암(黑暗)의 색상을 관하거나, 어두움에 대하여 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134) 습관이 될 정도로 자주 익히는 것을 의미한다.
135) 자신의 내부적인 것이 아닌 외부적인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136) 피로가 다 없어진 것을 의미한다.
137) 잠을 너무 자서 더 이상 잠을 취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138)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다른 사람이 깨우는 등의 일을 말한다.
139) 이때의 지(智)는 지혜(智慧)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하는 지(智)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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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는 것이다.
  무엇을 이욕(離欲)이라고 하는가?
  즉 이욕(離欲)에 수순하는 감각기관[根]을 성취하기 때문에140),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르침[敎誨]을 받아서 따르기[隨順] 때문에, 그것141)의 장애를 원리(遠離)하기 때문에, 방편(方便)을 바르게 닦아서[正修]142) 전도 없이[無顚] 사유하기 때문에, 비로소 이욕(離欲)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이욕(離欲)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하는가?
  즉 연근기[軟根]143)의 성품[性]이기 때문에, 새로 선품(善品)을 닦은 사람이 그것144)의 형상상(形狀相)145)을 사유하기 때문에, 순퇴법(順退法)을 받아 행하기[受行] 때문에, 번뇌에 장애 받기 때문에, 나쁜 벗[惡友]에 포섭되기 때문에, 이욕(離欲)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무엇을 선근(善根)을 끊는 것[斷]이라고 하는가?
  즉 이근자(利根者)가 상품(上品)의 여러 악한 의요[諸惡意樂]들이 현행하는 법을 성취하기 때문에, 그 나쁜 벗[惡友]을 수순하게 되기 때문에146), 그 사견(邪見)의 전(纏)147)이 극히 매우 원만하게 되어 구경(究竟)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일체의 악(惡)이 현행하는 가운데에 무외(無畏)를 얻기 때문에148), 애민(哀愍)이 없기 때문에, 능히 선근(善根)을 끊는 것이다.
  이 가운데 종자도 선근(善根)이라고 하고 무탐(無貪) 무진(無瞋) 등도 또한 선근(善根)이라고 하지만, 상속하는 것이 서로 다르기[相違] 때문에, 단지 현행(現行)의 선근(善根)149)만을 안립(安立)하여 선근을 끊는다[斷]고 하는
  
140) 6근(根)이 다 구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141) 다른 이로부터 가르침[敎誨]을 받고 수순하는 것을 의미한다.
142) 바른 실천을 의미한다.
143) 하열(下劣)한 근기를 의미한다.
144) 선품(善品)을 가리킨다.
145) 그것의 형상상(形狀相)이란 새로 닦은 선품(善品)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의 형상(形狀)의 상(相)을 억념(憶念) 사유(思惟)하는 것을 의미한다.
146) 여러 악의 의요[諸惡意樂]들이 현행하는 법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147) 상상품(上上品)의 사견(邪見)이 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전(纏)은 전박(纏縛)의 의미로서 번뇌를 일컫는다.
148) 여러 악의 의요들[諸惡意樂]이 현행하는 법에 대하여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149) 선근(善根)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종자이고 둘째는 현행이다. 종자의 세력을 끊어서 현행하지 않게끔 하는 것을 끊는다[斷]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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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다. 왜냐 하면 영원히 그150) 종자를 뽑아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근(善根)을 잇는 것[續]이라고 하는가?
  즉 이근(利根)의 성품[性]이기 때문에, 친한 벗[親朋友]151)을 보고서 복업(福業)을 닦기 때문에, 착한 장부(丈夫)152)에 나아가 정법(正法)을 듣기 때문에, 유예(猶豫)153)가 생겨도 증(證)154)을 결정하기 때문에, 도로 선근(善根)을 잇는 것[續]이다.
  무엇을155) 죽는다[死]고 하는가?
  수명[壽量]이 다했기 때문에 곧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하니,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목숨이 다하고[壽盡], 복이 다하고[福盡], 불평등(不平等)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156) 이것은 선심(善心) 불선심(不善心) 무기심(無記心)의 시사(時死)157)와 비시사(非時死)158)가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목숨이 다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하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감(感)159)에 따라서 수명이 완전히 다하여 죽는 것과 같
  
150) 선근(善根)을 가리킨다.
151) 여러 선의 의요[諸善意樂]들이 현행하는 법을 의미한다.
152) 정법(正法)을 가르치는 스승을 의미한다.
153) 이럴까 저럴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을 의미한다.
154) 깨달음의 진리를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155) 『본론(本論)』에서 생사(生死)를 밝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설명된다.(一) 내분유정(內分有情)의 생사를 밝힌다.1. 사(死)를 밝힌다. (1) 여섯 가지 사(死)를 드러내어 해석한다. (2) 여덟 가지 문(門)으로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설한다.2. 생(生)을 열 네 가지 항목으로 밝힌다. (1) 중유(中有)를 스물 두 가지 문(門)으로 밝힌다. (2) 생유(生有)를 두 가지 문(門)으로 밝힌다. (3) 본유(本有)를 두 가지 문(門)으로 밝힌다.3. 공관루진(空觀漏盡)을 스물 세 가지 항목으로 밝힌다.(二) 외분세계(外分世界)의 성괴(成壞)를 스물 네 가지 항목으로 밝힌다.
156) 이하 사(死)를 밝히는 두 가지 가운데에, 그 첫 번째로 여섯 가지의 사(死)를 드러내어 해석한다.
157) 때에 맞는 죽음을 의미한다.
158) 때에 맞지 않는 죽음을 의미한다.
159) 과보(果報)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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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니, 이를 시사(時死)라고 한다.
  무엇을 복이 다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하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구(資具)160)가 다 없어졌기 때문에 죽는 것과 같다.
  무엇을 불평등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하는가?
  세존께서 "아홉 가지 인(因)과 아홉 가지 연(緣) 때문에, 수명이 다하지 않아도 죽는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떤 것들을 아홉 가지라고 하는가?
  즉 양(量)에 맞지 않게 먹고, 마땅하지 않는 것을 먹고, 소화되지 않았는데도 다시 먹고, 살아있는데도 뱉지 않고, 익혀서 이를 지니고161), 의약(醫藥)을 가까이 하지 않고, 자기에게 손해 되고 이익 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때에 맞지 않고[非時] 양에 맞지 않는[非量] 범행이 아닌 것을 행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비시사(非時死)라고 한다.
  무엇을 선심(善心)의 죽음이라고 하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스스로 이전에 닦았던 선법(善法)을 기억하거나 혹은 다시 다른 사람이 그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이때 신(信) 등의 선법(善法)이 마음[心]에 현행하는 것과 같으며, 내지 추상(麤想)162)이 현행하는 것과 같다. 만약 세상(細想)163)이 현행할 때는 선심(善心)이 곧 평등[捨]하여 오직 무기심(無記心)에만 머물게 된다. 왜냐 하면 그는 이때에 일찍이 익혔던 선(善)에 대해서도 기억할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또한 그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불선심(不善心)의 죽음이라고 하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스스로 이전에 익혔던 악법(惡法)을 기억하거나 혹은 다시 다른 사람이 그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기 때문
  
160)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말한다.
161) 발효된 음식, 즉 예를 들어 젓갈 같은 것을 말한다.
162) 추상(麤想)이란 사유(死有)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선(善)과 불선(不善)의 명료한 생각을 의미한다.
163) 세상(細想)이란 정사(正死)의 전찰나의 마음으로서 선(善) 악(惡)의 법을 기억하지 못하는 무기심(無記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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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그는 이때 탐(貪) 진(瞋) 등과 함께하는 모든 불선법이 마음에 현행하는 것과 같다. 내지 추(麤) 세(細) 등의 상(想)이 현행하는 것은 앞에서 잘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선심(善心)을 갖고 죽을 때[死時]는 안락하게 죽는 것이라서,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에 몸을 핍박(逼迫)하는 극히 괴로운 느낌[極苦受]이 없다. 악심(惡心)을 갖고 죽을 때는 괴로워하면서 죽는 것이라서,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에 몸을 핍박(逼迫)하는 매우 심한 괴로운 느낌[極重苦受]이 있다. 또한 선심을 갖고 죽는 자는 어지럽지 않은 색상(色相)을 보고 불선심을 갖고 죽는 자는 어지러운 색상(色相)을 본다.
  무엇을 무기심(無記心)의 죽음이라고 하는가?
  즉 선(善)과 불선(不善)을 행한 사람과 혹은 행하지 않은 사람이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스스로 기억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도 기억하도록 할 수 없어서, 이때에 선심도 아니고 불선심도 아니면서 죽으니, 이미 안락하게 죽는 것도 아니고 괴로워하면서 죽는 것도 아닌 것이다.
  또한164) 선과 불선을 행한 보특가라(補特伽羅)165)는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혹은 자연스럽게 앞서 익혔던 선과 불선을 기억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기억하도록 한다. 그는 이때에 과거에 많이 익혔던 가장 강한 힘에 그 마음이 치우쳐서 기억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다 잃어버리게 된다. 만약 평등을 갖추어서 자주 거듭 익혔던 사람일 경우는 그는 이때에 처음 것을 따라서 스스로 기억하거나 다른 사람이 기억하도록 하는데, 다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이것166)만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167) 이때 두 가지 인(因)의 증상력(增上力), 즉 희론(戲論)에 즐겨 집착
  
164) 사(死)를 밝히는 두 가지 가운데, 이하는 그 두 번 째로 여덟 가지 문(門)으로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한다. 지금 이 대목은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첫 번째로 죽을 때 3성(性) 가운데에 어떤 것을 먼저 일으키는가를 분별한다.
165)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범어 Pudgala의 음사어[音譯]로서 삭취취(數取趣)라고 의역(意譯)된다. 자주 윤회하면서 6취(趣)의 생을 취한다는 뜻이다. 이는 보통 유정(有情)의 이명(異名)으로 쓰이는 것이다.
166) 자주 익혔던 사(捨)의 평등심(平等心)을 말한다.
167)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두 번째로 사인(死因)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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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樂著]하는 인(因)의 증상력(增上力)168)과 청정함[淨] 청정하지 않음[不淨]의 업인(業因)의 증상력(增上力)169)때문에 곧 목숨이 끊어지게 된다.
  이전의170) 업이 끌어당긴 과(果)를 다 받고 나서 불선업(不善業)을 행한 사람은 마치 꿈속에서 무량한 종류의 괴이한[變怪] 색상(色相)을 보듯이, 바로 이때171) 이전에 지었던 모든 불선업(不善業) 소득(所得)의 불애과(不愛果)의 전상(前相)을 받는다. 이런 상(相)172)에 의지하기 때문에 박가범(薄伽梵)께서 "이전에 악(惡) 불선업(不善業)을 짓거나 증장(增長)시킨 적이 있는 이는 이 때173) 마치 저무는 해가 산과 산봉우리에 걸려서 가려지고 거의 가려지기도 하고 아주 가려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밝음[明]에서 어두움[闇]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전에 불선업(不善業)의 과(果)를 다 받고 나서 선(善)을 닦은 이는 위와 서로 다르다.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 차별174)은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마치 꿈속에서 무량한 종류의 괴이하지[變怪] 않은 색(色)을 보고 가의상(可意相)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만약 상품(上品)의 불선업(不善業)을 지은 사람은 이러한 괴이한 상[變怪相]을 보기 때문에, 땀이 흐르고 털이 곤두서며 손발이 떨리며[紛亂] 마침내 똥을 싸면서 허공을 더듬고 눈동자가 뒤집히면서 거품을 내뿜는다. 그는 이때에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괴이한 모습[變怪相]을 일으키는 것이다.
  
168) 명언종자(名言種子)의 세력을 의미한다.
169) 업종자(業種子)의 세력을 의미한다.
170)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세 번째로 선(善) 악(惡)의 상(相)을 밝힌다.
171)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를 가리킨다.
172) 이전에 지었던 모든 불선업소득(不善業所得)의 불애과(不愛果)의 전상(前相)을 가리킨다.
173)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를 가리킨다.
174) 이전에 불선업(不善業)의 과(果)를 다 받고 나서 불선(不善)을 닦은 보특가라(補特伽羅)와 선(善)을 닦은 보특가라(補特伽羅)의 차이점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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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중품(中品)의 불선업(不善業)을 지은 사람은 이때175) 괴이한 모습[變怪相]이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하며, 만약 있더라도 전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176)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부터 아직 혼미한 상이 나타나지 않을 단계[位]에 이르기까지의 중생들은 오랫동안 익혔던 아애(我愛)177)가 현행한다. 이 힘178)때문에 '나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곧 자신을 사랑[愛]하니, 이179) 때문에 중유(中有)의 생보(生報)180)를 건립하는 것이다.
  예류과(預流果) 및 일래과(一來果)의 경우에도 이때 아애(我愛)가 또 다시 현행한다. 그러나 이 예류(預流) 및 일래과(一來果)는 이 아애(我愛)에 대하여 지혜력(智慧力)으로써 자주 추구하여 제지[制]하고 집착하지 않으니, 마치 씩씩한 장부가 힘 없는 약한 이와 씨름하여 그를 제압하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도리(道理)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불환과(不還果)의 경우는 이 때 아애(我愛)가 다시 현행하지 않는다.
  또한181) 지절(肢節)182)이 풀리는 것은 천(天)과 나락가(那落迦)를 제외한 그 밖의 생을 받는 곳[生處]에는 모두 다 있다. 여기에도 첫째 무거움[重]과 둘째 가벼움[輕]의 두 가지가 있다. 무거움이란 악업(惡業)을 지은 것을 말하고 가벼움이란 선업(善業)을 지은 것을 말하는데, 북구로주(北拘盧洲)에서는 모두가 다 가벼움이다.
  또한183) 색계(色界)에서 죽을 때는 모두 감각기관[根]을 갖추지만 욕계(欲
  
175)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를 가리킨다.
176)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네 번째로 윤생(潤生)의 상(相)을 밝힌다.
177)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178) 아애(我愛)의 힘을 말한다.
179) 아애(我愛)를가리킨다.
180) 중유(中有)의 생보(生報)는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첫째는 중유(中有)는 즉(卽) 생보(生報)라고 해석하는 지업석(持業釋)이며, 둘째는 중유(中有)와 생보(生報)를 다르게 보는 상위석(相違釋)이다.
181)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다섯 번째로 지절(肢節)이 풀리는 것을 밝힌다.
182) 5체4지(五體四支)의 뼈 마디마디를 의미한다.
183)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여섯 번째로 근(根)이 사라지는 점(漸) 돈(頓)의 시(時)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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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界)에서 죽을 때는 대상에 따라서 감각기관이 있되, 갖추기도 하고 갖추지 않기도 한다.
  또한184) 청정해탈(淸淨解脫)185)하여 죽는 이는 선에 어울리는 죽음[調善死]이라고 하며, 불청정불해탈(不淸淨不解脫)하여 죽는 이는 선에 어울리지 않은 죽음[不調善死]이라고 한다.
  또한186)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에 악업(惡業)을 지은 사람은 식(識)이 소의(所依)187)의 위쪽부터 버리게 된다. 즉 위쪽부터 식기 시작하여[冷觸] 이렇게 점차 버려서 심처(心處)188)에 이르게 된다.
  선업을 지은 사람은 식(識)이 소의(所依)의 아래쪽부터 버리게 된다. 즉 아래쪽부터 식기 시작하여 이렇게 점차로 버려서 마침내 심처에 이르게 된다. 다음에 식(識)이 심처를 버려야만 여기189)부터 식기 시작하여 두루 소의(所依)로 번져나감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을190) 태어남[生]이라고 하는가?
  아애(我愛)가191) 곧바로[無間] 이미 생겼기 때문에, 무시이래[無始]로 희론(戲論)을 즐겨 집착한[樂著] 인(因)192)을 이미 훈습(薰習)하였기 때문에, 청정함[淨] 청정하지 않음[不淨]의 업인(業因)을 훈습하였기 때문에, 그 소의(所依)의 체(體)193)는 두 가지 인(因)194)의 증상력(增上力)에 의하기 때문에 자기
  
184)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일곱 번째로 사(死)의 명칭의 차별을 밝힌다.
185) 청정해탈(淸淨解脫)이란 이미 번뇌를 해탈하여 청정해진 것을 의미한다.
186)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여덟 번째로 죽을 때 몸을 버리는 차별의 상(相)을 밝힌다.
187) 신체(身體)를 말한다.
188) 심장을 의미한다.
189) 심처(心處)를 가리킨다.
190) 이하는 생(生)을 중유(中有) 생유(生有) 본유(本有)의 세 가지로 밝히는 가운데에, 그 첫 번째로 중유(中有)에 대하여 스물 두 가지 문(門)으로 밝힌다.
191)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첫 번째로 중유(中有)의 인연(因緣)을 밝힌다.
192) 희론(戱論)의 언어에 의해서 훈습되어진 종자, 즉 명언종자(名言種子)를 의미한다. 이는 제 법(法)의 자과(自果)를 생기게 하는 친인연(親因緣)이며, 여기서의 인(因)은 종자를 의미한다.
193) 중유(中有)의 색심오온(色心五蘊)의 소의(所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체(體)를 의미한다.
194) 무시이래[無始]로 희론(戱論)을 낙착(樂著)한 인(因)과 정(淨) 부정(不淨)의 업인(業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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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종자[自種子]195)로부터 즉 이곳 중유(中有)에 이숙(異熟)196)이 곧바로[無間]197)태어나게 된다. 저울의198) 양쪽 끝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시(時)와 같이 (생유[生有]는) 사유(死有)와 동시(同時)이다. 그래서199) 이 중유(中有)는 반드시 감각기관들[諸根]을 갖춘다.
   악업(惡業)을200) 지은 사람이 얻는 중유(中有)는 검은 양[黑 ]의 빛깔과 같거나 혹은 캄캄한 밤과 같으며, 선업(善業)을 지은 사람이 얻는 중유(中有)는 흰옷의 빛깔과 같거나 혹은 청명한 밤과 같다.
  또한201) 이 중유는 매우 청정한 천안(天眼)이 작용하게 된다[所行]. 그는202) 이때 이전의 아애(我愛)와 같은 종류[類]로는 다시 현행하지 않는다. 식(識)이203) 이미 머무르기 때문에204) 그래서 경계에 대해서 희론(戲論)의 애(愛)를 일으키며 태어날 곳에 따라서 곧 그 형류(形類)의 중유가 생긴다.
  또한205) 중유의 눈[眼]은 마치 천안(天眼)과 같이 장애가 없어서 오직 태어
  
195) 명언종자(名言種子)를 말한다.
196) 선업(善業)으로 부르게 되는[所感] 가애(可愛)의 과보(果報), 또는 악업(惡業)으로 부르게 되는[所感] 불가애(不可愛)의 과보를 의미한다.
197) 사유(死有) 다음 찰나에 간격없이 곧바로 중유(中有)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198)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두 번째로 생사(生死)의 동시(同時)를 밝힌다.
199)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세 번째로 중유(中有)가 제 근(根)을 갖추는 것을 밝힌다.
200)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네 번째로 중유(中有)의 상상(相狀)을 밝힌다.
201)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다섯 번째로 중유(中有)는 매우 깨끗한 천안(天眼)으로 경(境)을 대함을 밝힌다.
202)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여섯 번째로 죽을 때 아애(我愛)가 현행(現行)하는 것과는 다름을 밝힌다.
203)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일곱 번째로 중유(中有)의 당생(當生)의 형(形)을 밝힌다.
204) 식(識)이 이미 중유의 몸을 받아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상속하여 머무르기 때문에 자아(自我)의 단멸(斷滅)을 두려워하여 자체(自體)의 아애(我愛)를 집착하지 않지만 경계에 대한 애(愛)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205)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여덟 번째로 중유(中有)의 안(眼)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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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곳[生處]에만 이른다. 마치206) 신통(神通)을 얻은 것과 같아서 나아가는 곳에 장애는 없지만, 역시 오직 태어날 곳[生處]에만 이른다.
  또한207) 이 눈에 의해서 자기와 같은 종류의 중유(中有)의 유정(有情)을 보고 그리고 자신이 태어날 곳을 본다.
  또한208) 악업을 지은 사람은 눈으로 아래를 청정하다고 보고 얼굴을 숙이고 가며, 천취(天趣)로 가는 이는 (머리를) 위로 하며, 인취(人趣)로 가는 이는 (머리를) 옆으로 한다.
  또한209) 이 중유가 만약 아직 태어날 연[生緣]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꽉 찬 7일 동안 머무르지만 태어날 연[生緣]을 만났을 경우에는 결정할 수 없다.210) 만약 7일이 되어도 아직 태어날 연[生緣]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 7일 동안 머물게 되고, 이와 같이 계속하여, 아직 태어날 연[生緣]을 만나지 못했을 경우에는 49일 동안 머물게 된다. 이 이후부터는 결정적으로 태어날 연[生緣]을 만난다.
  또한211) 7일에 죽어 버린 이 중유는 혹은 곧 이것의 종류212)로 태어나고, 혹은 나머지 업이 전전하기 때문에 중유(中有)의 종자(種子)가 계속할 경우213)에는 곧 다른 종류로 태어난다.
  또한214) 이 중유는 여러 명칭이 있다. 어떤 경우는 죽음[死]과 태어남[生]의
  
206)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아홉 번째로 중유신(中有身)이 가는 곳을 밝힌다.
207)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번째로 중유(中有)는 이취(異趣)를 보지 않음을 밝힌다.
208)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한 번째로 중유(中有)는 선업(先業)의 선(善)과 악(惡)에 따라서 눈으로 정(淨)과 예(穢)를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밝힌다.
209)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두번째로 중유(中有)의 수명(壽命)을 밝힌다.
210) 중유(中有)가 생연(生緣)을 받는 날짜가 결정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211)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세 번째로 중유종자(中有種子)가 전전하는 것을 밝힌다.
212) 인취(人趣) 등을 말한다.
213) 계속 중유(中有)로 전전하는 중유(中有)를 말한다.
214)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네 번째로 중유(中有)의 이명(異名)을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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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가지 종류[類]의 중간에 있으면서 태어나기 때문에 중유(中有)라고 하고, 냄새를 찾아가고 냄새를 먹이로 삼기 때문에 건달박(健達縛)이라고 이름한다. 의(意)를 의지로 삼아서 태어날 곳[生處]에 가기 때문에 의행(意行)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몸이 가는 것을 설하는 것이며, 심연(心緣)으로 가는 것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는 생유(生有)를 일으키기 때문에 취생(趣生)이라고 이름한다. 중유는215) 무색계(無色界)를 제외한 모든 태어나는 곳[生處]에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216) '악업(惡業)을 지었다'란 양 닭 돼지 등을 잡는 것을 말한다. 그 한 가지에 따라도 불율의(不律儀)217)의 중동분(衆同分)에 머무르기 때문에 나락가(那落迦)를 부르는 악(惡) 불선업(不善業)을 짓고 증장하게 된다. 그는 이때 마치 꿈속과 같이 스스로 그 업을 받게 되는 태어날 곳[生處]에서 도리어 이와 같은 종류의 유정(有情)과 양 등을 잡는 일을 보게 되는데, 전에 익혔던 것이기 때문에 기뻐서 내달린다. (이때) 바로 태어날 곳[生處]의 경계[境]의 물질[色]에 의하여 장애를 받아 중유(中有)는 사라지고 생유(生有)가 이어서 일어난다. 그것218)이 없어지려고 할 때는 앞서 사유(死有)와 같이 어지러운[紛亂] 색(色)219)을 본다.
  이와 같이 나머지 생겨나고[生] 사라지는[滅] 도리는 앞과 같음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220) 그것221)이 생겨날 때, 오직 화생(化生)이며 6처(處)를 구족(具足)
  
215)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다섯 번째로 중유(中有)의 3계(界) 존재여부(存在與否)를 밝힌다.
216)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여섯 번째로 중유(中有)의 취향(趣向)의 상(相)을 밝힌다.
217) 계율(戒律)에 반하는 행위(行爲)에서 생기게 되는 악(惡)의 무표색(無表色)을 말한다.
218) 중유(中有)를 가리킨다.
219) 앞에서 밝힌 변괴상(變怪相)을 말한다.
220)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일곱 번째로 중유(中有)는 오직 화생(化生)임을 밝힌다.
221) 중유(中有)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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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다시222) '나[我]는 그와 재미있게 즐기며 즐거움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기예(伎藝)를 익히리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면서도 여기223)로 나아간다. 그는 이때 전도(顚倒)되어 여러 가지 사업(事業)을 짓고 냉(冷) 열(熱)을 느낀다. 망견(妄見)을 여의면 이와 같은 상모(相貌)에도 오히려 취욕(趣欲)224)이 없었을 텐데 하물며 그곳225)으로 가겠는가. 만약 거기로 가지 않으면 마땅히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락가(那落迦)처럼 다른 나락가(那落迦)와 흡사한 아귀[鬼]의 취(趣) 가운데 태어나는 것도 이 영귀(癭鬼)와 같다고 알아야만 한다. 또한 나머지 아귀[鬼] 방생(傍生) 인(人) 등 및 욕(欲) 색계천(色界天)의 중동분(衆同分)에서 생(生)을 받으려고 할 때 태어나야 할 곳[當生處]에서 자기와 동류(同類)의 가의(可意)의 유정(有情)을 본다. 이 때문에 그는 기쁨[欣樂]이 일어나서 태어날 곳[生處]에 가서 곧바로 걸리게 된다.
  죽고 태어나는[死生] 도리(道理) 또한 앞의 경우와 같음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226) 세 가지[三處]가 현행하기 때문에 모태(母胎)에 들어갈 수 있다. 즉 첫째는 그 어미[母]가 조적(調適)하면서도 때를 만나야 하고, 둘째는 부모가 화합하여 함께 애염(愛染)을 일으켜야 하고, 셋째는 건달박(健達縛)이 바로 현재전(現在前)해야 한다.
  다시227) 세 가지 장애, 즉 산처(産處)의 과환(過患)의 소작(所作) 종자(種子)의 과환(過患)의 소작(所作) 숙업(宿業)의 과환(過患)의 소작(所作)이 없어야 한다.
  
222)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여덟 번째로 중유(中有)의 취향심(趣向心)을 밝힌다.
223) 나락가취(那落迦趣)를 가리킨다.
224) 6취(趣)로 나아가려는 욕구를 말한다.
225) 나락가취(那落迦趣)를 가리킨다.
226)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아홉 번째로 3처(處)의 현전(現前)에 의하여 모태(母胎)에 들어가는 것을 밝힌다.
227)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스무 번째로 세 가지 장애가 없을 때, 중유(中有)가 모태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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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산처(産處)의 과환(過患)이라 하는가?
  아이 낳는 곳[産處]이 풍병(風病)과 열병(熱病)으로 핍박(逼迫)받거나, 혹은 그 안228)에 마맥과(麻麥果)229)가 있거나, 혹은 그 문(門)230)이 마치 차라(車螺)와 같은 형상231)이거나 굽은 형상이거나 더럽거나 탁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종류가 산처(産處)의 과환(過患)인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종자(種子)의 과환(過患)이라고 하는가?
  아비[父]는 부정(不淨)을 내고 어미[母]는 그렇지 않거나, 혹은 어미[母]는 내고 아비[父]는 내지 않거나, 혹은 둘 다 내지 않거나, 혹은 아비[父]의 정(精)이 썩었거나, 혹은 어미[母]의 정(精)이 썩었거나, 혹은 둘 다 썩었거나 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종류가 종자(種子)의 과환(過患)인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숙업(宿業)의 과환(過患)이라 하는가?
  아비[父] 또는 어미[母]가 자식을 얻을[感] 업(業)을 짓지 않고 증장(增長)하지 않았거나, 혹은 둘 다 짓지 않았거나, 혹은 그232) 유정(有情)이 부모를 얻을 업을 짓지 않고 증장(增長)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233)의 부모가 다른 자식을 얻을 업을 짓고 증장(增長)하였거나, 혹은 그 유정이 다른 부모를 얻을 업을 짓고 증장하였거나, 혹은 대종엽(大宗葉)234)을 얻을 업, 또는 비대종엽(非大宗葉)을 얻을 업을 말하니, 이와 같은 종류가 숙업(宿業)의 과환(過患)임을 알아야만 한다.
  만약 이와 같은 세 가지의 과환(過患)235)이 없고 세 가지[三處]236)가 현전
  
228) 산처(産處)를 가리킨다.
229) 태아가 자라는 것을 장애하는 보리씨와 같은 일종의 혹을 말한다.
230) 산문(産門)을 말한다.
231) 산문(産門)이 넓은 것을 말한다.
232) 중유(中有)를 가리킨다.
233) 중유(中有)를 가리킨다.
234) 불공역(不空譯)의 『왕법정론경(王法政論經)』에서는 종족(種族)으로 번역한다. 본가(本家)와 분가(分家)가 왕성한 일족(一族)을 대종엽가(大宗葉家)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자신과 부모(父母)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235) 위에서 밝힌 산처과환(産處過患)의 소작(所作) 종자과환(種子過患)의 소작(所作) 숙업과환(宿業過患)의 소작(所作)을 말한다.
236) 위에서 밝힌 중유(中有)의 모(母)가 조적(調適)하면서도 때를 만나야 하는 것과 중유(中有)의 부모(父母)가 화합(和合)하여 함께 애염(愛染)을 일으켜야 하는 것과 건달박(健達縛)이 바로 현재전(現在前)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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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現前)하면, 모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곧 중유의 처소에서 자기와 같은 종류[同類]인 유정(有情)이 기뻐하는 것[喜戲] 등을 보고 태어날 곳[所生處]에 나아가려는 욕구를 일으킨다.
  그는237) 이때 그 부모가 함께 사행(邪行)하여 나오는 정혈(精血)을 보고 전도(顚倒)를 일으킨다. 전도(顚倒)를 일으킨다는 것은 부모가 삿된 행[邪行]을 행하는 것을 볼 때, 부모가 삿된 행[邪行]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착각[倒覺]을 일으켜서 자기가 스스로 행하는 것이라고 보고, 자기가 스스로 행한 것을 보고 나서 곧바로 탐애(貪愛)를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지금 여자가 되고자 하면 그는 곧 아비[父]에게 회탐(會貪)238)을 일으키며, 지금 남자가 되고자 하면 그는 곧 어미[母]에게 탐애[貪]를 일으키는 것도 그러하다. 곧 가까이 가서는 여자일 경우에는 어미[母]에게서 그가 멀어지려고 하고, 남자일 경우에 있어서 아비[父]에 대한 마음도 또한 이와 같다.
  이러한 욕구를 일으키고[生] 나서는 혹은 남자만을 보고 혹은 여자만을 보면서 점점 그 처소239)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부모의 다른 부분을 보지 못하고 오직 남녀의 근문(根門)만을 보아서 곧 이 곳240)에 걸리게 된다.
  죽고 태어나는[死生] 도리(道理)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만 한다.
  박복자(薄福者)일241) 경우는 하천한 집에 태어나려고 하면서, 그는 죽을 때[死時]와 태 안에 들어갈 때[入胎時] 곧 여러 가지 어지러운[紛亂] 소리를 듣고도 헛되이 스스로 숲 대나무 갈대 등의 속으로 들어간다고 본다.
  다복자(多福者)의 경우는 존귀한 집에 태어나려고 하면서, 그는 이 때242)
  
237)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스물 한 번째로 중유(中有)가 부모(父母)에게 전도(顚倒)를 일으키는 것을 밝힌다.
238) 아비가 어미에게 탐애(貪愛)를 일으키는 것과 똑같은 탐애를 일으키기 때문에 회탐(會貪)이라고 한다.
239) 태(胎)를 말한다.
240) 태(胎)를 가리킨다.
241)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마지막으로 박복(薄福) 다복(多福)의 중유(中有)에 대하여 밝힌다.
242) 사시(死時)와 입태시(入胎時)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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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스스로 어떤 적정(寂靜)하고 미묘하고 가의(可意)의 소리를 듣고도 헛되이 스스로 궁전 등을 오르는 가의상(可意相)이 나타남을 본다.
  부모의243) 탐애(貪愛)가 모두 지극하여 결정적으로 최고일 때에, 각각 한 방울씩 짙은 정혈(精血)을 내는데, 두 방울은 화합하여 모태 안에서 마치 끓인 우유가 응결된 것처럼 한 덩어리로 합성(合成)한다. 이곳244)에 일체종자(一切種子)의 이숙에 포함되는[異熟所攝] 집수소의(執受所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화합하여 의탁하게 된다.
  '화합하여 의탁한다'란 무엇인가?
  여기에서245) 나온 짙은 정혈(精血)이 한 덩어리로 합쳐지면 전도(顚倒)의 연(緣)246)과 함께 중유(中有)도 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라짐과 동시에 곧 일체종자의 식(識)의 공능력(功能力) 때문에 다른 미세한 근(根)과 대종(大宗)이 있어서 화합하여 생기며 그리고 나머지 유근(有根)의 동분(同分)은 정혈과 화합하여 뭉쳐 나오게 된다.
  이 시기를 식(識)이 이미 머물러서 결생상속(結生相續)한다고 설하는 것이며, 곧 이것을 갈라람위(羯羅藍位)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갈라람(羯羅藍)에는 제 근(根)의 대종(大種)이 있는데, 오직 신근(身根)과 신근(身根)의 소의처(所依處)인 대종(大種)이 함께 생긴 것이다. 곧 이 신근(身根)과 함께 생기는 제 근(根)의 대종력(大種力) 때문에 안(眼) 등의 제 근(根)이 차례로 생겨나게 된다. 또한 이 신근(身根)과 함께 생겨나는 제 근(根)의 소의처(所依處)인 대종력(大種力) 때문에 제 근(根)의 의지처가 차례로 생겨나게 된다. 이 제 근(根)과 소의처(所依處)가 구족(具足)하여 생기기 때문에, 득원만의지성취(得圓滿依止成就)라고 하며, 또한 이 갈라람(羯羅藍)의 색(色)은 심(心) 심소(心所)와 안위(安危)를 함께하기 때문에 의탁(依託)이라고 한다.
  
243) 이하는 생유(生有)를 두 가지로 밝힌다. 첫째는 식지(識支)의 맨 처음에 의탁(依託)하는 것을 밝히고, 둘째는 종자(種子)의 구(具) 불구(不具)를 밝힌다.
244) 모태(母胎)를 말한다.
245) 모태(母胎)를 가리킨다.
246) 중유(中有)의 맨 마지막 마음에 애에(愛恚)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전도(顚倒)라 하고 중유의 마지막 신(身)을 전도(顚倒)의 연(緣)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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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心) 심소(心所)의 의탁력(依託力) 때문에 색(色)은 없어지지 않고, 색(色)의 손해[損]와 이익[益]때문에 그것도 또한 손해하고 이익하기 때문에 그것을 안위공동(安危共同)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 갈라람(羯羅藍)은 식(識)이 최초로 의탁하는 곳이므로 육심(肉心)247)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식(識)이 이곳에 맨 처음 의탁하기 때문에 이곳을 가장 마지막에 버리는 것이다.
247) 심장(心臟)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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