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9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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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 9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3) 유심유사 등 3지 ⑥
  
  다음에 업(業)의 문(門)이란 무엇인가?1)
  여기에 간략히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여과문(與果門)이요, 둘째는 손익문(損益門)이다. 여과문(與果門)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이숙과를 부여하는 것[與異熟果]이고, 둘째는 등류과를 부여하는 것[與等流果]이고, 셋째는 증상과를 부여하는 것[與增上果]이고, 넷째는 현법과를 부여하는 것[與現法果]이고, 다섯째는 다른 증상과를 부여하는 것[與他增上果]이다.
  이숙과를 부여하는 것[與異熟果]이란 살생(殺生)을 가까이 수습(修習)하고 자주 수습하였기 때문에 나락가(那落迦)에서 이숙과(異熟果)를 받는 것을 말한다. 살생에 있어서 이와 같듯이 다른 불선업도(不善業道)도 또한 그러하다. 이를 이숙과를 부여하는 것[與異熟果]이라고 한다.
  등류과를 부여하는 것[與等流果]이란 저곳으로부터 이 세간[間]에 인간[人]의 동분(同分) 중에 태어나서 수명[壽量]이 짧고 재물이 모자라며, 아내가 정숙하지 못하고 많은 비방(誹謗)을 당하고, 친한 벗[親友]과 어긋나
  
1) 잡염등기(雜染等起)의 시설건립(施設建立) 가운데 업잡염(業雜染)을 기술한다. 업잡염(業雜染)은 아홉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되는데, 이하는 다섯 번째로 업(業)의 문(門)에 대해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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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乖離],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듣고, 위의와 엄숙함[威肅]이 없이 말하고, 맹리(猛利)한 탐(貪)을 증장하고, 맹리한 진(瞋)을 증장하고, 맹리한 치(癡)를 증장하는 것이니, 이를 등류과를 부여하는 것[與等流果]이라고 한다.
  증상과를 부여하는 것[與增上果]이란 여러 가지 불선업(不善業)을 가까이 수습(修習)하고 자주 수습하는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所感] 바깥 부분[外分]의 광택이 줄어들고, 결과[果]가 충실하지 않고, 결과가 대부분 썩어버리고, 결과가 대부분 변해버리고, 결과가 대부분 떨어지고, 결과가 감미롭지 않으며, 결과가 늘 같지[恒常] 않고, 결과가 충만하지 않으며, 결과가 형편없이 좋지 않고 텅비어서 과실(果實)이 없는 것이다. 선업(善業)은 이것과 상위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현법과를 부여하는 것[與現法果]이란 첫째 욕해(欲解)에 의하고, 둘째 사(事)에 의한 두 가지 인연(因緣)이 있어서 선(善) 불선업(不善業)의 현법과(現法果)를 부여하는 것이다.
  욕해(欲解)에 다시 여덟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유고욕해(有顧欲解)요, 둘째는 무고욕해(無顧欲解)요, 셋째는 손뇌욕해(損惱欲解)요, 넷째는 자비욕해(慈悲欲解)요, 다섯째는 증해욕해(憎害欲解)요, 여섯째는 정신욕해(淨信欲解)요, 일곱째는 기은욕해(棄恩欲解)요, 여덟째는 지은욕해(知恩欲解)이다.
  유고욕해(有顧欲解)란 불선업(不善業)을 지어서 현법과(現法果)를 받는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증상(增上)의 욕해(欲解)에 의해서 그 몸을 연연[顧戀]2)해하고 재물을 연연해하고, 모든 존재[諸有]를 연연해하면서 불선업(不善業)을 짓는 것과 같다.
  무고욕해(無顧欲解)란 선업(善業)을 지어서 현법과(現法果)를 받는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증상의 욕해에 의해서 그 몸을 연연[顧戀]해하지 않고 재물을 연연해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諸有]를 연연해하지 않아서 선업(善業)을 짓는 것과 같다.
  손뇌욕해(損惱欲解)란 불선업(不善業)을 지어서 현법과(現法果)를 받는
  
2) 마음 속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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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다른 유정(有情)인 보특가라(補特伽羅)에 대해서 증상품(增上品)의 손뇌욕해(損惱欲解)에 의해서 불선업(不善業)을 짓는 것과 같다.
  자비욕해(慈悲欲解)란 선업(善業)을 지어서 현법과(現法果)를 받는 것이니, 어떤 사람이 다른 유정인 보특가라에게 증상품(增上品)의 자비욕해(慈悲欲解)에 의해서 선업(善業)을 짓는 것과 같다.
  증해욕해(憎害欲解)란 불선업(不善業)을 지어서 현법과(現法果)를 받는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불(佛) 법(法) 승(僧)에 대해서 그리고 일종(一種)의 존중해야 할 곳에 대해서 증상품(增上品)의 증해욕해(憎害欲解)에 의해서 불선업(不善業)을 짓는 것과 같다.
  정신욕해(淨信欲解)란 선업(善業)을 지어서 현법과(現法果)를 받는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불(佛) 법(法) 승(僧) 등에 대해서 증상품(增上品)의 정신욕해(淨信欲解)에 의해서 선업(善業)을 짓는 것과 같다.
  기은욕해(棄恩欲解)란 불선업(不善業)을 지어서 현법과(現法果)를 받는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 또는 일종의 은혜를 입은 곳에 증상품(增上品)의 배은(背恩)의 욕해(欲解)와 속임[欺誑]의 욕해와 혹독[酷暴]한 욕해에 의해서 불선업(不善業)을 짓는 것과 같다.
  지은욕해(知恩欲解)란 선업(善業)을 지어서 현법과(現法果)를 받는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부모 등에 대해서 증상품(增上品)의 지은(知恩)의 욕해(欲解)와 보은(報恩)의 욕해(欲解)에 의해서 선업(善業)을 짓는 것과 같다.
  사(事)에 의하기 때문이란 불선업(不善業)일 경우에는 5무간(無間)과 그것3)의 중동분(衆同分)에서 역시 현법과(現法果)를 받게 되는 것이다. 5무간업(無間業)이란 첫째는 어머니를 해치는 것이고, 둘째는 아버지를 해치는 것이며, 셋째는 아라한(阿羅漢)을 해치는 것이며, 넷째는 승가를 파괴하는 것[破僧]이고, 다섯째는 여래(如來)에게 악심(惡心)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다.
  
3) 5무간(無間)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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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간업(無間業)의 동분(同分)이란 어떤 사람이 아라한인 비구니[尼]와 그 어머니에게 더러운 행[穢染行]을 행하고, 최후유(最後有)의 보살4)을 때리고, 천묘(天廟)5)와 거리[衢路]와 시장[市肆]에서 양(羊)을 죽이는 법(法)을 만들어서 끊임없이 유행(流行)시키며, 혹은 매우 위중(委重)하여 기탁(寄託)해야 할 착한 벗과 동심(同心)과 매우 늙은 노인[耆舊]에게 손해를 입히고 속이며, 혹은 괴로움이 있고 빈궁하고 곤핍하며 의지할 데 없고 믿을 데 없는 것에 귀의(歸依)하게 하여 무외(無畏)를 베풀고 나서는 나중에 도리어 해를 끼치고 괴롭히며, 혹은 다시 승문(僧門)6)을 강제로 빼앗으며, 혹은 영묘(靈廟)를 파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은 업(業)을 무간(無間)의 동분(同分)이라고 한다.
  여러 선업(善業)일 경우에는 사실의 중함[事重]에 의하여 현법과(現法果)를 받는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바른 믿음[正信]이 없는데도 어머니에게 도(道)를 권하여 개화하게 하고, 믿음을 갖추는 것[具信] 가운데에 안치(安置)하고 건립(建立)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른 믿음[正信]이 없는데도 믿음을 갖추는 것[具信]에 두는 것이 이와 같듯이, 계(戒)를 범하는데도 계를 갖추는 것[具戒]에 두는 것과 인색[慳悋]한데도 베품을 갖추는 것[具捨]에 두는 것과 악혜(惡慧)인데도 혜를 갖추는 것[具慧]에 두는 것도 그러하며, 어머니의 경우와 같이 아버지도 그러하다.
  혹은 자정(慈定)7)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공양하고 받들어 모시기도[承事] 하는데, 자정(慈定)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이와 같이 하듯이, 무쟁정(無諍定) 멸진정(滅盡定) 예류과(預流果) 아라한과(阿羅漢果)을 일으켰을 경우에도 공양하고 받들어 모심도 그러하다. 또한 친히 부처님께 공양하고 받들어 모시기도 하는데, 부처님께 이와 같이 하듯이, 학(學) 무학승(無學僧)한테도 그렇게 한다. 만약 이러한 존중사(尊重事)에 대하여 이와 상위한다면
  
4) 석존(釋尊)의 최후신(最後身)은 마야(摩耶) 부인의 태생의 보살이라고 하여, 최후유(最後有)의 보살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5)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당을 말한다.
6) 승가[僧門]의 상주물(常主物)을 말한다.
7) 일체중생(一切衆生)에 대하여 자비심(慈悲心)을 갖는 선법(善法)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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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을 손해하기 때문에 불선업(不善業)을 일으켜서 현법과(現法果)를 받는다.
  다른 증상과를 부여하는 것[與他增上果]이란 역시 현법과를 받을 업에 의하는 것이니, 마치 여래께서 머물고 계신 나라와 읍은 부처님의 신통력[神力] 때문에, 반드시 질역(疾疫)과 재횡(災橫)이 일어나지 않아서 무량중생(無量衆生)에게 질병도 없고 돌림병도 없으며 재횡(災橫)도 없어서 안락하게 머무르게 되는 것과 같다. 불(佛) 세존(世尊)이 이와 같듯이, 전륜성왕(轉輪聖王) 및 자정(慈定)에 머무르는 보살도 또한 그러하다.
  또한 여러 보살들은 대비심(大悲心)으로 모든 빈궁(貧窮)과 괴로움[困苦]과 업천(業天)8)에 시달리는 중생을 관찰하여 음식(飮食) 재곡(財穀)의 창고[庫藏]를 풀어서 모두 충족시킨다. 이러한 인연에 의하여 그 중생들은 안락하게 머무르게 된다. 이와 같은 종류들을 다른 증상[他增上] 소생(所生)의 현법수업[現法受業]이라고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손익문(損益門)이란 여러 유정들에게 10불선업도(不善業道)에 의거하여 여덟 가지 손해문(損害門)을 건립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여덟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중생을 손해(損害)하는 것이며, 둘째는 재물(財物)을 손해하는 것이며, 셋째는 처첩(妻妾)을 손해하는 것이며, 넷째는 허위(虛僞)의 증거[友證]로 손해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조반(助伴)을 손해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과실(過失)을 드러내어 말하여 손해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방일(放逸)을 끌어당겨서 손해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포외(怖畏)를 끌어당겨서 손해하는 것이다. 이것과 상위한 것은 10선업도(善業道)에 의거하여 여덟 가지 이익문(利益門)이 건립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업(業)의 증상(增上)이란 무엇인가?9)
  맹리(猛利)하고 무거운 업을 말한다. 이 업은 여섯 가지의 상(相)에 의함을
  
8) 세속(世俗)에서는 대부분 선악(善惡)을 하늘의 이치[天理]로 돌리지만, 실제로는 업력에 의한 것이므로, 업(業)을 지칭하여 천(天)이라고 하는 것이다.
9) 업잡염(業雜染)은 아홉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되는데, 이하는 그 여섯 번째로 업(業)의 상품(上品)에 대해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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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가행(加行) 때문이요, 둘째는 자주 익혔기[串習] 때문이요, 셋째는 자성(自性) 때문이요, 넷째는 사건[事] 때문이요, 다섯째는 소치와 같은 부류[所治一類] 때문이요, 여섯째는 소치를 손해하는 것[所治損害] 때문이다.
  '가행(加行) 때문'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매우 맹렬한[極猛利] 탐(貪) 진(瞋) 치(癡)의 전(纏) 및 매우 맹렬한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의 가행(加行)에 의하여 여러 가지 업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주 익혔기[串習] 때문'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불선(不善) 선(善)의 업을 가까이 수습하고 또는 자주 수습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성(自性) 때문'이란 말하자면 기어(綺語)보다는 추악어(麤惡語)를 대중죄(大重罪)라고 하며, 추악어(麤惡語)보다는 이간어(離間語)를 대중죄라고 하며, 이간어(離間語)보다는 망어(妄語)를 대중죄라고 하며, 욕사행(欲邪行)보다는 불여취(不與取)를 대중죄라고 하며, 불여취(不與取)보다는 살생(殺生)을 대중죄라고 하며, 탐욕(貪欲)보다는 진에(瞋恚)를 대중죄라고 하며, 진에(瞋恚)보다는 사견(邪見)을 대중죄라고 하며, 또한 시성(施性)보다는 계성(戒性)의 무죄(無罪)를 뛰어나다[勝]고 하며, 계성(戒性)보다는 수성(修性)의 무죄(無罪)를 뛰어나다고 하며, 문성(聞性)보다는 사성(思性)의 무죄(無罪)를 뛰어나다고 하는 이와 같은 등이다.
  '사건[事] 때문'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불(佛) 법(法) 승(僧) 및 일종의 존중해야 할 곳에게 손해를 입히고 이익을 주는 것을 존중업(尊重業)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치(所治)와 같은 부류 때문'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한결같이[一向] 여러 가지 불선업(不善業)을 받아 행하고[受行],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시라도 선(善)을 행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치를 손해하는 것[所治損害) 때문'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대치해야 할[所對治] 불선업(不善業)들을 끊고, 여러 선업(善業)들로 하여금 탐욕을 여의고 청정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업의 전도(顚倒)란 무엇인가?10)
  
10) 업잡염(業雜染)은 아홉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되는데, 이하는 그 일곱 번째로 업(業)의 전도(顚倒)에 대해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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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작용(作用)의 전도(顚倒)이며, 둘째는 집수(執受)의 전도(顚倒)이며, 셋째는 희락(憙樂)의 전도(顚倒)인 줄 알아야만 한다.
  작용(作用)의 전도(顚倒)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다른 중생을 살해하려고 생각하다가 잘못하여 그 밖의 사람을 살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경우는 살생(殺生)을 하였지만 살생의 죄는 없다. 그러나 살생의 종류(種類)는 있어서 살생의 상사동분(相似同分)의 죄가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 밖의 중생을 잘못하여 죽이지 않았을지라도 유정이 아닌 것[非情]에게 칼과 몽둥이[刀杖]을 가하고 나서 '나는 살생하였다'고 말한다면 이 경우에는 살생(殺生)도 없고 살생(殺生)의 죄도 없다. 그러나 살생의 종류는 있어서 살생의 상사동분(相似同分)의 죄는 생긴다. 살생(殺生)의 업도(業道)가 이와 같듯이 불여취(不與取) 등 모든 업도(業道)도 그 상응하는 바에 따른 작용의 전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집수(執受)의 전도(顚倒)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베풀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다. 내지 …… '라고 이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 모든 사견(邪見)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결국 살해하는 자[能殺] 살해당하는 자[所殺] 및 또한 불여취(不與取)에서 기어(綺語)에 이르기까지도 없으며, 시여(施與) 재를 받는 것[受齋] 복을 닦는 것[修福] 수학(受學) 시라(尸羅)도 없으며, 이러한 인연에 의하여 죄도 없고 복도 없다'고 이러한 주장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어떤 중생이 범(梵)을 미워하고 천(天)을 미워하며 바라문(婆羅門)을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사람[憎惡]은 살해해야만 하리니, 그를 살해한 인연은 오직 복(福)일 뿐 죄는 없다. 또한 그에게 일으키는 불여취(不與取) 내지 기어(綺語)는 오직 복덕(福德)을 얻고 복 아닌 것이 없다'고 이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 것과 같다.
  희락(憙樂)의 전도(顚倒)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불선(不善)의 업도(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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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道)를 현전에 행할 때 유희법(遊戲法)과 같이 매우 기뻐하며 즐기는 것과 같다.
  업(業)의 차별(差別)이란 무엇인가?11)
  말하자면 짓는 업[作業]이 있고 짓지 않는 업[不作業]이 있으며, 증장하는 업[增長業]이 있고 증장하지 않는 업[不增長業]이 있으며, 고의의 사업[故思業]이 있고 고의가 아닌 사업[不故思業]이 있으며, 이와 같이 일정한 이숙업[定異熟業] 일정하지 않은 이숙업[不定異熟業]이 있으며, 이숙이이미 익은 업[異熟已熟業] 이숙이 아직 익지 않은 업[異熟未熟業]이 있으며, 선업(善業) 불선업(不善業) 무기업(無記業)이 있으며, 율의에 포함되는 업[律儀所攝業] 불율의에 포함되는 업[不律儀所攝業] 율의도 아니고 불율의도 아닌 것에 포함되는 업[非律儀非不律儀所攝業]이 있으며, 시성업(施性業) 계성업(戒性業) 수성업(修性業)이 있으며, 복업(福業) 비복업(非福業) 부동업(不動業)이 있으며, 순락수업(順樂受業) 순고수업(順苦受業) 순불고불락수업(順不苦不樂受業)이 있으며,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 순생수업(順生受業) 순후수업(順後受業)이 있으며, 과거업(過去業) 미래업(未來業) 현재업(現在業)이 있으며, 욕계업(欲繫業) 색계업(色繫業) 무색계업(無色繫業)이 있으며, 학업(學業) 무학업(無學業) 비학비무학업(非學非無學業)이 있으며, 견도에서 끊어지는 업[見所斷業] 수도에서 끊어지는 업[修所斷業] 끊을 것이 없는 업[無斷業]이 있으며, 검고 검은 이숙업[黑黑異熟業] 희고 흰 이숙업[白白異熟業] 검고 희고 검고 흰 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고 이숙도 없는 업이 다한 모든 업[非黑非白無異熟業能盡諸業]이 있으며, 굽은 업[曲業] 더러운 업[穢業] 흐린 업[濁業] 청정한 업[淸淨業] 적정한 업[寂靜業]이 있다.
  짓는 업[作業]이란 사업(思業)이나 또는 사이업[思已]에서 일어난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말하고, 짓지 않는 업[不作業]12)이란 불사업(不思業)이나
  
11) 업잡염(業雜染)은 아홉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되는데, 이하는 그 여덟 번째로 업(業)의 차별(差別)에 대해서 기술한다.
12) 무표업(無表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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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는 불사이업[不思已]에서 일어나지 않은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말한다.
  증장하는 업[增長業]이란 말하자면 열 가지 업을 제외하는 것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꿈에서 짓게 되는 업이며, 둘째는 무지(無知)에서 짓게 되는 업이며, 셋째는 고의[故思]없이 짓게 되는 업이며, 넷째는 이롭지도 않고 헤아리지도 않고 짓게 되는 업이며, 다섯째는 미쳐서 짓게 되는 업이며, 여섯째는 실념(失念)하여 짓게 되는 업이며, 일곱째는 욕락(欲樂)하지 않고 짓게 되는 업이며, 여덟째는 자성(自性)이 무기(無記)인 업이며, 아홉째는 후회하여 덜게 되는 업이며, 열째는 대치하여 덜게 되는 업이다. 이 열 가지를 제외한 그 밖의 여러 가지 업들을 증장(增長)이라고 한다. 증장하지 않는 업[不增長業]이란, 즉 앞에서 설한 열 가지 업을 말한다.
  고의의 사업[故思業]이란 고의로 생각하고 나서 업을 짓거나 업을 증장하는 것을 말하고, 고의가 아닌 사업[不故思業]이란 고의로 생각하지 않고 짓게 되는 업을 말한다.
  순정수업(順定受業)이란 고의로 생각하고 나서 업을 짓거나 증장하는 것을 말하고, 순불정수업(順不定受業)이란 고의로 생각하고 나서 업을 지었으나 증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숙이 이미 익은 업[異熟已熟業]이란 이미 과(果)를 부여한 업을 말하고, 이숙이 아직 익지 않은 업[異熟未熟業]이란 아직 과(果)를 부여하지 않은 업을 말한다.
  선업(善業)이란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를 인연(因緣)으로 삼는 업을 말하며, 불선업(不善業)이란 탐(貪) 진(瞋) 치(癡)를 인연(因緣)으로 삼는 업(業)을 말하며, 무기업(無記業)이란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도 인연으로 삼지 않고 탐(貪) 진(瞋) 치(癡)도 인연(因緣)을 삼지 않는 업을 말하다.
  율의에 포함되는 업[律儀所攝業]13)이란 별해탈율의에 포함되는 업[別解脫
  
13) 이하의 율의(律儀) 불율의(不律儀) 비율의비불율의(非律儀非不律儀)의 셋은 무표업(無表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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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律儀所攝業]14)이나 혹은 정려 등지 과 및 단의 율의에 포함되는 업[靜慮等至果斷律儀所攝業]15)이나 혹은 무루율의에 포함되는 업[無漏律儀所攝業]16)을 말하며, 불율의17)에 포함되는 업[不律儀所攝業]이란 열 두 가지의 불율의 종류에 포함되는 업들을 말한다.
  무엇이 열 두 가지의 불율의(不律儀) 종류에 포함되는 업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양을 잡는 것이며, 둘째는 닭을 파는 것이며, 셋째는 돼지를 파는 것이며, 넷째는 새를 잡는 것이며, 다섯째는 토끼를 사냥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도둑질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감옥을 지키는 것이며, 아홉째는 헐뜯는 것[讒刺]이며, 열째는 옥(獄)을 절단하는 것이며, 열 한 번째는 코끼리를 포박하는 것이며, 열 둘째는 용에게 비는 것[呪龍]이다. 율의도 아니고 불율의도 아닌 것에 포함되는 업[非律儀非不律儀所攝業]이란 세 가지 율의업(律儀業) 및 불율의(不律儀) 종류의 업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의 업을 말한다.
  시성업(施性業)이란 인연(因緣)과 등기(等起)와 의처(依處)와 자성(自性)을 말한다. 그것18)의 인연은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를 인연으로 삼는 것을 말하고, 그것의 등기(等起)는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
  
14) 5계(戒) 8계(戒) 10계(戒) 구족계(具足戒)가 있는데,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등으로 차례대로 계(戒)를 받고, 따로따로 죄악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별해탈(別解脫)이라고 하는 것이며, 정공계(定共戒)와 도공계(道共戒)와 같은 것은 종합적으로 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15) 정려(靜慮)란 색계의 4정려(靜慮)를 말하고, 등지(等至)란 4무색정(無色定)을 말하며, 과(果)란 정려(靜慮)와 무색(無色)에 의지하여 닦아서 생기게 되는 공덕(功德)을 말하며, 단(斷)이란 욕계의 범계(犯戒)의 잘못을 막는 단계(斷戒)를 말한다. 즉 정려와 무색의 과(果)인 무표(無表)의 계체(戒體)는 악을 끊고 잘못을 막기 때문에 정려등지과단(靜慮等至果斷)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 정려율의(靜慮律儀)라고도 하며, 정공계(定共戒)라고도 한다. 또한 이는 유루정(有漏定)에 들어서 얻는 계(戒)이다.
16)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의 성자가 무루정(無漏定)에서 얻는 무루(無漏)의 계체(戒體)이며, 도공계(道共戒)라고도 한다.
17) 다음에서 열거하는 악행(惡行)은 율의(律儀)에 반대되는 악업(惡業)이므로 불율의(不律儀)라고 이름한다.
18) 시성업(施性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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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癡)와 함께하면서 시물(施物)을 베풀어서 능히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일으키는 생각[思]를 말하며, 그것의 의처(依處)란 시물(施物)과 받는 사람[受者]을 의지처[依處]로 삼는 것을 말하며, 그것의 자성(自性)은 생각[思]를 일으켜서 시물(施物)을 능히 베푸는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말한다. 시성업(施性業)이 이와 같듯이 계성업(戒性業)과 수성업(修性業)도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 계성업(戒性業)의 인연(因緣)과 등기(等起)는 앞의 내용과 같으며, 자성(自性)은 율의(律儀)에 포함되는 신업과 어업 등을 말하며, 의지처[依處]는 유정(有情) 비유정(非有情)의 수(數)의 시물[物]을 말하는 것이다.
  수성업[修性]의 인연(因緣)이란 삼마지(三摩地)의 인연인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를 말하며, 등기(等起)란 그것19)과 함께하면서 정(定)을 끌어 일으키는 생각[思]를 말하며, 자성(自性)은 삼마지(三摩地)를 말하고, 의지처[依處]는 시방(十方)의 고(苦) 낙(樂) 등이 없는 유정계(有情界)20)를 말한다. 또한 시(施) 계(戒) 수(修)를 갖춘 것의 모든 모습[相貌]은 모두 다른 곳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복업(福業)이란 선취(善趣)의 이숙(異熟)을 부르고 5취(趣)의 수(受)에 따른 선업(善業)을 말하며, 비복업(非福業)이란 악취(惡趣)의 이숙을 부르고 5취(趣)의 수(受)에 따른 불선업(不善業)을 것을 말한다. 부동업(不動業)이란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이숙을 부르고 색계와 무색계(無色界)의 수(受)에 따른 선업(善業)을 말한다.
  순락수업(順樂受業)이란 복업과 3정려(靜慮)의 수(受)에 따른 부동업(不
  
19)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를 가리킨다.
20) 소연(所緣)의 3계(界)의 유정(有情)을 묶어서 세 가지로 종류로 한다. 첫째 고(苦)도 없고 낙(樂)도 없는 자에게 낙(樂)을 주는 것을 자(慈)라고 하며, 둘째 고(苦)가 있는 자에게 고(苦)를 뽑아내는 것을 비(悲)라고 하며, 셋째 낙(樂)이 있는 자를 기쁘게끔 돕는 것을 희(喜)라고 한다. 첫 번째 종류에서는 치(癡)를 여의는 상(想)을 일으키고, 두 번째 종류에서는 진(瞋)을 여의는 상(想)을 일으키고, 세 번째 종류에서는 탐(貪)을 여의는 상(想)을 일으킨다. 평등하게 악(惡)을 여의도록 하는 것은 사(捨)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자(慈)의 경(境)을 거론하고 나머지 세 가지를 '등(等)'이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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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動業)을 말하며, 순고수업(順苦受業)이란 비복업(非福業)을 말하며, 순불고불락수업(順不苦不樂受業)이란 능히 일체처(一切處)21)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이숙을 부르는 업과 제 4정려 이상의 부동업(不動業)을 말한다.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이란 능히 현법과(現法果)를 부르는 업을 말하며, 순생수업(順生受業)이란 능히 끊임없이 태어남의 과(果)를 부르는 업을 말하며, 순후수업(順後受業)이란 다음 생에서 과(果)를 부르는 업을 말한다.
  과거업(過去業)이란 습기위(習氣位)에 머무르거나 혹은 과(果)를 부여했거나 아직 과(果)를 부여하지 않은 업을 말한다. 미래업(未來業)이란 아직 생기지 않고 아직 멸하지 않은 업을 말하며, 현재업(現在業)이란 이미 만들어지고 이미 생각한 것이지만 아직 사멸(謝滅)하지 않은 업을 말한다.
  욕계업(欲繫業)이란 능히 욕계(欲界)의 이숙(異熟)을 불러서 욕계(欲界)로 떨어지는 업을 말하며, 색계업(色繫業)이란 능히 색계(色界)의 이숙을 불러서 색계(色界)로 떨어지는 업을 말하며, 무색계업(無色繫業)이란 능히 무색계(無色界)의 이숙을 불러서 무색계(無色界)로 떨어지는 업을 말한다.
  학업(學業)이란 이생(異生)이나 이생이 아닌 것[非異生]이 학(學)을 상속하는 가운데에 있는 선업(善業)을 말하고, 무학업(無學業)이란 무학(無學)을 상속하는 가운데에 있는 선업을 말하며, 비학비무학업(非學非無學業)이란 앞의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를 상속하는 가운데에 있는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의 업을 말한다.
  견도에서 끊어지는 업[見所斷業]이란 악취(惡趣)를 받을 불선(不善) 등의 업을 말하며, 수도에서 끊어지는 업[修所斷業]이란 선취(善趣)를 받을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 등의 업을 말하며, 끊을 것이 없는 업[無斷業]이란 세간과 촐세간의 여러 가지 무루(無漏)의 업을 말한다.
  검고 검은 이숙업[黑黑異熟業]이란 비복업(非福業)을 말하며, 희고 흰 이숙업[白白異熟業]이란 부동업(不動業)을 말하며, 검고 희고 검고 흰 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이란 말하자면 복업(福業)에 불선업(不善業)이 있어서, 악
  
21)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3계(界)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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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惡對)로 삼기 때문이며, 아직 비복업(非福業)을 끊지 못할 때 있는 복업(福業)에 의거하여 건립하기 때문이다.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고 이숙도 없는 업이 다한 모든 업[非黑非白無異熟業能盡諸業]이란 말하자면 출세간(出世間)의 여러 가지 무루업(無漏業)이며 이는 앞의 세 가지 업22)을 끊어 대치하기 때문이다.
  굽은 업[曲業]이란 여러 외도들의 선(善) 불선(不善)의 업을 말한다.
  더러운 업[穢業]이란 곧 굽은 업[曲業]도 더러운 업[穢業]이라고 한다. 또한 더러운 업[穢業]이 있으니, 이 법(法)에 머무르는 이생(異生) 가운데 성교(聖敎)에 대하여 전도하여 보는 자[顚倒見者]와 스스로 견취[自見取]에 머무르는 자와 삿되게 결정하는 자[邪決定者]와 깨달음을 유예하는 자[猶豫覺者]가 갖게 되는 선(善) 불선(不善)의 업을 말한다.
  흐린 업[濁業]이란 곧 굽은 업[曲業]과 더러운 업[穢業]도 흐린 업[濁業]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흐린 업이 있으니, 이 법에 머무르는 이생 가운데 성교(聖敎)에 대하여 결정하지 않은 자와 깨달음을 유예하는 자가 갖게 되는 선(善) 불선(不善)의 업을 말한다.
  또한 차별이 있으니, 오직 외도의 법에만 이 세 가지 업23)이 있어서 삿되게 이해하고 행한다[邪解行]는 의미[義] 때문에 굽은 것[曲]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이것에 의지하여 능히 일어나는 여러 공덕들을 장애한다는 의미[義] 때문에 더러운 것[穢]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능히 진여(眞如)를 통달함을 장애한다는 의미[義] 때문에 흐린 것[濁]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청정한 업[淸淨業]이란 이 법에 머무르는 이생 가운데 성교에 대하여 곧바로 결정하는 자[正決定者]와 깨달음을 유예하지 않은 자에게 있는 선업(善業)을 말하며, 적정한 업[寂靜業]이란 이 법에 머무르는 자 가운데에 이생 아닌 자[非異生者]와 일체의 성자[一切聖者]에게 있는 학(學)과 무학(無學)의 업을 말한다.
  업(業)의 과환(過患)이란 무엇인가?24)
  
22) 흑흑이숙업(黑黑異熟業)과 백백이숙업(白白異熟業)과 흑백흑백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의 세 가지 업을 가리킨다.
23) 곡업(曲業)과 예업(穢業)과 탁업(濁業)의 세 가지 업을 가리킨다.
24) 업잡염(業雜染)은 아홉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되는데, 이하는 그 아홉 번째로 업(業)의 차별(差別)에 대해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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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하게 설명하면 일곱 가지 과환(過患)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살생자(殺生者)는 살생이 인(因)이 되어서 능히 자신을 해치고[自害], 다른 것을 해치며[他害], 능히 모두를 해치고[俱害], 현법(現法)의 죄(罪)를 생기게 하고, 후법(後法)의 죄를 생기게 하고, 현법과 후법의 죄를 생기게 하고, 거기에서 생기는[所生] 몸과 마음의 우고(憂苦)를 받는 것이다.
  무엇을 능히 자신을 해치는 것[自害]이라고 하는가?
  생명을 해치는 방편(方便)을 일으켜서 이 인연에 의하여 곧 자신이 해침을 당하는 것이니, 묶임[繫縛]을 당하거나 잃음[退失]을 만나거나 비난[訶毁]를 받지만 그러나 그는 다른 것을 손해(損害)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능히 다른 것을 해치는 것[他害]이라고 하는가?
  이 일으킨 방편에 의하여 능히 다른 것을 손해하지만 이 인연에 의하여 비난[訶毁]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해치지는 않는 것이다.
  무엇을 모두를 해치는 것[俱害]이라고 하는가?
  곧 이 일으킨 방편에 의하여 능히 자신25)을 손해하고, 이 인연에 의하여 묶임[繫縛]으로부터 비난[訶毁]에 이르기까지 하며 다시 다른 것을 해치는 것이다.
  무엇을 현법(現法)의 죄(罪)를 생기게 한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능히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다.
  무엇을 후법(後法)의 죄(罪)를 생기게 한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능히 다른 것을 해치는 것[他害]과 같다.
  무엇을 현법과 후법의 죄를 생기게 한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능히 모든 것을 해치는 것[俱害]과 같다.
  무엇을 거기에서 생기는[所生] 몸과 마음의 우고(憂苦)를 받는 것이라고 하는가?
  
25) 한역에서는 타(他) 즉 다른 것이라고 하지만, 의미상 자해(自害)가 맞으므로, 바로 잡아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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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생명을 해치는 방편을 일으켰지만 여섯 가지의 과실(過失)을 성취할 수가 없으며, 또한 바라는 대로 죽이는 일을 마칠 수가 없어서 그는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한 인연(因緣) 때문에, 곧 거기에서 생기게 되는 몸과 마음의 우고(憂苦)를 받는 것이다.
  또한 열 가지의 과환(過患)이 있다. 시라(尸羅)를 범하는 것에 의하는 것이니, 경(經)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또한 네 가지 불선업도(不善業道)와 다섯 번째가 되는 여러 가지 술들을 마시는 것이 있으니, 계사[事]를 범하는 선남자[善男]의 학처(學處)에 의거하여 불(佛) 박가범(薄伽梵)께서는 많은 과환을 설하셨다. 자세한 것은 『천지가경(闡地迦經)』에서 설한 것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을 생(生)의 잡염(雜染)이라고 하는가?26)
  말하자면 네 가지 상(相)에 의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니, 첫째는 차별(差別)에 의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고초[艱辛]에 의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일정하지 않음[不定]에 의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유전(流轉)에 의하기 때문이다.
  생의 차별에는27) 다시 다섯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하리니, 첫째는 계(界)의 차별이며, 둘째는 취(趣)의 차별이며, 셋째는 처소(處所)의 차별이며, 넷째는 승생(勝生)의 차별이며, 다섯째는 자신(自身)의 세간(世間)의 차별이다.
  계(界)의 차별이란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남[生]의 차별을 말한다.
  취(趣)의 차별이란 5취(趣)에 있어서 4생(生)의 차별을 말한다.
  처소(處所)의 차별이란 욕계에 36처(處)의 태어남의 차별이 있고, 색계에 18처(處)의 태어남의 차별이 있으며, 무색계에 4처(處)의 태어남의 차별이
  
26) 잡염등기(雜染等起)의 시설건립(施設建立)은 첫째 번뇌잡염(煩惱雜染), 둘째 업잡염(業雜染) 셋째 생잡염(生雜染)으로 기술되는데, 앞에서는 번뇌(煩惱)의 잡염(雜染)과 업(業)의 잡염(雜染)에 대하여 밝혔고, 이하는 생(生)의 잡염(雜染)에 대해서 네 가지 부분, 즉 생(生)의 차별(差別)과 생(生)의 간신(艱辛)과 생(生)의 부정(不定)과 생(生)의 유전(流轉)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27) 생잡염(生雜染)은 네 가지 부문으로 기술되는데, 이하는 그 첫번째로 생(生)의 차별(差別)에 대하여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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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어서 이와 같이 총 58가지의 태어남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승생(勝生)의 차별이란 욕계에 세 가지 뛰어나게 태어나는 것이 있음을 말한다. 첫째는 흑승생(黑勝生)으로 태어나는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전다라(旃茶羅)28)의 집안에 태어나거나, 혹은 복갈사(卜羯婆)29)의 집안에 태어나고, 또는 수레를 만드는 집안에 태어나고, 또는 대나무를 가지고 만드는 집안에 태어나고 그 밖의 하천하고 빈곤하며 재물과 음식 등이 부족한 집안에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사람 가운데에 복덕이 박한 자[薄福德者]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는 백승생(白勝生)으로 태어나는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찰제리(刹帝利)의 매우 부귀한 집안 , 혹은 바라문(婆羅門)의 매우 부귀한 집안, 혹은 장자(長者)의 매우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거나, 혹은 그 밖의 매우 귀하고[豪貴] 매우 부유하며 재물과 곡식의 창고들이 많은 집안에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사람 가운데에 복덕이 뛰어난 자[勝福德者]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셋째는 비흑비백승생(非黑非白勝生)으로 태어나는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앞의 두 종류의 태어나는 곳[生處]이 아닌 중간의 집안에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욕계천(欲界天)에도 세 가지의 뛰어나게 태어나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비천(非天)30)에 태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지분에 의지[依地分]하여 태어나는 것31)이고, 셋째는 허공의 궁전에 의지[依虛空宮殿]하여 태어나는 것32)
  
28) 전다라(旃茶羅)는 범어 Ca la의 음사어이다. 이는 인도의 사성계급 가운데 최하위인 수다라(修多羅) 중에서도 가장 천한 계급이다.
29) 복갈사(卜羯婆)는 Pulkasa, Pukk a, Pukkasa의 음사어로서 분예(糞穢)를 치우거나 시신을 운반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 혹은 비천한 혼혈종족, 혹은 인과(因果)를 믿지 않고 악업(惡業)을 짓는 사견인(邪見人)을 말한다.
30) 아수라(阿修羅)를 말한다.
31) 4왕천(王天)과 도리천(忉利天)의 유정(有情)을 말한다. 이 두 천(天)은 수미산의 지분(地分)에 의지하는 지거천(地居天)이므로 의지분(依地分)이라고 하는 것이다.
32) 야마(夜摩) 도솔(兜率) 화락(化樂) 타화천(他化天)의 네 천(天)은 수미산과 떨어져 허공 중에 머무르는 공거천(空居天)으로서 이 네 천(天)의 유정(有情)을 의허공궁전(依虛空宮殿)의 태어남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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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또한 색계(色界)에도 세 가지 뛰어나게 태어나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이생(異生)33)이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유상천(有想天)에 태어나는 것34)이고, 셋째는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는 것35)이다.
  또한 무색계(無色界)에도 세 가지 뛰어나게 태어나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무량상천(無量想天)에 태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무소유상천(無所有想天)에 태어나는 것이고, 셋째는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태어나는 것이다.
  자신(自身)의 세간(世間)의 차별이란 말하자면 시방(十方)의 무량세계(無量世界)에 무량(無量)의 유정(有情)과 무량(無量)의 태어남의 차별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생(生)의 고초[艱辛]36)란 박가범(薄伽梵)께서 다음과 같이 설하신 것과 같다. "너희들은 오랜 세월 동안[長時]에 생사(生死)에 치달으면서 몸의 넘쳐흐른 피가 4대해(大海)를 넘는다. 왜냐 하면 너희들은 오랜 세월 동안에 혹은 코끼리 말 야크[駝] 당나귀[驢] 소 양 닭 사슴 등의 중동분(衆同分)에 태어나서 너희들은 그것들37)에서 수없이 몸의 여러 부분을 찢기고 베여서 너희들 몸의 피를 매우 많이 넘쳐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코끼리 등의 중동분(衆同分)에서와 같이 인간에서 또한 그러하였다. 또한 다시 너희들은 오랜 세월 동안[長夜]에 무량(無量)의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친척들을 잃고 다시 갖가지 재보(財寶)와 갖가지 자생(資生)의 도구들을 잃으면서 너희들의 눈물을 매우 많이 넘쳐흐르게 하였으니, 앞의 피의 양과 같으리라. 피와 눈물이 이와 같듯이 먹은 엄마 젖의 그 양 또한 그와 같음을 알지어다"라고 하셨다.
  
33) 범부는 선업(善業) 또는 악업(惡業)을 지어서 인(人)과 천(天)의 선취(善趣)에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에 태어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 태어나는 장소가 갖가지로 다르므로 이생(異生)이라고 하는 것이다.
34) 색계 18천(天) 가운데 광과천(廣果天) 이하의 유정(有情)을 말한다.
35) 색계(色界) 18천(天) 가운데 무번천(無煩天) 이상의 5정거천(淨居天)을 말한다.
36) 생잡염(生雜染)은 네 가지 부문으로 기술되는데, 이하는 그 두 번째로 생(生)의 고초[艱辛]에 대하여 기술한다.
37) 앞에서 나열한 여러 가지 축생(畜生)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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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등의 종류는 태어남[生]의 고초[艱辛]의 괴로움[苦]의 무량(無量)한 차별인 줄 알아야 한다.
  생(生)의 일정하지 않음[不定]38)이란 박가범께서 다음과 같이 설하신 것과 같다. "가령 대지에 있는 여러 가지 초목의 뿌리 줄기 가지 잎사귀 등을 가져다가 끊어서 네 손가락 크기만큼의 가는 산대[籌]를 만들어서 너희들이 오랜 세월 동안 전전하며 겪었던 부모(父母)를 계산하여 '이러한 중생은 일찍이 나의 어머니였고 나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일찍이 그의 어머니였으며, 이러한 중생은 일찍이 나의 아버지였고 나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일찍이 그의 아버지였다'라고 이와 같이 계산하면 네 손가락 크기의 산대[籌]는 빨리 다하여 없어지나니, 나는 너희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겪었던 부모의 그 양의 끝[邊際]을 말하지 못하겠노라"라고 하셨다.
  또 다시 말씀하셨다. "너희 유정(有情)들은 스스로 관찰하건대, 오랜 세월동안 전전(展轉)하며 제일(第一)의 매우 무거운 우고(憂苦)를 성취하였지만 지금은 이제 구경(究竟)을 얻었도다. 나 또한 일찍이 이와 같은 큰 고통을 받았으며, 고통과 같이 즐거움 또한 그것과 같았음을 너희들은 알지어다"라고 하셨다.
  또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대지(大地)를 관찰하건대, 조그마한 처소라도 너희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이 처소에서 일찍이 무량(無量)한 생사(生死)를 받아서 겪지 않았던 곳을 얻을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또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세간(世間)의 유정(有情)을 관찰하건대, 오랜 세월 동안 유전(流轉)하면서 너희들의 어머니 아버지였거나 형제 자매였거나 궤범사(軌範師)39) 친교사(親敎師)40)였거나 그 밖의 존중하지 않은 사람 존중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던 적을 만나기 쉽지 않구나"라고 하셨다.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약 한 보특가라(補特伽羅)가 1겁 동안 받았던 몸의 뼈[身骨]를 가령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서 사라지지 않게 쌓아 모았
  
38) 생잡염(生雜染)은 네 가지 부문으로 기술되는데, 이하는 그 세 번째로 생(生)의 일정하지 않음[不定]에 대하여 기술한다.
39) 범어 c rya의 의역(意譯)이다.
40) 범어 Up dhy ya의 의역(意譯)이다. 화상(和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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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면 그 모인 양의 높이는 왕사성(王舍城) 옆의 광박협산(廣博脇山)41)과 같으리라"고 하셨다.
  무엇을 생(生)의 유전(流轉)이라고 하는가?42)
  자신(自身)의 모든 연기(緣起)를 말한다. 이것은 곧 유전(流轉)을 설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무엇을 연기(緣起)라고 하는가?43)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리라.
  
  체(體)와 문(門)과 의(義)와 차별(差別)과
  차제(次第)와 난(難)과 석사(釋詞)와
  연성(緣性)과 분별연(分別緣)이며
  여러 경전을 포괄함[攝]을 맨 마지막으로 하네
  體門義差別  次第難釋詞
  緣性分別緣  攝諸經爲後
  
  무엇을 연기(緣起)의 체성[體]라고 하는가?44)
  간략하게 세 가지의 상(相)에 의해서 연기(緣起)를 건립(建立)하여 설명하는 것이니, 전제(前際)로부터 중제(中際)가 생기며, 중제(中際)로부터 후제(後際)가 생기며, 중제(中際)가 생기고 나서 유전(流轉)에 나아가거나 청정구경(淸淨究竟)에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41) 범어 Vipula의 의역(意譯)이다. 구역(舊譯)에서는 비부라산(毗富羅山)이라고 음사한다. 그 형상(形狀)이 비천(非天), 즉 아수라(阿修羅)의 옆구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42) 생잡염(生雜染)은 네 가지 부문으로 기술되는데, 이하는 그 네 번째로 생(生)의 유전(流轉)에 대하여 기술한다.
43) 생(生)의 유전(流轉)의 내용은 연기(緣起)로서 설해지는데, 그 연기는 체(體) 문(門) 의(義) 차별(差別) 차제(次第) 석난(釋難) 석사(釋詞) 연생사연(緣生四緣)과 이연(二緣) 서른 두가지의 분별연(分別緣) 열 여섯 가지로 경전의 내용을 인용함의 열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된다.
44) 생(生)의 유전(流轉)의 내용은 연기(緣起)로서 설해지는데, 그 첫번째로 연기(緣起)의 체(體)에 대해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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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전제(前際)로부터 중제(中際)가 생기고, 중제(中際)가 생기고 나서 다시 유전(流轉)에 나아간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전제(前際)를 알지 못하여 무명(無明)에 포함되며, 무명(無明)이 연(緣)이 되어 복(福) 비복(非福) 부동(不動)의 신(身) 어(語) 의업(意業)을 짓거나 증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수업식(隨業識)은 목숨이 끝날 때까지 끊기지 않고 유전(流轉)하며, 능히 후유(後有)의 상속식(相續識)의 인(因)이 된다. 이 식(識)에 과(果)가 생기려고 할 때에 안과 밖의 탐애(貪愛)가 곧바로 나타남[現在前]으로써 조반(助伴)이 되기 때문에 그 전제(前際)로부터 이미 목숨을 버렸는데도 현재세(現在世)에서 자체(自體)45)가 생기게 되며, 어머니의 배 안에 있으면서 인식(因識)을 연(緣)으로 삼아서 상속(相續)의 과식(果識)이 전후(前後) 차례 차례 생기고, 갈라람위(羯羅藍位)에 이르기까지 차별하며 구른다. 어머니의 태(胎) 안에서 상속(相續)의 과식(果識)과 명색(名色)이 함께하면서 늙어지는 것에 이르기까지 점점 증장할 때에 생을 받는 업[受生業]의 명색(名色)과 이숙과(異熟果)를 부른다.
  또한 이 이숙과(異熟果)는 명색(名色)에 의지하여 구르는데 반드시 6의(依)에 의탁하여 구르기 때문에, 그러므로 경(經)에서 '명색(名色)은 식(識)을 연(緣)으로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구유의(俱有依)의 근(根)을 색(色)이라고 말하며, 등무간멸의(等無間滅依)의 근(根)을 명(名)이라고 말하며,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6식(識)의 소의(所依)라고 말하며, 그것46)에 의지하기 때문에 목숨이 끝날 때까지 여러 식(識)들은 유전(流轉)하는 것이다.
  또한 5색근(色根)과 근(根)의 소의(所依)의 대종(大種)과 근(根)의 처소(處所)와 그 능생(能生)의 대종(大種)을 색(色)이라고 말하며, 그 나머지를 명(名)이라고 말한다. 식(識)의 집수(執受)에 의해서 여러 근(根)들이 상속법(相續法)에 떨어져 마침내 유전(流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47)는 식(識)에 의지하여 끊기지 않고 상속한다. 이러한 도리에 의해서 마치
  
45) 몸을 말한다.
46) 육식소의(六識所依)를 말한다.
47) 명(名) 색(色)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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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대묶음과 같이, 현재세(現在世)에 식(識)은 명색(名色)을 연(緣)으로 하고 명색(名色)은 식(識)을 연(緣)으로 하여 목숨이 끝날 때까지 서로 의지하며[相依] 구른다. 이와 같이 전제(前際)로부터 중제(中際)의 제 행(行)이 연기(緣起)하여 생기고, 중제(中際)가 생기고 나서 끊기지 않고 유전(流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태로 태어나는 것[胎生者]에 의지하여 유전(流轉)의 차례를 설명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난생(卵生)과 습생(濕生)의 경우는 모태(母胎)에 처하는 것에서 제외되며 나머지 내용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만약 유색(有色)의 유정취(有情聚) 가운데에 말하자면 욕(欲) 색계(色界)에서 화생(化生)을 받는 자는 근(根)들이 반드시 원만[決定圓滿]하면서 생기게 되니, 앞48)과 다르다.
  만약 무색계(無色界)의 경우는 명(名)을 의지로 삼고 색(色)의 종자(種子)를 의지로 삼음으로써 식(識)이 일어나게 되며, 식(識)을 의지로 삼고 명(名)과 색(色)의 종자가 구름으로써 이 종자를 의지하는 색(色)이 단절할지라도 나중에 다시 생기게 되기 때문에 앞49)과 다르다.
  또한 복업(福業)에 의해서 욕계(欲界)의 인(人) 천(天)에 태어나고, 비복업(非福業)에 의해서 여러 악취(惡趣)에 태어나며, 부동업(不動業)에 의해서 색(色)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난다.
  무엇을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청정구경(淸淨究竟)에 나아가는 것이다.
  무엇을 중제(中際)로부터 후제(後際)의 제 행(行)이 연기(緣起)하여 생긴다고 하는가?
  중제(中際) 다음에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생겨서 두 가지 선업과(先業果)를 받는 것을 말한다. 즉 안[內]의 이숙과(異熟果)와 경계(境界)에서 생겨나는 수(受)의 증상과(增上果)를 받는 것이다. 이 보특가라는 어떤 경우 정법(正法)이 아닌 것을 듣기 때문에, 어떤 경우 앞서 자주 익혔기[串習] 때문에
  
48) 태생자(胎生者) 난생자(卵生者) 습생자(濕生者)를 가리킨다.
49)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화생자(化生者)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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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과(果)50)에 대해서 어리석게[愚] 된다. 안[內]의 이숙과(異熟果)에 어리석기 때문에 후유(後有)에서 고(苦)가 생겨도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후유(後有)를 미혹하는 후제(後際)의 무명(無明)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앞과 같이 제 행(行)을 짓거나 증장한다.
  이 새롭게 짓게 되는 업(業) 때문에 이 식(識)을 말하여 수업식(隨業識)51)이라고 이름하며, 곧 현법(現法)에서 무명을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행(行)이 생기며, 행(行)을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식(識)이 생긴다고 설하는 것이다. 이 식(識)을 현법(現法)에서 인식(因識)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능히 후생(後生)의 과식(果識)을 섭수(攝受)하기 때문이다. 총괄적인 일체식(一切識)에 의거하여 말하면 6식신(識身)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곧 이 식(識)은 후유(後有)의 명색종자(名色種子)가 뒤따르게[隨逐] 되며, 이 명색종자(名色種子)는 후유(後有)의 6처종자(處種子)가 뒤따르게 되며, 이 6처종자는 후유(後有)의 촉종자(觸種子)가 뒤따르게 되며, 이 촉종자(觸種子)는 후유(後有)의 수종자(受種子)가 뒤따르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을 종합하여 중제(中際)에서 후유를 끄는 인[後有引因]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에 의해서 능히 식(識)을 끌며, 내지 1기(期)의 몸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앞의 이숙과(異熟果)에 어리석기 때문에 후유(後有)를 끄는 것이며, 또한 두 번째 경계에서 생기게 되는 수과(受果)52)에 어리석기 때문에 경계수(境界受)를 연(緣)으로 하여 애(愛)를 일으키며, 이 애(愛) 때문에 어떤 경우는 욕구(欲求)53)를 일으키고, 어떤 경우는 유구(有求)54)를 일으키며, 어떤 경우는 욕취(欲取)55)를 집착하고, 어떤 경우는 견(見) 계(戒) 아어취(我
  
50) 안[內]의 이숙과(異熟果)와 경계에서 생겨나는 수(受)의 증상과(增上果)를 말한다.
51) 윤회하며 과보(果報)를 받는 주체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종자(種子)를 의미한다.
52) 수(受)의 증상과(增上果)를 의미한다.
53) 욕계(欲界)에 있는 제 사물에 대한 욕구심(欲求心)을 의미한다.
54) 색(色) 무색계(無色界)에 있는 색(色) 무색계(無色界)에 대한 욕구심(欲求心)을 의미한다.
55) 욕계(欲界)에 있어서 견취(見取)와 계금취(戒禁取)를 제외한 번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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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語取)를 집착하는 것이다. 이 애(愛)와 취(取)가 화합(和合)하고 서로 돕기[資潤] 때문에, 앞에서 끄는 인(引)을 굴려서 유(有)로 만든다고 이름하는 것이며, 곧 후유(後有)의 생인(生因)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곧바로[無間] 목숨이 이미 끊어졌는데도 먼저 끈 인[先引因]에 따라서 끌어당겨진 바[所引] 수(受)를 맨 마지막으로 하여 식(識)56) 등의 이 제 행(行)은 점차로 혹은 단박에 생긴다. 이와 같이 하여 현법(現法)에서 무명촉(無明觸)에서 생기게 되는 수(受)를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애(愛)가 있으며, 애(愛)를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취(取)가 있으며, 취(取)를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유(有)가 있으며, 유(有)를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생(生)이 있으며, 생(生)을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노(老) 병(病) 사(死) 등의 여러 고(苦)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혹은 생처(生處)에 차례대로 현전(現前)하며, 혹은 다시 종자(種子)가 뒤따른다. 이와 같이 중제(中際)에서 무명(無明)은 행(行)에 연(緣)이 되는 등과 수(受)는 애(愛)에 연(緣)이 되는 등을 인연으로 하기 때문에 후제(後際)의 제 행(行)이 생긴다.
  다시 앞서 모은 자량(資糧)이 있고, 현법(現法)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음[音]을 듣고서 두 과(果)의 제 행(行)에 만약 그 인(因)과 그 멸(滅)에서 그 취(趣)가 멸하는 작용에 대해서 이치에 맞게 작의[如理作意]하게 되면, 이 이치에 맞는 작의[如理作意]를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정견(正見)이 생기게 되고, 이로부터 차례대로 학(學) 무학(無學)의 청정한 지견(智見)을 얻으며, 이 지견(智見)에 의해서 무명(無明) 및 애(愛)가 남김없이 끊어진다.
  이것57)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 소연(所緣)을 여실히 알지 못한 무명촉(無明觸)에서 생기게 되는 수(受) 또한 다시 영원히 끊어진다. 이것58)이 끊어지기 때문에 영원히 무명을 여의어 현법(現法)에서 혜해탈(慧解脫)을 증득한다.
  
56) 식(識) 명색(名色) 6처(處) 촉(觸) 수(受)의 소훈(所熏)의 종자(種子)를 의미한다.
57) 무명(無明)에서 애(愛)에 이르기까지를 가리킨다.
58) 무명촉(無明觸)에서 생기는 수(受)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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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촉(無明觸)에서 생기는 수와 상응하는 마음[受相應心] 속의 모든 탐애(貪愛)에 대해서 곧 이 마음에서 이계(離繫)를 얻기 때문에 탐애를 영원히 멸하고 현법(現法)에서 심해탈(心解脫)을 증득한다.
  가령 그 무명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으면 식(識) 등에 의지한 수(受)를 맨 마지막으로 하기 때문에 모든 제 행(行)은 마땅히 후제(後際)에 생겨나게 되며, 무명(無明)이 멸(滅)하기 때문에 또 다시 일어나지 않아서 무생법(無生法)을 얻는다. 그러므로 무명(無明)이 멸(滅)하기 때문에 행(行)이 멸(滅)하며, 차례대로 내지 이숙생(異熟生)의 촉(觸)이 멸(滅)하기 때문에 이숙생(異熟生)의 수(受)가 멸(滅)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현법(現法)에서 무명(無明)이 멸(滅)하기 때문에 무명촉(無明觸)이 멸(滅)하며, 무명촉(無明觸)이 멸(滅)하기 때문에 무명촉(無明觸)에서 생기는 수(受)도 멸(滅)하며, 무명촉(無明觸)에서 생기는 수(受)가 멸(滅)하기 때문에 애(愛)가 멸(滅)하며, 애(愛)가 멸(滅)하기 때문에 앞의 내용과 같이 무생법(無生法)을 얻는 것이다.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취(取) …… 뇌(惱)를 맨 마지막으로 하는 제 행(行)이 영원히 멸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하여 현법(現法)에서 제 행(行)이 구르지 않으며, 구르지 않기 때문에 현법(現法)에서 그리고 유여의계(有餘依界)에서 현법열반(現法涅槃)을 증득한다. 그59)는 이 때에 오직 남게 된 청정식(淸淨識)으로 명색(名色)을 연(緣)하며, 명색(名色)은 식(識)을 연(緣)하여 내지 식이 있는 몸[有識身]이 있어도 항상 이계(離繫)의 수(受)를 받으며 유계(有繫)의 수(受)를 받지 않는다. 이 식이 있는 몸 내지 선업(先業)에서 끌어당긴 수명[壽量]은 항상 상속하며 머무른다. 만약 수명이 다하면 식(識)이 지탱하는 몸[識所持身]을 버리며, 이 명근(命根) 뒤에는 모든 명근(命根)이 남김없이 영원히 멸(滅)하여 다시는 거듭 이숙하지[熟] 않는다.
  또한 다시 이 식(識)과 모든 수(受)는 자연히[任運] 멸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나머지 인연(因緣)은 앞서 이미 멸했기 때문에, 다시는 상속하지 않고 남김없이 영원히 멸한다. 이를 무여의열반계구경적정처(無餘依涅槃界究竟
  
59) 유여의열반계(有餘依涅盤界)에서 현법열반(現法涅槃)을 얻은 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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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寂靜處)라고 이름하며, 또 열반에 나아가려고 하는 자가 세존(世尊)이 계신 곳[所]에서 범행(梵行)을 이미 세워서 구경열반(究竟涅槃)하였다고 이름한다.
  위와 같이 전제(前際)로부터 중제(中際)가 생기고, 중제(中際)로부터 후제(後際)가 생기며, 또한 중제(中際)로부터 유전(流轉)하거나 청정(淸淨)해지는 이 세 가지 상(相)에 의해서 연기(緣起)를 건립하여 설하였다. 이를 연기(緣起)의 체성(體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연기(緣起)의 문(門)이란 무엇인가?60)
  여덟 가지 문(門)에 의해서 연기(緣起)의 유전(流轉)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는 내식생문(內識生門)이며, 둘째는 외가성숙문(外稼成熟門)이며, 셋째는 유정세간생사문(有情世間生死門)이며, 넷째는 기세간성괴문(器世間成壞門)이며, 다섯째는 식임지문(食任持門)이며, 여섯째는 자소작업의 증상세력의 수용의 업에 따른 소득의 애와 비애의 과의 문[自所作業增上勢力受用隨業所得愛非愛果門]이며, 일곱째는 위세문(威勢門)61)이며, 여덟째는 청정문(淸淨門)62)이다.
  연기(緣起)의 의미[義]란 무엇인가?63)
  말하자면 유정(有情)을 여읜다는 이치[義]64)가 연기(緣起)의 의미[義]이며, 유정(有情)을 여읨에 다시 무상(無常)의 이치65)가 있음이 연기(緣起)의 의미
  
60) 생(生)의 유전(流轉)의 내용은 연기(緣起)로서 설해지는데, 앞에서는 연기(緣起)의 체성(體性)에 대하여 설하였고, 이하는 두 번째로 연기(緣起)의 문(門)에 대해서 기술한다.
61) 내증(內證)이 연(緣)이 되어서 신통(神通) 등의 매우 뛰어난 공덕(功德)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62) 순해탈분(順解脫分)의 선(善)이 연(緣)이 되어 차례대로 아라한과(阿羅漢果) 등을 얻는 것을 말한다.
63) 생(生)의 유전(流轉)의 내용은 연기(緣起)로서 설해지는데, 앞에서는 연기(緣起)의 체성(體性) 연기(緣起)의 문(門)에 대해서 설하였고 이하는 세 번째로 연기(緣起)의 의미[義]에 대해서 기술한다.
64) 무아(無我)의 이치를 말하며 승론(勝論 : Vai e ika)과 독자부(犢子部)에서 아(我)를 작자(作者)라고 하는 주장을 논파하는 것이다.
65) 수론(數論 : Sa khya)에서 자성(自性 : prak ti)의 제(諦)는 상주(常住)하여 만물의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논파하고 대중부(大衆部)와 화지부(化地部)에서 12연기는 무위법(無爲法)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논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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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義]이며, 무상(無常)에 다시 잠주(暫住)의 이치[義]66)가 있음이 연기(緣起)의 의미[義]이며, 잠주(暫住)67)에 다시 의타(依他)의 이치68)가 있음이 연기(緣起)의 의미[義]이며, 의타(依他)에서 작용(作用)을 여읜 이치69)가 있음이 연기(緣起)의 의미[義]이며, 작용을 여읨에서 다시 끊어지지 않고 인과상속(因果相續)하는 이치가 있음이 연기(緣起)의 의미[義]이며, 끊어지지 않고 인과상속(因果相續)함에 다시 인과(因果)가 상사(相似)하여 구르는[轉] 이치가 연기(緣起)의 의미[義]이며, 인과(因果)가 상사(相似)하여 구름[轉]에 다시 자업소작(自業所作)의 이치[義]70)가 있음이 연기(緣起)의 의미[義]이다.
   어떤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서 연기(緣起)를 건립하는가?
   인연(因緣)에 포함되는 염오(染汚)와 청정(淸淨)의 이치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연기(緣起)의 차별(差別)이란 무엇인가?71)
  전제(前際)에 대한 무지(無知) 등을 말하니, 경(經)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전제(前際)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과거(過去)의 제 행(行)에 대해서 이치에 맞지 않는 분별[不如理分別]을 일으켜서, '나는 과거에 일찍이 있었던 것인가, 일찍이 없었던 것인가? 일찍이 어떤 체성(體性)이었는가? 일찍이 어떤 종류였던가?'라고 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66) 찰나멸(刹那滅)을 말하며 이는 곧 정량부(正量部)의 색(色) 명근(命根) 등에 대한 주장을 논파하는 것이다.
67) 신체가 잠깐동안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68) 다른 중연(衆緣)에 의지해서 생긴다는 뜻이며, 이것은 자연외도(自然外道)의 비인생(非因生)이라는 주장을 논파하는 것이다.
69) 중연작용(衆緣作用)은 그 근본이 공(空)이라는 것이며, 이것은 유부(有部)의 실재의 작용이 있어 연생(緣生)의 체(體)로 삼는다고 하는 주장을 논파하는 것이다.
70)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뜻으로서 인과(因果)도 없고 업(業)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공견론(空見論)의 주장을 논파하는 것이다.
71) 생(生)의 유전(流轉)의 내용은 연기(緣起)로서 설해지는데, 앞에서는 연기(緣起)의 체성(體性) 연기(緣起)의 문(門) 연기(緣起)의 의미[義]에 대하여 설하였고, 이하는 그 네 번째로 연기(緣起)의 차별(差別)에 대해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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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제(後際)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미래의 제 행(行)에 대해서 이치에 맞지 않는 분별[不如理分別]을 일으켜서, '나는 미래에 있게 될 것인가, 없게 될 것인가? 어떤 체성(體性)이 될까? 어떤 종류가 될까?'라고 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전(前) 후(後際)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안[內]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망설임[不如理猶豫]을 일으켜서, '어떤 것이 나일까? 나는 무엇이 될까? 지금 이 유정(有情)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며 여기에서 죽고 나서 어느 곳으로 가게 되는가?'라고 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안[內]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각각 다른 제 행(行)에 대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작의[不如理作意]를 일으켜서, '이것이 나이다'라고 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밖[外]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밖[外]의 비유정수(非有情數)72)의 제 행(行)에 대해서 이치에 맞지 않는 작의[不如理作意]를 일으켜서, '아소(我所)이다'고 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안팎[內外]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다른 것을 상속하는[他相續] 제 행(行)에 대해서 이치에 맞지 않는 분별[不如理分別]을 일으켜서, '원수[怨] 친한 이[親] 원수도 아니고 친하지도 않은 이[中]이다'고 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업(業)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업(業)에 대해서 이치에 맞지 않는 분별[不如理分別]을 일으켜서, '짓는 것[作者]이 있다'고 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이숙(異熟)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이숙과(異熟果)에 포함되는 제 행(行)에 대해서 이치에 맞지 않는 분별[不如理分別]을 일으켜서'받는 것[受者]이 있다'고 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72) 정신이 없는 부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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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이숙(業異熟)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업(業) 및 과(果)에 대해서 이치에 맞지 않는 분별[不如理分別]을 일으키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불(佛)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불(佛)의 보리(菩提)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거나, 삿되게 사유하거나, 방일(放逸)에 의하거나, 의혹(疑惑)에 의하거나, 훼방(毁謗)에 의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법(法)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정법선설성(正法善說性)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거나, 삿되게 사유하거나, 방일(放逸)에 의하거나, 의혹(疑惑)에 의하거나, 훼방(毁謗)에 의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승(僧)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승가[僧]의 정행(正行)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거나, 삿되게 사유하거나, 방일(放逸)에 의하거나, 의혹(疑惑)에 의하거나, 훼방(毁謗)에 의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고(苦)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고(苦)는 고성(苦性)임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거나, 삿되게 사유하거나, 방일(放逸)에 의하거나, 의혹(疑惑)에 의하거나, 훼방(毁謗)에 의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고(苦)에 대한 것과 같이 집(集) 멸(滅) 도(道)에 대한 무지(無知)도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인(因)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이치에 맞지 않는 분별[不如理分別]을 일으켜서, 인이 없다[無因]고 계탁[計]하거나 자재(自在) 세성(世性) 사부(士夫) 중간(中間) 등의 불평등인(不平等因)73)을 계탁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인(因)에 대한 무지(無知)와 같이 인(因)으로부터 생기게 되는 제 행(行)
  
73) 『본론(本論)』 제 6 7권(卷)에서 설한 16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의 내용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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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대한 것 또한 그러하다.
  또한 저것에 죄(罪)가 없기 때문에 '선(善)'이라고 이름하며, 죄가 있기 때문에 '불선(不善)'이라고 이름하며, 이익(利益)이 있기 때문에 '수습해야 할 것[應修習]'이라고 이름하며, 이익이 없기 때문에 '수습하지 않아야 할 것[不應修習]'이라고 이름하며, 검기 때문에 '유죄(有罪)'라고 이름하며, 희기 때문에 '무죄(無罪)'라고 이름하며, 섞였기 때문에 '유분(有分)'이라고 이름한다.
  6촉처(觸處)에 여실하게 통달하는 것에 대한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증상만자(增上慢者)가 증득한 것에 대해서 전도(顚倒)하여 사유하는 온갖 무지(無知)를 말한다.
  위와 같이 간략하게 열 아홉 가지의 무지(無知)를 설하였다.
  다시 일곱 가지의 무지(無知)가 있으니, 첫째는 세우(世愚)74)이고, 둘째는 사우(事愚)75)이며, 셋째는 이전우(移轉愚)76)이며, 넷째는 최승우(最勝愚)77)이고, 다섯째는 진실우(眞實愚)78)이며, 여섯째는 염정우(染淨愚)79)이며, 일곱째는 증상만우(增上慢愚)80)이다.
  앞의 열 아홉 가지의 무지(無知)와 지금 일곱 가지의 무지(無知)의 서로의 관계[相攝]는 어떠한가?
  말하자면 처음의 세 가지의 무지(無知)81)는 첫 번째 것82)에 포함되고, 다음의 세 가지83)의 무지(無知)는 두 번째 것84)에 포함되며, 다음의 세 가지의 무
  
74) 3세(世)에 대한 무지(無知)를 말한다.
75) 안팎의 제 법(法)에 대한 무지(無知)를 말한다.
76) 업(業)이 능히 과(果)를 부르는 것인데도 이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마침내 불평등인(不平等因)을 계탁하기 때문에 이전우(移轉愚)라고 이름한다.
77) 불(佛) 법(法) 승(僧) 3보(寶)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愚]을 말한다.
78) 4제(諦)의 진실의 도리[理]에 대한 무지(無知)를 말한다.
79) 염(染) 정(淨)에 걸친 4제(諦)의 인과(因果)의 도리[理]에 대한 무지(無知)를 말한다.
80) 아직 얻지 못했는데도 (특히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알지 못하는 만심(慢心)에 수반되는 무명(無明)을 말한다.
81) 앞의 열 아홉 가지 무지(無知) 가운데 전제(前際)에 대한 무지, 후제(後際)에 대한 무지, 전(前) 후제(後際)에 대한 무지의 셋을 가리킨다.
82) 뒤의 일곱 가지 무지(無知) 가운데 첫 번째의 세우(世愚)를 가리킨다.
83) 안[內] 밖[外] 안팎[內外]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84) 사우(事愚)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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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無知)85)는 세 번째 것86)에 포함되며, 다음의 세 가지의 무지(無知)87)는 네 번째 것88)에 포함되고, 다음의 네 가지의 무지(無知)89)는 다섯 번째 것90)에 포함되고, 다음의 두 가지의 무지(無知)91)는 여섯 번째 것92)에 포함되고, 마지막 한 가지 무지(無知)93)는 일곱 번째 것94)에 포함된다.
  다시 다섯 가지 우(愚)가 있으니, 첫째는 의우(義愚)이며, 둘째는 견우(見愚)이며, 셋째는 방일우(放逸愚)이며, 넷째는 진실의우(眞實義愚)이며, 다섯째는 증상만우(增上慢愚)이다.
  앞의 열 아홉가지의 우(愚)와 지금의 다섯 가지 우(愚)의 서로의 관계는 어떠한가?
  말하자면 견우(見愚)는 앞의 여섯 가지95)와 인(因)과 소생법(所生法)에 대한 무지(無知)를 포함하며, 방일우(放逸愚)는 업(業) 이숙(異熟) 업과숙[俱]에 대한 무지(無知)를 포함하며, 진실의우(眞實義愚)는 불(佛) 등으로부터 도제(道諦)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무지(無知)를 포함하며, 증상만우(增上慢愚)는 마지막의 무지(無知)96)를 포함한다. 의우(義愚)는 일체(一切)를 모두 포함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다음에 무지(無知) 무견(無見) 무유현관(無有現觀) 흑암(黑闇) 우치(愚癡) 무명암(無明闇)의 이러한 여섯 가지 무명(無明)의 차별은 앞에서 설
  
85) 업(業) 이숙(異熟) 업이숙(業異熟)에 대한 무지(無知)를 가리킨다.
86) 이전우(移轉愚)를 가리킨다.
87) 불(佛) 법(法) 승(僧)에 대한 무지(無知)를 가리킨다.
88) 최승우(最勝愚)를 가리킨다.
89) 고(苦) 집(集) 멸(滅) 도(道)에 대한 무지(無知)를 가리킨다.
90) 진실우(眞實愚)를 가리킨다.
91) 인(因)과 인(因)으로부터 생기게 되는 제 행(行)에 대한 무지(無知)를 가리킨다.
92) 염정우(染淨愚)를 가리킨다.
93) 6촉처(觸處)에 대한 무지(無知)를 가리킨다.
94) 증상만우(增上慢愚)를 가리킨다.
95) 앞의 열 아홉 가지 무지(無知) 가운데 처음의 전제(前際)로부터 안팎에 대한 무지까지의 여섯 가지의 무지를 가리킨다.
96) 앞의 열 아홉 가지 무지(無知) 가운데 6촉처(觸處)에 여실하게 통달하는 것에 대한 무지(無知)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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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바 일곱 가지 무지(無知)의 사(事)에 따라서 차례대로 (배대됨을) 알아야 한다. 뒤의 두 가지 무지(無知)의 사(事)97)를 하나로 종합하여 이 마지막의 무명흑암(無明黑闇)을 일으킨다.
  다시 차별이 있으니, 말하자면 문(聞) 사(思) 수소성(修所成)의 3혜(慧)의 소치(所治)의 차별이다. 그 차례대로 앞의 세 가지98)를 설하며, 곧 이 소치(所治)의 연(軟) 중(中) 상품(上品)의 차별에 의해서 뒤의 세 가지99)를 설한다. 이와 같이 소치(所治)의 차별 때문에 그리고 자성(自性)의 차별 때문에 여섯 가지 차별(差別)을 건립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신행(身行)이란 무엇인가?
  신업(身業)을 말하며, 욕계(欲界)나 색계(色界) 이하에 있는 것을 복(福) 비복(非福)이라고 이름하며 그 위에 있는 것을 부동(不動)이라고 이름한다.
  어행(語行)이란 무엇인가?
  어업(語業)을 말하며, 나머지는 앞과 같이 알아야 한다.
  의행(意行)이란 무엇인가?
  의업(意業)을 말하며, 욕계(欲界)에 있으면 복(福) 비복(非福)이라고 이름하고 위의 2계(界)100)에 있으면 오직 부동(不動)이라고만 이름한다.
  안식(眼識)이란 무엇인가?
  미래[當來]에 있어서 안근(眼根)을 의지하여 색경(色境)을 요별(了別)하는 식(識)이 갖고 있는 복(福) 비복(非福) 부동행(不動行)으로 훈습을 일으키게 되는[所熏發] 종자식(種子識)과 그 종자에서 생기는 과식(果識)을 말한다.
  안식(眼識)이 위와 같듯이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97) 일곱 가지의 무지(無知) 가운데의 여섯 번째의 염정우(染淨愚)와 일곱 번째의 증상만우(增上慢愚)을 가리킨다.
98) 무지(無知) 무견(無見) 무유현관(無有現觀)을 가리킨다.
99) 흑암(黑闇) 우치(愚癡) 무명암(無明闇)을 가리킨다.
100)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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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의(所依)와 경계(境界)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는 요별(了別)의 차별(差別)을 알아야만 하니, 이 욕계(欲界)에서는 여섯 가지를 구족하고 색계(色界)에서는 네 가지만 구족하며, 무색계(無色界)에서는 한 가지만 구족한다.
  수온(受蘊)이란 무엇인가?
  모든 영납(領納)의 종류를 말한다.
  상온(想蘊)이란 무엇인가?
  일체의 상(像)을 아는 종류를 말한다.
  행온(行蘊)이란 무엇인가?
  일체의 마음에서 조작된 의업(意業)의 종류를 말한다.
  식온(識蘊)이란 무엇인가?
  일체의 요별(了別)의 종류를 말한다.
  위와 같은 제 온(蘊)은 3계(界)에 통한다.
  4대종(大種)이란 무엇인가?
  지(地) 수(水) 화(火) 풍계(風界)를 말하며, 이는 모두 2계(界)101)에 통한다.
  4대종소조색(大種所造色)이란 무엇인가?
  10색처(色處)102)와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을 말하며 욕계(欲界)에는 열 가지와 법처소섭(法處所攝)의 가색(假色)103)을 갖추고 있으며, 색계(色界)에는 여덟 가지와 법처소섭(法處所攝)의 색(色)이 있다. 그런데 일체가 (4대종소조색에) 포함되지 않는 것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식종자(識種子)에 섭수되는 종자(種子)의 명색(名色)과 거기에서 생기게 되는 과(果)의 명색(名色)을 말한다.
  안식(眼識)이란 무엇인가?
  안식(眼識) 소의(所依)의 정색(淨色)을 말하며, 이것에 의해서 색(色)에
  
101) 욕계(欲界)와 색계(色界)를 가리킨다.
102)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과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를 말한다.
103) 열 가지란 5근(根) 및 5경(境)이며, 법처소섭(法處所攝)의 가색(假色)이란 극약색(極略色) 극형색 (極逈色) 수소인색(受所引色) 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 정소생색(定所生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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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해서 보았으며[已見] 보며[現見] 보게 되는 것[當見]이다.
  안식(眼識)이 위와 같듯이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도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다 알아야 한다.
  모든 곳[一切處]에 3시(時)104)의 업용(業用)의 차별을 마땅히 설하겠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명색종자(名色種子)가 섭수하게 되는 종자(種子)의 6처(處)105)와 거기에서 생기게 되는 과(果)의 6처(處)106)를 말한다. 다섯 가지107)는 욕계와 색계에 있으며, 여섯 번째 것108)은 3계(界)에 통한다.
  안촉(眼觸)이란 무엇인가?
  3가지109)가 화합(和合)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경계의 정묘(淨妙) 등의 대상[義]을 취한다.
  위와 같이 나머지 촉(觸)의 각각도 각기 다른 경(境)에 따라서 그 상(相)을 설명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6처(處)의 종자가 섭수하는 바의 종자의 촉(觸)과 거기에서 생기게 되는 과(果)의 촉(觸)을 말한다. 욕계에는 여섯 가지를 갖추고 있으며, 색계에는 네 가지, 무색계에는 한 가지를 갖추고 있다.
  낙수(樂受)란 무엇인가?
  낙(樂)에 수순(隨順)하는 제 근(根)과 경계(境界)를 연(緣)으로 하여 생기게 되는 적열(適悅)의 느낌[受]으로서 수(受)에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고수(苦受)란 무엇인가?
  고(苦)에 수순(隨順)하는 두 가지110)를 연(緣)으로 하여 생기게 되는 비적열(非適悅)의 느낌[受]으로서 수(受)에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란 무엇인가?
  
104)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105) 6근(根)의 종자(種子)를 말한다.
106) 6(根)의 현행(現行)을 말한다.
107) 전오식(前五根)을 말한다.
108) 의식(意識)을 말한다.
109) 근(根) 경(境) 식(識)을 말한다.
110) 제 근(根)과 경계(境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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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고불락(不苦不樂)에 수순(隨順)하는 두 가지를 연(緣)으로 하여 생기게 되는 적열하지도 않고 적열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非適悅非不適悅]의 느낌[受]으로서 수(受)에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욕계에는 세 가지, 색계에는 두 가지가 있으며, 제 4정려 이상으로부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이르기까지는 세 번째의 불고불락(不苦不樂)만이 있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촉(觸)의 종자에 섭수되는 종자의 수(受)와 그리고 거기에서 생기게 되는 과(果)의 수(受)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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