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11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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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 11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4) 삼마희다지(三摩 多地) ①
  
  이미 유심유사(有尋有伺) 등의 세 가지에 대해서 설하였다.
  무엇을 삼마희다지(三摩 多地)라고 하는가?1)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리라.
  
  총표(總標)와 안립(安立)과
  작의(作意)와 상(相)의 차별(差別)이며
  여러 경전의 종요(宗要)를 포함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 이치[衆雜義]라네
  總標與安立 作意相差別
  攝諸經宗要 最後衆雜義
  
  만약 간략하게 삼마희다지(三摩 多地)를 설하면 총표(總標)에 의하고, 안립(安立)에 의하며, 작의(作意)의 차별(差別)과 상(相)의 차별(差別)에 의하며, 여러 경전의 종요(宗要) 등을 간략하게 포함시킴을 알아야만 한다.
  
1) 삼마희다지(三摩 多地)는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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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총표(總標)라고 하는가?2)
  말하자면 이 지(地)에는 간략하게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려(靜慮)이며, 둘째는 해탈(解脫)이며, 셋째는 등지(等持)이며, 넷째는 등지(等至)이다.
  정려(靜慮)란 4정려(靜慮)를 말하는 것으로서, 첫째는 이욕[離]으로부터 생겨나는 유심유사(有尋有伺)의 정려(靜慮)이며, 둘째는 정(定)으로부터 생겨나는 무심무사(無尋無伺)의 정려(靜慮)이며, 셋째는 희(喜)를 여읜 정려(靜慮)이며, 넷째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정려(靜慮)이다.
  해탈(解脫)이란 8해탈(解脫)을 말하는 것으로서, 첫째는 유색관제색(有色觀諸色)의 해탈(解脫)3)이며, 둘째는 내무색상관외제색(內無色想觀外諸色)의 해탈(解脫)4)이며, 셋째는 정해탈신작증구족주(淨解脫身作證具足住)의 해탈(解脫)5)이며, 넷째는 공무변처(空無邊處)의 해탈(解脫)이며, 다섯째는 식무변처(識無邊處)의 해탈(解脫)이며, 여섯째는 무소유처(無所有處)의 해탈(解脫)이며, 일곱째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해탈(解脫)이며, 여덟째는 상수멸신작증구족주(想受滅身作證具足住)의 해탈(解脫)6)이다.
  등지(等持)7)란 3삼마지(三摩地)를 말하는 것으로서, 첫째는 공(空)이며,
  
2) 삼마희다지(三摩 多地)를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첫 번째로 총표(總標)에 대해서 기술한다.
3) 초선(初禪)과 2선(禪)에 의지하여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색(色)을 연(緣)해서 내신(內身)에 있어서의 색상(色想)의 탐(貪)을 제거하기 때문에 밖의 부정색(不淨色)을 관하여 탐(貪)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4) 초선(初禪)과 2선(禪)에 의지하여 욕계(欲界)와 초선(初禪)의 색(色)을 연(緣)해서 내신(內身)에서 색상(色想)의 탐(貪)이 없을지라도 다시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밖의 부정색(不淨色)을 관하여 탐(貪)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5) 제 4선(禪)에 의지하여 욕계(欲界)의 색(色)을 연(緣)하고 부정관심(不淨觀心)을 버려서 정색(淨色)을 관하고, 몸 가운데에서 정해탈(淨解脫)을 작증(作證)하고, 구족원만(具足圓滿)하여 이 정(定)에 머무르는 것이다.
6) 제 4선(禪)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기 전에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등의 일체의 소연(所緣)을 버리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이름한다. 8해탈(解脫)에 대해서는 『구사론(俱舍論)』 29를 참조하고,명칭을 해석하여 대 소승의 차이를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둔륜(遁倫)의 『유가론기(瑜伽論記)』 4下를 참조하라.
7) 등지(等持)란 범어 Sam dhi의 의역(意譯)이다. 이 단어는 또한 정정(正定) 정의(定意) 조직정(調直定) 정심행처(正心行處)로도 의역(意譯)되며, 삼매(三昧) 삼마제(三摩提) 삼마제(三摩帝) 등으로 음사(音寫)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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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는 무원(無願)이며, 셋째는 무상(無相)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유심유사(有尋有伺)와 무심유사(無尋唯伺)와 무심무사(無尋無伺)를 말한다.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소(小)와 대(大)와 무량(無量)을 말한다.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일분수(一分修)와 구분수(具分修)를 말한다.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희구행(喜俱行)과 락구행(樂俱行)과 사구행(捨俱行)을 말한다.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4수정(修定)8)을 말한다.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5성지(聖智)9)의 삼마지(三摩地)를 말한다.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성오지(聖五支)10)의 삼마지(三摩地)를 말한다. 다시 유인(有因) 유구(有具)11)의 성정삼마지(聖正三摩地)가 있으며, 다시 금강유삼마지(金剛喩三摩地)12)가 있으며, 다시 유학(有學) 무학(無學)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 등의 삼마지(三摩地)가 있다.
  등지(等至)13)란 5현관삼마발저(現觀三摩鉢底)와 8승처삼마발저(勝處三摩
  
8) 현법락(現法樂)에 머무르기 위해서, 지견(智見)을 얻기 위해서, 분별혜(分別慧)를 얻기 위해서, 누진(漏盡)을 얻기 위해서 닦는 정(定)을 말한다. 『구사론(俱舍論)』 28권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9) 자체지(自體智) 보특가라지(補特伽羅智) 청정지(淸淨智) 과지(果智) 입출정상지(入出定相智)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本論)의 제 12권(卷)에서 기술되고 있다.
10) 색계(色界)의 4근본정려(根本靜慮)의 현법락주(現法樂住)와 제 법(法)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제5지(支)를 건립하는 것이다. 본론(本論) 제 12권(卷)에서 기술되고 있다.
11)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의 다섯 가지를 유인(有因)이라 하고, 정견(正見)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의 세 가지를 유구(有具)라고 한다. 8정도(正道) 가운데 정정(正定)만 제외한 앞의 7성도(聖道)를 인(因)이라고도 하고 또는 구(具)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本論) 제 12권(卷)에서 기술되고 있다.
12) 보살(菩薩)의 맨마지막의 정(定)을 말한다. 그 견고함이 금강(金剛)과 같다고 한다.
13) 등지(等至)는 범어 Sam patti의 의역(意譯)이다. 정수(正受) 정정현전(正定現前) 등으로도 의역(意譯)되며, 삼마발제(三摩鉢提), 삼마발저(三摩鉢底) 등으로 음사(音寫)되기도 한다. 이는 정(定)의 다른 명칭으로서 정력(定力)으로 말미암아 혼침 도거를 여의는 심(心)을 평등안화(平等安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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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鉢底)14)와 10변처15)삼마발저(遍處三摩鉢底)와 4무색삼마발저(無色三摩鉢底)와 무상삼마발저(無想三摩鉢底)16)와 멸진정(滅盡定) 등의 삼마발저(三摩鉢底)를 말한다.
  무엇을 안립(安立)이라고 하는가?17)
  말하자면 오직 이와 같은 것들을 등인지(等引地)라고 이름하며 욕계(欲界)의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정(定) 등은 무회(無悔)와 환희(歡喜)와 안락(安樂)에서 끌어당긴 것이기 때문에 욕계와는 같지 않으나 욕계에서는 법에 대해서 전혀 자세하고 바르게 관찰하는 것[審正觀察]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음에18) 초정려(初靜慮)에서 여읨으로부터 생기는 희[離生喜]를 설하는데, 증득에 의해서 이것에 머물러 탐욕에서 끌어당긴 기쁨[欲所引喜]과 탐욕에서 끌어당긴 근심[欲所引憂]과 불선에서 끌어당긴 기쁨[不善所引喜]과 불선에서 끌어당긴 근심[不善所引憂]과 불선에서 끌어당긴 것을 내버려 둠[不善所引捨]의 5법(法)을 끊어 없애기 때문이다. 또한 환(歡) 희(喜) 안(安) 낙(樂) 삼마지(三摩地)의 5법에 대해서 원만하게 수습(修習)하기 때문이다.
  탐욕에서 끌어당긴 기쁨[欲所引喜]이란 묘오욕(妙五欲)19)에 대해서 처음 얻을 때에나 이미 증득하였을 때에나 바로 수용(受用)할 때에 보거나[見] 듣거나[聞] 받아들이는[領受] 이러한 여러 가지 연(緣)에 의해서 억념(憶念)
  
14) 내유색상관외색소(內有色想觀外色少) 내유색상관외색다(內有色想觀外色多) 내무색상관외색소(內無色想觀外色少) 내무색상관외색다(內無色想觀外色多) 내무색상관외청(內無色想觀外靑) 내무색상관외황(內無色想觀外黃) 내무색상관외적(內無色想觀外赤) 내무색상관외백(內無色想觀外白)을 여덟 가지를 말한다.
15)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청(靑) 황(黃) 적(赤) 백(白) 및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의 열 가지를 말한다.
16) 무상정(無想定)을 말한다.
17) 삼마희다지(三摩 多地)를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두 번째로 안립(安立)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 안립((安立)은 이생희락(離生喜樂) 개의 장애[蓋障] 지분(支分) 정명(定名)으로 나누어서 설명된다.
18) 이하는 안립(安立)을 네 가지로 해석하는 가운데 첫 번째로 이생희락(離生喜樂)에 대해서 설명한다.
19) 5관의 욕망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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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희(歡喜)하는 것을 말한다.
  탐욕에서 끌어당긴 근심[欲所引憂]이란 묘오욕(妙五欲)에 대해서 구하는데도 따라 주지 않거나 이미 수용(受用)한 것을 또 다시 얻을 수 없거나 얻고 나서 다시 잃어버리는 이러한 여러 가지 연(緣)에 의해서 자주 근심[憂惱]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불선에서 끌어당긴 기쁨[不善所引喜]이란 마치 어떤 사람이 희락(喜樂)과 더불어 살생업[殺業] 내지 사견(邪見)을 함께 행하는 것을 말한다.
  불선에서 끌어당긴 근심[不善所引憂]이란 마치 어떤 사람이 근심[憂苦]과 더불어 살생업[殺業] 내지 사견(邪見)을 함께 행하는 것을 말한다.
  불선에서 끌어당긴 것을 내버려 둠[不善所引捨]이란 마치 어떤 사람이 왕 또는 왕과 같은 사람과 혹은 그 밖의 재상[宰官]이나 존중하는 사람이나 존중하는 사람과 같은 이들을 살해하는 등의 악업(惡業)을 스스로 즐겨 짓지는 않지만 그 시종이 악업(惡業)을 지을 때 참고서 제지하지 않으며, 또한 비나야(毘奈耶)에 편안하게 처하도록 하지 않으며, 제멋대로 내버려두기 때문에 마침내 악업(惡業)을 짓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업(業)을 짓는 것에 대해서 현전(現前)에서 받아들인 것[領解]이지 현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또한 내버려두는 것[捨]에 머물러 심구(尋求)하고 사찰(伺察)하며 나쁜 방편을 짓는 것이며, 또한 모든 악(惡)을 탐착하여 끊지 않기 때문에 내버려두는 것[捨]을 당겨서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불선(不善)이 현전(現前)에서 구를 때에는 중용(中庸)의 고락(苦樂)이 아닌 수(受)를 일으키는 것이다.
  환(歡)이란 본래부터 청정(淸淨)을 행한 자가 관자량지(觀資糧地)20)에서 먼저 닦은 정행(淨行)과 무회(無悔)21)로 인하여 위의(慰意) 적열(適悅)하는 마음의 흔용성(欣踊性)을 말한다.
  희(喜)란 먼저 바르게 방편을 수습(修習)하는 것으로 인하여 매우 기쁘고 적열(適悅)한 마음의 흔용성(欣踊性)을 말한다.
  
20) 자량위(資糧位)에서 정행(淨行)을 닦아서 지계(持戒)가 청정하고 무회(無悔) 등을 생기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방편으로 인해서 가행도(加行道)의 위(位)에서 비로소 등인(等引)을 닦게 된다.
21) 후회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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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安)이란 추중(麤重)을 여의어 심(心) 신(身)이 조적(調適)한 성품을 말한다.
  낙(樂)이란 위와 같은 마음이 조적(調適)하기 때문에 곧 심(心) 신(身)에 손해(損害)가 없는 즐거움과 해탈의 즐거움을 얻으며 저 품(品)의 추중성(麤重性)을 여의기 때문에 모든 번뇌에서 해탈되는 것을 말한다.
  삼마지(三摩地)란 소연(所緣)에 대해서 자세하고 바르게 관찰[審正觀察]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말한다.
  세존께서는22) 무루(無漏)의 방편(方便)에서는 먼저 삼마지(三摩地)를 설하셨고 나중에 해탈을 설하셨는데, 삼마지를 잘 성취한 힘에 의해서 모든 번뇌로부터 마음이 영원히 해탈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유루(有漏)의 방편(方便)에서는 먼저 해탈(解脫)을 설하셨고 나중에 삼마지(三摩地)를 설하셨는데, 구경방편작의(究竟方便作意)의 과(果)를 증득하고 번뇌가 끊어져야만 비로소 근본삼마지(根本三摩地)를 얻기 때문이다. 혹은 동시에 삼마지(三摩地)와 해탈(解脫)을 설하셨는데, 말하자면 곧 이 구경방편작의(究竟方便作意)와 그 밖의 무간도삼마지(無間道三摩地)에 삼마지(三摩地)와 그 해탈이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23) 여러 정려(靜慮)의 등지(等至)의 장애에 대해서 간략히 하면 5개(蓋)가 있으니, 증득하려는 때에 능히 장애가 된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탐욕개(貪欲蓋)이며, 둘째는 진에개(瞋恚蓋)이며, 셋째는 혼침
  
22) 이하에서는 삼마지(三摩地)와 해탈(解脫)의 전(前) 후(後)에 대한 힐난[妨難]을 해석한다. 세 경(經)이 같지 않다. 즉 첫 번째 경에서는 먼저 삼마지(三摩地)를 설하고 난 뒤에 해탈(解脫)을 설하며, 두 번째 경에서는 먼저 해탈을 설하고 난 뒤에 삼마지(三摩地)를 설하며, 세 번째 경에서는 둘을 동시에 설한다. 위에서 인용된 것은 두 번째 경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에 근본정(根本定)을 삼마지(三摩地)라고 이름하며, 번뇌를 조복하여 끊는 것을 해탈이라고 이름한다. 무루(無漏) 가운데에는 대부분 근본정(根本定)에 의지해서 제 번뇌를 끊기 때문에 먼저 삼마지를 설하고 난 뒤에 해탈을 설하는 것이다. 둔륜(遁倫)의 『유가론기(瑜伽論記)』 4上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23) 이하는 안립(安立)을 네 가지로 해석하는 가운데 두 번째로 개의 장애[蓋障]에 대해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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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면개[惛沈睡眠蓋]이고, 넷째는 도거 악작개[掉擧惡作蓋]이며, 다섯째는 의개(疑蓋)이다.
  탐욕(貪欲)이란 묘오욕(妙五欲)에 대해서 정상(淨相)에 따라서 보려고[見] 하고 들으려고[聞] 하고 접촉하려고[觸] 하며, 혹은 억념(憶念)에 따라서 먼저 받아들인 것[所領受]을 심사(尋伺)하고 연연[追戀]해하는 것을 말한다.
  진에(瞋恚)란 같이 범행(犯行)한 등의 사람이 그 범한 것을 들추어내는 것을 인(因)하거나 옛날에 일찍이 겪었던 이롭지 않은 일[不饒益事]이나 진에(瞋恚)의 상(相)을 기억[憶念]하는 것으로 인(因)하여 마음에 성냄과 노여움을 일으키고, 혹은 앞으로 이롭지 않은 일[不饒益事]을 꾸미려고 하는 것과 앞으로 하려고 하는 진에(瞋恚)의 상(相)에 대해서 자주 따라다니고 심사(尋伺)하여 마음에 성냄과 노여움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혼침(惛沈)이란 깨끗한 시라(尸羅) 등의 어떤 하나의 선행(善行)을 훼손하여 무너뜨리고, 근문(根門)을 지키지 않고, 양(量)을 알지 못한 채 먹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수면(睡眠)을 줄이지 않으며, 부정지(不正知)에 머물러 짓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닦아서 끊어야 할 것[修斷]에 대해서 부지런히 가행(加行)하고 수순(隨順)하지 않으며 일체의 번뇌를 일으켜서 심(心) 신(身)이 혼매(惛昧)하여 감임(堪任)이 없는 성품을 말한다.
  수면(睡眠)이란 마음이 매우 매략(昧略)한 것을 말한다. 또는 번뇌를 수순[順生]하고 가행(加行)을 무너뜨리고 끊는 것이 혼침(惛沈)의 성품이며, 마음이 매우 매략(昧略)한 것이 수면(睡眠)의 성품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합해서 하나의 개(蓋)로 설하는 것이다.
  또한 혼매(昏昧)하여 감임(堪任)이 없는 성품을 혼침(惛沈)이라고 하며 혼매(昏昧)하여 마음이 극히 줄어드는[略] 성품을 수면(睡眠)이라고 한다. 이 혼침이 여러 가지 번뇌와 수번뇌(隨煩惱)를 생기게 할 때에는 수면(睡眠)과 같은 그 밖의 가까운 연[近緣]이 없기 때문이다. 그 밖의 여러 가지 번뇌(煩惱)와 수번뇌(隨煩惱)는 어떤 경우는 응당 생겨날 수 있고 어떤 경우는 응당 생겨날 수 없지만 혼매(昏昧)가 생기면 수면(睡眠)은 반드시 바로 다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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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거(掉擧)란 친속(親屬)을 심사(尋思)하고 국토(國土)를 심사(尋思)하며 불사(不死)를 심사(尋思)하기 때문에 혹은 옛날에 경험했던 웃고 즐겼던 소행(所行)의 일을 기억[憶念]함에 따라서 마음이 떠들썩하게 움직이고[諠動] 뛰어오르는 것[騰躍]을 생기게 하는 성품을 말한다. 악작(惡作)이란 친속(親屬)을 심사(尋思)하는 등에 인(因)하기 때문에 마음에 돌이켜 후회함[追悔]을 생기게 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나는 무슨 까닭에 친속(親屬)과 이별하였던 가,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 국토(國土)에 태어나지[往] 않았던가,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 국토를 버리고서 이곳에 와서 이러한 먹거리를 먹고 이러한 마실 거리를 마시고 오직 이러한 의복(衣服) 와구(臥具) 병의 인연[病緣] 의약(醫藥) 몸을 돕는 여러 도구들[資身衆具]을 얻는가? 어찌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무엇 때문에 나는 본디 어릴 때 출가(出家)했던가'라고 하며, 혹은 옛날에 경험했던 웃고 즐겼던 등의 일을 후회하면서[追悔] 곧 회한(悔恨)을 일으키며 '나는 무엇 때문에 응당 희락(戲樂)을 수용하고 장식으로 멋을 내고 친구와 놀 때에 그 종친과 친구들의 뜻을 위반하여 그들로 하여금 슬프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까지 하면서 억지로 출가하였던가'라고 하는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에 의해서 근심하고 연연[憂戀]해 하는 마음을 내어서 악작(惡作)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앞의 도거(掉擧)와 이 악작(惡作)은 처소(處所)가 같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의 개(蓋)로 설하는 것이다. 또한 응당 지어야 하고 응당 짓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하여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어떤 경우는 이미 지었던 것을, 어떤 경우는 아직 짓지 않은 것을 마음에서 후회하면서[追悔] '어찌하여 나는 옛날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도리어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였던가'라고 하는 것이다. 먼저 후회함[追悔]에서 생기게 되는 악작(惡作)을 제외하고는 이 악작(惡作)은 오히려 버리지 못하는 전(纏)이어서 다음에 다시 근심하고 연연해하는 마음을 끊이지 않고 상속시켜서 악작(惡作)하고 후회하는 것[追悔]이다. 이것이 또한 일종의 악작(惡作)의 차별이다.
  앞에서 생긴 비처(悲處)의 악작(惡作)과 뒤의 악작(惡作)은 비록 도거(掉擧)와 처소가 같지는 않지만 떠들썩하게 움직이고[諠動] 뛰어오르는[騰躍] 그 상(相)이 같으며, 지금의 이것24) 또한 근심하고 연연해하는 상(相)이므로,
  
24) 악작(惡作)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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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그것과 혼합하여 하나의 개(蓋)로 설하는 것이다.
  의(疑)란 스승[師] 법(法) 학(學) 가르침[誨] 증득[證]에 대하여 의혹(疑惑)을 일으키고, 이와 같이 마음에 의혹을 품었기 때문에 능히 용맹(勇猛)한 방편(方便)과 정단(正斷)의 적정(寂靜)에 들어가지[趣入] 못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과거 미래 현재와 고(苦) 등의 진리[諦]에 대하여 의혹(疑惑)을 일으키고 마음에 두 갈래[二分]를 품어서 헷갈려 바르게 알지 못하여 망설이는 것[猶豫]과 의심하여 재는 것[猜度]을 말한다.
   이 식욕개(食欲蓋)는 무엇으로써 식(食)25)으로 삼는가?
   정묘상(淨妙相)이 있을 경우 그 상(相)에 대하여 바르지 않은 사유[不正思惟]를 자주 수습(修習)하는 것으로써 식(食)으로 삼는다. 정묘상(淨妙相)이란 제일(第一)의 승묘(勝妙)한 여러 가지 욕상[欲相]을 말한다. 만약 여기에서 능히 염심(染心)을 멀리 여읜다면 나머지 하열(下劣)한 것도 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 강력한 것을 제거하면[制] 나머지 열등한 것도 스스로 조복되는 것[自伏]과 같다.
  이것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여인(女人)의 몸에는 여덟 곳에 포함되는 사랑할 만한 정묘상[淨相]이 있는데, 소위 노래[歌] 춤[舞] 웃음[笑] 눈물[睇] 아름다운 용모[美容] 거동[進止] 묘한 접촉[妙觸] 예를 갖춤[就禮]의 이 여덟 곳에 의하여 여인은 남자를 묶는다[縛]. 이 인연에 의하여 모든 탐욕(貪欲) 중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게 하며, 생겨난 것은 증장하기 때문에 식(食)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탐욕개(貪欲蓋)는 무엇으로써 비식(非食)으로 삼는가?
   부정상(不淨相)이 있을 경우 그 상(相)에 대하여 여리작의(如理作意)를 자주 수습(修習)하는 것으로써 비식(非食)으로 삼는다.
  이것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청어(靑瘀) 등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갖가지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 섞여
  
25) 자장(資長)의 뜻으로 개연(蓋緣)을 증장하여 자라게 하는 것[增生]을 말한다. 이에 반해 개법(蓋法)을 단멸(斷滅)하는 것을 비식(非食)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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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꽉 찬 이 몸을 관하면 내신(內身)의 부정상(不淨相)을 관(觀)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갖가지로 부정(不淨)한 밖의 청어(靑瘀) 등의 상(相)을 관(觀)하는 것을 외신(外身)의 부정상(不淨相)을 관(觀)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두 부정상(不淨相)을 관하기 때문에 아직 생기지 않은 탐욕은 그것으로 하여금 생기지 않도록 하며, 생긴 것은 능히 끊기 때문에 비식(非食)이라고 한다. 그 상(相)에 대하여 여리작의(如理作意)하기 때문에, 차단[遮]하여 생기지 않도록 하며, 자주 수습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을 능히 끊는 것이다. 앞의 흑품(黑品)에서는 그 상(相)에 대하여 바르지 않게 사유하기 때문에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도록 하며, 많이 수습(修習)한 것 때문에 배(倍)로 다시 더하는 것[增廣]이다.
   진에개(眞恚蓋)는 무엇으로써 식(食)으로 삼는가?
  진에성(眞恚性)이 있고 진에상(瞋恚相)이 있을 경우에 그 상(相)에 대하여 바르지 않게 사유하고 자주 수습하는 것, 이를 식(食)으로 삼는다. 갖가지 불요익(不饒益)의 대상[事]에 대하여 마음에 시달림[惱害]을 일으키는 데에 의지하면 진에성(眞恚性)이라고 하며, 불요익(不饒益)의 대상[事]을 진에상(瞋恚相)이라고 하며, 아홉 가지 괴로운 대상[惱事]26)에 대하여 바르지 않게 작의하는 것을 바르지 않는 사유[不正思惟]라고 한다. 이와 같은 현상[事]을 모두 식(食)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진에개(眞恚蓋)는 무엇을 비식(非食)으로 삼는가?
   인자하고[仁] 자애로우며[慈] 어질고[賢] 착함[善]이 있을 경우 그 상(相)에 대하여 여리작의(如理作意)하고 많이 수습하는 것을 비식(非食)으로 삼는다. 또한 자애로우며[慈] 착함[善]은 항상 남에게 안락(安樂)을 주려고 하는 상(相)이므로 수력(修力)에 포함되는 것이다. 사택력(思擇力)에 포함되는 작의(作意)에 의하여 아홉 가지 괴로움[惱]을 조복(調伏)하고 능히 진에개(眞恚蓋)를 끊어 없애기 때문에 경(經)에서는 오직 이것27)만을 설하여 비식
  
26) 자신의 몸[己身] 사랑하는 유정[所愛有情] 사랑하지 않는 유정[非所愛有情] 과거의 원친(怨親) 미래의 원친(怨親) 현재의 원친(怨親)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本論)의 55권(卷)에서 설명된다. 이상의 것 중에서 뒤의 세 가지는 두 가지 씩을 한데 묶은 것이므로 분별하면 아홉 가지가 된다.
27) 사택력(思擇力)에 포함되는 작의(作意)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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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非食)이라고 한다.
   혼침(惛沈) 수면개(睡眠蓋)는 무엇으로써 식(食)으로 삼는가?
   흑암상(黑暗相)에 있을 경우 그 상(相)에 대하여 바르지 않게 사유하고 많이 수습하는 것, 이를 식(食)으로 삼는다.
   이 개(蓋)는 무엇으로써 비식(非食)으로 삼는가?
   광명상(光明相)이 있을 경우 그 상(相)에 대하여 이치대로 작의하고 자주 수습하는 것을 비식(非食)으로 삼는다.
  광명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어둠을 대치하는 광명이며, 둘째는 법(法)의 광명이며, 셋째는 몸에 의한 광명이다.
  어둠을 대치하는 광명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밤에 드러나는 별과 달 등을 말하며, 둘째는 낮에 드러나는 해의 광명을 말하며, 셋째는 모든 부분[俱分]28)에 드러나는 불빛나는 구슬[火珠] 등을 말한다. 법(法)의 광명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그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접촉하는 것에 따라서 제 법(法)을 관찰하고, 혹은 다시 수습하고 염불(念佛) 등을 따르는 것과 같다. 몸에 의한 광명이란 여러 유정(有情)의 자연(自然)의 몸의 광명을 말한다.
  처음의 광명은 첫째 밤의 어둠, 둘째 구름의 어둠, 셋째 굴로된 집과 같은 막힌 것의 어둠의 세 가지 어둠을 대치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법의 광명이란 능히 세 가지29)의 흑암(黑暗)을 대치할 수 있다. 여실하게 제 법(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하여 자주 의혹(疑惑)을 내며, 불법(佛法) 등에 대해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는 무명(無明)과 의(疑)를 모두 흑암(黑暗)이라고 한다. 또한 증관찰(證觀察)은 능히 제 법(法)의 성품[性]을 현료(顯了)하기 때문에 능히 혼침(惛沈) 수면(睡眠)의 흑암(黑暗)을 대치한다.
   도거(掉擧) 악작개(惡作蓋)는 무엇으로써 식(食)으로 삼는가?
   친속(親屬) 등에 대한 모든 심사(尋思)와 일찍이 경험하였던 놀고 웃
  
28) 낮과 밤의 모두를 가리킨다.
29) 무명(無明) 의(疑) 혼침수면(惛沈睡眠)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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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戲笑] 등의 생각[念]과 그 상(相)에 대하여 바르지 않게 사유하며 자주 수습하는 것, 이를 식(食)으로 삼는다.
  친속(親屬)에 대한 심사(尋思)란 혹은 흥하고 혹은 쇠하며 혹은 분리되고 혹은 합하는 친속(親屬)으로 인하여 기쁘고 울적한 행[欣戚行]을 일으키며, 마음에 염려[籌慮]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국토(國土)에 대한 심사(尋思)란 국토 등의 흥하고 쇠하는 등의 상(相)으로 인하는 것을 말하며,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불사(不死)에 대한 심사(尋思)란 소년과 노년의 단계의 여러 존재에서 짓는 것[所作]이나 혹은 다른 것을 이롭게 하는 일[利他事]로 인하여 기쁘고 울적한 행을 일으키고, 마음에 염려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웃다[笑]란 어떤 사람이 개론(開論)30)과 합론(合論)31)으로 인하여 이를 드러내면서 웃고 기쁨이 넘쳐서 웃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놀다[戲]란 쌍륙(雙陸)과 저포(樗蒲)32)와 농주(弄珠) 등의 놀이를 말한다. 혹은 그 밖의 종류가 있어서 환락(歡樂)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상호 수용(受用)의 경계(境界)를 서로 수용하고, 여러 가지 쾌락을 수용하고, 혹은 동처(同處)에 의하여 혹은 희론(戲論)에 의하여 재미있게 즐기면서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소행(所行)의 일[事]이란 손과 팔과 머리카락 등을 서로 잡고 혹은 서로 어루만지며 몸의 일부분을 껴안거나 속삭이거나 서로 돌아다보며 혹은 그 밖의 일[餘事]을 짓는 것을 말한다.
   이 개(蓋)는 무엇을 비식(非食)으로써 삼는가?
   사마타(奢摩他)33)가 있을 경우 그리고 그 상(相)에 대해서 이치대로 작의하고 자주 수숩(修習)하는 것을 비식(非食)으로 삼는다. 사마타(奢摩他)란
  
30) 드러내며 말을 푸는 것을 말한다.
31) 은밀하게 비유(譬喩)를 들어서 말을 풀고 이를 합하여 해석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32) 쌍륙(雙陸)과 같이 노름의 일종이며, 옛날에는 저(樗)와 포(蒲)의 열매로 주사위를 만들었다고 한다.
33) 범어 amatha의 음사어이다. 지식(止息) 또는 적정(寂靜)으로 의역(意譯)된다. 분별을 끊고 사념(捨念)을 떠나서 심(心)을 일경(一境)에 머무르게 하여 적정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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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종주심(種住心)34)과 사마타품(奢摩他品)에 포함되는 제 법을 말하며 자타(自他)의 쇠하고 흥하는 등의 염환(厭患)해야 할 법(法)에 대해서 마음에 싫어함[厭離] 놀랍도록 두려워함[驚恐] 비천함[惡賤]을 생기게 하여 정려(靜慮)에 안주(安住)하는 것이다.
   의개(疑蓋)는 무엇으로써 식(食)으로 삼는가?
   과거 미래 현재가 있을 경우 그리고 그 상(相)에 대해서 바르지 않게 사유[不正思惟]하며 자주 수습(修習)하는 것, 이를 식(食)으로 삼는다. '나는 과거에 있었던가, 없었던가?'라고 말하는 것으로 자세한 설명은 앞의 내용과 같다. 바르지 않은 사유[不正思惟]란 사량하지 않아야 할 것[不可思處]에 포함되는 사유(思惟)를 말한다. 사량하지 않아야 할 사유란 나에 대한 사유[我思惟] 유정에 대한 사유[有情思惟] 세간에 대한 사유[世間思惟]를 말한다. 만약 자신에 대한 것[自處]에 대하여 세간[世]의 차별(差別)에 의해서 아상(我相)을 사유하면 나에 대한 사유라고 이름하며, 만약 다른 것에 대한 것[他處]에 대하여 하면 유정에 대한 사유라고 이름하며, 유정세간(有情世間)과 기세간(器世間)에 대한 것에서 하면 세간에 대한 사유라고 이름하는데, '세간은 항상[常]하다'고 말하거나 혹은 '무상(無常)하다'고 말하거나 또는 '항상[常]하기도 하면서 무상(無常)하기도 하다'고 말하거나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非常非無常]'고 말하는 것이다.
   이 개(蓋)는 무엇으로써 비식(非食)으로 삼는가?
   유연(有緣)과 연기(緣起)35)와 그리고 그 상(相)에 대해서 이치대로 작의하고 자주 수습(修習)하는 것을 비식(非食)으로 삼는다. 그것은 오직 법(法)과 법인(法因)이 있을 경우 오직 고(苦)와 고인(苦因)이라고 보기[觀見] 때문에 모든 일체의 바르지 않은 사유[不正思惟]를 연(緣)으로 하여 3세(世)의 경계에 대해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무명(無明)은 생겨나지 않도록 하고
  
34) 마음으로 하여금 내주(內住) 등주(等住) 안주(安住) 근주(近住) 조순(調順) 적정(寂靜) 최극적정전주일취(最極寂靜專注一趣) 등지(等持)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본론(本論) 30권(卷)의 성문지대법(聲聞地對法)의 제 10에서 해석하는 것과 같다.
35) 유연(有緣)이란 과법(果法)을 말하고 연기(緣起)란 인법(因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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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생겨난 것은 능히 끊도록 한다.
  만약 이치에 맞지 않게 억지로 작의하는 것과 그 이치에 맞는 것을 작의하지 않는 이 두 가지를 종합적으로 설하면 바르지 않은 사유[不正思惟]라고 한다. 만약 이것에 대해서 응당 도리에 맞는다면 이러한 것을 이치에 맞는다[如理]고 이름함을 알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둠에 대해서 광명상(光明想)을 지을 경우는 이 방편(方便)에 의해서 이치대로 작의하는 것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 것[不如理]이 아닌 것이다. 그 밖의 처소에 대해서도 또한 그 밖의 이치에 맞는 작의[如理作意]가 있다.
  다음에36) 초정려(初靜慮)는 첫째 심(尋), 둘째 사(伺), 셋째 희(喜), 넷째 낙(樂), 다섯째 심일경성(心一境性)의 5지(支)를 구족(具足)한다. 제 2정려(靜慮)에는 첫째 내등정(內等淨)37), 둘째 희(喜), 셋째 낙(樂), 넷째 심일경성(心一境性)의 4지(支)가 있다. 제 3정려(靜慮)에는 첫째 사(捨), 둘째 염(念), 셋째 정지(正知), 넷째 낙(樂), 다섯째 심일경성(心一境性)의 5지(支)가 있다. 제 4정려(靜慮)에는 첫째 사청정(捨淸淨), 둘째 염청정(念淸淨), 셋째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넷째 심일경성(心一境性)의 4지(支)가 있다.
  초정려(初靜慮)에서는 심(尋) 사(伺)를 소연(所緣)을 취하는 것이라고 하며, 삼마지(三摩地)를 그것의 소의(所依)라고 하며, 희(喜)를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受]이라고 하며, 낙(樂)을 추중(麤重)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제 2정려에서는 내등정(內等淨)을 소연(所緣)으로 취하는 것이라고 하며, 삼마지(三摩地)를 그것의 소의(所依)라고 하며,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제 3정려에서는 사(捨) 염(念) 정지(正知)를 소연(所緣)으로 취하는 것이라고 하며, 삼마지(三摩地)를 그것의 소의(所依)라고 하며,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제 4정려에서는 사청정[捨淨]과 염청정[念淨]을 소연(所緣)으로 취하는 것이라고 하며, 삼마지(三摩地)를 그것의 소의(所依)라고 하며,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여러 가지 정려(靜
  
36) 이하는 안립(安立)을 네 가지로 해석하는 가운데 세 번째로 지분(支分)을 설명한다.
37) 사(捨) 정념(正念) 정지(正知)의 셋이 정위(定位)에 의지하여 동일하게 능히 장애를 제거할 경우 내등정(內等淨)이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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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慮)에 다른 법이 있을지라도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정(定)을 닦는 자에게 은중(恩重)하기 때문에 치우치게 지(支)를 세우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초정려(初靜慮)에 심(尋)이 있고 사(伺)가 있는가?38)
   능히 욕계(欲界)를 염환(厭患)하여 초정려에 들어가는 사람은 초정려에서 능히 심(尋) 사(伺)의 허물[過]을 관(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 2정려에서는 능히 그것39)의 허물[過]을 관(觀)한다. 이 때문에 심 사가 고요해진다[尋思寂靜]고 설하는 것이다. 제 2정려에서와 같이 그것40)의 허물을 보기 때문에 심 사가 고요해진다고 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제 3정려에서는 희(喜)의 허물을 보기 때문에 희가 고요해진다[喜寂靜]고 하며, 제 4정려에서는 낙(樂)의 허물을 보기 때문에 락이 고요해진다[樂寂靜]고 한다. 사념(捨念)과 청정(淸淨)41)에는 차별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음에 여러 가지 정려(靜慮)의 명칭의 차별[名差別]이 있다. 어떤 경우는 증상심(增上心)이라고 이름하니, 말하자면 심청정(心淸淨)의 증상력(增上力)에 의해서 바르게 심려(審慮)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락주(樂住)라고 이름하니, 말하자면 여기에서는 최상의 즐거움[極樂]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여러 가지 정려에 의지하여 희락(喜樂) 안락(安樂) 사락(捨樂) 심신락(心身樂)을 받아들이기[領受] 때문이며, 또한 정(定)을 얻은 사람이 여러 정려에 자주 자주 출입(出入)하여 현법안락주(現法安樂住)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정(定)에서 현전(現前)에 현법락주(現法樂住)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 나와서는 '나는 이미 이와 같은 락주(樂住)를 받아들였다'고 이와 같은 말을 한다.
  무색정(無色定)에서는 이와 같은 수(受)가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 때문
  
38) 이하는 안립(安立)을 네 가지로 해석하는 가운데 네 번째로 정려(靜慮)의 명칭에 대해서 설명한다.
39) 심(尋) 사(伺)를 말한다.
40) 초정려(初靜慮)의 심(尋0 사(伺)를 가리킨다.
41) 사념(捨念)과 청정(淸淨)의 두 가지가 모두 있는 것을 제 3정려에 대한 제 4정려의 차별이라고 밝히는 것이다. 제 3정려에서도 사념(捨念)은 있지만 아직은 번뇌 등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청정(淸淨)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제 4정려에서는 번뇌[障]를 다 여의었기 때문에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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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그곳42)을 락주(樂住)라고 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서 나오고 나서는 응당 바르게 선설(宣說)해야만 한다. 왜냐 하면 어떤 아련야(阿練若)의 필추(苾芻)가 그43)에게 와서 물을 때 그가 만약 대답하지 못하면 곧바로 기론(譏論)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아련야(阿練若)의 필추(苾芻)44)는 어째서 아련야(阿練若)에 있는 자라고 하는가? 나는 지금 그에게 색(色) 무색(無色)을 초월한45) 적정해탈(寂靜解脫)을 물었는데 들어갔을 때에는 기설[記]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정(定)에 들어가는 것을 락주(樂住)가 아니다46)고 설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다시 피분열반(彼分涅槃)47)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차별열반(差別涅槃)48)이라고도 설할 수 있으니, 여러 가지 번뇌의 일부분[一分]을 끊기 때문에, 결정적(決定的)이지 않기 때문에49) 피분열반(彼分涅槃)이라고 이름하며, 구경열반(究竟涅槃)이 아니기 때문에 차별열반(差別涅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음에 이 4정려(靜慮)는 또한 출제수사(出諸受事)라고 하는 이름을 얻으니, 초정려(初靜慮)에서는 우근(憂根)을 출리(出離)하고, 제 2정려(靜慮)에서
  
42) 무색정(無色定)을 말한다.
43) 무색정(無色定)에 들었던 자를 말한다.
44) 적정처(寂靜處)의 비구(比丘)를 말하는데, 곧 색(色) 무색(無色)을 초월한 무색정(無色定) 무루정(無漏定)에 들어간 비구를 말한다.
45) 색(色)을 초월한 것은 무색정(無色定)을 말하며, 무색(無色)을 초월한 것은 무루정(無漏定)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이 두 가지가 적정한 해탈인가를 묻는 것이다.
46) 무색정(無色定)은 락주(樂住)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색계(色界)의 4정려(靜慮)만을 적정해탈(寂靜解脫)이라고 이름하며, 이는 곧 현법락주(現法樂住)이다.
47) 정정(淨定) 무루정(無漏定) 미정(味定)을 말한다. 그 미정(味定)은 여러 번뇌 가운데 일부분을 끊고 또한 적정(寂靜)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열반(涅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유위(有爲)이기 때문에 속히 움직이는 것이며 무루(無漏)가 아니다. 정(淨)과 무루(無漏)도 체(體)는 유위(有爲)라서 실제로는 열반(涅槃)이 아니다. 다만 혹(惑)이 없는 것만이 열반과 조금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피분열반(彼分涅槃)이라고 하는 것이다.
48) 번뇌(煩惱)를 여의어서 차츰 적정하게 되는 정(定)일 경우에는 짐짓 열반(涅槃)이라고 설할지라도 이는 유위법(有爲法)으로서 구경적정(究竟寂靜)의 진실열반(眞實涅槃)은 아니기 때문에 차별열반(差別涅槃)이라고 하는 것이다.
49) 진실결정(眞實決定)의 열반(涅槃)이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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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고근(苦根)을 출리(出離)하고, 제 3정려(靜慮)에서는 희근(喜根)을 출리(出離)하고, 제 4정려(靜慮)에서는 락근(樂根)을 출리(出離)하고, 무상(無相)50)에서는 사근(捨根)을 출리(出離)하는 것을 말한다. 박가범(薄伽梵)께서 『무전경(無顚經)』에서 "필추(苾芻)여, 우근(憂根)이 생겼으면 마땅히 여실(如實)하게 알아야만 한다"고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생겼다[生]고 하는 이것은 어떤 위(位)에서인가?51)
  말하자면 곧 이것의 단방편위(斷方便位)에서이니, 만약에 우근(憂根)이 마음사이에서 상속(相續)하게 되면 그 때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마땅히 이것의 인(因) 연(緣)과 아울러 시초[序]52) 혹은 상(相)과 행(行)을 모두 여실(如實)하게 아는 것이다.
  무엇을 인(因)을 안다고 하는 것인가?
  이 종자(種子)의 상속(相續)을 아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연(緣)을 안다고 하는 것인가?
  이 종자(種子)에 포함되지 않는 소의(所依)와 조반(助伴)을 아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시초[序]를 안다고 하는 것인가?
  우근(憂根)은 이것의 대상[事]에 의탁하여 생기는 것을 아는 것이니, 곧 능히 우근(憂根)을 일으키는 상(相)53)과 무지종자(無知種子)54)이다.
  무엇을 상(相)을 안다고 하는 것인가?
  이것은 척행( 行)의 상(相)인 줄 아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행(行)을 안다고 하는 것인가?
  이 능히 일으키는 행(行)은 곧 이치에 맞지 않는 작의[不如理作意]와 상응하는 대상[事]인 줄 아는 것을 말한다.
  
50) 무학위(無學位)를 말한다.
51) 이하는 『출리경(出離經)』을 해석하는 것이다. 처음 것은 『이우경(離憂經)』을 해석한다.
52) 그 근본[根]에 말미암은 것을 말한다.
53) 5근(根)과 5경(境) 등을 말한다.
54) 무지(無知)한 사람은 자주 우(憂)를 일으켜서 근심을 짓기 때문에 우치(愚癡)는 우(憂)의 시초[序]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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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알고 나서 출리(出離) 가운데에서 극히 마음을 제지(制持)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제지(制持)라고 하는 것인가?
  염오(染汚)의 행(行)에 대해서 그 마음을 제어하고 거두어서 사유수(思惟修)로 지탱하여[任持] 견고하게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여기에서 남김없이 모두 멸(滅)하고 내지 구경(究竟)한다란 수면(隨眠)을 멸하기 때문에, 여러 전(纏)을 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간(世間)의 정려(靜慮)는 단지 점차로 그 품(品)의 추중(麤重)을 버리지만 종자를 뽑아내지는 않는다. 만약 이것과 다른 것은 종자를 영원히 뽑아내기 때문에 뒤에 생기지 않아야만 하니, 무루(無漏)의 정려(靜慮)는 두 가지를 모두 버린다. 이와 같이55) 나머지에 있어서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알아야만 한다.
   어떤 상(相)으로서 우근(憂根)을 알아야 하는가?56)
   혹은 염오상(染汚相), 혹은 출리욕(出離欲)과 함께하는 선상(善相)이다.
  고근(苦根)이란 자신 등[自等]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혹은 자신의 공용[自勞] 등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혹는 불에 타는 것[火燒] 등의 증상력 때문에, 혹은 다른 이가 핍박하는 것[他逼] 등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이욕자(離欲者)들도 오히려 일으키게 되는 것을 말한다.
  희근(喜根)이란 제 2정려(靜慮)에 곧 제 2정려지(靜慮地)57)에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락근(樂根)이란 제 3정려(靜慮)에 곧 제 3정려지(靜慮地)에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무슨 까닭에 고근(苦根)은 초정려(初靜慮)에서는 끊어지지 않는 것[未斷]이라고 설하는가?58)
   그 품(品)에서는 추중(麤重)은 여전히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55) 뒤에 그 나머지 것들을 여의는 경(經)을 예로 든 것이다.
56) 이하는 문답(問答)으로 출리(出離)에 대해서 분별하는 것이다. 처음 것은 제 근(根)의 상(相)을 밝힌다.
57) 정려지(靜慮地)에서 '지(地)'는 지(支)의 의미이다.
58) 이하에서는 고근(苦根)에 대해서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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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까닭에 초정려(初靜慮)에 머물고 있는 자는 고근(苦根)이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현행(現行)하지 않는가?
   그것59)의 조반(助伴)과 상대(相對)함에 의해 우근(憂根)에 포함되는 여러 가지 고(苦)들을 그60)는 이미 끊었기 때문이다. 만약 초정려에서 이미 고근(苦根)을 끊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수행자가 초정려와 제 2정려에 들어갈 때 수의 소작[受所作]의 머무름의 차별이 없어야만 한다. 두 가지61)는 모두 희(喜)와 낙(樂)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경(經)에서 '여러 수(受)에서 벗어나는 것에 의해서 정려(靜慮)의 차별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63)에는 심 사가 고요해짐[尋伺寂靜]과 추중단멸(麤重斷滅)의 소작(所作)의 차별이 없어야만 한다.63)
  이와 같이 그 밖의 근[餘根]의 그 품(品)의 추중(麤重)64)은 점차로 끊어지기 때문에 위의 여러 정려(靜慮)에서 끊어지는 데에 차별이 있다.
  또한65) 무상(無相)66)이라고 하는 것은 경(經)에서 설한 무상심정(無相心定)을 말하는 것이니, 이 정(定)에서는 사근(捨根)이 영원히 끊어지지만67) 단지 수면(隨眠)과 그 품의 추중(麤重)을 해쳐서 남김없이 끊기 때문에 현전(現
  
59) 초정려를 가리킨다.
60) 초정려(初靜慮)를 얻은 수행자를 말한다.
61) 초정려(初靜慮)와 제 2정려(靜慮)를 가리킨다.
63) 초정려(初靜慮)와 제 2정려(靜慮)를 말한다.
63) 초정려에서는 심(尋) 사(伺)가 있어서 적정하지 않고 또한 추중(麤重)이 끊어지지도 않는다. 제 2정려에 이르러야 비로소 심 사를 여의어서 적정(寂靜)이 되며 추중(麤重)을 끊는다. 그런데도 초정려에서 고근(苦根)을 끊는다고 말한다면 이 두 가지 것에 차별이 없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64) 초정려에서 끊어지는 우근(憂根)을 제외한 고(苦) 희(喜) 낙(樂)의 3근(根)에 소속된 번뇌를 말한다.
65) 이하에서는 무상(無相)에 대해서 밝힌다.
66) 무상(無相)이란 무학인(無學人)이 무루정(無漏定)에서 진여(眞如)의 경(境)을 연(緣)하는 것을 말한다.
67) 유루(有漏)의 사(捨)의 종자는 번뇌에 의해서 묶이기 때문에 짐짓 추중(麤重)이라고 이름하는데, 이 정(定)에 들어가면 단(斷)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현행(現行)된 무루(無漏)의 사(捨)를 현전(現纏)이라고 이름하는데, 정(定)에 있어서도 여전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의 여러 가지 수(受)는 번뇌로 인해서 물들지 않을지라도 수면(隨眠)이라는 것은 있기 때문에 이 수면(隨眠)을 추중(麤重)이라고 이름한다. 무루(無漏)의 수(受)에 종자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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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纏)을 멸하는 것은 아니다. 무상정(無相定)에 머무를 때는 반드시 수(受)가 있기 때문에 이 정(定)에 희(喜) 낙(樂) 사(捨)의 3수(受)가 있다고 인정해야 하며, 그 여러 수(受)에는 수면(隨眠)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번뇌가 끊어졌기 때문에 단(斷)이라고 설하는 것이며, 그 품(品)의 추중(麤重)을 수면(隨眠)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사근(捨根)은 어떤 처소까지 이르는가?
  제 4정려(靜慮)로부터 유정(有頂)에 이르기까지임을 알아야만 한다.
  다음에 이 5근(根)에서 출리(出離)한 무상(無相)은 후(後)의 그 다섯 가지의 순출리계[五種順出離界]68)와 전전(展轉)하며 서로 관계[相攝]한다. 여기에서는 욕(欲) 에(恚) 해(害)의 출리(出離)69)에 의해서 곧 락근(樂根)에 이르기까지의 출리를 설하며, 색(色)의 출리(出離)에 의해서 제 4정려의 사근(捨根)의 출리를 설하며, 살가야(薩迦耶)의 멸(滅)에 의해서 무색계(無色界) 일체의 4근(根)의 출리(出離)를 설한다.
  순출리(順出離)라고 하는 말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가?
  여기에 머무르는 자는 능히 출리(出離)하기 때문에 순출리(順出離)라고 하며, 이것에 의해서70) 저것으로부터 출리(出離)한다고 설하지 않으니, 이욕자(離欲者)를 위해서 이 계(界)를 설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욕(欲) 에(恚) 해(害)는 반드시 동시에 끊어지는데, 무슨 까닭에 따로 따로 출리(出離)를 건립하는가?71)
   그 여러 가지 출리(出離)는 비록 동시이지만 대치를 닦는 것에 의거하면 차별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의 출리의 차별을 선설(宣說)하는 것이다. 대치의 차별이란 부정(不淨) 자(慈) 비(悲)의 그 차례대로, 어떤 경우는 오직
  
68) 부정(不淨) 자(慈) 비(悲)의 3관(觀)과 공처(空處) 무상(無相)의 2정(定)을 말한다.
69) 욕(欲)에서 출리(出離)하는 것은 부정관(不淨觀)에 의하고, 에(恚)에서 출리하는 것은 자관(慈觀)에 의하고, 해(害)에서 출리하는 것은 비관(悲觀)에 의한다. 이 세 가지의 출리는 곧 우(憂) 고(苦) 희(喜) 낙(樂)의 네 가지 근(根)에서 출리하는 것이다. 자(慈) 비(悲)는 제 4정려에 모두 통하여 있는 것이다.
70) 범부(凡夫) 유학(有學)의 사람은 이 다섯 가지 관(觀)에 의해서 그 욕(欲) 에(恚) 해(害) 등을 출리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71) 비난[妨難]을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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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不淨)만을 닦아서 일체를 출리(出離)하고, 어떤 경우는 자(慈) 혹은 비(悲)만을 닦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따로 따로 세 가지 출리(出離)를 설하는 것이다. 이 이상72)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대치만이 있기 때문에 후(後)의 출리(出離)에는 차별이 없다.
  무엇을73) 맹리(猛利)한 견(見)이라고 하는가?
  탐욕[欲]을 같이 하면서 수념(隨念)하는 것이니, 관찰(觀察)의 작의(作意)에 의하여 뛰어난 대상[勝事]에 대하여 작의(作意)하기 때문이며, 맹리한 공용(功用)의 작의(作意) 때문이다.
  무엇을 여러 가지 탐욕[諸欲]에 대하여 마음이 취입(趣入)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그 처(處)에 대하여 뛰어난 공덕(功德)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불미(不美)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그 처(處)에 대하여 희열(喜悅)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불주(不住)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그 처(處)에 대하여 흔열(欣悅)하면서 쾌히 수용(受用)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승해(勝解)가 없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그 처(處)에 대하여 여리상(如理相)이 아니기 때문에 쾌히 취착(取著)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위췌(萎顇)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비록 멋대로[縱任]하지만 서태(舒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괴산(壞散)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경(境)을 취하고 나서 살피고 다시 버리기 때문이다.
  무엇을 서태(舒泰)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72) 제 4의 색출리(色出離)는 특별히 공정(空定)에 의지하여 색공(色空)을 관(觀)하고 제 5의 사근출리(捨根出離)는 무루(無漏)의 공관(空觀)을 관(觀)하는 것으로, 어떤 종류일지라도 대치법에 있어서는 종류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73) 경(經)의 내용을 28구(句)로 해석하는데, 앞의 13구(句)는 이욕(離欲)의 방편도(方便道)를 그 다음의 15구(句)는 정리욕도(正離欲道)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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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소연(所緣)에 대하여 비록 강제로 머무를지라도 애락(愛樂)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평등하게 사(捨)에 머무른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평등위(平等位)에 나아가서 평등위에서 마음이 관(觀)에 노닐기 때문이다.
  무엇 등을 염(厭)이라고 하는가?
  저것74)에 대하여 과환(過患)을 깊이 보기 때문에 버리는 것[棄背]을 특징[性]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에는 다시 세 가지 있으니, 말하자면 무상(無常) 때문이며, 고(苦) 때문이며, 변괴법(變壞法) 때문이다.
  무엇을 악(惡)이라고 하는가?
  저것에 대하여 처음 과환(過患)을 보고서 버리는 것[棄背]을 특징[性]으로 하는 것이다.
  무엇 등을 위(違)라고 하는가?
  저것에 대하여 과환(過患)을 보기 때문에 버리는 것[棄背]을 특징[性]으로 하는 것이다.
  무엇 등을 배(背)라고 하는가?
  저것에 대하여 나중에 과환(過患)을 보기 때문에 버리는 것[棄背]을 특징[性]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과 상위(相違)하면 곧 이욕(離欲)에 대하여 작의(作意)하여 취입(趣入)한다란 이 처(處)에 대하여 뛰어난 공덕(功德)을 보기 때문이다. 미(美)란 말하자면 이 처(處)에 대하여 청정한 믿음[信]을 내어서 증득[證]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주(住)란 말하자면 소연(所緣)에 대하여 흩어버리지[流散] 않기 때문이다.
  승해(勝解)란 이 처(處)에 대하여 염오(染汚)하지 않고 구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번뇌(煩惱)로부터 이계(離繫)를 얻기 때문에 염(厭) 등의 버리는 것[棄背]의 행(行)에서 바르게 유전(流轉)할 때에 마음에 걸림[罣礙]이 없고, 또한 다시 사(捨)에 대하여 공용(功用)이 없는 것이다.
  
74) 탐욕[貪]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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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그 마음의 선서(善逝)75)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방편구경작의(方便究竟作意)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수(善修)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나머지 작의(作意)를 잘 수습(修習)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위(斷位)와 단방편도위(斷方便道位)를 설명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해(解)란 말하자면 여러 가지 전(纏)을 해탈하기 때문이다. 탈(脫)이란 말하자면 소연(所緣)의 상(相)을 해탈하기 때문이다. 이계(離繫)란 말하자면 수면(隨眠)을 해탈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욕연(欲緣)으로부터 생기게 되는[所生] 여러 가지 루(漏)란 욕탐(欲貪)을 제외한 그 밖의 욕계의 번뇌(煩惱)를 말한다. 손궤(損匱)란 이것으로 인하여 무기[器仗]를 잡는 등의 악행(惡行)의 차별을 생기게 하며, 이것에 대하여 혹은 짓고 혹은 증장하기 때문에 여러 악취(惡趣)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소(燒)란 말하자면 이 욕애(欲愛)를 씹어 먹음[噉食]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을 태우기[燒] 때문이다.
  뇌(惱)란 이 인(因)에 의하여 대상[事]이 변괴(變壞)하면 문득 근심과 괴로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해탈하고 뛰어넘고[超出] 이계(離繫)한다란 앞의 차례대로 여러 가지 전(纏)과 소연(所緣)과 수면에서 벗어나기[解脫] 때문이다.
  무엇을 끝내 영납(領納)하여도 그 여러 가지 수(受)를 연(緣)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장득(將得) 정득(正得) 수념(隨念)의 제 욕(欲)의 경계(境界)에 의하여도 염오(染汚)의 여러 가지 수(受)를 다시는 현행(現行)하지 않으니, 그 소의신(所依身)이 중혹(衆惑)에 염오되지 않고 머무르는 것이 물방울에 젖지 않는 홍련화(紅蓮華)와 같은 것이다.
  다음에 여섯 가지의 순출리계(順出離界)76)가 있으니, 경(經)에서 '나는 이
  
75) 바르게 제 혹(惑)을 끊고 구경(究竟)의 마음이 지극한 도[心妙道]에 가는 것을 선서(善逝)라고 한다.
76) 자(慈) 비(悲) 희(喜) 사(捨) 무상(無相) 이아만(離我慢)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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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자(慈)를 닦고 내지 이미 아만(我慢)을 여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의혹(疑惑)의 독화살 때문에 그 마음이 번민하고 산란하다. 그러므로 자(慈) 등은 에(恚)와 해(害) 등에 대하여 바르게 대치한 것[正對治]이 아니다'고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삿된 집착[邪執]을 버리기 위해서 이 계(界)를 건립한 줄 알아야 한다'고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에 에(恚) 등77)의 이욕(離欲)의 대치(對治)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에 앞의 4대치상(對治相)78)을 건립한 것이며, 성주(聖住)를 관찰하여 도리(道理)를 얻기 때문에 무상(無相)을 건립한 것이며, 구경(究竟)의 정도리(正道理)를 관찰하기 때문에 여섯 번째79)를 건립한 것이다.
  자(慈)는 무손(無損)의 행(行)이 구르기[轉] 때문에 에(恚)를 대치하며, 비(悲)는 남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뛰어난 즐거움[勝樂]의 행(行)이 구르기 때문에 해(害)를 대치하며, 희(喜)는 남의 즐거운 일에 대하여 따라 기뻐하는[隨喜] 행이 구르기 때문에 불락(不樂)을 대치하며, 사(捨)는 사행(捨行)과 함께 구르기 때문에 탐에(貪恚)를 대치한다. 무상(無相)은 상(相)과 상위하기 때문에 일체(一切)의 중상(衆相)을 대치한다. 만약 아만(我慢)을 여의면 자신의 해탈이나 혹은 소증(所證)에 대하여 반드시 의혹(疑惑)이 없기 때문에 아만을 여의는 것은 그것80)의 대치(對治)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출리(出離)는 반드시 일체의 에(恚) 등을 능히 출리할 수 있지만 능히 잘 닦지[善修] 않기 때문에 에(恚) 등의 과실(過失)이 현행(現行)하는 것이다.
  또한 앞의 다섯 가지의 순출리계(順出離界) 중의 앞의 네 가지81)는 천주(天住)에 포함되며, 다섯 번째82)의 한 가지는 성주(聖住)에 포함된다. 지금 이 여섯 가지의 순출리계(順出離界)의 앞의 네 가지는 범주(梵住)83)에 포함되
  
77) 에(恚) 해(害) 불락(不樂) 탐에(貪恚)의 네 가지를 말한다.
78)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대치수습을 말한다.
79) 이아만(離我慢)의 대치수습을 말한다.
80) 의혹(疑惑)을 가리킨다.
81) 자(慈) 비(悲)희(喜) 사(捨)를 말한다.
82) 무상(無相)을 말한다.
83) 4무량(無量)에 의해서 범복(梵福)의 과(果)를 부르기 때문에 범주(梵住)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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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다섯 번째84)와 여섯 번째85)는 성주(聖住)에 포함된다.
  다음에 능히 에(恚) 등의 과실들을 뛰어넘기 때문에 출리(出離)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출리(出離)할 때에 바르게 의지하기[憑仗] 때문에 의지[依]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세존(世尊)께서 설하신 의지[依]에는 간략히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삭취취(數取趣)가 아니라 법(法)에 의지[依]하는 것이며, 둘째 문자[文]이 아니라 이치[義]에 의지[依]하는 것이며, 셋째는 불요의경(不了義經)이 아니라 요의경(了義經)에 의지[依]하는 것이며, 넷째 식(識)이 아니라 지혜[智]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의 의지[依]는 무엇 때문에 건립하는가?
  보특가라(補特伽羅)에는 네 가지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첨하고 속이는[諂詐] 보특가라의 차별에 인하기 때문에 맨처음의 의지[依]86)를 건립하는 것이며, 세간을 따르는[順世間] 보특가라(補特伽羅)87)의 차별에 인하기 때문에 두 번째 것88)을 건립하는 것이며, 자신의 견취(見取)89)에 머무르는 보특가라의 차별에 인하기 때문에 세 번째 것90)을 건립하는 것이며, 듣는 것[聞]을 최고로 삼는91) 보특가라의 차별에 인하기 때문에 네 번째 것92)을 건립하는 것이다.
  
84) 무상(無相)의 대치수습을 가리킨다.
85) 이아만(離我慢)의 대치수습을 가리킨다.
86) 법(法)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87) 세속(世俗)에 순응하여 설법하시는 부처님을 말한다. 세속에 순응하는 문자(文字)를 구경(究竟)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반드시 이치[義]에 의하여야 한다고 부처님께서는 설법하신다.
88) 이치[義] 즉 진리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89) 자신의 견해가 뛰어나다고 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요의경(了義經)을 뛰어나다고 하여 의지하게끔 하는 것이다.
90) 요의경(了義經)에 의지[依]하는 것을 말한다.
91) 인(人) 천(天)의 인(因)은 식(識)이며, 열반의 인(因)은 지(智)이므로 요의경(了義經)에서는 처음에 수행하는 사람을 위하여 식(識)을 설하고 오래 수행한 사람을 위하여 지(智)를 설한다. 여기에서는 초음에 수행하는 사람을 위한 식(識)을 듣고서 최고의 설이라고 오해하는 자를 막기 위하여 네 번째의 보특가라를 건립하는 것이다.
92) 지혜[智]에 의지[依]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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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아첨과 속임[諂詐] 때문에 삭취취(數取趣)가 아니라 법(法)에 의지하라고 설하신 것이며, 반드시 그것93)과 함께 논의(論義)하고 분별(分別)하고 결택(決擇)하면 드디어 정지(正智)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위의(威儀)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여기에 다시 차별이 있으니, 말하자면 부처님께서는 "보특가라(補特伽羅) 및 제 법(法)은 삭취취(數取趣)가 아니라 법(法)에 의지해야 한다"고 선설(宣說)하셨으니, 세속(世俗)의 언사(言辭)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법(法)에는 또한 문자[文]와 이치[義]의 두 가지가 있는데, 문자가 아니라 오직 이치[義]에만 의지[依]해야 한다. 왜냐 하면 듣는 것[聞]만으로 구경(究竟)으로 삼지 않아야 하며, 반드시 이치[義]에 대하여 사유(思惟)하고 헤아리고[籌量] 자세히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經)에는 어떤 경우는 요의(了義)도 있고, 어떤 경우는 불요의(不了義)도 있는데, 이치[義]를 관찰할 때 불요의(不了義)가 아니라 요의(了義)가 의지[依]가 된다. 부처님께서 어떤 때는 선취(善趣)에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취(趣)에 의지하여 복부동(福不動)의 식(識)94)을 선설하시며, 어떤 때는 열반(涅槃)에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4성제지(聖諦智)를 선설하신다.
  법(法)과 수법행(隨法行)95)을 닦을 때에는 식(識)이 아니라 지(智)에만 의지[依]해야 한다. 간략히 잃음[失]과 잃지 않음[不失]이 있기 때문에, 즉 득법(得法)의 때[時]와 주지(住持)의 때와 이치[義]를 관찰할 시(時)와 법(法)과 수법행(隨法行)을 관찰할 때의 네 가지의 보특가라(補特伽羅)를 건립하는 것이다. 4시(時)에 의지하기 때문에 4의(依)를 건립한다.
  안립(安立)을 설하였다.
  다음에 이 정려(靜慮)에 작의(作意)와 소연(所緣)의 두 가지의 차별을 알아야만 한다.96)
  
93) 법(法)을 가리킨다.
94) 인(人) 천(天)의 생인(生因)인 복(福) 부동업(不動業)과 관계하는 심식(心識)을 의미한다.
95) 법(法)은 멸제(滅諦)를 의미하며, 수법(隨法)은 도제(道諦)를 의미한다. 출리도(出離道)를 닦을 때에는 식(識)이 아니라 지(智)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96) 삼마희다지(三摩 多地)는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하는 가운데에 이하는 작의(作意)와 소연(所緣)의 상(相)에 대하여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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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의(作意)의 차별이란97) 7종(種)의 근본작의(根本作意)1)와 그 밖의 40종(種)의 작의(作意)99)를 말한다.
  무엇을 7종(種)의 작의(作意)라고 하는가?
  요상작의(了相作意)와 승해작의(勝解作意)와 원리작의(遠離作意)와 섭락작의(攝樂作意)와 관찰작의(觀察作意)와 가행구경작의(加行究竟作意)와 가행구경과작의(加行究竟果作意)를 말한다.
  무엇을 40작의(作意)라고 하는가?
  연법작의(緣法作意)와 연의작의(緣義作意)와 연신작의(緣身作意)와 연수작의(緣受作意)와 연심작의(緣心作意)와 연법작의(緣法作意)와 승해작의(勝解作意)와 진실작의(眞實作意)와 유학작의(有學作意)와 무학작의(無學作意)와 비학비무학작의(非學非無學作意)와 변지작의(遍知作意)와 정단작의(正斷作意)와 이단작의(已斷作意)와 유분별영상소연작의(有分別影像所緣作意)와 무분별영상소연작의(無分別影像所緣作意)와 사변제소연작의(事邊際所緣作意)와 소작성판소연작의(所作成辦所緣作意)와 승해사택작의(勝解思擇作意)와 적정작의(寂靜作意)와 일분수작의(一分修作意)와 구분수작의(具分修作意)와 무간작의(無間作意)와 은중작의(殷重作意)와 수순작의(隨順作意)와 대치작의(對治作意)와 순청정작의(順淸淨作意)와 순관찰작의(順觀察作意)와 역려운전작의(力勵運轉作意)와 유간운전작의(有間運轉作意)와 유공용운전작의(有功用運轉作意)와 자연운전작의(自然運轉作意)와 사택작의(思擇作意)와 내섭작의(內攝作意)와 정장작의(淨障作意)와 의지성판소행청정작의(依止成辦所行淸淨作依)와 타소건립작의(他所建立作意)와 내증상취작
  
97) 다섯 가지의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에 세 번째로 작의(作意)를 해석한다. 작의(作意)에 대해서는 첫째 7작의(作意)와 40작의(作意)의 명칭을 나열하고, 둘째 40작의(作意)의 행상(行相)을 낱낱이 해석하며, 셋째 7작의(作意)와 40작의(作意)의 서로간의 관계에 대하여 밝힌다. 이하는 그 첫 번째로 7작의(作意)와 40작의(作意)의 명칭을 거론한다.
99) 정심(定心)과 산심(散心)의 둘에 통할지라도 대개 정위(定位)에 의하여 닦기 때문에 등인지(等引地)에서 이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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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內增上取作意)와 광대작의(廣大作意)와 변행작의(遍行作意)를 말한다.100)
  연법작의(緣法作意)란101) 문소성혜(聞所成慧)와 상응(相應)하는 작의(作意)를 말한다. 연의작의(緣義作意)란 사(思) 수소성혜(修所成慧)와 상응하는 작의를 말한다.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을 연(緣)하는 작의(作意)란 염주(念住)102)를 닦는 자(者)가 여리(如理)하게 신(身) 등을 사유(思惟)하는 작의를 말한다. 승해작의(勝解作意)란 정려를 닦는 자는 그 바라는 것[所欲]에 따라서 여러 가지 사상(事相)을 증장하는 작의를 말한다. 진실작의(眞實作意)란 자상(自相) 공상(共相) 진여상(眞如相)으로써 여리하게 제 법(法)을 사유하는 작의를 말한다.
  유학작의(有學作意)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自性)이며, 둘째는 재상속(在相續)이다. 자성(自性)이란 유학(有學)의 무루작의(無漏作意)를 말하고 재상속(在相續)103)이란 유학(有學)의 일체의 선작의(善作意)를 말한다. 유학작의(有學作意)와 같이 무학작의(無學作意)의 두 가지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비학비무학작의(非學非無學作意)란 일체세간의 작의를 말한다. 변지작의(遍知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소연(所緣)을 두루 알아서[遍知] 혹(惑)을 끊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정단작의(正斷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두 가지 일[事]104)을 함께 짓는 것을 말한다. 이단작의(已斷作意)란 번뇌를 끊은 후에 있게 되는 작의를 말한다.
  유분별영상소연작의(有分別影像所緣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분별
  
100) 이러한 작의(作意)에 대해서는 본론(本論)의 제 33권(卷)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101) 첫째 7작의(作意)와 40작의(作意)의 명칭을 나열하고, 둘째 40작의(作意)의 행상(行相)을 낱낱이 해석하며, 셋째 7작의(作意)와 40작의(作意)의 서로간의 관계에 대하여 밝히는 작의(作意)의 내용 중에, 이하는 그 두 번째로 40작의(作意)의 행상(行相)을 낱낱이 해석한다.
102) 4념주(念住)의 관(觀)을 말한다. 곧 첫째 신(身)은 부정(不淨)하며, 둘째 수(受)는 고(苦)이며, 셋째 심(心)은 무상(無常)하며, 넷째 법(法)은 무아(無我)이다고 관하는 것이다.
103) 이 때 상속(相續)이란 몸을 말한다.
104) 두루 진여(眞如)를 알고, 다시 능히 혹(惑)을 끊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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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分別)의 체(體) 경(境)을 연(緣)하는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닦는 것을 말한다. 무분별영상소연작의(無分別影像所緣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분별의 체(體) 경(境)을 연하는 사마타(奢摩他)를 닦는 것을 말한다.
  사변제소연작의(事邊際所緣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일체의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의 소연(所緣)의 변제(邊際)를 완전히 알아서[了知] 이것을 넘어서 곧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은 없음을 완전히 아는 것을 말한다. 소작성판소연작의(所作成辦所緣作意)란 나는 여차(如此) 여차(如此) 사유(思惟)하고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사유한 것은 여차 여차 있어야만 하고 이렇게 이렇게 갖추어야만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이 청정한 소연(所緣)을 연(緣)하는 작의를 말한다.
  승해사택작의(勝解思擇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혹은 맨처음에 제 법(法)을 생각하여 택하게 되며, 혹은 사마타(奢摩他)를 상수(上首)로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적정작의(寂靜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혹은 맨 처음에 마음을 안으로 안정시키는 것이 있고 혹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상수(上首)로 하는 것을 말한다.
  일분수작의(一分修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에 따라서 일부분[一分]을 닦는 것을 말한다. 구분수작의(具分修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두 부분을 쌍으로 닦는 것을 말한다. 무간작의(無間作意)란 일체시(一切時)에 간단(間斷) 없이 상속(相續)하며 구르는 것을 말한다. 은중작의(殷重作意)란 느슨하지[慢緩]하지 않는 가행방편(加行方便)을 말한다.
  이 가운데에 승해사택작의(勝解思擇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청정하게 지견(智見)을 닦으며, 적정작의(寂靜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경안(輕安)을 키우며[生長], 일분(一分) 구분수작의(具分修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여러 개(蓋)로부터 마음에 해탈을 얻으며, 무간(無間) 은중작의(殷重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여러 결(結)로부터 마음에 해탈을 얻으며, 또한 무간작의(無間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끝내 부질없이 신명(身命)을 버리지 않으며, 은중작의(殷重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속히 통혜(通慧)105)를 증득한다.
  수순작의(隨順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소연(所緣)을 싫어하여 무너
  
105) 신통과 지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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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리고[厭壞] 번뇌를 따라다니며 끊는 것[順斷]을 말한다. 대치작의(對治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제 혹(惑)을 곧바로 버려서[正捨] 끊음[斷]을 임지(任持)하고 제 번뇌가 상속하는 것을 멀리 여의는 것을 말한다. 순청정작의(順淸淨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6수념(隨念)106)을 닦거나 혹은 다시 하나의 묘사(妙事)를 따라서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순관찰작의(順觀察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제 번뇌의 끊음[諸煩惱斷]과 아직 끊지 못함[未斷]을 관찰하고 혹은 다시 자기(自己)의 소증(所證)과 먼저 관찰한 제 법(法)의 도리(道理)를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역려운전작의(力勵運轉作意)란 처음 업[始業]을 닦아서 아직 작의를 얻지 못한 자가 갖게 되는 작의를 말한다. 유간운전작의(有間運轉作意)란 작의를 얻고 나서 위에 늘어짐[上慢緩]에 대하여 가행(加行)을 닦는 자가 갖게 되는 작의를 말한다. 유공용운전작의(有功用運轉作意)란 곧 이 용맹정진(勇猛精進)에 대하여 늘어짐[慢緩] 없이 가행(加行)을 닦는 자가 갖게 되는 작의를 말한다. 자연운전작의(自然運轉作意)란 4시(時)에 결정적으로 작의하는 것을 말하니, 첫째는 작의를 얻을 때이며, 둘째는 근본정(根本定)107)에 바로 들어가고[正入] 이미 들어갔을[已入] 때이며, 셋째는 현관(現觀)을 닦을 때108)이며, 넷째는 아라한(阿羅漢)을 곧바로 얻고[正得] 이미 얻었을[已得] 때이다.
  사택작의(思擇作意)란 비발사나품(毘鉢舍那品)의 작의를 말하며, 내섭작의(內攝作意)란 사마타품(奢摩他品)의 작의를 말한다. 정장작의(淨障作意)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제 루(漏)를 내버리고[棄捨] 영원히 추중(麤重)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 의지성판소행청정작의(依止成辦所行淸淨作依)란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일체의 추중(麤重)을 여읜 몸에 의지하여 일체의 소연(所緣)의 경계(境界)를 행할지라도 제 번뇌가 다시는 현행(現行)하지 않는 것을
  
106) 염불(念佛) 염법(念法) 등을 말한다. 본론(本論)의 보살지(菩薩地)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107) 견도(見道)에 도달하는 방편(方便)으로서 색계(色界)의 4근본정려(根本靜慮)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108) 견도(見道) 및 수도(修道)에서 제(諦)의 도리[理]를 현관(現觀)할 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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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한다. 타소건립작의(他所建立作意)란 제 성문(聲聞)이 갖게 되는 작의를 말하며,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소리[他音]를 쫓아서만 이에 안으로 이치에 맞게 작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증상취작의(內增上取作意)란 제 독각(獨覺)과 제 보살(菩薩)이 갖고 있는 작의를 말하며, 스승[師]을 쫓지 않고 깨닫기[覺悟] 때문이다. 광대작의(廣大作意)란 잘 생사(生死)의 과실(過失)을 요지(了知)하기 위하여 출리(出離)의 방편으로써 홍서(弘誓)의 원(願)을 일으키고 대보리(大菩提)로 나아가는 제 보살(菩薩)이 갖고 있는 작의를 말한다.
  변행작의(遍行作意)란 불(佛) 세존(世尊)께서 일체를 현견(現見)하여 장애없는 지(智)와 상응하는 작의(作意)와 또는 제 보살(菩薩)이 3승(乘)과 5명처(明處)와 선교방편(善巧方便)에 두루하면서 갖고 있는 작의(作意)를 말한다.
  이 가운데에109) 요상작의(了相作意)는 연법(緣法) 연의(緣義)를 포함하고 나머지 여섯 작의는 연의(緣義)만을 포함한다. 신(身) 등의 경(境)을 연(緣)하는 4종작의는 두루 일곱 가지에 포함되며, 요상(了相) 승해(勝解) 가행구경과(加行究竟果)의 작의(作意)는 승해(勝解) 진실(眞實)의 작의를 모두 포함하며, 관찰작의(觀察作意)는 오직 승해(勝解)만을 포함하고, 나머지 3작의(作意)는 오직 진실(眞實)만을 포함한다. 이것은 전문(前門)110)에 나아간 것이고 여문(餘門)111)에 나아갈 경우에는 상응에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7종작의는 유학(有學) 및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을 포함하고, 2종작의 즉 청정지요상작의(淸淨地了相作意) 및 가행구경과작의(加行究竟果作意)는 또한 무학작의(無學作意)를 포함한다. 요상(了相) 승해(勝解) 관찰(觀察)의 작의는 변지작의(遍知作意)를 포함하고, 나머지 3작의는 정단작
  
109) 첫째 7작의(作意)와 40작의(作意)의 명칭을 나열하고, 둘째 40작의(作意)의 행상(行相)을 낱낱이 해석하며, 셋째 7작의(作意)와 40작의(作意)의 서로간의 관계에 대하여 밝히는 작의(作意)의 내용 중에, 이하는 그 세 번째로 7작의(作意)와 40작의(作意)의 서로간의 관계에 대해서 밝힌다.
110) 진실작의(眞實作意)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연(緣)하기 때문에 전문(前門)이라고 하며 이는 3승(乘)의 통설(通說)이다.
111) 진실작의(眞實作意)가 진여(眞如)를 연(緣)하기 때문에 여문(餘門)이라고 하며, 이것은 오직 보살(菩薩)에게만 국한하여 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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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正斷作意)를 포함하며, 가행구경과작의(加行究竟果作意)는 이단작의(已斷作意)를 포함한다. 관찰작의(觀察作意)는 오직 유분별영상소연작의(有分別影像所緣作意)를 포함하고, 나머지 여섯 가지 작의는 두 가지 종류를 모두 포함한다. 사변제소연작의(事邊際所緣作意)는 일체에 두루 포함되고, 소작성판소연작의(所作成辦所緣作意)는 만약 초문(初門)에 나아가면 일체에 두루 포함되고 제 2문(門)에 나아가면 오직 가행구경과작의(加行究竟果作意)에 포함된다.
  맨 처음의 승해사택작의(勝解思擇作意)는 모두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나 만약 사마타(奢摩他)를 상수(上首)로 하면 일체에 두루 포함되고, 만약 최초의 정려 또는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상수(上首)로 할 경우에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만 한다.
  앞에 여섯 가지 작의는 모두 일분(一分) 및 구분수(具分修)를 포함하고 가행구경과작의(加行究竟果作意)는 오직 구분수(具分修)만을 포함한다. 무간작의(無間作意)와 은중작의(殷重作意)는 일체에 두루 포함되고, 수순작의(隨順作意)는 앞의 두 가지에 포함되고 대치작의(對治作意)는 원리(遠離) 가행구경(加行究竟)의 두 가지 작의에 포함되고, 섭락작의(攝樂作意)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순청정작의(順淸淨作意)는 오직 섭락(攝樂)의 일부분에 포함되고, 순관찰단미단작의(順觀察斷未斷作意)는 오직 관찰작의(觀察作意)에만 포함된다. 이것은 단대치(斷對治)에 나아가 설하는 것이며 만약 그 밖의 것[所餘]112)에 나아갈 경우에는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역려운전작의(力勵運轉作意)는 모든 것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며, 유간(有間) 유공용운전작의(有功用運轉作意)는 섭락작의(攝樂作意)에 이르기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자연운전작의(自然運轉作意)는 가행구경(加行究竟) 및 가행구경과(加行究竟果)의 두 작의에 포함된다. 사택작의(思擇作意)는
  
112) 순관찰작의(順觀察作意)에서 번뇌의 단(斷)과 미단(未斷)를 관찰하는 것과, 자기가 증득한 것 및 먼저 관한 제 법을 관찰하는 것이 있는데, 후자를 그 밖의 것[所餘]라고 한다. 그 밖의 것에 나아간다고 할 경우 순관찰작의는 요상(了相) 승해(勝解) 관찰(觀察) 및 과(果)의 네 작의에 포함되며, 단지 관찰작의에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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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상(了相)에 포함되고, 내섭작의(內攝作意)는 승해(勝解)에 포함되며, 정장작의(淨障作意)는 원리(遠離) 섭락(攝樂) 관찰(觀察) 가행구경(加行究竟)의 작의에 포함된다.
  의지성판소행청정작의(依止成辦所行淸淨作意)는 오직 가행구경과작의(加行究竟果作意)에만 포함되고, 타소건립(他所建立) 내증상취(內增上取)의 작의는 일체의 작의에 포함된다. 광대작의(廣大作意)는 모든 것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며, 처음의 변행작의(遍行作意)는 가행구경과(加行究竟果)에 포함되며, 두 번째 것은 일체에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요상작의(了相作意) 중에 타소섭작의(他所攝作意)에 포함되는 것은 다른 것의 소리[他音]를 듣고 또는 안의 이치에 맞는 작의[內如理作意]로써 일정하게 그 연(緣)으로 삼는 것이다. 내증상취작의(內增上取作意)에 포함되는 것은 오직 먼저의 자량(資糧)을 그 연(緣)으로 삼는 것이다. 그 밖의 작의는 전전후후(前前後後)로 전달되면서 그 연(緣)으로 삼는다.
  다음에113) 무엇을 소연(所緣)의 차별(差別)이라고 하는가?
  상(相)의 차별(差別)을 말한다.
  무엇 등을 상(相)이라고 하는가?
  간략하게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소연상(所緣相)이고, 둘째는 인연상(因緣相)이며, 셋째는 마땅히 원리해야 할 상[應遠離相]이고, 넷째는 마땅히 수습해야 할 상[應修習相]이다.
  소연상(所緣相)이란 소지사(所知事)의 분별(分別)의 체(體)와 상(相)을 말한다. 인연상(因緣相)이란 정(定)의 자량(資糧)114)을 말한다. 마땅히 원리해야 할 상[應遠離相]이란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침상(沈相) 도상(掉相) 난상(亂相) 착상(著相)을 말한다. 마땅히 수습해야 할 상[應修習相]이란 위의 네
  
113) 삼마희다지(三摩 多地)는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하는 가운데에 네 번째로 상(相)의 차별(差別)에 의하여 소연(所緣) 대하여 기술한다. 상(相)의 차별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되는데, 첫째는 4상(相)과 32상(相)에 대하여 밝히며, 둘째는 본말(本末)의 서로간의 관계에 대하여 밝히고, 셋째는 종합적으로 문장[文]을 분별한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내용이다.
114) 무회(無悔) 환(歡) 희(喜) 안(安) 낙(樂) 등의 인(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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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상(相)을 대치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 등이 침상(沈相)인가?
  근문(根門)을 지키지 못하고, 양(量)을 알지 못한 채 먹으며, 초저녁[初夜]과 새벽녘[後夜]에 깨어 있으면서[覺寤] 관행(觀行)을 부지런히 닦지 않으며, 부정지(不正知)에 머무르고, 치(癡)를 행하는 것이 특징[性]이다. 수면(睡眠)에 탐착(耽著)하고, 교편혜(巧便慧)115)가 없으며, 악작(惡作)과 함께 행하고, 욕(欲) 근(勤) 심(心) 관(觀)의 정사마타(正奢摩他)를 일찍이 수습하지 않으며, 사마타에 대해서 아직 순선(純善)하지 않으며, 한결같이 사마타의 상(相)을 사유(思惟)해도 그 마음이 어두워서 뛰어난 경계에 대해서 반연(攀緣)을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 등이 도상(掉相)인가?
  근문(根門)을 지키지 않는 등의 네 가지는 앞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으며, 탐(貪)을 행하는 것이 특징[性]이다. 부적정(不寂靜)을 즐기며, 염리심(厭離心)이 없으며, 교편혜(巧便慧)가 없으며, 크게 들뜸[太擧]과 함께 행하고, 앞과 같이 욕(欲) 등의 들뜸[擧]에 대해서 일찍이 수습하지 않으며, 들뜸에 대해서 아직 순선[善]하지 않으며, 한결같이 닦아도 갖가지 도법(掉法)에 수순하여 친리(親里)의 생각 등으로 그 마음을 흔들고 어지럽히는 것을 말한다.
  무엇 등이 난상(亂相)인가?
  근문(根門)을 지키지 않는 등의 네 가지는 앞과 같이 알아야만 하며, 근(根)이 둔(鈍)한 것이 특징[性]이다. 많이 구하고, 많이 힘쓰며, 여러 가지 사업(事業)에 대해서 자주 심사(尋思)를 행하는 것이 특징[性]이다. 교편혜(巧便慧)가 없고 염리심(厭離心)이 없으며, 원리(遠離)를 수습하지 않고, 뛰어난 경계에 대해서 반연(攀緣)을 즐기지 않고, 시끄러움[慣鬧]을 가까이 하며[親近], 방편(方便)이 모자라며, 난상(亂相)과 불란상(不亂相)을 자세하게 요지(了知)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 등이 착상(著相)인가?
  
115) 선교방편(善巧方便)의 지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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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문(根門)을 지키지 않는 등의 네 가지는 앞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근(根)이 둔(鈍)한 것이 특징[性]이며, 애(愛)를 행하는 것이 특징이며, 번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치에 맞게[如理] 생각하지 않고, 과환(過患)을 보지 않으며, 증상(增上)에 대하여 출리(出離)의 견해[見]가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마땅히 원리(遠離)해야 할 상(相)을 대치(對治)하는 것이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곧 마땅히 수습해야 할 상[應修習相]임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다시 32상(相)이 있으니, 자심상(自心相) 외상(外相) 소의상(所依相) 소행상(所行相) 작의상(作意相) 심기상(心起相) 안주상(安住相) 자상상(自相相) 공상상(共相相) 추상(麤相) 정상(靜相) 영납상(領納相) 분별상(分別相) 구행상(俱行相) 염오상(染汚相) 불염오상(不染汚相) 정방편상(正方便相) 사방편상(邪方便相) 광명상(光明相) 관찰상(觀察相) 현선정상(賢善定相) 지상(止相) 거상(擧相) 관상(觀相) 사상(捨相) 입정상(入定相) 주정상(住定相) 출정상(出定相) 증상(增相) 감상(減相) 방편상(方便相) 인발상(引發相)을 말한다.
  무엇을 자심상(自心相)이라고 하는가?
  어떤 필추(苾芻)가 번뇌의 염오심(染汚心) 때문에 곧 자심(自心)에서 매우 선(善)한 상(相)을 취하여 '이러 이러한 마음은 염오(染汚)가 있고 혹은 염오(染汚)가 없다. 이 방편에 의해서 마음이 침(沈) 등에 처해 있다. 이러한 방편에 의해서 침(沈) 등에 처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침(沈) 등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여금 애착하게 하는 상(相)에 이르기까지의 침(沈) 등의 네 가지를 말한다. 혹은 다시 거기에 염오(染汚)되지 않는 마음이다.
  무엇을 외상(外相)이라고 하는가?
  즉 저 염오되지 않는 마음에 대해서 스스로의 마음으로 염오되지 않았다고 요지(了知)하고 나서 곧 외상(外相)을 취하는 것이니, 광명상(光明相) 혹은 정묘상(淨妙相) 혹은 다시 다른 상(相)을 취하니, 제 번뇌를 없애려 하기 위한 것이며, 혹은 저 혹(惑)을 현행(現行)시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무엇을 소의상(所依相)이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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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별(分別)의 체(體)와 상(相)116)을 말하며, 곧 일체의 자신(自身)에 포함되는 5온(蘊)과 종자(種子)의 상(相)을 말한다.
  무엇을 소행상(所行相)이라고 하는가?
  사유의 대상[所思惟]인 이런 저런 경계의 색(色) 내지 법(法)의 분별의 체(體)와 상(相)을 말한다.
  무엇을 작의상(作意相)이라고 하는가?
  능생(能生)의 작의(作意)가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경계에 대해서 소생(所生)의 식(識)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다음과 같이 '지금 나의 이 마음은 작의에 의하기 때문에 경계에 구르니, 작의가 없는 것이 아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유하는 것을 작의상(作意相)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심기상(心起相)이라고 하는가?
  즉 차제(次第)로 설하는 것117)이 첫 번째 상(相)이며, 제 2의 상(相)은 심(心) 행(行)을 연(緣)으로 하고 명색(名色)을 연(緣)으로 하는 상(相)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사유하는 것을 심기상(心起相)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안주상(安住相)이라고 하는가?
  4식주(識住)118)를 말하며, 곧 식(識)은 색(色)에 따라서 머무는 등으로 경(經)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이것을 사유하는 것을 안주상(安住相)이라고 한다.
  무엇을 자상상(自相相)이라고 하는가?
  자류(自類)의 자상(自相)119), 혹은 각별(各別)의 자상(自相)120)을 말하며, 이것을 사유하는 것을 자상상(自相相)이라고 이름한다.
  
116) 안[內]의 5온(蘊) 및 종자(種子)를 말한다. 즉 이의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을 소의(所依)라고 한다.
117) 심기상(心起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차제(次第)의 작의상(作意相)이 제1의 상(相)이며, 일체의 마음이 일어날 때 반드시 작의(作意)의 경각(警覺)에 의하기 때문이다. 제2의 상(相)은 제 8식(識)의 심기상(心起相)이며 12지(支) 중에 심(心)이 행(行)을 연(緣)으로 하여, 또한 명색(名色)을 연(緣)으로 하여 생기기 때문이다.
118) 색식주(色識住) 수식주(受識住) 상식주(想識住) 행식주(行識住)를 말한다.
119) 5온(蘊)의 류(類) 각각의 자상(自相)을 말한다.
120) 각각 자상(自相)이 다른 안(眼) 등의 온(蘊)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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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공상상(共相相)이라고 하는가?
  제 행(行)의 공상(共相), 혹은 유루(有漏)의 공상(共相), 혹은 일체법의 공상(共相)을 말하며, 이것을 사유하는 것을 공상상(共相相)이라고 한다.
  무엇을 추상(麤相)이라고 하는가?
  하지(下地)의 일체의 추상(麤相)을 관(觀)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정상(靜相)이라고 하는가?
  상지(上地)에서 행하는 일체의 정상(靜相)을 말한다.
  무엇을 영납상(領納相)이라고 하는가?
  과거를 기억함[憶念]에 따라서 일찍이 겪었던 제 행(行)의 상(相)을 말한다.
  무엇을 분별상(分別相)이라고 하는가?
  미래의 제 행(行)을 생각하는 상(相)을 말한다.
  무엇을 구행상(俱行相)이라고 하는가?
  현재의 제 행(行)을 분별하는 상(相)을 말한다.
  무엇을 염오상(染汚相)이라고 하는가?
  탐욕이 있는 마음[有貪心]에서 탐욕이 있는 마음의 상(相)을 사유하고 내지 불선해탈심(不善解脫心)에서 불선해탈심(不善解脫心)의 상(相)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불염오상(不染汚相)이라고 하는가?
  위의 것과 상위(相違)하는 것을 말하며, 곧 이것은 불염오상(不染汚相)인 줄 알아야만 한다. 이 가운데 이미 출리(出離)하여 단(斷)에 대해서 방편을 닦지 않는 자는 유탐(有貪) 등을 관하며, 방편을 닦는 자는 약(略) 이하 등121)을 관한다. 유탐심(有貪心)이란 탐상(貪相)과 상응하는 마음, 혹은 그 품(品)에 따라 다니는 추중(麤重)을 말하며, 이와 같은 전(纏) 및 수면(隨眠)에 의하기 때문에 일체의 염오심(染汚心)은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알아야만 한다. 능히 전(纏)과 수면(隨眠)을 대치하기 때문에 불염오(不染汚)가 되는 것이다.
  
121) 약심(略心) 광심(廣心) 하심(下心) 거심(擧心) 내지 선해탈심(善解脫心) 불선해탈심(不善解脫心)을 말하며, 이는 불염오상(不染汚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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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정방편상(正方便相)이라고 하는가?
  백정품(白淨品)의 인연상(因緣相)의 상(相)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사방편상(邪方便相)이라고 하는가?
  염오품(染汚品)의 인연상(因緣相)의 상(相)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곧 근문(根門)을 지키지 않고 머무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와 같이 사유하며, 내지 부정지(不正知)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와 같이 마음이 염오되는 상(相)이다.
  무엇을 광명상(光明相)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어두움[暗]을 대치하거나 법(法)의 광명(光明)을 은근하고 지극하게 정성을 들여서 그 상(相)을 잘 취하여 매우 잘 사유하되, 하방(下方)에서와 같이 상방[上]에서도 그와 같이 하여 일체(一切)의 암상(暗相)을 대치하기 때문에 이 상(相)을 건립하는 것이다.
  무엇을 관찰상(觀察相)이라고 하는가?
  어떤 필추(苾芻)가 은근하고 지극하게 정성을 들여서 그 상(相)을 잘 취해서 이를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머무르면서[住] 앉음[坐]에 대하여 관찰하는 것122)은 현재(現在)의 능취(能取)로써 미래(未來)의 소취(所取)의 법(法)을 관찰하는 것이며, 앉아서[坐] 누움[臥]에 대하여 관찰하는 것123)은 현재(現在)의 능취(能取)로써 과거의 소취(所取)를 관찰하는 것이며, 혹은 후행(後行)에 있는 법(法)으로써 전행(前行)을 관찰한다는 것은 후후(後後)의 능취(能取)로써 전전(前前)의 능취(能取)의 법(法)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간략히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두 가지 법(法)의 관찰을 나타낸 것이다.
  무엇을 현선정상(賢善定相)이라고 하는가?
  청어(靑瘀) 등의 상(相)을 사유하는 것을 말하며, 욕탐(欲貪) 등을 대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이 상(相)을 현선(賢善)이라고 하는가?
  
122) 머무른다는 것은 현재이며, 앉는다는 것은 미래이다. 미래에 앉는 것을 세워서 현재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123) 앉는다는 것은 현재이며 눕는다는 것은 과거이다. 과거는 사라졌기[息滅] 때문에 눕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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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번뇌 중에서 탐(貪)이 가장 세기[勝] 때문이며, 제 탐(貪) 중에서 욕탐(欲貪)이 세서 여러 가지 괴로움[苦]을 낳기 때문이다. 이 상(相)은 그것124)의 대치(對治)의 소연(所緣)이기 때문에 현선(賢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지상(止相)이라고 하는가?
  무분별영상(無分別影像)의 상(相)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거상(擧相)이라고 하는가?
  마음을 책려[策]하여 하나의 정묘상(淨妙相)과 광명상(光明相)의 상(相)을 따라서 취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관상(觀相)이라고 하는가?
  문(聞) 사(思) 수(修)의 혜(慧)로 제 법(法)의 상(相)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사상(捨相)이라고 하는가?
  이미 평등심(平等心)을 얻고 나서 제 선품(善品)에서 사상(捨相)를 더욱 힘쓰는 것[增上]을 말한다.
  무엇을 입정상(入定相)이라고 하는가?
  인연상(因緣相) 소연상(所緣相) 응수습상(應修習相)에 의하기 때문에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거나 혹은 다시 이미 얻어서[已得] 현재전(現在前)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주정상(住定相)이라고 하는가?
  곧 그 제 상(相)에 대하여 선교(善巧)로 취하며 잘 취하기 때문에 그 바라는 것대로 정(定)에 안주(安住)하며, 또한 이 정(定)에서 불퇴법(不退法)을 얻기 때문이다.
  무엇을 출정상(出定相)이라고 하는가?
  분별(分別)의 체(體)에 포함되지 않는 부정지(不定地)의 상(相)을 말한다.
  무엇을 증상(增相)이라고 하는가?
  경안정(輕安定)이 배로 증대(增大)하면서 상(相)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124) 욕탐(欲貪) 등의 탐(貪)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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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감상(減相)이라고 하는가?
  경안정(輕安定)이 줄어들고 협소해지면서 상(相)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방편상(方便相)이라고 하는가?
  어떤 경우는 배로 증가하고 광대해지는 상을 취하거나, 어떤 경우는 줄어들고 협소해지는 상을 취하는 두 가지 도(道)의 상(相)을 말한다.
  무엇을 인발상(引發相)이라고 하는가?
  여러 가지 폭 넓은 문구(文句)를 요약한 의도(義道)나 또는 무쟁(無諍) 무애(無恚) 묘원지(妙願智) 등이나, 또는 삼마지(三摩地)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그 밖의 역(力) 무애(無恚) 등의 최승(最勝)의 공덕(功德)과 능히 깊고 깊은[甚深] 구의(句義)에 통달하는 미묘한 지혜(智慧)를 인발하는 이와 같은 상(相)을 말한다.
  다음에125) 이와 같은 제 상(相)은 곧 앞의 4상(相)에 포함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연상(所緣相)은 일체 모두를 포함하고, 인연상(因緣相)도 또한 그러하다. 앞의 것[前]은 뒤의 것[後]에게 인연(因緣)이 되기 때문이며, 후후(後後)로 하여금 명정(明淨)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정방편상(正方便相)은 일체 종류에게 낱낱이 다 인연상(因緣相)이 된다. 정방편상[正方便]과 같이 사방편상[邪方便] 또한 그러하니, 첫 번째 것은 백품(白品)의 상(相)이며, 두 번째 것은 흑품(黑品)의 상(相)이다. 제 염오(染汚)의 상(相)은 원리해야 하는 것이며, 그 밖의 제 상(相)은 수습해야 할 상(相)이다. 이런 저런 때에 수습해야 하기 때문이다.
125)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되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에, 네 번째로 상(相)의 차별(差別) 중 그 두 번째로 본말(本末)의 서로간의 관계에 대하여 밝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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