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12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4:23
[353 / 829] 쪽
  
유가사지론 제 12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4) 삼마희다지 ②
  
  다음에1) 무엇을 소연(所緣)의 제 상(相)의 작의(作意)를 수습(修習)한다고 하는가?
  곧 이런 저런[彼彼]2) 제 상(相)에 대하여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는 것을 말한다. 사유하기 때문에 능히 4사(事)를 지으니, 곧 위와 같은 작의(作意)를 수습하고, 또한 그 소치(所治)의 번뇌(煩惱)를 원리하며, 또한 능히 이 작의와 그 밖의 것을 수련[練]하여 후(後)의 소생(所生)으로 하여금 굴러서 다시 명성(明盛)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곧 이러한 작의를 수습할 때에 소연(所緣)을 염괴(厭壞)하고, 제 번뇌(煩惱)를 버리며, 단멸(斷滅)을 지니고[任持], 제 번뇌의 상속(相續)을 원리(遠離)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소연(所緣)의 제 상(相)의 작의를 수습하는 것이다.
  
1)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되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 네 번째의 상(相)의 차별(差別) 중 그 세 번째로 종합적으로 문장[文]의 내용을 일곱 가지로 밝힌다. 일곱 가지란 작의(作意)를 닦는 이유 정(定)에 들어가는 4연(緣) 4득정자(得定者) 미정(味定)과 정정(淨定) 등의 차별 4분정(分定)의 차별 차제(次第)와 초월(超越)의 입출(入出) 훈수(熏修)의 차별을 말한다. 이하는 작의(作意)를 닦는 이유에 대하여 밝히는 부분이다.
2) 소연상(所緣相) 인연상(因緣相) 등의 4상(相)을 말한다.
[354 / 829] 쪽
  다음에3), 즉 인력(因力) 방편력(方便力) 설력(說力) 교수력(敎授力)의 4인연(因緣)에 의하여 초정려(初靜慮) 내지 유정(有頂)에 들어간다.
  무엇을 인력(因力)이라고 하는가?
  일찍이 정려(靜慮)에 들어가는 데에 이웃하는 것[隣近]을 말한다.
  무엇을 방편력(方便力)이라고 하는가?
  정려 등에 들어가는 데에 이웃하지[隣近] 않지만 끊임없이[無間] 자주 수력(修力)을 닦기 때문에 능히 제 정(定)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설력(說力)이라고 하는가?
  정려 등의 증상연(增上緣)의 법(法)에 대하여 많이 듣고[多聞] 지니고[任持] 내지 자세한 설명[廣說]을 말한다. 곧 이 법에 의지하여 홀로 공한처[空閑]에 있으면서 제 방일(放逸)들을 여의고, 용맹하게 정진(精進)하며, 스스로 책려(策勵)하고, 법(法)에 머무르고 법을 따라 행하여[隨法行]4) 이것에 의하여 능히 정려 등의 정(定)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교수력(敎授力)이라고 하는가?
  친교사(親敎師) 궤범사(軌範師)한테서나 어떤 다른 존장(尊長)한테서 초정려(初靜慮) 등에 수순하는 전도 없는[無倒] 교수(敎授)5)를 획득(獲得)하고, 이것을 쫓아서 심제(審諦)6)를 작의하고 사유하여 능히 정려와 그 밖의 여러 정(定)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위와 같이 네 가지의 관행자(觀行者)를 현시(顯示)하는 것은, 즉 인력을 갖춘 자[具因力者] 방편력자(方便力者) 이근자(利根者) 둔근자(鈍根者)를 말하는 것이다.
  다음에7) 4정려(靜慮)를 얻는 사람이 있으니, 첫째는 애상정려자(愛上靜慮
  
3)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되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 네 번째의 상(相)의 차별(差別) 중 그 세 번째로 종합적으로 문장[文]의 내용을 일곱 가지로 밝힌다. 이하는 일곱 가지 중 정(定)에 들어가는 4연에 대하여 밝히는 부분이다.
4) 법(法)은 멸제(滅諦)이며, 법을 따름[隨法]은 도제(道諦)이다.
5)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법을 가르치고 도를 수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6) 4제(諦)의 도리를 자세히 심찰(審察)하는 것을 의미한다.
7)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되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에 네 번째의 상(相)의 차별(差別) 중 그 세 번째로 종합적으로 문장[文]의 내용을 일곱 가지로 밝힌다. 이하는 일곱 가지 중 세 번째로 4득정자(得定者) 대하여 밝히는 부분이다.
[355 / 829] 쪽
  者)이며, 둘째는 견상정려자(見上靜慮者)이며, 셋째는 만상정려자(慢上靜慮者)이며, 넷째는 의상정려자(疑上靜慮者)이다.
  무엇을 애상정려자(愛上靜慮者)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먼저 정려(靜慮)와 제 정(定)의 공덕(功德)을 듣었으나 그것8)의 출리(出離)의 방편(方便)을 듣지 못하여 그것에 대하여 한결같이 뛰어난 공덕[勝功德]을 보고 용맹스럽게 정진하여, 이 인연에 의하여 초정려 혹은 그 밖의 정(定)에 들어가고, 이와 같이 들어가고 나서는 후에 애미(愛味)9)를 내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무엇을 견상정려자(見上靜慮者)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스승[師]한테서 혹은 다른 스승한테서 제 세간(世間)은 모두 항상[常]하다는 등의 이와 같은 방편으로 초정려(初靜慮) 내지 유정(有頂)에 들어가서 능히 청정해탈(淸淨解脫)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듣고, 그는 이 견해[見]에 의지하여 용맹스럽게 정근(精勤)하며, 이 인연(因緣)에 의하여 초정려 내지 그 밖의 정(定)에 들어가며, 이와 같이 들어가고 나서는 능히 스스로 과거 많은 겁[多怯]을 기억[憶念]하여 드디어 '나[我]와 세간(世間)은 모두 다 항상[常]하다'는 등의 이러한 견해[見]를 내고는 정(定)으로부터 일어나고서 곧 이 견해에 대하여 굳게 집착하여 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후시(後時)에 자세하게 생각하고 생각하여 심제(審諦)를 관찰하며, '이것에 의하서 청정해탈(淸淨解脫)의 출리(出離)를 얻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만상정려자(慢上靜慮者)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아무개라고 이름하는 제 장로(長老) 등이 초정려 내지 유정(有頂)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교만(憍慢)을 내어서 '그는 능히 정려(靜慮) 등의 정(定)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나는 무슨 까닭에 들어
  
8) 정려(靜慮)와 제 정(定)을 가리킨다.
9) 집착하고 탐하는 것을 의미한다.
[356 / 829] 쪽
  가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이 만(慢)을 의지하여 용맹스럽게 정근(精勤)하고, 이 인연에 의하여 초정려 내지 그 밖의 정(定)에 들어가고, 이와 같이 들어가고 나서는 후에 교만(憍慢)을 내거나, 혹은 정(定)에 들어가고 나서 '나만이 이와 같은 정려를 얻을 수 있으며, 나머지는 얻을 수 없다'는 이러한 사유(思惟)를 하며, 그는 이 만(慢)에 의지하여 다시 후시(後時)에 제 정려(靜慮)에 대하여 자세하게 생각하고 생각하여 심제(審諦)를 관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의상정려자(疑上靜慮者)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성품[性]이 암둔(暗鈍)하지만 본래 일찍이 사마타(奢摩他)의 행(行)을 즐겨 수습한지라 이 인연에 의하여 제 정려 혹은 그 밖의 정(定)에 들어가고, 이와 같이 들어가고 나서는 다시 이러한 정(定)에 대하여 부지런히 방편(方便)을 닦고, 아직 얻지 못한 것[未得]을 얻기 위하여 4성제(聖諦)에 대하여 부지런히 현관(現觀)을 닦지만 성품이 암둔(暗鈍)하기 때문에 속히 성제(聖諦)의 현관(現觀)을 증득할 수 없고, 이 인연에 의하여 그 밖의 증득한 것[所證]에 대하여 곧 의혹(疑惑)을 내며, 이 의혹에 의하여 다시 승진(勝進)에 대하여 자세하게 생각하고 생각하여 심제(審諦)를 관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음에10) 무엇을 애미상응정려(愛味相應靜慮) 등의 정(定)이라고 하는가?
  어떤 둔근(鈍根)이 혹은 탐(貪)을 행하기 때문에, 혹은 번뇌가 많기 때문에 그는 오직 초정려(初靜慮) 등에서 갖고 있는 공덕(功德)만을 듣게 되어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애상정려(愛上靜慮)는 위의 출리[上出離]에 대해서 훤히 알지 않기 때문에 다시 애미(愛味)를 내며 연연해하며 집착하고 굳게 머무르는 것이다. 그 소애미(所愛味)11)는 이미 출리하였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 능애미(能愛味)12)는 정입(正入)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0)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되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에, 네 번째로 상(相)의 차별(差別) 중 그 세 번째로 종합적으로 문장[文]의 내용을 일곱 가지로 밝힌다. 일곱 가지 중 네 번째로 미정(味定) 정정(淨定) 등의 차별에 대하여 밝히는 부분이다.
11) 집착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12) 집착을 내는 주체를 의미한다.
[357 / 829] 쪽
  무엇을 청정정려(淸淨靜慮) 등의 정(定)이라고 하는 것인가?
  번뇌행(煩惱行)이거나 박진행(薄塵行)의 어떤 중근(中根) 혹은 이근(利根)의 성품 등을 지닌 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초정려(初靜慮) 등의 애미(愛味)의 과환(過患) 및 위의 출리[上出離]에 대해서 듣고서 용맹스럽게 정진(精進)하여 초정려 혹은 그 밖의 정(定)에 들어가고, 이와 같이 들어가고 나서는 곧 능히 제 정(定)의 과환(過患)을 사유하고 상출리(上出離)에 대해서 또한 능히 훤히 알아 애미(愛味)를 내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무루정려(無漏靜慮) 등의 정(定)이라 하는가?
  수신행(隨信行)이거나 혹은 수법행(隨法行)이거나 박진행(薄塵行)의 어떤 사람이 혹은 먼저 번[先時]에 4성제(聖諦)에 대해서 이미 현관(現觀)에 들어갔거나 혹은 다시 올바르게 현관(現觀)의 방편(方便)을 닦아서 그는 먼저 번의 제 행(行)과 상(狀)과 상(相)에 의해서 초정려(初靜慮) 혹은 그 밖의 정(定)에 들어갔지만, 지금은 이 행(行)과 이 상(狀)과 이 상(相)에 대해서 다시 사유하지 않고 제 색(色)으로부터 10법(法)에 이르기까지 병(病)과 같고 종기[癰] 등과 같은 등의 행(行)이라고 사유하며, 유위법(有爲法)에 대해서 마음으로 염오(厭惡)를 내고 포외(怖畏)하고 제복(制伏)하고 그 감로계(甘露界)13)에 대해서 생각[念]을 묶어서 사유하며, 이와 같이 하여 비로소 능히 무루정(無漏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음에14) 무엇을 순퇴분정(順退分定)이라고 하는가?
  어떤 둔근(鈍根)의 하열(下劣)한 이가 욕(欲) 해(解) 근정진(勤精進)으로 초정려(初靜慮) 혹은 그 밖의 정(定)에 들어가고 희(喜) 낙(樂) 뛰어난 공덕[勝功德]에 대해서 감인(堪忍)하지 않기 때문에 정려로부터 물러나
  
13) 4제(諦)를 관(觀)하거나 2공(空)을 관(觀)하여 드러나는 진여(眞如)를 앞의 방편으로 삼아서 무루정(無漏定)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14)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되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에 네 번째의 상(相)의 차별(差別) 중 그 세 번째로 종합적으로 문장[文]의 내용을 일곱 가지로 밝힌다. 이하는 일곱 가지 중 다섯 번째로 4분정(分定)의 차별에 대하여 밝히는 부분이다.
[358 / 829] 쪽
  며, 잠시동안 여러 정(定)에 들어가는 차별이 있듯이, 그렇게[如是如是] 도로 다시 퇴실(退失)하고 내지 잘 제 근(根)을 조련(調練)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순주분정(順住分定)이라고 하는가?
  어떤 중근(中根) 혹은 이근(利根)의 성품을 지닌 자가 여러 정(定)의 공덕(功德)만을 듣게 되어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애미(愛味)와 상응(相應)하여 소득(所得)의 정(定)에 대해서 오직 애미(愛味)만을 내고 능히 위로 나아가지 않으며, 또한 아래로 물러나지도 않는 것이다.
  무엇을 순승분정(順勝分定)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은 또한 출리(出離)의 방편을 듣고서 소득(所得)의 정(定)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기쁨[喜足]을 내지 않아서 이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애미(愛味)를 내지 않고 다시 뛰어난 단계[勝位]를 구하며, 이 인연에 의해서 곧 승진(勝進)을 얻는 것이다.
  무엇을 순결택분정(順決擇分定)이라고 하는가?
  일체의 살가야(薩迦耶) 가운데에 깊이 과환(過患)을 보며, 이 인연에 의해서 능히 무루(無漏)에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제 무루(無漏)를 결택분(決擇分)15)이라고 이름하니, 마지막 끝[極究竟]이기 때문이다. 마치 세간(世間)의 구슬과 병 등의 물건을 잘 골랐으면 결택(決擇)이라고 하는 것과 같듯이, 이 이후로부터는 선택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이와 같아서 이것을 지나쳐서 다시 간택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결택분(決擇分)이라고 이름한다.
  다음에16) 무엇을 곧바로[無間] 제 등지(等至)에 들어간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초정려(初靜慮) 내지 유정(有頂)을 얻었으나 아직 원만(圓滿) 청정(淸淨) 선백(鮮白)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먼저 차례대로 들어가서 유정(有頂)에까지 이르르고 뒤에 차례를 거꾸로 들어가서 초정려(初靜慮)에까지 들어가는 것이다.
  
15) 분(分)이란 지(支) 또는 류(類)의 뜻이다.
16)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되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 네 번째의 상(相)의 차별(差別) 중 그 세 번째로 종합적으로 문장[文]의 내용을 일곱 가지로 밝힌다. 이하는 일곱 가지 중 여섯 번째로 제 정(定)의 차제(次第)와 초월(超越)의 입출(入出)에 대해서 밝히는 부분이다.
[359 / 829] 쪽
  다음에 무엇을 초월(超越)하여 제 등지(等至)에 들어간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곧 이것에 대해서 이미 원만(圓滿) 청정(淸淨) 선백(鮮白)을 얻었기 때문에 초정려(初靜慮)로부터 곧바로[無間] 초월(超越)하여 제 3정려(靜慮)에 들어가고, 제 3정려로부터 곧바로 초월[超]하여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가며, 공무변처(空無邊處)로부터 연이어 초월[超]하여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가며, 내지 …… 하는 것이다. 거꾸로 초월[超]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매우 멀기 때문에 능히 세 번째 등지(等至)로부터 초월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오직 여래(如來)와 제 2아승기야(阿僧企耶)를 나온 여러 대보살(大菩薩)들은 제외되니, 그들은 원하는 대로 여러 정(定)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다음에17) 무엇을 정려(靜慮)를 훈수(薰修)18)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이미 유루(有漏) 및 무루(無漏)의 4종 정려를 얻고 등지(等至)에 대해서 자재(自在)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등지(等至)의 자재과(自在果)를 받기 위해서 오랫동안 상속하면서 여러 정려(靜慮)에 들어가고, 유루(有漏) 무루(無漏)가 서로 섞이고 내지 유루(有漏)에 곧바로[無間] 무루(無漏)가 현전(現前)하고, 무루(無漏)에 곧바로 도로 유루(有漏)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니, 이것에 맞춰서 훈수(薰修)의 성취를 알아야만 한다. 만약 이 곳[是處]과 이 때[是時]와 이 현상[是事]에서 여러 정(定)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곧 이 곳[此處]과 이 때[此時]와 이 현상[此事]에서 능히 여러 정(定)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를 제 등지(等至)에서 자재(自在)를 획득한 것이라고 한다. 등지
  
17)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되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 네 번째의 상(相)의 차별(差別) 중 그 세 번째로 종합적으로 문장[文]의 내용을 일곱 가지로 밝힌다. 이하는 일곱 가지 중 일곱 번째로 제 정(定)의 훈수(薰修)의 차별에 대하여 밝히는 부분이다.
18) 훈수(薰修)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순유루정(純有漏定)의 훈수(薰修)이며, 둘째는 순무루정(純無漏定)의 훈수(薰修)이며, 셋째는 유루(有漏) 무루(無漏)의 잡수(雜修)이며, 넷째는 유루정(有漏定)의 산잡(散雜)의 훈수(薰修)이며, 다섯째는 무루정(無漏定)의 산잡(散雜)의 훈수(薰修)이다. 여기에서 다음에 설하는 등지(等至)에 있어서 자재(自在)를 얻기 위한 것이라 하는 것은 세 번째의 유루(有漏) 무루(無漏)의 잡수(雜修)의 훈수(薰修)를 말한다.
[360 / 829] 쪽
  (等至)의 자재과(自在果)란 현법락주(現法樂住)에서 구르며, 다시 명정(明淨)하여 또한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불퇴도(不退道)를 얻고, 또한 깨끗하게 해탈(解脫) 승처(勝處) 변처(遍處) 등의 뛰어난 품[勝品]의 공덕(功德)을 능히 끌어당기는 도(道)를 닦아 대치하는 것이다. 그 밖의 취(取)가 있는데 목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자일 경우에는 이 인연에 의해서 곧 정거천[淨居]에 들어간다.19)
  연(軟) 중(中) 상품(上品)의 여러 정려(靜慮)를 닦는 데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일체처(一切處)에서 3지(地)의 과(果)를 받는다. 앞에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에서 자세히 분별했듯이, 무심유사삼마지(無尋唯伺三摩地)를 수습(修習)하기 때문에 대범(大梵)이 되는 것을 얻고, 연(軟) 중(中) 상(上) 상승(上勝) 상극품(上極品)의 훈수력(薰修力)에 의하기 때문에 5정거천[淨居]에 태어나는 것이다. 청정(淸淨) 정려정(靜慮定)을 닦음으로 인해서 애미상응(愛味相應)을 가까이 익히지 않기 때문에 정려지(靜慮地)에 태어나지만 이미 거기에 태어나고 나서 만약 애미(愛味)를 일으키면 곧바로 다시 퇴몰(退沒)하며, 만약 청정(淸淨)을 닦으면 다시 거기에 태어나되, 혹은 하정(下定)에 태어나거나 혹은 상정(上定)으로 나아가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앞서 이 사이에서 정(定)을 닦아 얻고 나서야 뒤에 거기에 가서 태어날 수 있다. 왜냐 하면 아직 욕(欲)을 여의지 않을 경우에는 거기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 정(定)을 닦아 얻지 못한 여러 이생(異生)들은 능히 욕을 여의지 않기[離欲] 때문이다. 또한 이 사이와 그 곳에 있어서 제 등지(等至)에 들어가는 데에는 낙(樂)의 차별은 있지 않고 오직 소의신(所依身)에만 차별이 있다.
  다음에 수습(修習)해야 할 작의(作意)와 상(相)의 차별에 대해서는 이미 설하였다.
  무엇을 제 경(經)의 종요(宗要)를 포함[攝]한다고 하는가?20)
  
19) 취지(取支)에 잔여(殘餘)의 업(業)이 있어서 윤생(潤生)할지라도 목숨이 끊어지면 곧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난다는 뜻이다.
20)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되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 다섯 번째로 제 경(經)의 종요(宗要)에 대해서 밝힌다. 이 제 경(經)의 종요(宗要)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서 해석된다. 첫 번째는 섭종요(攝宗要)로서 첫째 해탈(解脫), 둘째 등지(等持), 셋째 등지(等至)에 대해서 기술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경(經)의 중잡(衆雜)의 이치[義]를 해석하는 것으로 그 첫째는 11가지의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며, 그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서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섭종요(攝宗要)의 내용 중 해탈(解脫)에 대해서 8해탈(解脫) 8승처(勝處) 10변처(遍處)로 해석하고 마지막으로 종합하여 간추리는 것[料簡]이다.
[361 / 829] 쪽
  8해탈(解脫) 등을 말하니, 경(經)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8해탈(解脫)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유색관제색(有色觀諸色)을 말한다. 앞의 일곱 가지 해탈(解脫)은 이미 해탈(解脫)에 대해서 승해(勝解)를 내었기 때문에 해탈(解脫)이라고 이름하는 것이고, 여덟 번째 해탈(解脫)은 상(想) 수(受)를 저버렸기[棄背] 때문에 해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유색관제색(有色觀諸色)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욕계(欲界)에 태어나고 나서 이미 욕계의 욕(欲)을 여의였으나 아직은 색계(色界)의 욕(欲)을 여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해탈할 것[所解脫]에 대해서 이미 해탈을 얻고, 곧 욕계(欲界)의 제 색(色)에 대해서 광명상(光明相)이 있기 때문에 작의(作意) 사유(思惟)하고 승해(勝解)를 내는 것이다. 두 가지 인연에 의해서 유색(有色)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욕계(欲界)에 태어났기 때문이요, 색계정(色界定)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광명이 있는 것에 대해서 승해(勝解)를 짓기 때문이다.
   관제색(觀諸色)은 어떤 등의 색(色)을 관(觀)하고 다시 어떻게 행(行)하는 것인가?
   욕계(欲界)의 제 색(色)이다. 제 승처(勝處)에서 제도되는 소색(少色)이되, 좋거나 싫거나 열세하거나 뛰어나며 이와 같이 많은 것들에 내지 …… 관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관행(觀行)을 수습(修習)하는가?
  능히 최승(最勝)의 공덕(功德)의 방편(方便)을 깨끗이 닦아 다스리기 때문이다.
  무엇을 최승(最勝)의 공덕(功德)이라고 이름하는가?
[362 / 829] 쪽
  승처(勝處) 변처(遍處) 여러 가지 성인[聖]의 신통(神通) 무쟁(無諍) 원지(願智) 무애해(無恚解)21) 등을 말한다. 앞서서 제 욕계(欲界)의 제 색(色)에 대해서 이미 이욕(離欲)을 얻었더라도 그 색(色)에 대해서 아직 승해(勝解)의 자재(自在)를 증득하지 않아서 증득하기 위해서 자주 자주 그것에 대해서 사유(思惟)하고 승해(勝解)하는 것이다.
  무엇을 내무색상관외제색(內無色想觀外諸色)이라고 하는가?
  욕계(欲界)에 태어나서 이미 색계(色界)의 욕(欲)을 여의었으나 무색계(無色界)의 정(定)이 현재전(現在前)하지 않고, 또한 그것의 상(想)의 광명상[明相]을 사유하지 않고 단지 외색(外色)에 대해서 승해(勝解)를 짓는 것이다. 만약 이 색(色)에 대해서 이미 이욕(離欲)을 얻었다면 그것을 설하여 외(外)라고 한다. 두 가지 인연에 의해서 내무색상(內無色想)이라고 이름하니, 말하자면 이미 무색(無色)의 등지(等至)를 증득하고 역시 스스로 이 정(定)을 얻었다는 것을 훤히 알기 때문이며, 그리고 안[內]의 광명상(光明相)을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무엇을 정해탈신작증구족주(淨解脫身作證具足住)22)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이미 사념(捨念) 원만(圓滿) 청백(淸白)을 얻고, 이것을 의지로 삼아서 청정한 성행(聖行)을 수습(修習)하여 원만해지는 것과 같은 것을 정해탈(淨解脫)이라고 이름한다. 왜냐 하면 세 가지의 인연 때문이니, 말하자면 이미 제 고락(苦樂)을 뛰어넘었기[超過] 때문이요, 일체의 흔들림[動亂]이 이미 고요[寂靜]해졌기 때문이요, 잘 갈아서 빛이 나기 때문이다. 신작증(身作證)이란 이 머무름에 대해서 일체의 현성(賢聖)이 자주
  
21) 앞의 3해탈(解脫)은 승처(勝處) 변처(遍處) 제 성(聖)의 신통(神通)을 끌어당기고, 뒤의 4해탈(解脫)은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능히 무쟁(無諍) 등의 공덕(功德)을 끌어당긴다.
22) 정(淨)이란 제 4정려(靜慮)에서 8종(種)의 장애를 여의어서 사념(捨念)이 원만(圓滿)하고 청백(淸白)한 것을 말한다. 해탈(解脫)이란 정(淨) 부정(不淨) 가운데의 모든 변화(變化) 가행(加行) 공용(功用) 극자재(極自在)의 장애를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신(身)이란 의신(意身)을 말하며, 작증(作證)이란 지단(智斷)에 있어서 작증(作證)을 얻기 때문에 오직 신근(身根)만을 친히 합칠 경우라면 신(身)에 증(證)의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다. 구족주(具足住)란 제 4정려의 근본정(根本定)이 원만(圓滿)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363 / 829] 쪽
  머문 것[所住]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공무변처해탈(空無邊處解脫)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그 공처(空處)에서 이미 이욕(離欲)을 얻고, 곧 허공에 대해서 사유(思惟)하고 승해(勝解)하는 것과 같다.
  
  위와 같이 식무변처해탈(識無邊處解脫)은 그 식처(識處)에 대해서 이미 이욕(離欲)을 얻어서, 곧 이 식(識)에 대해서 사유(思惟)하고 승해(勝解)하는 것이며, 무소유처해탈(無所有處解脫)은 이미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얻고 나서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대해서 사유(思惟)하고 승해(勝解)하는 것이다. 유정해탈(有頂解脫)은 다시는 나머지 것에 대해서 승해(勝解)를 짓지 않고 내지 두루 상(想)을 낼만한 곳[處]에 대해서, 곧 이곳에 대해서 마땅히 승해(勝解)를 짓는 것이다.
  다음에 앞에서 이미 작의승해(作意勝解)를 닦아 대치[修治]하고 뒤에 비로소 뛰어난 앎[勝知]과 뛰어난 견해[勝見]를 일으키기 때문에 승처(勝處)라고 이름한다.
  이 뛰어남[勝]에도 다시 다섯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비하(卑下)를 압도[形奪]하기 때문에 뛰어남[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가장 뛰어난 공교(工巧) 등의 일로써 다른 사람을 압도[形奪]하여 하열(下劣)한 자리[位]에 놓는 것과 같다. 둘째는 리열(羸劣)을 제복(制伏)하기 때문에 뛰어남[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어떤 사람이 자기의 강력한 힘으로써 약한 이들을 꺽는 것과 같다. 셋째는 능히 다른 것을 은폐(隱蔽)하기 때문에 뛰어남[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병과 항아리 등은 은폐할 수 있고, 혹은 여러 가지 약초와 주술과 신통도 은폐하는 것이 있다. 넷째는 소연(所緣)을 염괴(厭壞)하기 때문에 뛰어남[勝]이라고 이름하니, 말하자면 경계(境界)를 염괴(厭壞)하여 제 번뇌를 버리는 것이다. 다섯째는 자재(自在)로이 회전(廻轉)하기 때문에 뛰어남[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세간의 군왕이 원하는 바대로 신하[臣]와 종[僕]을 처분(處分)하는 것이다.
  이 의미[義]에서는 의지[意]의 은폐 및 자재(自在)의 뛰어남을 나타낸 것이고, 앞에 해탈(解脫)에서는 승해(勝解)의 자재(自在)를 나타낸 것인데,
[364 / 829] 쪽
  지금의 승처(勝處)에서는 제복(制伏)과 자재(自在)를 나타낸 것이다.
  색(色)을 관(觀)함이 적다[少]는 것은 제 유정(有情)의 자구(資具) 등의 색(色)을 말하는 것이다. 색(色)을 관(觀)함이 많다[多]는 것은 여러 궁전(宮殿) 방사(房舍) 등의 색(色)을 말한다. 호색(好色)이라고 말하는 것은 미묘한 현색(顯色)을 말하니, 한결같이 정묘(淨妙)하기 때문이다. 이것과 상위(相違)하는 것을 악색(惡色)이라고 이름한다. 소색(少色)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의 불가의(不可意)의 색(色)을 말하며, 이것과 상위(相違)하는 것을 뛰어난 색[勝色]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이 네 가지 현색(顯色)은 유정(有情)의 자구(資具) 궁전(宮殿) 등을 포함한다. 뛰어난 앎[勝知]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주 자주 소연(所緣)을 은폐하는 승해(勝解)를 말한다. 이와 같은 상(想)이 있다는 것은 제복(制伏)의 상(想)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에 제 변처(遍處)는 승해(勝解)의 대상[事]에 대해서 두루 승해(勝解)를 내기 때문에 변처(遍處)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이(無二)라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제 현성(賢聖)에게는 아(我)와 아소(我所)의 두 가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무량(無量)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체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변처(遍處)는 오직 색(色)과 촉(觸)의 2처(處)에 나아가 건립하는가?
  이 두 가지는 자타(自他)의 몸과 함께 유색계(有色界)에 두루 하면서 항상 상속(相續)하기 때문이다. 안(眼) 등의 근(根)의 색(色)은 오직 자신(自身)에게만 속하고 향(香)과 미(味)의 2진(塵)은 일체에 두루 하지 않으며23) 성진(聲塵)24)은 끊어짐[間]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설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유색(有色)의 제 변처정(遍處定)은 색계(色界)의 후변(後邊)이며 무색계(無色界) 중에서 공(空)은 일체에 두루 하기 때문에 변처(遍處)를 세우고 식소행
  
23) 향(香) 미(味)의 두 가지 경(境)은 오직 단식(段食)의 성품으로서 단지 욕계계(欲界繫)일 뿐이라서 위의 두 가지의 계[上二界]에는 없다.
24) 한역(漢譯)에서는 성성(聲聲)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는 성진(聲塵)의 오자(誤字)이므로 정정하여 번역한다.
[365 / 829] 쪽
  (識所行)의 경(境)은 일체에 두루 하기 때문에 또한 변처(遍處)를 세우는 것이다.
  다음에 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먼저 소연(所緣)에 대해서 사유(思惟)하고 승해(勝解)하며 다음으로 능히 제복(制伏)한다. 이미 제복(制伏)에 대해서 자재(自在)를 얻고 난 이후에, 곧 이것에 대해서 일체의 처소[所]에 두루 하며 그 원하는 바대로 승해(勝解)를 짓는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위와 같은 순서이다.
  8색변처(色遍處)를 잘 청정(淸淨)히 하기 때문에 능히 현성(賢聖)의 승해신통(勝解神通) 및 제 대상[事]에 대해서 전변(轉變)하는 신통(神通)을 끌어당기며, 그 승해(勝解)와 그 승해(勝解)대로 전변(轉變)하는 것에 따라서 모두 능히 성취(成就)하고 또한 능히 금 은 등의 물건을 변화로 만들어서[變作] 쓸 수 있게 할 수 있다.
  식변처(識遍處)를 잘 청정히 하기 때문에 곧 능히 무쟁(無諍) 원지(願智) 무애해(無恚解) 등의 여러 뛰어난 공덕을 끌어당기며[引發], 공변처(空遍處)를 잘 청정히 하기 때문에 그 원하는 바대로 모두 다 굴러서 공(空)이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세간(世間)의 기와[瓦]와 철(鐵)과 금(金)을 다루는 사람[師]이 처음에는 진흙 등을 개는 것이 아직 잘 숙달[調練]되지 않는 것과 같이 해탈위(解脫位) 또한 그러하며, 잘 조련(調練)되는 것과 같이 승처위(勝處位) 또한 그러하며, 조련(調練)하고 나서 원하는 바대로 전변(轉變)하는 것과 같이 변처위(遍處位) 또한 그러하다.
  다음에25) 3삼마지(三摩地)에서 무엇을 공삼마지(空三摩地)라고 하는가?26)
  
25)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되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에 다섯 번째로 제 경(經)의 종요(宗要)에 대해서 밝힌다. 제 경(經)의 종요(宗要)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서 해석된다. 이하는 제 경(經)의 종요(宗要)를 밝히는 내용 가운데에 첫 번째의 섭종요(攝宗要) 중 그 두 번째로 등지(等持)에 대하여 해석한다. 이 등지(等持)에 대한 해석은 10부문으로 나뉘어져 해석되는데, 첫째는 3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하고, 둘째는 유심유사(有尋有伺) 등의 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하며, 셋째는 대(大) 소(小) 무량삼마지(無量三摩地)를 해석하며, 넷째는 일분수(一分修) 구분수(具分修)의 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하며, 다섯째는 3수(受)와 함께하는 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하며, 여섯째는 4수정(修定)을 해석하며, 일곱째는 5성지(聖智)의 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하며, 여덟째는 성오지(聖五支)의 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하며, 아홉째는 유구성정(有具聖正)의 삼마지를 해석하며, 열째는 금강유(金剛喩)의 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한다.
26) 이하는 열 가지 부분의 삼마지(三摩地)의 내용 중에 첫 번째로 3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한다.
[366 / 829] 쪽
  유정(有情) 명자(命者) 양육자(養育者) 삭취취(數取趣) 등을 원리(遠離)하고, 마음이 하나의 연(緣)에 머무르는 것이니, 공성(空性)에는 간략하게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관찰공(觀察空)이니, 제 법(法)은 공(空)하여 상(常) 낙(樂)이 없으며, 내지 공(空)하여 아(我) 아소(我所)가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둘째는 피과공(彼果空)이니, 부동심(不動心)으로 해탈(解脫)하여 탐(貪) 등의 일체의 번뇌(煩惱)가 비어서[空] 없는 것이다. 셋째는 내공(內空)이니, 자신(自身)을 비어서[空] 아(我) 아소(我所)를 계탁하거나 아만(我慢) 등의 일체의 벽집(僻執)을 계탁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는 외공(外空)이니, 5욕(欲)을 비어서[空] 욕애(欲愛)가 없는 것이다.
  설명한 것과 같이 나는 이미 일체의 유색(有色)의 상(想)을 초과(超過)했기 때문에 외공(外空)에 대하여 몸[身]으로 작증(作證)하고 구족(具足)하여 머무르며, 내지 …… 라고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묘욕(妙欲)을 연(緣)하는 상(想)을 색상(色想)이라고 이름하며, 이 상(想)을 일으키게 되는 탐욕(貪欲)을 끊기 때문에 외공(外空)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또한 수행자(修行者)는 피과공(彼果空)에 의하여 어떤 때는 외공(外空)을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며, 어떤 때는 내공(內空)을 작의하고 사유하며, 관찰공(觀察空)에 의하여 어떤 때는 내외(內外)의 공성(空性)을 사유하며, 이 힘[力]에 의하여 마음이 함께 증회(證會)27)하는 것이다. 가령 이 내외(內外)의 공성(空性)에 대하여 증회(證會)하지 못하는 자는 다시 곧 무동(無動)을 작의하고 사유해야만 한다. 무동(無動)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상(無常想) 혹은 다시 고상(苦想)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다시 그것으로 인하여 아만(我慢) 등으로 흔들리지 않으며, 그것에 의하여 아(我) 아만(我慢)을 계탁하지 않고, 내지 …… 그 마음을 흔들지 않기 때문에 다시 두 가지 공(空)에서
  
27) 증지(證知)하여 회취(會取) 또는 해회(解會)한다는 뜻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367 / 829] 쪽
  마음이 함께 증회(證會)하는 것이다.
  무엇을 무원심삼마지(無願心三摩地)라고 하는가?
  5취온(取蘊)에 대하여 무상(無常)을 사유하고 혹은 고(苦)를 사유하여 마음이 하나의 연(緣)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무상심삼마지(無相心三摩地)라고 하는가?
  곧 그 취온(取蘊)의 멸(滅)에 대하여 적정(寂靜)을 사유하여 마음이 하나의 연(緣)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경(經)에서 '무상심삼마지(無相心三摩地)는 낮지도 않고[不低] 높지도 않다[不 ].28) 내지 ……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무엇을 낮지고 않고 높지도 않다고 하는가?
  거슬리고[違] 수순하는[順] 두 가지 상(相)과 상응(相應)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두 가지 인연(因緣)으로 무상정(無相定)에 들어가니, 첫째는 일체의 상(相)을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바르게 무상계(無相界)를 사유하기 때문이다. 일체의 상(相)을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제 상(相)에 대하여 싫어하지도 무너뜨리지도[厭壞] 않으면서 가행(加行)하고 작의(作意)하고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낮지 않다[不低]고 말하는 것이다. 무상계(無相界)29)에 대하여 바르게 사유하기 때문에, 그 무상계에 대하여 굳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높지 않다[不 ]고 말하는 것이다.
  이 삼마지(三摩地)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방편(方便)이며, 둘째는 방편과(方便果)이다. 방편(方便)이라고 하는 것은 자주자주 책려(策勵)하고 사택(思擇)하고 안립(安立)하여, 그 제 상(相)30)에 대하여 능히 해탈하지 못하고 수상식(隨相識)31)에 의하여 때때로 마음을 요란(擾亂)하기
  
28) 위경(違境)을 연(緣)하는 심(心)은 낮고 순경(順境)을 연(緣)하는 심(心)은 높다. 여기에서는 이 위(違) 순(順)의 두 가지 상(相)이 없기 때문에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세속의 진리[世諦]를 무너뜨리고 세속에 거스르는 경계를 낮다고 하며, 심(心)을 붙잡아 두어서 진경(眞境)에 수순하는 것을 높다고 한다. 무상(無相)의 행(行)은 이 둘을 여의었기 때문에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고 하는 것이다.
29) 진여(眞如) 즉 공무상계(空無相界)를 말한다.
30) 유루(有漏) 무루(無漏)와 유위(有爲) 무위(無爲)의 여러 가지 상(相)을 말한다.
31) 분별의식(分別意識)을 말한다.
[368 / 829] 쪽
  때문이다. 그는 다시 자주자주 스스로 책려(策勵)하고 사택하고 안립하여 드디어 능히 과(果)를 취하여 수상식[隨相]을 벗어난다[解脫]. 이것으로부터 해탈하고, 또한 해탈로 인하여 스스로 책려(策勵) 사택(思擇)하지 않고 안주[住]하니, 이 때문에 극선해탈(極善解脫)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자주 책려(策勵) 사택(思擇)하고 안립(安立)하여 드디어 머무르는 자는 해탈(解脫)이라고 이름하지만, 선해탈(善解脫)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한 효료(曉了)의 과(果)와 효료(曉了)의 공덕(功德)은 말하자면 번뇌단(煩惱斷)의 구경(究竟)이기 때문이며, 현법락주(現法樂住)의 구경(究竟)이기 때문이다. 또한 멸도(滅道)와 함께하는 것은 효료(曉了)이어야 하는데, 곧 이 두 가지를 그 차례에 따라서 효료(曉了)의 과(果)와 효료(曉了)의 공덕(功德)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제현관(諦現觀)과 아라한과(阿羅漢果)가 모두 현료(顯了)이어야 하는데 견도위(見道位)에 대하여 효료(曉了)의 과(果)라고 이름하며, 아라한과(阿羅漢果)에 대하여 효료(曉了)의 공덕(功德)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이 처(處)에 대하여 그 물질[物]이 없다면 그 도리(道理)에 의하여 이를 관(觀)하여 공(空)이라고 하기 때문에 공성(空性)이라고 이름하며, 곧 관찰된[所觀] 공(空)에 대하여 바랄 만한 원(願)이 없기 때문에 무원(無願)이라고 이름하며, 일체의 행상(行相)을 원리(遠離)하는 것을 관하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라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는 먼저 공성(空性)을 설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고(苦)이며, 고(苦)이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선설(宣說)하고 마지막으로 마침내 공(空)을 선설하는 것인가?32)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를 관하지 않으면 끝내 청정해지지 않으며, 반드시 먼저 무아(無我)의 상(想)에 안주해야 만이 이로부터 곧바로[無
  
32) 견도(見道) 이전의 가행위(加行位)에서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공(空)의 쉬운 것부터 어려운 순으로 관(觀)하며, 견도(見道)에 들어가서 진여(眞如)를 관(觀)할 때에는 공(空) 무아(無我)의 순으로 하기 때문에 공(空)을 먼저 관하여 진견도(眞見道)에서 상견도(相見道)로 들어가며, 다음으로 무원(無願) 무상(無常) 고(苦)를 관하여 드디어 청정(淸淨)을 얻기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것이다.
[369 / 829] 쪽
  間] 비로소 무원(無願)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제 무상상(無常想)은 무아상(無我想)에 의지하여 안주하게 된다. 내지 ……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무상(無常)에 대하여 무아(無我)를 관하고 나서 희원(希願)을 내지 않고 오직 무상(無相)만을 원하여 오로지 출리(出離)를 구하기 때문에 이것은 곧바로[無間] 무상(無相)을 선설하는 것이다.
  다음에33) 무엇을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고 하는가?
  심(尋) 사(伺)와 상응하는 삼마지(三摩地)를 말한다.
  무엇을 무심유사삼마지(無尋唯伺三摩地)라고 하는가?
  오직 사(伺)와 상응하는 삼마지(三摩地)를 말하며, 대범(大梵)을 닦고 나서 대범왕(大梵王)이 된다.
  무엇을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고 하는가?
  심(尋) 사(伺) 두 가지 모두에 상응하지 않는 삼마지(三摩地)를 말하며, 이것을 닦기 때문에 오직 무루(無漏)의 제 삼마지(三摩地)만을 제외하고 다음에 유정(有頂)에 이르기까지의 상지(上地)에 태어난다.
  무엇을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의 상(相)이라고 하는가?
  심(尋) 사(伺)에 대하여 마음에서 버리는 것[棄捨]을 내며, 일미(一味)에 의하여 내소연(內所緣)에 대해서 승해(勝解)를 지으며, 또한 일미(一味)의 평등(平等)으로 현관(現觀)하는 것이다.
  다음에34) 무엇을 소삼마지(小三摩地)라고 하는가?
  혹은 소연(所緣)에 의하기 때문에 소(小)라고 하며, 소색(小色)을 관하고 혹은 작의(作意)를 관하기 때문에 소(小)라고 하며, 소신(小信) 소욕(小欲) 소승해(小勝解)에 의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대삼마지(大三摩地)라고 하는가?
  혹은 소연(所緣)에 의하기 때문에 대(大)라고 하며, 다색(多色)을 관하지만 무변무제(無邊無際)의 제 색(色)을 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혹은 작의
  
33) 이하는 열 가지 부분의 삼마지(三摩地)의 내용 중에 두 번째로 유심유사(有尋有伺) 등의 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한다.
34) 이하는 열 가지 부분의 삼마지(三摩地)의 내용 중에 세 번째로 대(大) 소(小) 무량삼마지(無量三摩地)에 대하여 해석한다.
[370 / 829] 쪽
  (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대(大)라고 하며, 상신(上信) 상욕(上欲) 상승해(上勝解)에 의하지만 무변무제(無邊無際)의 신(信) 욕(欲) 승해(勝解)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을 무량삼마지(無量三摩地)라고 하는가?
  혹은 소연(所緣)에 의하기 때문에 무량(無量)이라고 하며, 무변무제(無邊無際)의 제 색(色)을 관하기 때문이며, 혹은 작의(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무량(無量)이라고 하며, 무변무제(無邊無際)의 신(信) 욕(欲) 승해(勝解)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에35) 대심삼마지(大心三摩地)는 하나의 나무 아래에서 제 천(天)의 광명[光]을 생각하여 승해(勝解)를 내며 내지 …… 하는 것을 말하며, 무량삼마지(無量三摩地)는 4무량(無量)을 말한다.
  무엇을 하나의 나무 아래에서 제 천(天)의 광명[光]을 생각하여 승해(勝解)를 낸다고 하는 것인가?
  욕계(欲界)에 대하여 극히 염괴(厭壞)하고 나서 초정려(初靜慮)을 얻고, 이 정(定)을 선청정(善淸淨)하기 위하여 다시 방편을 닦고, 또한 제 천(天)의 몸은 광명(光明)을 두른다는 말을 듣고서 곧 그 몸의 광명상(光明相)이 하나의 나무 아래로부터 대지(大地) 대해(大海)의 변제(邊際)에까지 두루 하다고 사유하며 승해(勝解)를 발생(發生)하는 것이다. 삼마지의 후후(後後)에 굴러서 증가하는 차별(差別)이 있기 때문에 생기(生起)하는 것에도 차별이 있게 된다.
  어떻게 작의(作意)는 오직 두 가지만을 성취하게 되는가?
  승해(勝解)의 분제(分齊)36)에 따라서 작의를 시설(施設)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작의(作意)가 오직 두 가지만을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닦음[修]도 두 가지 만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인가?
  곧 이 작의력(作意力)에 의하기 때문에 닦아지는[所修] 정(定)을 시설하는데도 차별이 있다는 것이니, 원만(圓滿)과 청정(淸淨)이 점점 증가하고 뛰
  
35) 이하는 대(大) 소(小) 등의 삼마지(三摩地)에 대한 경설(經說)을 인용한다.
36) 승해(勝解)는 결정(決定)을 의미한다. 정(定)을 구할 때에는 승(勝) 열(劣)에 따라서 의지하여 작의(作意)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371 / 829] 쪽
  어나기[增勝] 때문이다.
  무엇을 닦음[修]에서 오직 두 가지 만을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행(行)도 두 가지 만을 성취한다고 하는가?
  선(善)을 닦으면서 정(定)이 점차 증가하고 뛰어나게 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시설되어 받게 되는[所感] 생(生)에도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행(行)이 오직 두 가지를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보특가라(補特伽羅)의 건립도 오직 두 가지인 것인가?
  이 인연소생(因緣所生)의 유정(有情)에 높고 낮음[高下]와 뛰어남과 열등함[勝劣]의 차별을 시설하는 것이다.
   처음의 두 가지 정려의 제 천(天)의 광명(光明)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마니주(末尼珠)는 밖에는 광명이 있어도 안에는 광명이 없는 것과 같이, 초정려(初靜慮)의 몸[身]도 이와 같아서 밖으로는 광명을 놓아도 안으로는 곧 그렇지 않다. 비유하자면 밝은 등불[明燈]은 밖으로도 광명을 내고 안으로도 스스로 환하게 비추듯이, 제 2정려(靜慮)의 몸[身]도 이와 같아서 안팎에 모두 광명이 있다. 이 때문에 경(經)에서 "그 지(地) 이상은 오직 한 가지의 몸[身]만이 있고, 하지(下地)에는 있지 않다"고 설하는 것이다.
  다음에 어떻게 4무량정(無量定)을 건립하는가?
  말하자면37) 제 유정에게는 3품(品)이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고(苦) 낙(樂)이 없는 것이며, 둘째는 고(苦)가 있는 것이며, 셋째는 낙(樂)이 있는 것이다. 그 차례대로 그 낙(樂)을 주려고 하고, 고(苦)를 없애주려고 하며, 그 낙(樂)과 영원히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 작의에 네 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 차례대로 네 가지를 건립한다. 말하자면 락을 주는[與樂] 작의에 의하기 때문에, 고를 뽑아내는[拔苦] 작의에 의하기 때문에, 락과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수희(隨喜)하는 작의 때문에 앞의 세 가지를 건립한다. 곧 이 세 가지 낙(樂)을 주려고 하는 낙(樂) 등에 대하여 그것을 즐겨 사모(思慕)하지 않고 염오(染汚)하지 않고 작의하기 때문에,
  
37) 경(經)의 4무량(無量)의 행상(行相)의 차별을 해석한다.
[372 / 829] 쪽
  진에(瞋恚)에 염오되지 않고 작의하기 때문에, 탐욕(貪欲)에 염오되지 않고 작의하기 때문에 사(捨)를 건립한다.
  경(經)에서 "자(慈)와 함께[俱] 하는 마음으로써 내지 ……"고 말씀하신다. 현전(現前)에 요익(饒益)하기 때문에 자(慈)와 함께 한다[俱]고 이름하며, 요익(饒益)의 상(相)이기 때문에 자(慈)의 선우(善友)라고 이름한다. 그 요익의 상(相)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익(利益)하려고 하는 것이며, 둘째는 안락(安樂)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相)은 일체무량(一切無量)으로 현시(顯示)되는 것이다.
  무원(無怨)이라는 것은 악(惡)의 의요(意樂)를 여의기 때문이며, 무적(無敵)이라는 것은 현재의 괴쟁(乖諍)을 여의기 때문이며, 무뇌해(無惱害)라는 것은 불요익(不饒益)의 사(事)를 여의기 때문이다. 광(廣)이라는 것은 소연(所緣)이 광대(廣大)하기 때문이며, 대(大)라는 것은 이익(利益) 안락(安樂)의 사유(思惟)가 최승(最勝)이기 때문이며, 무량(無量)이라는 것은 4대하(大河)가 여러 물줄기가 섞인 처소[衆流雜處]이듯이 과(果)가 무량하기 때문이며, 선수습(善修習)이라는 것은 극히 순숙(純熟)하기 때문이다. 가령 '자(慈) 등과 함께하는 마음에는 어떤 등의 상(相)이 있는가'라고 질문이 있기 때문에 다음에 '승해(勝解)가 편만(遍滿)하고 구족(具足)하여 머무른다[住]'고 대답하는 것이다. 승해(勝解)가 편만(遍滿)하다는 것은 증상의요(增上意樂)의 승해(勝解)가 두루 널리 하기[周普] 때문이며, 의구족(義具足)이란 원만(圓滿)하고 청정[淸]하고 선백[白]하기 때문이며, 머무른다[住]란 닦는 바 관행(觀行)이 밤낮[日夜]으로 전주(專注)하며, 때로 전주(專注)하기 때문이다.
   경(經)에서 "자(慈)를 잘 수습(修習)하여 두루 깨끗함[遍淨]을 다한다[極]. 내지 …… "라고 말씀하셨듯이, 이것은 어떤 밀의(密意)인가?
   제 3정려(靜慮)는 제 낙(樂) 중에 그 낙(樂)이 가장 뛰어나며[最勝], 그 낙(樂)을 기억하여 자심(慈心)을 수습하는 데에 자(慈)가 최고로 제일(第一)이기 때문에 자(慈)를 수습하여 두루 깨끗함[遍淨]을 다한다[極]고 설하신 것이다.
  공처(空處)를 기억[憶念]하여 비심(悲心)을 수습하는 것도 또한 최고로 제
 
[373 / 829] 쪽
  일(第一)이니, 비(悲)를 닦는 자는 쾌히 고(苦)를 뽑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색계(無色界)에서는 뭇 고(苦)를 원리(遠離)하고 괴(壞) 등의 고(苦)를 끊은 것이니, 그곳은 모두 다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변(無邊)의 공처(空處)를 기억하여 비(悲)의 등지(等至)를 수습하되, '마땅히 일체의 고(苦)가 있는 유정(有情)에게 뭇 고(苦) 및 소의(所依)가 없는 곳에 이르게 하리라'는 이와 같은 생각을 짓는 것이다.
  희정(喜定)을 닦는 사람도 또한 항상 무변(無邊)의 식처(識處)를 기억하여 제 유정이 얻는 바 안락(安樂)을 축하[慶]하며, '마땅히 일체의 유정의 종류에게 무량한 낙(樂)을 주리라. 마치 식처(識處)의 식(識)이 한량없는 것처럼'이라는 이와 같은 생각을 짓는다. 이 때문에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기억하여 희정(喜定)을 닦는 것을 최고로 제일(第一)이라고 한다. 사정(捨定)을 닦는 사람도 또한 항상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기억하고 '무소유처(無所有處)는 무루심지(無漏心地)의 최고의 후변(後邊)이며, 사(捨)는 최고로 제일(第一)이니, 아라한(阿羅漢) 필추(苾芻)의 모든 고(苦) 낙(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의 현행위(現行位)에는 모두 염오(染汚)가 없는 것과 같다. 마땅히 일체의 유정의 종류에게 이와 같은 사(捨)를 얻게 하리라'는 이와 같은 생각을 짓는다. 이 때문에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억념하여 사정(捨定)을 닦는 것을 최고로 제일(第一)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일체는 모두 성행(聖行)이며, 오직 성인만이 닦기 때문에 경(經)에서 "각분(覺分)과 함께 행(行)한다"고 선설(宣說)하시는 것이다.
  다음에38) 무엇을 일분수삼마지(一分修三摩地)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이 중에서 어떤 경우는 오직 광명상(光明相)만을 작의(作意)하고 사유하고, 어떤 경우는 오직 색상(色相)만을 작의(作意)하여 사유해서 정(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그 차례에 따라서 어떤 경우는 광명(光明)을 요별하고, 어떤 경우는 뭇 색(色)을 본다.
  무엇을 구분수삼마지(具分修三摩地)라고 하는가?
  
38) 이하는 열 가지 부분의 삼마지(三摩地)의 내용 중에 네 번째로 일분수(一分修) 구분수(具分修)의 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한다.
[374 / 829] 쪽
  말하자면 두 가지 모두를 사유하여 정(定)에 들어가는 것이니, 광명(光明)을 요별하면서도 또한 뭇 색(色)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광명정(光明定)을 수습(修習)하는 자에게는 소위 의(疑) 등의 열 한가지39) 정(定)의 장애[難]의 차별이 있으니, 경(經)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이것은 어떠한 장애[難]인가?
   삼마지(三摩地)의 상(相)이다. 상(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소위 소연상(所緣相) 및 인연상(因緣相)이며 그것을 의지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머무르는 것이다. 만약 그 상(相)을 물리치면 곧 머무를 수 없다.
  여기에서는40) 가장 먼저 현현(顯現)하게 되는 광명(光明) 색(色)의 상(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곧 깨달음에 의심을 품게 된다.
  방편(方便)이 느슨하기 때문에41) 부작의(不作意)가 있어서, 뭇 색(色)에 대해서 보려고 하지 않는 자가 눈을 가리거나 다시 얼굴을 돌리는 것과 같다. 이 관행자(觀行者)가 제 색(色)에 대해서 작의(作意)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
  잘 근문(根門) 등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42) 몸이 추중(麤重)하게 되고 자주 수면(睡眠)을 익히며, 혹은43) 자주 깨어 있으면서도[覺悟] 곧 혼침과 수면[惛睡]을 증장하여 뭇 색(色)을 보지 못하며 설사 보는 것이 있더라도 원만하지 않게 된다. 이 두 가지 작용[事] 때문에 극도로 공용(功用)을 지으며, 힘써 사유하기 때문에 크게 무리하면서 용맹스럽게 정진(精進)하는 것이다. 크게 무리하여 책려(策勵)하는 허물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극도로 하열(下劣)하게
  
39) 전도정(顚倒定)의 장애[難] 무념정(無念定)의 장애[難] 탐등정(貪等定)의 장애[難] 불적정(不適定)의 장애[難] 불등정(不等定)의 장애[難] 추희정(麤喜定)의 장애[難] 포외정(怖畏定)의 장애[難] 이상정(異相定)의 장애[難] 유만정(有慢定)의 장애[難] 다어정(多語定)의 장애[難] 불취정(不取定)의 장애[難]를 말한다.
40) 제 1의 전도정(顚倒定)의 장애[難]를 기술한다.
41) 제 2의 무념정(無念定)의 장애[難]를 기술한다.
42) 제 3의 탐등정(貪等定)의 장애[難] 또는 추중수면(麤重睡眠)의 장애[難]를 기술한다.
43) 제 4의 부적정(不適定)의 장애[難] 또는 많은 사각(思覺)을 내는 장애[難]를 기술한다.
[375 / 829] 쪽
  되니, 급하게 척안조(斥 鳥)44)를 잡는 사람과 같다.
  그는45) 오직 광명상(光明相)만을 구하고자 사유하였는데, 이것과 더불어 색(色)을 보거나 또는 함께 생길 때, 하나를 바랬는데 두 가지를 얻고 곧 용약(踊躍)을 일으키게 된다. 마치 어떤 사람이 두 가지 복장(伏藏)을 얻는 것과 같다.
  두루46) 여러 방향에서 갑자기 늘비한 상서롭지 못한 색(色)을 보고 곧바로 큰 두려움을 내게 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양쪽으로 빙빙 돌다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것이47) 작용할 때에, 혹은 다시 머무를 때에는 세간의 잡류(雜類)에 대해서 갖가지 상(想)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와 같은 외상(外想)은 정(定)에 장애[難]가 된다.
  혹은 다시48) 그 수습(修習)된 정(定)에 의해서 자기가 뛰어나다고 말하고 다른 이를 열등하다고 보아서 곧 스스로 높이게[高擧]되니, 이와 같은 것도 갖가지 상(想)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49) 많이 토론[言論]하거나, 혹은 오랫동안 심사(尋思)하여 몸을 지치게 하고 마음으로 정(定)을 얻지 못하게 하니, 이와 같은 많은 말[多語]은 정(定)에 장애[難]가 된다.
  만약50) 정(定)으로부터 광명상(光明相)을 내거나 및 색(色)을 볼 때 곧바로 안에서 닦는 상속작의(相續作意)를 버리고 밖의 진리[外諦]에서 뭇 색[衆色]을 보기를 바라기[願樂] 때문에 지극한 사찰(思察)은 정(定)에 장애[難]가 된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장애[難]는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삼마지(三摩地)의 소연경상(所緣境相) 및 인연상(因緣相)을 장애[難]한다. 혹은 이것에 만나
  
44) 수찰조(水札鳥)라고도 한다. 급히 붙잡으면 새가 지치고 살그머니 잡으면 날아가 버린다. 그 성질이 조급한지라 붙잡기가 매우 곤란한 것에 종종 비유된다.
45) 제 6의 추희정(麤喜定)의 장애[難]를 기술한다.
46) 제 7의 포외정(怖畏定)의 장애[難]를 기술한다.
47) 제 8의 이상정(異相定)의 장애[難]를 기술한다.
48) 제 9의 유만정(有慢定)의 장애[難]를 기술한다.
49) 제 10의 다어정(多語定)의 장애[難]를 기술한다.
50) 제 11의 불취정(不取定)의 장애[難]를 기술한다.
[376 / 829] 쪽
  는 것이 있으면 소연(所緣) 인연상(因緣相)을 퇴실(退失)하게 되므로 그 차례대로 두 가지 상(相)은 모두 사라진다.
  다음에51) 무엇을 희구행삼마지(喜俱行三摩地)라고 하는가?
  처음 두 가지 정려(靜慮)52)의 제 삼마지(三摩地)를 말한다.
  무엇을 락구행삼마지(樂俱行三摩地)라고 하는가?
  제 3정려(靜慮)의 제 삼마지(三摩地)를 말한다.
  무엇을 사구행삼마지(捨俱行三摩地)라고 하는가?
  제 4정려(靜慮) 이상의 제 삼마지(三摩地)를 말한다.
  다음에53) 어떠한 수정(修定)이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얻게 되는가?
  말하자면 네 가지의 현법락주(現法樂住)이니, 방편도(方便道) 가운데에 있게 되는 수정(修定) 및 원만(圓滿) 청정(淸淨) 선백(鮮白)하지 않는 제 근본지(根本地)에서 얻게 되는 수정(修定)이다. 아직 증득하지 못한[未曾得] 정(定)을 수습(修習)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때문에 세존(世尊)께서는 초정려(初靜慮) 앞에54) 방편도(方便道)를 설명하신 것이다.
  어떠한 수정(修定)이 지견(智見)을 얻게 되는가?
  필추(苾芻)들이 광명상(光明相)에 대해서 은근하고 지극히 정성스럽게 자세히 진리를 살펴서[審諦] 취하는 것이니, 경(經)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이것은 능히 천안(天眼)을 일으키기 전에 방편도(方便道)에 있으면서 갖게 되는 수정(修定)인 줄 알아야만 한다. 이 가운데 제 색경(色境)에 대해서 능히 비추고 능히 관(觀)하는 천안(天眼)을 설명하여 견(見)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능히 제 천(天)의 이와 같은 명자(名字)와 이와 같은 종류(種類)를 알며 내지 …… 은 『승천경(勝天經)』과 같으며, 이를 지(智)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51) 이하는 열 가지 부분의 삼마지(三摩地)의 내용 중에 다섯 번째로 3수와 함께하는 삼마지[三受俱行三摩地]를 해석한다.
52) 초정려(初靜慮)와 제 2정려(靜慮)를 가리킨다.
53) 이하는 열 가지 부분의 삼마지(三摩地)의 내용 중에 여섯 번째로 4수정(修定)을 해석한다.
54) 초정려(初靜慮)를 들어서 뒤의 3정려(靜慮)를 간략히 하며, 뒤의 3정려(靜慮)는 증득(曾得)의 종류이기 때문에 줄여서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377 / 829] 쪽
  어떠한 수정(修定)이 분별혜(分別慧)를 낸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진리[諦]를 현관(現觀)하는 예류과향(預流果向)의 방편도(方便道)에서 갖게 되는 수정(修定)이거나 혹은 제 무애해(無恚解)를 수습(修習)하는 것이다.
  어떠한 수정(修定)을 제 루(漏)를 다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아라한과(阿羅漢果)의 방편도(方便道)에서 갖게 되는 수정(修定)을 말한다.
  다음에55) 무엇을 5성지(聖智)의 삼마지(三摩地)라고 하는가?
  "나의 이 삼마지(三摩地)는 성(聖)이며 물듦[染]도 없고 집착[執]도 없다 …… "고 말씀하신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경(經)에서와 같다. 여기에서는 5행상(行相)의 지(智)를 시현(示現)하는 것이니, 자체지(自體智) 보특가라지(補特伽羅智) 청정지(淸淨智) 과지(果智) 입출정상지(入出定相智)를 말한다.
  '성(聖)'이란56) 선(善)하기 때문에 성(聖)이라고 이름하며, 또한 무루(無漏)이기 때문에 성(聖)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물듦[染]이 없다'고 하는 것은 선성성(善聖性)을 나타낸다. '집착[執]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루성성(無漏聖性)을 나타낸다.
  '범부가 가까이 할 바가 아니다[非凡夫所近]'는 것은57) 말하자면 제 불(佛) 및 성제자(聖弟子)가 가까이 하는 것[親近]이기 때문이다. '총예로 칭찬받는 바[是聰叡所讚]'란 말하자면 곧 그에게 칭찬받기 때문이다. '제 총예인 범행을 함께하는 자는 항상 가훼하지 않는다[是諸聰叡同梵行者常不訶毁]'란 말하자면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칭찬하기 때문이다. 세간의 초정려(初靜慮) 등에서 하지(下地)를 등지기 위해서 방편(方便)을 닦기 때문에 먼저 정상(靜相)으로서 이를 칭찬하고 상지(上地)로 나아가기 위해서 방편(方便)을 닦기
  
55) 이하는 열 가지 부분의 삼마지(三摩地)의 내용 중에 일곱 번째로 5성지(聖智)의 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한다.
56) 이하는 경문(經文)을 해석하는 것이다. 다음의 3구(句)는 자체지(自體智)를 설명하는 것이다.
57) 이하의 3구(句)는 보특가라지(補特伽羅智)를 설명하는 것이다.
[378 / 829] 쪽
  때문에 뒤에 추상(麤相)으로서 다시 가훼(呵毁)하는 것과 같지 않다.
  '적정(寂靜)'이란58) 소치(所治)의 번뇌(煩惱)가 영원히 적정(寂靜)하기 때문이다. '미묘(微妙)'란 자지(自地)의 번뇌(煩惱)에 애미(愛味)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은의 도를 얻는다[得安隱道]'란59) 소득(所得)의 도(道)에서 물러섬[退轉]이 없기 때문이다. '증심일취(證心一趣)'란 이미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를 얻었기 때문이다. '현재안락(現在安樂)'이란 능히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얻었기 때문이다. '후락이숙(後樂異熟)'이란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의 낙(樂)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정념으로 들어간다[正念而入]'란60) 잃는 것[忘失]이 없이 능히 삼마지(三摩地)에서 들어가는 상(相)을 잘 취하기 때문이다. '정념으로 나온다[正念而出]'란 잃는 것이 없이 능히 삼마지(三摩地)를 나오는 상(相)을 잘 취하기 때문이다.
  다음에61) 무엇을 성오지(聖五支)의 삼마지(三摩地)62)라고 하는가?
  "제 필추(苾芻)는 곧 이 내신(內身)에 이생희락(離生喜樂)하며 …… "고 말씀하시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경(經)에서와 같다. '이생희락(離生喜樂)'이란63) 초정려지(初靜慮地)에 포함되는 희(喜) 낙(樂)을 말한다. '자윤하는 것[所滋潤]'이란 희(喜)로 적셔지는 것을 말한다. '두루 자윤한다[遍滋潤]'란 낙(樂)으로 적셔지는 것을 말한다. '두루 충만한다[遍充滿]'란 가행구경작의위(加行究竟作意位)를 말한다. '두루 적열한다[遍適悅]'란 이전에 제 작의위(作
  
58) 이하의 2구(句)는 청정지(淸淨智)를 설명하는 것이다.
59) 이하의 4구(句)는 과지(果智)를 설명하는 것이다.
60) 이하의 2구(句)는 입출정상지(入出定相智)를 설명하는 것이다.
61) 이하는 열 가지 부분의 삼마지(三摩地)의 내용 중에 여덟 번째로 성오지(聖五支)의 삼마지(三摩地)를 해석한다.
62) 4정려(靜慮) 가운데 제 현성(賢聖)의 정(定)에 각각 1지(支)가 있는데 이것을 4지(支)라고 한다. 심관안립(審觀安立)하여 결박(結縛)을 끊어 없애는 모든 성(聖)의 정(定)을 제 5지(支)라고 한다.
63) 이하의 5지(支)는 경(經)을 인용해서 이에 대해 해석하는 것인데, 초지(初地)를 해석하는 것에는 모두 16구(句)가 있다. 처음의 6구(句)는 법설(法說)이며, 다음의 10구(句)는 비유설[喩說]이다.
[379 / 829] 쪽
  意位)에 있을 때는 그 위(位)에서도 또한 희(喜) 낙(樂)이 있어서 때때로 끊어지면서 일어나지만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아서 역시 원만(圓滿)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 몸에 작은 부분이라도 충만하지 않음이 있지 않다[於此身中無有少分而不充滿]'란 가행구경과작의위(加行究竟果作意位)에 있는 것을 말한다.
  '비유하자면64) 힐혜로써65) 능히 목욕하는 사람과 혹은 그 제자와 같다[譬如黠慧能沐浴人或彼弟子]'란 관행자(觀行者)에 대해서 비유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구리그릇, 기와그릇, 또는 조개그릇이기도 하다[銅器瓦器或蜂蛤器者]'66)란 욕심을 여의고 희(喜)와 낙(樂)을 생기게 하기 위해서 교수(敎授) 교계(敎誡)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미세한 목욕가루[細沐浴末]'67)란 그것에 능히 수순하여 심(尋) 등을 벗어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물을 댄다[水澆灌]'란 심(尋)에 대한 청정도(淸淨道)68)를 비유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목욕단(沐浴 )'69)이란 몸을 비유한 것이다. '진이를 두른다[帶津膩]'70)란 희(喜)와 화합(和合)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기름짐이 따르게 된다[膩所隨]'란 낙(樂)과 화합(和合)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안팎을 두루 한다[遍內外]'란 간격없이 희(喜) 낙(樂)과 화합(和合)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강하지 않다[不强]'란 산동(散動)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약하지 않다[不弱]'란 염오(染汚)도 없고 애미(愛味)도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또한 두 번째 비유에는 차별(差別)이 있으니, '산(山)'이란 무심사정(無尋
  
64) 이하의 10구(句)는 비유설이다.
65) 인도 사람은 목욕해야 할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고 하기 때문에 비유로 삼는 것이다.
66) 목욕하는 그릇을 지칭한다. 언교(言敎)는 마치 이 그릇과 같이 능히 가르침에 따라서 심(尋) 사(伺) 등을 출리(出離)한다. 제 선정행(善淨行)은 그릇에 담긴 미세한 목욕가루와 같다.
67) 무간도(無間道)를 비유한 것이다.
68) 해탈도(解脫道)를 말한다.
69) 인도에서 목욕을 한 후에 몸에 바르는 향료의 일종(一種)이다. 아직 정(定)을 얻지 못한 수행자가 추중(麤重)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를 드는 것이다.
70) 정(定)이 희(喜)와 상응해서 심(心) 신(身)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향(香)과 마유(麻油)를 화합하여 기름지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380 / 829] 쪽
  伺定)71)을 비유한 것이고, '첨정(尖頂)'이란 제 2정려(靜慮)의 무심무사(無尋無伺)의 소연경(所緣境)에 대한 일미(一味)의 승해(勝解)를 비유한 것이며, '샘[泉]'72)이란 내등정지(內等淨支)를 비유한 것이다. '수축(水軸)'73)이란 물이 옆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말하며, '수색(水索)'이란 물이 위로 용출하는 것을 말하니, 이 두 가지 비유는 그 차례대로 희(喜) 낙(樂)을 현시(顯示)하는 것이다. '자윤(滋潤)' 등의 말은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충만하지 않음이 없다[無不充滿]'란 곧바로[無間] 상응하는 것을 비유한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세 번째의 비유에도 차별(差別)이 있으니, '올발라(嗢鉢羅)'74) 등은 이희(離喜)의 낙(樂)과 같듯이, 그 상응법(相應法) 및 그 소의신(所依身)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물[水]'은 이희(離喜)의 무심사정(無尋伺定)을 비유한 것이니, 희(喜)를 일으켜 용약(踊躍)하는 것이 거기에는 없기 때문에 꽃[華]의 태장(胎藏)이 물 속에 빠져있는 것에 비유하는 것이다.
  또한 네 번째의 비유에도 차별(差別)이 있으니, '청정심(淸淨心)'이란 사념청정(捨念淸淨)과 상응하는 것을 말하며, 하지(下地)의 여러 재환(災患)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선백(鮮白)'이란 성품이 선(善)인 것을 말하며, 자지(自地)의 번뇌에 애미(愛味)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다시 장자(長者)75)로써 비유를 삼는가?
  말하자면 그는 소작(所作)을 모두 다 알기 때문이며,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며, 뛰어나게 사유하고 헤아리며 관찰하기 때문이며, 늘어나고[增] 줄어드는[減] 부분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청정한 제 4정려(靜慮)를 증득하는 자 또한 이와 같아서 무릇 할 바가 있으면 자세히 살피고 원
  
71) 색계(色界)의 중간정(中間定)의 무심유사정(無尋唯伺定)을 말한다. 중간정(中間定)은 초선(初禪)을 벗어나는 산꼭대기와 흡사하다.
72) 희(喜) 낙(樂)의 여러 가지 물을 유출하는 것을 말한다.
73) 산(山) 옆으로 물을 흘리는 것이 큰 차축(車軸)과 같기 때문에 수축(水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74) 범어 Utpala를 음사한 것이다. 이 단어는 보통 청련화(靑蓮華)로 의역(意譯)된다. 제 2정려(靜慮)를 물[水]에 비유하고 연화(蓮華)를 희(喜)에 비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제 3정려 또한 그러하다고 한다.
75) 장자(長者)의 4업(業)을 정(定)의 4용(用)으로 비유한다.
[381 / 829] 쪽
  만히 하여 여러 가지 방일(放逸)들이 없으며, 일체의 대상[義]에 대해서 요지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 성품이 민첩하고 예리하다는 것이다.
  '여덟 날실, 아홉 날실로써 비유로 삼았다[八經九經以爲喩]'란 견고하게 짜기 때문에 모기 등이 침범할 수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수족을 모두 덮는다[首足皆覆]'란 만약 두 가지의 과실[失]이 있으면 침손(侵損)을 허용하게 되니, 말하자면 옷이 얇아지기 때문이고, 헌 데[路處]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두 가지 과실이 모두 없음을 현시(顯示)하는 것이니, 이 정(定) 또한 그러하다. 그 마음이 청정(淸淨)하고 선백(鮮白)하고 두루[周遍]하여 일체의 산동(散動)으로 능히 침범되지 않는 것이며, 추위와 더위 내지 다른 사람의 질타하는 악언(惡言)과 내신(內身)의 갖가지 고수(苦受)를 감인(堪忍)하는 것이다.
  또한 다섯 번째 비유에도 차별(差別)이 있으니, 관찰되는 상[所觀相]에 대해서 은근하고 매우 정성스럽게 하는 등이 있으며, 이미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은 줄 알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자세하게 3세(世)의 제 행(行)을 관찰하고, 능히 관찰한 것에 대해서 또 다시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가운데에 총의(總義)이다.
  무엇 등을 성삼마지(聖三摩地)라고 이름하며, 어떻게 5지(支)의 차별을 건립하는가?
  말하자면 4정려(靜慮) 가운데 갖고 있는 성현(聖賢)의 심일경성(心一境性)과 안립(安立)에 서 심제(審諦)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성삼마지(聖三摩地)라고 이름한다. 네 가지의 현법락주(現法樂住)에 의지하여 4지(支)를 건립하니, 자세하게 연기법(緣起法)을 관찰하는 데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밖의 결(結) 박(縛)을 끊어서 제거하기 위해서 다섯 번째 것을 건립한다. 이 두 가지 인연에 의해서 5지(支)를 건립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다음에76) 무엇을 유인유구(有因有具)77)의 성정삼마지(聖正三摩地)라고
  
76) 이하는 열 가지 부분의 삼마지(三摩地)의 내용 중에 아홉 번째로 유인유구(有因有具)의 성정삼마지(聖正三摩地)를 해석한다.
77) 유인(有因)이란 정(定)의 인(因)을 말하고, 유구(有具)란 정(定)의 자구(資具)를 말한다.
[382 / 829] 쪽
  하는가?
  선(善)이기 때문에, 무루(無漏)이기 때문에 설하여 성(聖)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이 정(定)의 인(因)이라고 이름하는 5도지(道支)가 있으니, 소위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이다. 함께하는[具] 세 가지가 있으니, 소위 정견(正見)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이다. 이 가운데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앞의 7도지(道支)는 모두 성정삼마지(聖正三摩地)에 인(因)이 되고 함께하는 것[具]이 된다고 종합적으로 설하셨으니,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차별(差別)을 알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앞에서 이끌어 주는 순서[前導次第]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다섯 가지를 세워 인(因)이라고 하는 것이며, 삼마지(三摩地)에서는 도움[資助]의 뜻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를 세워 함께 한다[具]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정견(正見) 등에 전도차제(前導次第)의 뜻이 있는가?
  말하자면 세간에 실로 진아라한(眞阿羅漢)이 있어서 정행(正行) 정지(正至)한다고 먼저 분명히 알고서 곧 출리(出離)에 대해서 깊이 욕락(欲樂)을 내어 정견(正見)을 획득한다. 다음으로 다시 '집에 살면서 압박[迫 ]에서 벗어나게[出離] 될까? 내지 …… '라고 사유하고, 이로부터 출가하여 시라(尸羅)를 수학(受學)하고 정명(淨命)을 닦아 대치하니, 이를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이라고 이름한다. 이 정견(正見) 등으로 대치되어야 할 사견(邪見) 등의 다섯 가지에 대해서 아직 끊지 못한터라 다시 곧 이 다섯 가지의 선법(善法)에 의지하여 다른 이로부터 법음[音]을 듣고 전전(展轉)하여 문혜(聞慧)와 정견(正見)을 일으키며, 소치법(所治法)을 끊어 제거하기 위해서, 또한 도(道)의 자량(資糧)을 수습(修習)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관찰하고, 다음으로 문혜(聞慧)에 의해서 사혜(思慧)를 일으키고, 다시 사혜(思慧)에 의해서 수혜(修慧)를 일으킨다.
  이러한 정견(正見)에 의해서 제 사견(邪見)에 대해서 여실(如實)하게 '이는 사견(邪見)이다'고 훤히 알고, 제 정견(正見)에 대해서 여실(如實)하게 '이는 정견(正見)이다'고 훤히 알며, 내지 정명(正命)에 이르기까지 여실하게
 
[383 / 829] 쪽
  훤히 안다. 여실하게 알고 나서 사견(邪見) 등을 끊어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견(正見) 등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근정진(勤精進)을 일으킨다.
  만약 이것에 의해서 능히 소치(所治)를 끊으면 능치법(能治法)을 모아서 그것으로 하여금 원만히 하니, 이를 정념(正念)이라고 이름한다. 이 염(念)은 곧 삼마지(三摩地)의 부분이기 때문에 또한 겸하여 정삼마지(正三摩地)라고 설하는 것이다. 만약 이 때에 사견(邪見) 등을 버려서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하고 정견(正見) 등을 닦아서 원만하게 되면, 곧 이와 같은 방편도(方便道)에서도 능히 삿된 정진(精進)과 염(念)을 버리고 겸하여 능히 정정진(正精進)과 정념(正念)을 만족히 닦는다. 만약 이 때에 그 제 법(法)에 대해서 능히 끊고 능히 원만히 하면, 곧 이 때에 성정삼마지(聖正三摩地) 또한 원만하게 된다. 이 가운데 혜(慧)를 도수(導首)78)로 삼기 때문에 증상계(增上戒)에서도 먼저 스스로 안처(安處)하며, 다음으로 다른 이의 법음을 듣고 이치에 맞는 작의[如理作意]와 증상계학(增上戒學)의 두 가지를 의지로 삼아서 방편도(方便道)에서 증상심학(增上心學)과 증상혜학(增上慧學)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정념(正念)을 증상심학(增上心學)이라 이름하며, 정견(正見)과 정정진(正精進)을 증상혜학(增上慧學)이라고 이름하는데, 이와 같은 3학(學)은 성정삼마지(聖正三摩地)를 닦을 때에 모두 원만하게 된다.
  다음에79) 무엇을 금강유삼마지(金剛喩三摩地)80)라고 하는가?
  맨마지막 끝에 배우는 삼마지(三摩地)를 말한다. 이 삼마지(三摩地)는 최고로 제일(第一)이기 때문에, 최고로 존귀하고 뛰어나기[尊勝] 때문에, 극히 견고[堅牢]하기 때문에, 그 위[上]에 능히 최복(摧伏)할 만한 번뇌가 없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번뇌를 최복(摧伏)하기 때문에, 이 때문에 이 정(定)을 금강유(金剛喩)라고 이름한다. 비유하자면 금강(金剛)의 그 성품은 견고하여 여러 마니(末尼) 등으로 뚫어서 부술 수 없고 모든 마니보(末尼寶) 등으로 뚫
  
78) 앞에서 이끌어 주는 선봉장을 의미한다.
79) 이하는 열 가지 부분의 삼마지(三摩地)의 내용 중에 열 번째로 금강유삼마지(金剛喩三摩地)를 해석한다.
80) 보살 제 10지(地)의 무간도(無間道)에 있는 삼마지(三摩地)이다.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10(15右)을 참조하라.
[384 / 829] 쪽
  어서 부술 수 없는 것과 같듯이, 이 정(定)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금강(金剛)이라고 비유[喩]하는 것이다.
  다음에81) 무엇을 5현견삼마발저(現見三摩鉢底)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필추(苾芻)들이 이 몸 등에 대해서 …… "라고 하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경(經)에서와 같다. '이미 진리를 보았다[見諦]'란 이 등지(等至)를 닦는 것이니, 이 때문에 현견등지(現見等至)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 수도소단(修道所斷)의 번뇌(煩惱)를 제복(制伏)하여 대치(對治)하며, 단멸(斷滅)을 대치(對治)하며, 그리고 관찰단(觀察斷)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총(總) 약(略)의 체성(體性)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처음의 부정관(不淨觀)은 방편염주(方便念住)로써 의지로 삼아서 욕탐(欲貪)을 현행(現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신(內身)의 갖가지 부정(不淨)을 관찰하며, 두 번째의 부정관(不淨觀)은 곧 그 염주(念住)로써 의지로 삼아서 내지 골인상(骨人相)을 관찰하고 그것의 탐(貪)을 현행(現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몸의 갖가지 부정(不淨)을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를 모두 일체(一切)의 부정(不淨)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이름함을 알아야만 한다. '가장 마지막으로 통달하는 것[最極通達]'이란 청어(靑瘀) 등을 관(觀)하여 품류(品類)의 차례를 극도로 뛰어넘는다[逾越]는 의미[義]이다. 처음의 부정관(不淨觀)에서 내신(內身)의 현전(現前)에 안주(安住)하는 갖가지 부정(不淨)을 관찰하고, 그 다음의 부정관(不淨觀)은 법성(法性)을 통달하여 이 몸도 이와 같은 법(法)이 있고 이와 같은 성(性)이 있다고 관찰하며, 내지 …… 하는 것이다.
  '식의 유전을 관하는 것[觀識流轉]'이란82) 생멸상속(生滅相續)하는 식(識)
  
81) 제 경(經)의 종요(宗要)를 밝히는 내용 가운데에 첫 번째의 섭종요(攝宗要) 중 그 세 번째의 등지(等至)는 네 가지로 나뉘어서 해석되는데, 즉 첫째는 5현견삼마발저(現見三摩鉢底)에 대해서 해석하고, 둘째는 승처(勝處)와 변처(遍處)에 대해서 거론하고, 셋째는 무상등지(無想等至)에 대해서 해석하고, 넷째는 멸진정(滅盡定)에 대해서 해석한다. 이하는 그 첫 번째로 5현견삼마발저(現見三摩鉢底)를 해석한다.
82) 이하는 관찰단(觀察斷), 즉 뒤의 3현견(現見)을 해석한다. 뒤의 3현견(現見)은 모두 골신관(骨身觀)이다. 유학(有學)의 끝의 이욕(;初二果)과 이이욕(已離欲;不還果)와 아라한(阿羅漢)에 의해서 셋을 구별한다.
[385 / 829] 쪽
  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전전상속(展轉相續)하는 생신(生身)을 관찰하는 것이니, 행(行)을 연(緣)하는 식(識) 등을 대충[麤]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는 찰나(刹那)로 전전상속(展轉相續)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즉 유탐심(有貪心)과 이탐심(離貪心)의 품류(品類)의 차별이 있어서 세월이 흐름[荏苒]으로써 이러 저러한 낮밤[日夜] 찰나(刹那) 납박(臘縛) 모호율다(牟呼栗多)를 지나면서 그 중간에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의 종종(種種)의 심식(心識)이 다르게 생겨서 다르게 멸(滅)한다는 것을 세밀히[細]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아직 욕을 여의지 못한 유학자[有學未離欲者]83)는 2세(世) 모두에 머무르며, 이미 욕을 떠난 자[已離欲者]는 타세(他世) 만에 머무르며, 아라한과(阿羅漢果)는 모두 머무는 바가 없다고 관찰하니, 이와 같은 것을 관찰(觀察)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단(斷)의 승처등지(勝處等至)와 변처등지(遍處等至)에 대해서는84) 앞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85)
  다음에86) 무엇을 무상삼마발저(無想三摩鉢底)라고 하는가?
  변정(遍淨)의 욕(欲)을 여의었으나 아직은 상욕(上欲)을 여의지 못한 것이니, 출리를 구하려는 상작의[求出離想作意]를 우선으로 하여 제 심(心) 심법(心法)을 멸(滅)하는 것이다.
   어떤 방편(方便)으로 이 등지(等至)에 들어가는가?
   상(想)은 병(病)과 같고 종기[癰]와 같으며 화살[箭]과 같다고 관(觀)하는 것이다. 제 4정려(靜慮)에 들어가서 상을 등지는 작의[背想作意]를 닦고, 갖가지 상(想)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싫어하여 등져서[厭背] 머무르며, 오직 무상(無想)만이 적정미묘(寂靜微妙)하다고 말하며 무상(無想)에 대해서 마음을 지키며 머무른다. 이와 같이 점차로 제 소연(所緣)을 여의면 마음이 곧바로 적멸(寂滅)한다. 이것이 생겨나는 것에도 또한 들어감[入]이 있고, 또
  
83) 아직 욕(欲)을 여의지 못한 유학자(有學者)의 식(識)을 의미한다.
84) 등지(等至)는 네 가지로 나뉘어서 해석되는데 이하는 그 두 번째로 승처(勝處)와 변처(遍處)에 대해서 거론한다.
85) 본권(本卷) 앞의 8해탈(解脫) 중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86) 등지(等至)는 네 가지로 나뉘어서 해석되는데 이하는 그 세 번째로 무상등지(無想等至)에 대해서 거론한다.
[386 / 829] 쪽
  한 일어남[起]이 있다. 만약 거기에 태어나면87) 오직 들어가고 일어나지 않으며, 그 상(想)이 생기면 곧 그곳88)으로부터 사라진다.
  다음에89) 무엇을 멸진삼마발저(滅盡三摩鉢底)라고 하는가?
  이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욕(欲)을 여의고 잠시 안주하는 상작의[暫安住想作意]를 우선[先]으로 하여 제 심(心)과 심법(心法)을 멸(滅)하는 것이다.
   어떤 방편(方便)으로써 이 등지(等至)에 들어가는가?
   만약 제 성자(聖者)가 이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욕(欲)을 여의었다면 어떤 경우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상(相)에 의지하여 정(定)에 들어가고, 어떤 경우는 멸진(滅盡)의 상(相)에 의지하여 정(定)에 들어간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상(相)에 의지하여 정(定)에 들어가는 것은 이 이상의 마음에 대해서 깊게 염사(厭捨)를 내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로 나아가려는[進趣] 소연(所緣)을 모두 멸진(滅盡)하기 때문에 마음이 곧바로 적멸(寂滅)하는 것이다. 적멸(寂滅)의 상(相)에 의지하여 정(定)에 들어가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장차 멸진정(滅盡定)으로 취입(趣入)하려고 할 때에 많은 소작(所作)이 있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말한다.
  무엇을 사마타(奢摩他)라고 하고, 무엇을 비발사나(毘鉢舍那)라고 하며, 어떻게 이 두 가지에는 많은 소작(所作)이 있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이 뜻 가운데에 8차제정(次第定)을 사마타(奢摩他)라고 이름하며, 모든 성혜(聖慧)를 비발사나(毘鉢舍那)라고 이름한다. 이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따라서 빼먹으면 곧 멸진등지(滅盡等至)로 들어갈 수 없으며, 반드시 이 두 가지를 다 갖춰야 드디어 취입(趣入)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두 가지에 많은 소작(所作)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87)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면 500대겁(大劫)간의 무심과(無心果)를 받으며, 만약 상(想)이 생기면 곧 죽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7권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88) 무상천(無想天)을 말한다.
89) 등지(等至)는 네 가지로 나뉘어서 해석되는데 이하는 그 네 번째로 멸정(滅定)에 대해서 거론한다.
[387 / 829] 쪽
   멸진정[滅定]에 들어갈 때에 어떻게 순서[次第]대로 세 가지의 행(行)90)을 멸한다고 하는가?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행시(行時)91)와 주시(住時)92)를 말한다. 만약 행시(行時)의 경우에서는 또한 언설(言說)을 일으키며, 초정려(初靜慮)에서는 어행(語行)이 있기 때문에 이 작용이 있다. 만약 주시(住時)의 경우에서는 제 2정려(靜慮) 이상의 순서대로 정력(定力)에 따라서 그 세 가지 행(行)이 차례로 멸(滅)한다.93) 출시(出時)는 반대의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멸진정(滅盡定)에서는 제 심(心)과 심법(心法)이 나란히 모두 멸진(滅盡)하는데 어떻게 식(識)은 신(身)을 여의지 않는다고 설하는가?
   제 색근(色根)을 변계(遍計)하지 않는 가운데에서 능히 전식(轉識)의 종자(種子)를 집지(執持)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어서 멸진(滅盡)하지 않기 때문에 후시(後時)에 이 법(法)은 이것으로부터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멸진정[滅定]에 들어갈 때에는 '나는 정(定)에 들어가겠다', '나는 정(定)에서 나오겠다'라고 하는 분별(分別)이 있지 않으니, 곧바로 정(定)에 있을 때에는 마음이 적멸(寂滅)하기 때문에 가행(加行)을 원리(遠離)하며, 장차 정(定)에서 나오려고 할 때에는 마음이 먼저 멸(滅)하기 때문에 작의(作意)가 없는데 어떻게 능히 들어가고 어떻게 능히 나올 수 있는가?
   앞서 그 마음을 잘 수습(修習)했기 때문이다. 만약 제 행(行)과 제 상(狀)과 제 상(相)이 있다면 정(定)에 들어갈 수 있고 정(定)에서 나올 수 있다.
  
90) 이 때의 행(行)은 인(因)의 뜻이며, 세 가지란 신(身) 어(語) 심(心)을 일으키는 인(因)을 말한다.
91) 초정려(初靜慮)에서는 안(眼) 이(耳) 신(身) 의(意)의 4식(識)이 있어서 외경(外境)을 연(緣)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문밖을 걸어 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갈 때[行時]라고 하는 것이다.
92) 제 2정려 이상은 마음이 외경(外境)을 연(緣)하지 않는다. 마치 사람이 집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머무를 때[住時]라고 하는 것이다.
93) 제 2정려(靜慮)에서는 어행(語行) 즉 심(尋) 사(伺)를 멸하고, 제 4정려(靜慮)에서는 신행(身行) 즉 출입식(出入息)을 멸하고, 멸진정(滅盡定)에서는 심행(心行) 즉 수(受) 상(想) 사(思)를 멸한다.
[388 / 829] 쪽
  그것에 대해서 수습하고 매우 많이 수습하며 수습하였기 때문에 자유자재[任運]로 들어갈 수 있으며, 자유자재[任運]로 나올 수 있다.
  어떻게 멸진정에서 나올 때에 첫째 부동촉(不動觸), 둘째 무소유촉(無所有觸), 셋째 무상촉(無相觸)의 세 가지 촉(觸)을 접촉하는가?
  말하자면 정(定)에서 나올 때는 대부분 3경(境)에 의해서 정(定)으로부터 나오니, 첫째는 유경(有境)94)에 의하고, 둘째는 경경(境境)95)에 의하고, 셋째는 멸경(滅境)96)에 의한다. 이 3경(境)에 의해서 정(定)에서 나올 때에는 그 차례대로 세 가지 촉(觸)을 접촉한다.
  유경(有境)을 연(緣)하여 정(定)에서 나올 때에는 아만(我慢)이 그 마음을 요동(擾動)하여 '이것은 나다'고 말하면서 아만(我慢)을 일으키지 않으며, 혹은 '미래에 나는 있을 것이다'고 계탁함이 없으니, 내지 ……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동촉(不動觸)을 접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경(境境)을 연(緣)하여 정(定)에서 나올 때에는 탐(貪)의 소유(所有)가 없고, 진(瞋)의 소유(所有)도 없으며, 치(癡)의 소유(所有)도 없다. 이 때문에 무소유촉(無所有觸)에 접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멸경(滅境)을 연(緣)하여 정(定)에서 나올 때에는 일체의 상(相)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계(無相界)를 연(緣)한다. 이 때문에 무상촉(無相觸)을 접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이미 정려(靜慮) 해탈(解脫) 등지(等持) 등지(等至)를 설하였다.
  
94) 내신(內身)을 말한다. 내신(內身)을 연(緣)하여 무아(無我)의 행(行)을 지어서 멸진정(滅盡定)으로부터 나오므로 아만(我慢) 등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다.
95) 밖의 6진(塵)을 말한다.
96) 무상(無相)의 도리[理]를 말한다.
 

'經典 >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가사지론 제 14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13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11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10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9 권  (0) 2007.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