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릉록(宛陵錄)

7. 모든 견해를 여읨이 무변신보살

通達無我法者 2008. 2. 18. 20:46
 

7. 모든 견해를 여읨이 무변신보살


“무변신보살(無邊身菩薩)1)은 왜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합니까?”

“실로 볼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무변신보살이란 곧 여래이기 때문에 응당 보지 못한다.

다만 너희에게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부처라는 변견(邊見)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중생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중생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있다[有]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있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없다[無]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없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범부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범부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나아가 성인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성인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만 모든 견해만 없으면 그대로가 곧 가이 없는 몸[無邊身]이니라.

그러나 무엇인가 보는 곳이 있으면 곧 외도라고 부른다.

외도란 모든 견해를 즐기고 보살은 모든 견해에 있어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여래란 곧 모든 법에 여여(如如)한 뜻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미륵도 또한 그러하고 모든 성현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여여하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다.

여래의 정수리는 두렷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두렷이 보는 것도 없으므로,

두렷하다는 변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 몸은 하염 없으신 것이다.

숫자로써 헤아리는 범주에 속하지도 않지만, 다만 방편으로 허공에 비유할 뿐이니라.    

 ‘원만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며’ 한가로이 일삼을 것이 없다.

 

다른 경계를 억지로 끌어들여 설명하려 하지 말 것이니, 설명하려 들면 벌써 식[識]이 이뤄지고 만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식의 바다에 잠겨서 나부끼는 쑥대처럼 흘러 도네’라고 하였다.

그저 말하기를 ‘나는 알았으며 배워서 얻었으며, 깨달았으며, 해탈하였으며, 도의 이치를 얻었노라’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강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지만 약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질 않는다면 이런 견해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내 너에게 말하노니, 한가하여 스스로 일 없도록 하여 쓸데없이 마음을 쓰지 말라.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나니, 오직 모든 견해를 쉴지니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봄[內見]과 밖으로 봄[外見]이 모두 잘못이며 부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나쁜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문수보살이 잠깐 두 견해를 일으켰다가 그만 두 철위산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문수보살은 참된 지혜의 상징이고 보현보살은 방편적인 지혜의 상징이다.

방편과 참됨이 서로서로 작용을 하여 끝내는 방편과 참됨 그것마저도 사라지고 오로지 한 마음뿐인 것이다.

마음은 결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닌데, 부처의 견해를 갖기만 하면 바로 중생의 견해를 내게 되느니라. 있다는 견해[有見], 없다는 견해[無見],

영원불변하다는 견해[常見], 단멸한다는 견해[斷見]가 바로 두 철위산 지옥을 이룬다.

이처럼 견해와 장애를 받기 때문에 역대의 조사들께서 일체 중생의 본래 몸과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바로 가리키신 것이다.

이것은 닦아서 되는것도 아니고 점차적인 단계를 밟아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밝음이나 어두움에 속하지도 않아서, 밝음이 아니기 때문에 밝음도 없으며 어둠이 아니기 때문에 어두움도 없다.

그러므로 밝음 없음[無明]도 없으며 또한 밝음 없음이 다함[無明盡]도 없다.

우리이 선가의 종문에 들어와서는 누구든지 뜻을 간절하게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것을 이름하여 법이라 하고 법을 보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며,

부처와 법이 모두 함께 없는 것을 승(僧)이라 부르며,

하릴없는 중이라 부르며, 또한 한몸의 삼보[一体三宝]라 하느니라.

 

대저 법을 구하는 이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아서 마땅히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하느니라.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랄 것도 없으며,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이랄 것도 없으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승(僧)이랄 것도 없느니라.”


問 無邊身菩薩 爲什麽不見如來頂相

師云 實無可見 何以故 無邊身菩薩 便是如來 不應更見 祇敎你 不作佛見 不落佛邊 不作衆生見 不落衆生邊 不作有見 不落有邊 不作無見 不落無邊 不作凡見 不落凡邊 不作聖見 不落聖邊 但無諸見 卽是無邊身 若有見處 卽名外道 外道者 樂於諸見 菩薩 於諸見而不動 如來者 卽諸法如義 所以云 <彌勒 亦如也 衆聖賢 亦如也> 如卽無生 如卽無滅 如卽無見 如卽無聞 如來頂 卽是圓見 亦無圓見故 不落圓邊 所以 佛身 無爲 不墮諸數 權以虛空 爲喩 圓同太虛 無欠無餘 等閑無事 莫强辯他境 辯着 便成識 所以云 <圓成沈識海 流轉若飄蓬> 祇道 <我知也 學得也 契悟也 解脫也 有道理也> 强處 卽如意 弱處 卽不如意 似者箇見解 有什麽用處 我向汝道 等閑無事 莫謾用心 不用求眞 唯須息見 所以 內見外見 俱錯 佛道魔道俱惡 所以 文殊 暫起二見 貶向二鐵圍山 文殊 卽實智 普賢 卽權智 權實 相對治 究竟 亦無權實 唯是一心 心且不佛不衆生 無有異見 纔有佛見 便作衆生見 有見無見常見斷見 便成二鐵圍山 被見障故 祖師 直指一切衆生 本心本體 本來是佛 不假修成 不屬漸次 不是明暗 不是明故 無明 不是暗故 無暗 所以 無無明 亦無無明盡 入我此宗門 切須在意 如此見得 名之爲法 見法故 名之爲佛 佛法俱無 名之爲僧 喚作無爲僧 亦名一體三寶 夫求法者 不着佛求 不着法求 不着衆求 應無所求 不着佛求故 無佛 不着法求故 無法 不着衆求故 無僧

 

1) 무변신보살 : <열반경> 제1 서품의 모임에 참여한 보살.


'완릉록(宛陵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9. 한 물건도 없음[無一物]  (0) 2008.02.18
8. 한 법도 얻을 수 없다  (0) 2008.02.18
6. 한 마음의 법  (0) 2008.02.18
5. 모양 있는 것은 허망하다  (0) 2008.02.18
4. 마음과 성품이 다르지 않다  (0) 2008.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