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야화(山房夜話)

산방야화(山房夜話). 1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21:53

 

 

산방야화(山房夜話). 1

 

 

胎息法과 달마스님의 禪은 동일합니까?

 

내가 깊은 산속에 살고 있을 때에 흘연히 어떤 객승이 문앞을 지나다가,

내 방에 들어와 서로 토론을 하게 되었다.

이날 따라 산월(山月)이 휘영청 밝고, 창문이 대낮처럼 훤했다.

 

이 때에 객승이 내게 물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읍니다.

義學들이 6바라밀의 하나인 禪定의 '禪'과 달마스님께서 단독으로 후세에 전한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을 동일한 것이라 합니다.

 

즉 달마스님께서는 일찌기 胎息論이라교 하는 수행법을 제자들에게 전수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제8식이 胞胎에 머물 때에는 오직 한 호흡에만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胎息이라고 한다'는 학설을 자세하게 인용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禪定도 한 호흡에 의지하여 안주하니,

이런 점에서 胎息法과 서로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참선한다는 사람들이 드디어는 그 학설을 아주 복잡하게 하여,

달마스님의 禪과는 다르게 2승의 선정〔二乘禪定〕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던데요.

스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나는 대답했다.
"이것은 비방하는 말입니다.

달마스님이 전한 선〔直指之禪〕을 모르는 것입니다.

四禪八定 밖에는 달리 어떤 禪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달마스님이 멀리 인도땅으로부터 二十祖를 계승하여

'부처님의 가장 핵심되는 가르침이 바로 禪이다'

고 한 말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달마스님이  전하신 禪을 지칭하는 이름은 매우 많습니다.

어떤 때에는 最上乘禪이라고도 하고 혹은 第一義禪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二乘外道의 四禪八定과는 실로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합니다.

 

달마스님의 禪은 여러 경전에서 주장하는것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漸修하여 깨달은 내용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경험으로 이해한 것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그 밖의 어떠한 방편으로도 달마의 禪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敎外別傳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근기가 뛰어난 중생만이 깨달음의 싹〔佛種〕을 문득 틔워서,

단계를 거치지 않고 하나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 근본자리〔總持〕를 체득합니다.

 

이런 다음부터는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잠자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일에 뛰어들어 종횡무진하게 인생살이〔常情〕를 말하기도 합니다.

말과 행동 [語默卷舒]에 고정된 형식을 두지 않는데,

어찌 이른바 禪定이니 胎息法이니 하는 등등의 고정된 형식을 주장했겠읍니까!  

 

대체로 달마스님은 상징에 불과한 文字를 매개로 하지 않고 사람의 본심을 바로 가리켰던 것입니다.

 이 때로부터 여섯 대를 거쳐 六祖慧能스님께 전해졌읍니다.

혜능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바로 사람의 본성을 가리켰다 [直指人心]고 말하더라도 이것은 잘못이다' 라고 했읍니다.

그러니 따로 싱징에 불과한 언어나 문자 로써 전해줄 그 무엇이 있겠옵니까 !

 

요즈음 항간에는 胎息論이 유행한다고 하는데,  

이는 어느 망령된 무리들이 달마스님을 모함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참으로 애석한 현상입니다.

 

더구나 胎息論이  퍼진 뒤로부터 달마스님의 본 뜻을 속이려는 무리들은

그 학설을 좇아서 서로를 그릇되게 만들었읍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달마 스님을 속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속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팽생 동안 설법하신 내용은,

실로 중생들이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 속아 허망하게 자신을 속박하여 끝내는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꼴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법[心法]을 보여,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도리어 그 마음의 법[心法]때문에 스스로를 속인다면,

어떤 말을 듣더라도 속아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敎外別傳의 참뜻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禪을 敎外別傳이라 부르는데, 정말 따로 전할 만한 이치가 있는지요?

義學들이 이 점에 대해서 이론을 복잡하게 하여 결론을 얻지 못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나는 대답했다 .
"義學들이 개념과 구조를 분석하는 데에만 노력을 하지,

그렇게 분석을 하는 이유를 모르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렇게 분석하는 이유를 철저하게 알기만 하면

'달리 무엇을 전한다〔別傳〕'라는 얘기는 우스운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네 종파가 모두 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함께 전했으므로,

어느 한 종파도 빠뜨려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같은 내용을 말씀하셨읍니다.

「法華經」에서 말씀하시기를'오직 一佛乘일 뿐 二乘도 三乘도 없다'라고 하셨는데,

네 종파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읍니까 !

 

굳이 네 종파로 나눈 이유는 각각의 전문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임의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따로 一乘佛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4계절이 모여서 一年이 되므로,

개념적으로는 분명하게 춘.하.추.동으로 구별할 수 있읍니다.

그러면서도 구별지을 수 없는 것은 만물을 기르는 공덕의 근원인 것과 같습니다.

 

密宗은 봄에 해당하고, 

天台. 賢首. 慈恩 등의 敎宗은 여름에 해당하고,

남산 律宗은 가을에 해당하고,

달마스님의 禪은 겨울에 해당합니다.

 

이치상으로 따져보면 禪宗이 다른 敎宗의 別傳인 줄만 알고,

그 반대로 교종이 선종의 별전인 줄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있읍니다.

 

요약해서 말해 보겠읍니다.

밀종은 부처님께서 큰 자비로써 중생을 제도하시는 마음을 선양했으며,

교종은 부처님께서 큰 지혜로써 중생들의 불성을 開示悟入하는 데에 공을 세웠으며,

율종은 부처님께서 단아하고 엄숙한 몸가짐으로써 훌륭한 실천의 표본을 선양한 것입니다.

 끝으로 선종은 부처님께서 깨우치신 뚜렷한 마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4계절을 혼동해서는 안되는 것과 흡사합니다.

 

혼동해서는 안된다면 따로 전한 것[別傳]이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객승은 또 이렇게 질문을 했다.
"선종을 제외한 세 종파에서는 別傳을 말하지 않는데,

오직 선종에서만 유난히 별전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읍니다.

모든 종파에서는 다 깨달음에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으며, 배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그러나 선종만은 안으로는 사량분별을 용납하지 않고,

밖으로도 배움과 점진적인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족하거나 모자람이 없이 탕탕합니다.

마음속으로 비교하고 요리조리 따지면 벌써 잘못된 길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설사 몸 전체로 깨닫는다 해도 도리어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별전 속에서 또 다른 별전을 찾는 격입니다.

이것은 그림을 보고 좋은 말(馬)을 찾으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선의 근본을 알겠습니까!

그러니 禪에 敎外別傳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놀라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永嘉스님의 선과 달마스님의 선은 동일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영가(永嘉: 665∼713)스님은  

'마음을 惺惺寂寂하게 하는 참선을 하도록 해야지,

잡다한 생각에 혼미하게 머무는 것은 참선하는 이들의 큰 병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영가스님의 이 말씀은 달마스님이 전한 禪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永嘉集]에서 十篇의 大指로써 漸修하여 깨닫는다는 말들은,

거의가 止觀法門의 방법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처음은 思念을 쉬어 六塵을 쉬는 것이며,

다음은 대상(境)과 인식작용(智)을 모두 고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로 모아놓은 觀心十門은 아주 玄妙하여 無生法忍을 깊이 통달할 수 있도록 했읍니다.

 

그러나 달마스님은 사람들에게 오직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취하게 했을 뿐입니다.

마음이 밝아지기만 하면,

마치 주인이 자기 집에 돌아와 마음대로 활동하듯이,

복잡하게 여러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언어와 문자를 장황하게 늘어 놓지 않은 것은 모두 적절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마스님이 제자 神光스님을 가르칠 때에,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임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올바른 방법을 찾은 것이니라'

라고 했을 뿐,  

그 밖에 다른 말을 하셨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읍니다.

 

정말로 진실하게 마음속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漸修하여 수행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소리는,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과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과오를 어찌 영가스님만이 범했겠습니까!

천태스님의 三觀과,

현수스님의 華嚴四法界觀도,

이 마음의 이치를 언어적인 이론으로써 자세하게 풀어 놓았습니다.

 

비록 과거의 부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시더라도,

이 두 스님들 보다 마음의 법을 이론적으로 자세히 밝혀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달마스님과 다른 점은 대체로 언어적인 이론을 사용했느냐 안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즉 [圓覺經]에서 三觀으로써 서로 분류하여 二十五輪」을 삼은 경우와 같고,

[楞嚴經]에서 十八界와 七大性證으로써 二十五圓通을 삼은 경우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어찌 이 두 경전에만 나왔겠읍니까!  

다른 경전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경전에서 늘어놓은,

닦아서 증득하는 방편[修證法門]을 다 섭렵했다 하더라도,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과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편 복잡 하게 언어적인 이론을 늘어놓으면,

敎外別傳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달마스님의 선과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른가요?"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가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에 대해서 같다는 생각도 할 수 없거늘,

어찌 다르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읍니까!

 

당신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總持 자체는 문자가 아니나, 문자로써 총지를 밝혀낸다'라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총지 자체는 문자가 아니라는 입장이,

바로 달마스님외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입니다.

 

반면에 문자를 이용하여 총지를 밝힌다는 입장이 여러 교종의 이론들인 것입니다.  

또한 달마스님의 가르침이 교종과 다른 이유는,

특이한 것을 좋아하고 주관적인 자기집착에 빠져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靈山會上에서 최후로 大迦葉에게만 유일하게 전해주신 心法을

달마스님이 그대로 계승하신 것 입니다.

 

그러나 대가섭에게 유일하게 전해주신 가르침은 물론 대가섭만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함께 소유한 신령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자비심을 내어 중생들을 제도하실 때에,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 알맞게 하신 것입니다.

이른바 大小, 偏圓, 同異, 顯密의 방편을 쓰신 것입니다."

교종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달마스님의 선은 다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이런 말들이 있읍니다.

'교종의 여러가지 言說과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法門]은 서로 같다'라고 합니다.

즉 華嚴經에서 말한,

'일체법이 그대로 마음 속에 있는 自性임을 알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 밖에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구하지 말라'

라고 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또 법화경에서 말한,

'이 법은 사량분별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한 경우와,

 

金剛經에서 말한,

'모습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와,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것이 없다'

라고 한 것도 그 증거입니다.

 

또한 圓覺經에서 말한,

이것이 空華인 줄 알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며,

또 몸과 마음도 생사의 윤회를 받지 않는다고 한 경우와,

楞嚴經에서 말한,

'六根과 六塵이 같은 근원이므로 속박과 해탈이 둘이 아니다'

라고 한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밖에도 여러 경전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는 수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法門)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敎와 禪의 뜻이 같은 줄을 알게 되었읍니까?"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문자를 사용하여서 總持를 밝힌 것이라고

진실로 자기 마음 깊이 한번이라도 깨달아보지 못하면,

부질없이 藥만을 늘어 놓을 뿐 병을 고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 한 번이라도 본성에 계합하여 증오한 자라면

어찌 대승경론의 귀절들만이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法門)과 일치한다고 주장하겠습니까!

대승경론은 말할 것도 없고

하찮은 이론과 바람소리,

빗방울소리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달마스님이 전한,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法門)과 상통합니다.

 

러나 만약  언어와 형상을 떠난 상태에서 자기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

다만 대승경론의 서로 그럴듯한 말만을 기억해 둔다면 절대로 깨달을 수 없읍니다.

옛사람들이 말씀한

'마음밖의 것에 의지하여 깨달으려 한다면 스스로가 깨닫는 길을 막는 꼴이 된다' 라고 한 것과,

또 '금가루가 눈에 들어간 것처럼 그 자체로는 값 나가고 보배로울지 모르지만,

눈에는 이로울 것이 없다'

와 같은 비유가 꼭들어 맞습니다.

참선하는 납자들은 이 점을 마음에 깊이 새겨서 스스로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어찌 경전을 통한 가르침만이 유독히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과 일치하겠읍니까? 보통 禪을 한다는 부류들 속에서도 그런 예는 많이 있습니다.

즉 二祖 慧可 스님의 安心과

三祖 僧璨 스님의 懺罪와

南嶽스님의 기왓장 갈기[磨전]와,

靑原스님의 垂足으로부터

秘魔스님의 나무집게[擎叉]와

雪峰스님의 공 굴리기[곤迷]와

德山스님의 매질[棒]과

임제스님의 할(喝)에 이르기까지,

1,700공안은 물론 모든 機緣을 不立文字敎外別傳의 입장에서 모두 비판했읍니다.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대로 깨닫는데 어떤 것이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만일 육신의 굴레를 탁 벗어나지 못하고,

알음알이[情意識]를 가지고 깨달으려 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마치 '기름이 국수그릇에 들어간 것과 같으며 온갖 독이 심장에 들어간 것 같다'는 비유와,

'제호(醍호)의 최고 가는 맛은 세상의 제일이지만,

이런 사람에게는 도리어 독약이 된다'

는 비유와 같은 경우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法門]에는 마음을 이용하여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생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 자리는 발들여 놓을 틈도 없고, 손에 닿지도 않는 곳입니다.

 

이 자리는 친히 자신의 본성을 향하여 미끄러지듯 한걸음에 성큼 밑바닥까지 쑥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 들어가기만 하면,

침 뱉으며 팔 흔드는 등의 하찮은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위가 대상에 관계없이 저절로 마음속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사자가 친구를 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말한 1,700공안이,

마치 여우가 흘린 침에 잡다한 독이 들어 있는 것처럼,

쓸데없는 소리인 줄을 알게 됩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바깔 경계에 휘둘리리요.

애석합니다!

때로 총명하다고 자처하는 무리들이 스스로 깨달으려고는 하지 않고,

밤낮으로 잡다한 독구덩이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헛된 짓을 하고 있읍니다.

 

말하자면 向上이니 向下이니, 

全提니 半提니,

最初니 末後니,

正按이니 旁敲니,

照用, 主賓, 縱奪, 死活 등등으로 억지로 쓸데없는 헛된 이론만 늘어 놓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자기 종파의 중요한 핵심이라고 받들어,

후인들을 현혹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선배들의 문장과 이론만을 비판 검토하여 평가하기도 합니다.

즉 어떤 선배의 말씀은

'全提와 向上이기 때문에 결가지는 모두 잘라 버렸다'

라고 평가하기도 하며,

어떤 선배의 말씀은

'신기하고 교묘하여 고금을 통하여 제일이다'

라고 평가하기도 하며,

어떤 선배의 말씀은

'올바른 방법이기는 하나 죽은 선[死禪]이기 때문에 거칠다'

라는 등등으로,

수만 가지로 비교하고 판단을 나름대로 내립니다.

 

그러나 크게 통달한 선배들이라면 심장이 천 갈래 만갈래 찢어지더라도

가슴 속에 한 물건도 남겨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임제(?∼867)스님은 外物을 대할 때에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집어들었지,

애초부터 이리 저리 궁리하여 선택하지는 않았읍니다.

 

그대로 손을 놀리는 것이 우뢰와 번개 같았읍니다.

그러나 어찌 자취나 이유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찾을 수 있었다면 金剛王寶劍이 떠나버린 지가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어찌 사량분별에 얽매여 선사들의 빼어난 峻機을 회롱하고 교묘한 말을 꾸며서

후배들을 부채질하여 유혹할 수 있겠읍니까!

더구나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주장을 떠받들도록 유혹할 수 있겠읍니까!

 

또 선배들이 상대방을 근기에 알맞게 지도할 때에,

그 내용을 추.세(추 細), 顯密, 廣略 등으로 다르게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진실한 마음에서 그런 것이지,

애초부터 조작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입니다.

 

비유하면 마치 커다란 범종과 북이 사람이 두들기는 대로 소리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소리의 대소와 맑거나 흐린 것은 범종이나 북의 성능에 따라 다릅니다.

 

그런데 범종이나 북의 성능이 좋지 못하다고 하여

거기에다 눈꼽만큼이라도 다른 소리를 첨가시키면

그 고유의 음색을 잃고 마는 것과도 같습니다.


요즈음 禪을 한다는 작자들은 그저 큰 책상머리에나 앉아서

이리저리 연구하여 되지도 않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읍니다.

 

그리하여 여러 스님들이 말한 요점을 모으고 간추려서 서로 비교하기도 하고,

혹은 여러 스님들의 잡다한 이야기들을 모아서 이것으로써 얘깃거리를 삼기도 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선을 입으로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다른 사람의 속박을 풀어 주기는 커녕,

끝내는 자신의 진면목을 잃고 나아가자 신의 道眼마저도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잘못 수행하여 놓고도 자기들끼리 서로서로 추종하고 홍상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 밝은 종사들의 큰 기대를 저버립니다.

그런데 어찌 叢林을 세워서 법도를 융성시킬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 세상에 출현하시고 달마스님이 인도 땅에서 오신 목적을 살펴보니,

모두가 사람의 속박을 풀어 주려고 그런 것이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애초부터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도 자기 나름대로 터득한 본래 청정한 경지를 바탕으로

더더욱 허망하게 수많은 이론들에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발을 디딜 곳 마저도 없게 되었습니다.

부모를 다 버리고 출가하여 스승에 의지하여 도를 배우면서도,

출가 이전의 번뇌를 씻어버리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쓸데없는 허다한 이론을 거기에다 첨가하여,

자신의 본심마저도 점점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가엾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선배 스승들이 차마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기연을 토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마치 吹毛劍처럼 저네들의 병든 부분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게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자비심으로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어찌 자신들의 사사로운 명예를 위하여 문호를 준엄하게 높여서

후학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한 일이겠습니까!


대체로 크게 통달한 선배들도 모두가 처음에는 수행의 방법을 확실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이리저리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의심을 풀려고  노력했습니다.

 

흘연히 어려운 話頭에 부딪쳐서 확실히 깨치지 못하면,

마치 따가운 밤송이를 삼킨 듯이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원수를 만난 것처럼 용맹스럽게 정진하기도 했습니다.

 

고민 고민하느라 추위와 더위도 모두 견디고,

잠자고 먹는 일마저도 잊어 버렸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한순간 화두를 놓지 않았으니,

화두를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쉽게 풀어줄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문자나 언어에서 찾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 침현 眞機을 스스로 드러내서 의심덩어리를 모조리 풀어버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각 宗門이 생긴 뒤부터 소위 깨달았다는 사람치고 이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없습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걸음걸이가 겉으로 보면 느려 보이나,

그 힘은 마치 사자가 여러 동물들을 놀라게 하여 도망치게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각 종문에서는 위와 같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수행의 방법을 설명하게 된 것입니다."

영명스님은 왜 여러가지 수행을 말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영명 (永明 : 904∼975)스님은 「宗鏡錄」100권을 저술하고,

대승경론을 광대하게 인용하여 우리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신 선〔直指之禪〕과 일치시켰습니다.

 

비록 그 뜻은 훌륭하다고 하겠지만,

어쩌면 언어에 의존하여 연구하고 義理를 해석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달마스님이 인도 땅에서 중국으로 와서,

바로 가리키는 가르침〔直指之道〕이 여섯 번 전수되어 6조 혜능 스님에게 이르렀습니다.

 

또 6조스님으로부터 아홉번 전수되어 법안(法眼: 885∼958)스님에게 이르렀고,

법안스님으로부터 또 2대(代)가 흘러 영명스님에게 전수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깨달은 조사들이 계속 배출되어 고금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리하여 敎學을 연구하는 三藏학자들도 달마스님이 세운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영명스님께서 자세하게 경전을 연구하고 한데 묶어서 변론해 놓은 것이 바로 「종경록」입니다.

 

「종경록」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그 전개가 자유자재하고,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도의 근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문자를 사용하여 도를 밝혀 놓은 總持門인 것입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三藏을 연구하는 교종의 학자들이

달마스님과 그 제자들을 불제자가 아니라고 비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종경록」과 명교(明敎: 1007∼1072)스님이 저술한

「補敎編]의 두 책은 모두가 수백명의 사상을 정교하게 검토하고,

그 밖의 서적들을 널리 연구해서 만든 것입니다.  

 

때문에 이 두 책은 부처님의 진실한 자비를 선양하고 

儒學者들의 계속되는 질투를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두 책이야말로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을 호위하는 성벽에 해당합니다.

 

혹자들이 이 책을 보고 말 귀절이나 따지고 의리따위나 해석했다는 꼬투리를 잡는다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정말로 두 스님들의 진실된 정성과 깊고 깊은 이해가 없었다면,

그렇게 비슷하게 흉내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영명스님께서는 또 「萬善同歸集」을 저술했는데,

그 내용이「종경록」의 학설과는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저술한 책인데도 서로 모순되는 점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음은 모든 善의 근본입니다.

 

「종경록」에서는 여러 善을 모아서 한 마음으로 귀결시켰고,

「만선동귀집」에서는 한 마음을 풀어 여러 善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치상으로 보면 두 책의 이론이 동일한 것입니다.

 

영명스님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은,

대체로 참선한다는 사람들이 깨닫지도 못한 채

여러 가지의 수행을 하지 않는 실태를 지도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三藏을 연구하는 교학자들이,

禪家에서는 여러 가지 수행을 두루 통괄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을 막으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책에서 자세하게 여러 가지의 수행방법을 밝힌 것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고금을 통하여 많은 스승들이 있지만 어찌 영명스님을 빼놓을 수가 있겠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禪家에서도 여러 가지의 수행을 해야한다고 가르치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달마스님의 문하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 밝히는 것만을 으뜸으로 여길 뿐입니다.

이 마음이 밝혀지기만 하면,

갖가지의 수행을 한다느니,

아니면 안한다느니 하는 것조차 따질 것도 없습니다.

 

혹 수행을 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수행하는 주체와 또 수행의 대상에 전혀 얽매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수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알음알이에 휘둘리어 바른 생각을 잃어버리는 등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의 정체를 확연히 알지 못하면 여러 가지의 수행을 한다 해도 허망하고,

설사 수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참선하는 이 납자들은 마음 밝히는 일을 무엇보다 으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 만행을 해도 되는 것입니다."

선종에도 깨달음의 단계가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十地의 단계와 禪은 어떤 관계인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10지의 단계에 올라가야만 신통을 부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입장에서 10지의 등급을 나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말씀하시기를

'十地도 허공을 나는 새의 발자취와 같아서, 본래가 空하다'

라고 했습니다.

 

무릇 대승보살치고 10지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것만을 굳게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달마스님은 오직 見性이 成佛이라고 말했을 뿐,

그 밖의 수행 단계에 대해서는 모두 생략하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달마스님의 禪은 모든 부처님들의 心宗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圓頓上乘'의 중생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통해 점차로 깨달아진다고 말한다면 이미 바른 가르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正法眼藏으로써 수많은 중생들을 관찰하면 모두가 본래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어찌 見性을 하고 난 다음에 다시 더 깨달을 것이 있겠습니까?

 

깨달을 것조차 없는데 무슨 10지 따위의 깨달음의 단계를 설정하겠습니까?" 

 

언어나 문자로도 견성을 할 수 있습니까?

객승이 또 질문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무명의 거친 풀을 헤쳐버리고,

조사의 가풍을 우러러보는〔撥草瞻風〕이유는 오직 견성을 하려고 그런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또 부대사(傳大士: 497∼569)도 말하기를

'다만 말소리를 막은것도  견성성불을 도모하려고 그런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 따로 견성하는 이치가 있읍니까?  

만약 없다면 衲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령 단편적으로 見性을 말한다면 옛사람들이 깨달은 오묘한 이치를 두루 설명한다 해도 수행에 장애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이 잘못되면,

뒤로 가면 갈수록 깨달음에서 더더욱 멀어지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대체로 견성의 이치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으며,

생각으로 알 수가 없으며,

분별할 수도 없으며,

취하거나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작용은 아주 위대하고 그것의 본체는 완전한 것입니다.

 그대들이 한 털끌만큼이라도 알음알이를 가지고 있으면,

본체를 마주 하더라도 계합할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 눈 있고 귀 있는 자들치고 어느 누구인들 견성을 말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견성에 대하여 질문을 받으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틀린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교학에서 말하는

'法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라는 말을 억지로 끌어들여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다시 말하겠습니다.

말로하면 말이 옳지만 깨달음이란 깨달아야만 분명해집니다.

그러니 견성이란,

언어나 문자를 매개로 하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깨달음에서는 멀어져 가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命根이 끊어지고 주체와 객체가 없어진 자리에서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五陰. 六識 따위에 의지하여  알음알이만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저 말로 할 때에는 견성한 듯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보면 미혹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는 그대의 무명과 邪妄이 멋대로 발생하는대로 지껄이지 마십시요.  

 

말할 때에는 엄연히 두 개의 본성이 있는 듯하니 어찌 일관성 있게 생각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견성을 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일관성 있는 도리를 말하는 것조차 인정되지 않거늘,

하물며 일관성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꼭 알아야합니다.

이처럼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두 가지 허물과 착오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발심하여 도를 배울 때에 언어나 문자로써 도를 통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애초부터 결단코 生死大事를 확실히 밝히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스승이 잘못 되어 제자외 근기를 고려하지 않고,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주가 약간 있는 것만을 보고서 교묘한 방편만을 가르칠 뿐,

결코 마음을 바르게 갖도록 제자를 가르치지는 못한 것입니다.

 

다만 한결같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다(卽心是佛)'와  

 

'물질 그 자체에서 마음을 밝힌다(卽色明心)'

 

는 등의 그럴 듯한 화두로서 스승과 제자가 서로서로 속고 속이는 것입니다.  

 

다만 스승은 자기가 체험한 경지로 이끌어 제자가 언어나 문자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禪林도 서로서로 영향을 주어서 한 가풍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2천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원각경」이나,

 「능엄경」에서 이네들의 잘못된 견해를 꾸짖고 나무라셨습니다.

 

대체로 성인께서는 말세의 중생들이 이런 허망한 잘못이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처럼 문답을 자세하게 베풀어 그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고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生死大事를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언어나 문자로써 견성을 하려고 합니까?

 

그러다가 홀연히 바른 안목을 가진 수행자가 나타나 그것이 잘못됐다고 손을 저어 나무라기라도 하면, 마음 속에는 갖가지 의심의 물결이 출렁거리게 됩니다.

 

나아가 문득 꾸짖고 배척하면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당신이 정말로 견성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언어나 문자를 싹 쓸어버려야 합니다.

 

만약 털끝 만큼이라도 그런 것들이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으면

이야말로 지독한 독이 심장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설사 부처님이라도 구제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참선하는 衲子가 이렇게 잘못된 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스승의  몫이고,

둘째는 자기 스스로가 언어나 문자로써 알음알이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설사 석가과 미륵부처님께서 禪道와 佛法을 직접 당신의 허파와 간장에 부어준다 하더라도

그것에 끄달려서는 안됩니다.

 

언어가 끊어진 바로 근본 자리(一句子)를 반조해 보면

몸 속에 깊숙이 배어버린 독소를 모두 토해낼 수 있습니다.

 

당신인들 어찌 이 나쁜 독을 받아 들이기를 원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바른 견해〔正見〕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도 잘못된 스승에게 꾀여 넘어 가는 것입니다.


당신이 과연 禪을 알음알이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무심코 던지는 한 토막의 비유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록 당신에게 1,700공안을 일시에 뚫어버릴 수 있도록 해주더라도

그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을 뿐더러,

차라리 일생동안 선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만도 못합니다.

이런 내용을 당신이 이해한다면,

香嚴스님께서 지난날 위산(위山)스님의 문하생으로 있다가 말문이 막혀,

남양 땅에 있는 암자로 피해가 고생했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한 아난이 능엄회중(楞嚴會中)에서 슬피 우느라고 애쓰지 않아도 됐으리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대는 상대의 말을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줄을 알아야합니다.

 

가령 깨달은 내용을  정확하게 가져와서 주장하더라도,

이는 벌써 걸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량분별〔心鏡識〕로써 그럴듯한 언어나 문자를 매개로 하여,

허망하게도 눈앞에 나타난 昭昭靈靈한 허깨비를 주인공이라고 잘못 알고

보배처럼 아끼며 가슴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실로 미혹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미혹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을 오래도록 고치지 않으면,

훗날에는 般若를 잘못 말했다는 과보를 받을 것이며,

가까이는 죽는 마당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옛날 慧忠國師께서 말씀하시기를,

'요즈음 남방의 불법이 크게 변해버렸다.

그들은 四大身 속에 신령한 성품이 들어 있어 불생불멸한다고 한다.

또 이 四大가 파괴되더라도 이 성품은 파괴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견해는 인도의 外道들과 같은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또 長沙스님 같은 분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진실을 식별하지 못하고 그저 옛 사람들이 말해 놓은 신령한 말만을 좇는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즈음 수행자들이 六塵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그림자를

자기의 참마음이라고 잘못 인식하는 풍조를 지적한 것입니다.  


즉 「능엄경」에서 말하는

'百千의 큰 바다는 알지도 못하고 한 방울의 물거품으로 전체의 바닷물을 알려고한다'

는 것과 상통합니다.

 

또 眞如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무리들이 말하기를,

'十方世界가 그대로 바로 나〔我〕이다.  

이 성품은 허공을 둘러싸고 온 법계를 두루했으며

고금과 凡聖을 가릴 것 없이 두루 있으며

삼라만상에 가득하다'라고 말들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옛사람이 말한,

'한 줄기의 풀을 들고 이것이 丈六金身이다' 라 한 것과,

또 '한 털끝마다 부처님 나라〔寶王刹〕가 나타난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음식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역시 배는 고픈 것이며,

의복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추위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치를 어찌 하겠습니까?  

모름지기 깨달음이란 직접 스스로 겪어 봐야만 됩니다.

또한 설사 그대가 직접 깨달아 봤다 하더라도 本色宗匠을 만나서,

그대가 깨달았다는 그 자취마저도 싹 쓸어버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른바

'알음알이가 도리어 가시가 되어 심장을 찌르고,

좋은 약을 고집하다가 도리어 병을 얻고 만다'

는 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언어나 문자로 통할 수 있고 의식으로 도달하여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한량없이 오랜 세월 이전부터 흘러온 생사의 굴레를 금일에 완전하게 끊어 버리고,

또 그대가 끊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단박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작은 근기,

천박한 재주로써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정말로 그대의 미혹을 더욱 부채질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들이 생사의 굴레에서 헤매이는 것이 너무나도 애통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참선을 그저 말로만하려는 자들이 얼굴을 돌려서 나에게 침을 뱉는다 하더라도,

또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염불이 참선보다 더 효과적입니까?


西歸子라는 스님이 문앞을 지나다가 나에게 질문하였다.
"나는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淨土에 태어나길 바랍니다.
 

 

생사에서 확실하게 벗어나는 길은 참선하는 것보다 아미타불 염송이 쉬운 듯합니다.

이 까닭은 멀리 계시는 아미타부처님께서 그윽하게 가피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네들이 하는 참선은 잡을 것도 없고,

성스러운 힘의 가피를 받을 수 도 없읍니다.

 

실로 아주 근기가 빼어난 사람들이 한번 듣기만 하면

수천 가지를 깨닫는 정도의 재주가 아니고 서는,

참선의 본면목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永明선사께서도

'참선하는 사람 열 명 중에 아흡 명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라고 걱정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하도 한심하여 대답했다.         
"쯧쯧! 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극락정토밖에  따로 참선이 있단 말입니까?  

 

설사 정말로 있다고 한다면 佛과 法이 서로 모순이 됩니다.

그래서야 어찌 불법으로써 사람을 인도하는 원융한 이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상황의 적절한 방편을 잘 모르고 자신의 견해에만 고집하여,

先哲을 속이고 비방하는 격입니다.

 

실로 영명스님께서 참선과 정토를 짝지어 四句偈를 만드신 까닭은,

듣는 이의  근기에 알맞게 특별히 방편을 써서 강조한 것일 뿐입니다.

 

대체로 敎學에서 이른바,

'원래는 一乘道뿐이지만 방편으로 분별하여 三乘道를 설한다'

라고 한뜻과도 같습니다.

 

長蘆. 北磵. 眞歇. 天目 등 여러 스님들이 저술하신 정토에 관한 게송도

모두 말로써 풀어놓은 卽心自性의 참선입니다.  

 

애초부터 별다른 무엇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東都의 희법사(曦法師)가 禪定 속에서 연꽃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그 연꽃에 圓照本禪師의 이름이 쓰여있었다고 합니다.

달마스님 선법을 정통으로 이은 원조스님으로서

어떻게 연꽃에 이름이 박혀 있을 수가 있을까 하고 의심했습니다'

라 했다.

 

그래서 일부러 내가 가서 질문했더니,

원조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비록 禪門에 있었으나 정토신앙을 겸해서 수행했다.'

 

그 당시에 원조스님께서는 갖가지의 방편으로 찾아와 질문하는 사람들을 지도한 것이지,

어찌 정말로 그랬던 것이겠습니까?  

 

미혹한 사람들이 방편으로 그런 줄을 모르고 제멋대로,

'참선 말고 따로 정토에 귀의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영명스님의 「淨土四句偈」를 변명의 구실로 삼기도 하니,

이것 역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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