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야화(山房夜話)

산방야화(山房夜話). 2

通達無我法者 2008. 2. 28. 19:00
 

 

 

 산방야화(山房夜話). 2

 

 

 

손님이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좀더 자세한 설명을 청했다.

 

"정토와 참선의 경지가 서로 어떤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요."

 

내가 대답했다.

"정토도 마음이며 참선도 또한 마음으로서 본체는 하나이지만 이름을 서로 달리했을 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명칭에 집착하여 그 본체를 미혹하고,

반면에 깨달은 사람은 그 본체를 알아서 이름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어찌 정토만이 그렇겠습니까?

敎學에서 말하는, '일체의 모든 法이 마음에 상주한 자성〔卽心自性〕임을 알아야한다' 라고 말한 부분과,

'삼라만상이 한 법〔一心〕에서 나왔다'라고 한 것이 모두 그렇습니다. 

 

다만 자기 마음 속의 禪을 깨닫기만 하면 삼계의 만법에 두루한 신령한 근원에 닿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든지 완전하고 진실되어서 전혀 간택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구별이 있을 수가 없는데,

어찌 淨土니 혹은 穢土니 하는 구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십만억토를 한걸음에 다가가고 갖 가지의 보배로 온 우주를 그득히 채우기도 합니다.

 

나아가 한 찰나에 영원한 세월을 맛보아,

그 속에서 비취빛 대나무와 노란 국화가 동시에 피어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큰 바다와 같은 아미타불의 눈이 또록또록 빛나고,

다섯개의 수미산 같은 白毫光明이 곳곳에다 찬란한 빛을 분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늙은 달마는 흘연히 明月珠를 잊고,

아미타불도 황금도 장날 잃어버릴 것입니다.

禪門도 군더더기에 불과한 말이며,

정토도 또한 헛된 이름에 불과합니다.

 

이름이니 본체니 하는 견해도 없어지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알음알이가 없어지면,

丈六金身과 한줄기 풀이 어떤 우열이 있겠으며,

삼천대천 세계와 한점의 티끌에 어찌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한결같이 평등한 법문입니다.

실로 참되고 온몸으로 깨달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찌 해탈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참선을 하는 목적은 생사의 문제를 투철하게 해결하는 데에 있으며,

또한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도 오직 생사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자는 데에 그목적이 있습니다.

 

성인들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방법은 수천수만 가지이지만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생사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오직 한 부분이라도 투철하게 깊숙이 들어가야지,

이것 저것 兼修를 해서는 안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털끌만큼이라도 알음알이〔思念〕에 얽매인다면 三惡道에 떨어집니다.

조금이라도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오랜 세월동안 윤회에 빠집니다.

그런데 어찌 兼修가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수행하지 않고,

참선이 이러니 정토가 저러니 말로만 하면 쓸데없이 생각만 복잡해지고 알음알이만 더더욱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생시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차마 내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五家로 선풍이 분열됐습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달마스님이 처음 홀로 전한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이 10代를 계속 전승되다가,

후에 분파되어 다섯 종파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달마스님의 말씀 속에 이미 서로 다른 다섯 가지 내용이 애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한 스승 밑에서 五家로 분리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가 말한 5가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섯 부류이지 그 道가 다섯 종류인 것은 아닙니다.

대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종지를 전수하는 행위를 이름하여 

'등불을 전한다〔傳燈〕'고 하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정말로 전등의 의미를 알았다면 五家로 분리된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의미로서의 등불을 알아보기로 합시다.

등불에는 새장처럼 생긴 등〔籠燈〕도 있고,

잔등(盞燈)도 있고,

유리등(유離燈)도 있습니다.

등불이라는 의미에서는 모두 같지만 걸 모양은 모두 다릅니다.

 

비록 五家로 분립하여 곁모양이 서로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모두가 生死의 긴 밤을 밝혀주지 않는 가르침은 없읍니다.

어찌 지금의 五家만이 그렇겠습니까?

옛날 달마스님의 한 등불이 네 번 전하여 大醫스님에 이르러 牛頭宗이 설립되었고, 달마스님으로부터 다섯번 전하여 大滿스님에 이르자 북쪽의 神秀스님이 한 종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달마스님으로부터 여섯 번 전하여 曹溪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6조스님 아래로 靑原. 南嶽. 荷澤 등의 세 스님은 절대로 그 선풍을 구별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각 종파로 나뉘어서 이리저리 작은 流派가 만연해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물도 번창하였으니 이는 곧 나뉘어지지 않아야 할 것을 나눈 꼴이 된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는 五家는  南嶽. 靑原(?∼740) 양 파의 아태에서 서로 파가 갈라져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느덧 마치 소용돌이의 물이 넘쳐 거대하게 온 세상을 적시듯이 각각 서로의 가풍을  날렸습니다.

그뒤로 끊임없이 후진들이 배출되어 자기네의 가풍을 하늘 끝까지 치켜 올리니 드넓기가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를 어찌 한눈으로써 관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득이 5가로 나누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객승이 또 물었다.

 

"분파된 5가외 차이점을 살펴보니 소속된 인원수뿐만 아니라 각파의 宗旨도 동일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무슨 까닭인가요.?"

 

나는 대답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같고 약간 다른 점이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이 갈다는 것은 달마스님이 전한 한 등불〔一燈〕과 동일하다는 것이고,

약간 다르다는 것은 쓰는 말과 표현하는 방법이 우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위앙종(위仰宗)의 근엄함과,

曹洞宗의 자상함과,

臨濟宗의 통쾌함과,

雲門宗의 고고함과,

法眼宗의 간단 명료함이 그것입니다.

 

이런 차이점 등은 각각 그 종파의 인물들의 천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자지간에 걸음걸이가 서로 닮은 것과도 비슷합니다.

쓰는 말과 표현하는 방법이 서로 비슷하게 닮는 것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저절로 서로 닮아지는 것입니다.

 

가령 당시의 宗師들이 괜히 서로 다른 것만을 숭상하여,

사사로이 한 가문의 傳承을 삼고자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잘못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고서야,

佛祖께서 세상을 비추는 혜명의 등불〔命燈〕을 후세에 전파하고자 했던 본래의 임무를 어찌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사이에 참선한다는 무리들이 宗旨에 얽매여 허공을 쪼개려는 듯한 허망한 견해를 일으켜 서로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런 꼴을 열반에 드신 5종(五家:오가)의 스님네들이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히 열반의 寂定 속에 계시면서도 그 하는 꼴이 냄새나고 더러워서 코를 틀어 막을 것이 분명합니다."

 

公案의 뜻과 그 기능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닫게 된 機緣를 사람들이 公案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나는 대답했다.

"公案이라고 한 것은 관청에 있는 문서에다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국가에는 법령이 있어야만 왕도정치가 제대로 실현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公이란 훌륭한 道를 깨달아 세상사람들에게 그 길을 모두 함께 가도록 하는 지극한 가르침이며,

案이란 성현들께서 그 道를 수행하는 바른 방법을 기록한 것입니다.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자라면 누구든지 관청을 설립하지 않을 수가 없고,

관청이 설치되면 자연히 그것을 운영하는 법령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른 이치를 받아들여 법령을 만들고,

바르지 못한 것들을 박멸하려고 그러는 것 입니다.

公案이 시행되면 바른 법령이 통용되고,

바른 법령이 통용되면 천하의 기강이 바로잡히면 왕도정치가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우치게 된 계기〔機緣〕를 公案이라 이름 붙인 이유도 역시 위와 같은 뜻에서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한 사람의 억지주장이 아니라 신령스런 근원에 딱 들어맞고,

妙旨에 계합하여, 생사와 굴레를 타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안은 언어나 문자로 따지는 것을 초월하며,

이것은 十方三世의 수많은 보살과 함께 똑같이 지니고 있는 아주 지극한 도리입니다. 그것은 생각이나 이치로 알 수도 없으며,

언어로 전할 수도 없으며,

문자로써 설명할 수도 없으며,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마치 毒을 바른 북을 둥둥 울리게 되면 듣는 이는 모두 그 자리에서 죽는 것과도 같으며,

큰불구덩이 속에 갓난 아기가 들어가면 그대로 타죽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靈山에서 말한 '別傳'이라는 것도 이를 전한 것이며,

달마스님이 말한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도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南宗과 北宗이 분리되고 五家로 갈라진  뒤로부터,

모든 善知識들은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부처님의 別傳과 달마스님이 그대로 지적한 도리〔直指之道〕를 전하려고 애를 썼으니,

마치 손님이 찾아오면 즉시에 주인이 나오는 것처럼 했습니다.

우두법융선사에서 마조도일선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안종사들이 입에서 튀어 나오는대로 한 말로 번개처럼 즉각에 본성을 드러내주시니,

귀를 기울여 따져볼 겨를조차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삼 세근〔麻三斤〕',

'똥 묻은 막대기〔乾屎궐〕'

와 같은 公案은 사량분별로써는 조금도 말 수 없습니다.

 

위와 같은 공안에 부딪치면 마치 銀山鐵壁처럼 사량분별로는 뚫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눈 밝은 사람만이 언어나 문자가 끊어진 자리에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한 곡조 부르고 거기에 한 곡조 화답하는 것이 마치 공중을 날아가는 새처럼 자취가 없고, 

맑은 물에 비친 달 그림자처럼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비록 천 갈래 만 갈래 길로 이리저리 방자하게 사량분별한다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멀리는 영취산에서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인〔拈華示衆〕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또 그밖에 1,700公案만이 어찌 그러했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 야지만 알 수 있는 도리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에게 사량분별이나 증진시키고 그저 이야깃거리의 밑천이나 삼으려고 공안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長老라는 뜻은 즉 叢林이라는 관청의 최고 관리자이며,

「전등록」에 실려있는 말씀은 선풍을 드날릴 묘안들을 기록한 공문서입니다.

옛 사람들이 혹은 제자들을 지도하거나 혹은 대문을 잠그고 수행에 정진하던 여가에, 틈틈이 평석하거나〔拈〕.

판단하거나〔判〕.

노래하거나〔頌〕.

다른 논지률 펴거나〔別傳〕

한 것을 모아놓은 책이 바로 「전등록」입니다.

 

어찌 보고 들어 따지는 죽은 지혜만을 증장시키고,

끝내는 눈밝은 고승대덕 스님들에게 대들어 실력을 겨루려고 한 말씀이겠습니까?

이렇게 한 이유는 大法이 장차 피페해지는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편을 자세하게 베풀어 후배들의 지헤의 안목을 열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모두 본래의 진면목을 깨닫게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公이란 뜻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을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며,

案이란 뜻은 기필코 佛祖의 깨달음과 동일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公案이 풀리면 번뇌의 알음알이〔情識〕가 사라지고,

번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면 생사의 굴레가 公해지고,

생사의 굴레가 公해지면 佛道를 이룰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佛祖의 깨달음과 동일하게 만들겠다'라는 뜻은,

중생들이 생사의 번뇌 속에서 제 스스로 꽁꽁 묶여 풀려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상황을 두고 한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자리이지만 할 수 없이 중생들을 위하여 말로 표현한 것이며,

형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이치이지만,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형상으로 드러내어서 미혹의 오랏줄이 풀려지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깨달음외 자리에 어찌 언어나 형상을 들먹거릴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다가 불공평한 사건이 생기면,

반드시 관청에서 공정하게 재판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면 吏曹에서는 공포된 법조문을 근거로 공평하게 재판해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선하는 자가 깨달은 부분이 있으나 제스스로 확신을 못하겠으면 스승에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스승은 公案을 근거로 하여 의심을 풀어줍니다.

공안이란 바로 번뇌망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의 횃불이며,

보고 듣는 것에 얽매인 결박을 끊어주는 날카로운 칼날입니다. 그

 

런가하면 공안이란 번뇌의 뿌리를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도끼이며,

성인과 범부를 가려내는 신령스러운 거울입니다.

조사들의 본뜻이 공안때문에 분명하게 밝아지고,

부처님의 마음이 공안 때문에 드러납니다.

 

번뇌를 말끔히 털어버리고 불조의 혜명을 드러내는 데에 이 공안보다 더 좋은 길잡이는 없습니다.

 

이른바 공안이란 법을 아는 자만이 두려워할 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근처에 어른거리지도 못합니다.

 

아아! 슬프도다!

미망에 빠진 인간들은 근본자리를 돌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의 총명만을 밑천으로 삼아 요리조리 사량분별만 하여 언어나 문자로 깨달으려 하는구나!

 

그리하여 끝내는 마음자리를 깨달으려 들지 않습니다.

棒이나 喝 등의,

방편의 채찍으로 몰아대는 마차는 결국 번뇌와 망상이 우거진 숲속에 처박히고,

龍이나 코끼리처럼 훌륭한 조사스님네들의 말씀은 결국 사량분별하는 잘못된 함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량분별하게 되면 그 결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욕정이 눈가에 넘치고,

취사선택하는 어리석음이 가슴에 가득하여집니다.

옛 스님들이 말한,

'제호(醍호)가 도리어 독약이 된다'

라는 비유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총림이 무너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슬프도다! 

이것은 마치 법령을 집행하는 담당관이 법령을 미끼로 삼아 사람들의 뇌물을 받아서 호의호식하는 꼴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개인적인 사리사욕에 빠지면 아무리 공명정대하게 하려 해도 세상이 잘 다스려질 까닭이 없습니다.

 

공안에 집착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 아닙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조사의 公案은 본래 참선하는 사람이 의심이 생겨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니 옛사람이 깨달은 마음자리는 마치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도 같고,

혹은 커다란 북이 두들기는대로 소리가 나듯이,

 

상대에 따라 그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공안이란 다른 사람의 의심덩어리를 풀어주는 것에 불과한 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중시하지 않으며 한 법도 남들에게 준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공안이란 선배들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어서 마지 못해 주고받은 짧은 얘기입니다.

그러다 그것들이 총림에 전해져서 깨달은 이들이 이것을 공안이라고 후에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원래의 공안은 분명한 도리에 근본하였는데,

요즈음 총림이 되어가는 모양을 보니 전혀 처음의 분명한 도리는 없어진 듯합니다. 그리하여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거나,

달마스님이 인도 땅에서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삼세근〔麻三斤〕이다,

혹은 똥 묻은 막대기〔乾屎궐〕이다,

혹은 수미산(須彌山)이다,

혹은 망상 피우지 말라〔莫妄想〕는 등등으로 대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道가 낮은 사람을 인도하려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감파(勘婆).

화타(話墮).

탁발(托鉢).

상수(上樹)등등으로 대답하는 것을 도가 높다고 평합니다.

 

그런가 하면 후학을 제접하는 방편으로 三玄을 나열하여 귀결시키기도 하며,

혹은 모든 언어를 科判하여 四句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 구구절절한 말들을 1,700公案으로 정리하고,

그 각각에 이름을 붙여서 서열을 매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난 잘 모르겠습니다.

 

위와 같이 한 것이 본래 눈밝은 종사들의 본 뜻인지?"

 

나는 대답했다.

"조사의 말씀은 아주 空寂하여서 인위적으로 꾸민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손 가는대로 쓴 것이지,

애초부터 사량 분별하여 선택해서 쓴 것은 아닙니다.

무릇 모든 것이 달마스님이 흘로 전한 뜻〔單傳之旨〕에 근본을 둡니다.

 

그러므로 말을 하기 시작하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보여주니,

결코 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다름과 같습니다.

 

달이 하늘에 떠 있지만 동쪽으로 가는 사람이 바라보면 달이 동쪽으로 가는 듯하고, 서쪽으로 가는 사람이 달을 바라보면 달이 서쪽으로 가는 듯합니다.

그런가하면 움직이지 않고 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는 자는 '달이 나와 함께 움직이지 않고 있구나'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빠져 있는 소견으로 서로 동쪽, 서쪽, 혹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달리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름달이 허공에 뜨면 실로 '동쪽이다', '서쪽이다'하는 것도 결국은 움직이지 않는 원래의 자리를 기준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쿵 저러쿵 공안에 대하여 서로 다른 말이 생긴 이유는  법〔法〕의 근원을 확실히 깨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상대방에 따라 허공의 크기와 모양이 달라진다는 비유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깨달은 선배 宗師들이 공안을 설명할 때에 혹은 생략하기도 하고,

혹은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언어로 설명하는 본뜻이 혀끝에 있지 않다는 말로써 증거를 삼아 종사들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이해한 뜻으로서 縱奪逆順으로 종횡무진하게 설명하는 정안종사의 말씀에 부딪치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치를 극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공안이 그에 알맞는 도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 공안마다의 깊이는,

사람이 바다에 들어가 바다의 깊이를 재는 것처럼,

깨달은 정도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져서 계속 들어가면 가장 깊은 밑바닥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고 나서 흘연히 왔던 길을 되돌아보면,

바로 이것이 바다였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만약 그 깊은 곳에 몸소 도달해서 한번 뒤돌아보지 않았더라면,

가슴 속의 의심덩어리를 집어내어 제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마조스님에게 묻기를,

'무엇이 부처인가요? '

라고 하자 마조스님이 말하기를,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공안은 비록 전에 참선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도 두가 알았다고 지나쳐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지극한 뜻은 오래 참선한 禪僧이라도 거의가 잘못 알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그 사람에게 '무엇을 마음이라 하는가?'라고 다시 질문하면,

이것은 벌써 옆길로 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그 지시하는 當處에서 그대로 훌쩍 뛰어넘기를,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쓱싹 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공안의 참뜻을 분명하게 알아서,

마치 교통이 자유로운 十字路 위에서 그리운 어버이를 만나 달려가듯이,

이리저리 따질 겨를 없이 단박에 깨쳐야 합니다.

 

혹 어떤 무리들은 전혀 참선도 하지 않고,

또 마음자리를 분명히 밝히지도 않고,

생사의 큰 의심덩어리인 번뇌를 절단하지도 않고,

오직 총명한 재주만을 믿고 고금의 문자만을 이리저리 따지고 연구하여,

그저 그럴 듯한 언어로 비교하고 헤아려서는 고금의 공안을 모두 알았노라고 자만하기도 합니다.

 

러나 이것은 자신이 생사의 근본을 몰랐다는 시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무리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는 솔직한 사람만도 못합니다.

솔직한 사람은 지금까지는 공안의 깊은 뜻을 몰랐으나,

어느 날엔가 홀연히 信心을 일으켜 똑바로 공안을 參究하기만 하면 명확하게  깨닫는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오직 총명하고 영리하기만 하여 머리 속에서만 미리 알아버린 사람은 절대로 다시는 올바른 믿음을 내어서 명확하게 깨닫지 못할 겁니다.

 

요즈음 총림에서는 남의 말 듣는 데 급급하며,

또한 참선하는 이들을 대접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언어나 문자로만 따지는 무리들은,

근본자리에 부딪치게 되면 화두 한 귀절 대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어려운 책을 읽듯이 쩔쩔맵니다.

 

이 무리들이 알음알이로 공안의 뜻을 풀어 보려고 하지만,

이것은 마치 그물 속에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가득차게 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진정한 선객〔本色道流〕은 이와 같은 나쁜 독약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고금의 기연을 만나더라도 절대로 이리저리 따지려들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단박 깨우쳐 생사의 바른 뜻을 꿰뚫어버립니다.

 

마치 눈앞에 수 만길이나 되는 장벽이 서 있는 것처럼,

오래도록 공안을 참구하다가 홀연히 의심덩어리를 타파합니다.

 

그러면 백천만 가지 공안의 深淺. 難易. 同別이 한꺼번에 뚫려서 자연히 남에게 묻지 않게 됩니다.

 

가령 마음의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는데도 자키자신에게 되물어 참구하려 하지 않고 끝내 남들이 열어 보여주기를 바란다면,

비록 석가모니부처님과 달마스님이 간과 쓸개를 꺼내어 보여준다 해도,

오히려 그 마음의 눈만을 멀게 할 뿐입니다.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

 

수행을 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인도땅에서 오신 달마스님의 가풍은 매우 엄격해서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알아버렸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옆길로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修行을 해서 되는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마른 고목처럼 방석에 앉아 참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떻게 선을 앉아서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先代의 宗旨에 누를 끼치는 일이 아닐는지요?"

 

나는 말했다.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 말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료.

龍潭스님이 스승인 천황(天皇: 748∼807)스님에게 묻기를,

'제가 오랫동안 스님 밑에서 공부를 했는데도 제게 心要를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자 천황스님은,

 

'그대가 차를 갖고 오면 나는 차를 받아 마셨고,

그대가 문안을 드리면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것이 그대에게 심요를 열어 보여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자,

용담스님이 드디어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공안은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매우 명쾌하고 쉬운 것인 듯하지만 우리 宗門의 입장에서 보면 옆길로 샌 것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위산(위山)스님이 香嚴스님에게,

부모가 그대를 낳아주기 이전의,

그대의 참 모습이 무엇이냐고 묻자 향엄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도리어 위산스님이 설명해주기를 바랬는데,

위산스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향엄스님은 평소에 공부했던 것을 모두 버리고 南陽 땅으로 들어가 한 암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를 지내다가 갑자기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는 단박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깨달음이 있기까지는 수행한다는 티를 내지 않고 묵묵히 암자에 기거하면서 그 문제를 생각하고,

그 문제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노력해서 된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깨닫지는 못하고,

많은 세월을 지내고서야 깨달았지만 그가 깨달은 깊은 경지가 달마스님이 전한 경지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읍니까?

 

요즈음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첫째는 고인들처럼 진실하지 못하고,

둘째는 生死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껴 그것을 일생의 大事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오랜 세월 동안 잘못 익힌 수행 방법을 버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화두를 들기는 하지만,

방석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집니다.

이것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心身이 채 갖추어지지 않은 때문입니다. 

참으로 딱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설사 彌勒부처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런 폐단을 다 없앨 수 있겠습니까?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미치지 못하는 것은 탓하지 않고 도리어 佛法이 쇠퇴하고 叢林의 운이 다했다고 핑계를 냅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처지는,

훈련을 시켜주는 스승도 없고 일깨워 주는 친구도 없으며,

주거도 불편하고 음식도 먹을 수가 없으며,

법도도 없고 주위도 시끄럽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수행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이 나오고부터는 道를 배운다는 사람치고 이것을 구실로 삼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땅을 갈고 김매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제 때에 비가오지 않는 것만 탓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렇게 하고서도 가을에 결실이 풍성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도를 배우는 사람이 환경의 좋고 나쁨만을 따지기만 합니다.

그러다 한 생각이 어지러워지면 환경 탓만 할 뿐입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 사람이 만겁의 생사 굴레에 얽히고 결박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 탓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대는 듣지 못했습니까?

雪山의 늙은 사문〔석가모니 부처님〕이 萬乘이나 되는 존귀한 영화를 모두 버리고 6년간이나 얼음 위에 누워 고행을 하며 黃蘗 나무를 씹으면서

춥고 배고픈 가운데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수행하다가

드디어는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또한 부처님 이후 西天 땅의 二十八祖師 모두가 바위나 동굴 등에 거처하였습니다. 혹 세상사에 섞여 있어도 眞心을 잃지 않고 참다운 수행을 어김없이 해서 모두 스스로 깨달아 부처님의 心印을 전했던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중국으로 오고 百丈스님이 탄생하기 이전에 牛頭스님이 옆으로 한 가지 나와 南北宗 양파로 나뉘어졌습니다.

그 영향으로 수행자들은,

허리에는 낫을 차고 어깨에는 삽을 걸치고는 火田으로 나가 농사를 지어 직접 밥을 짓고 절구질을 했으며,

너절한 누더기를 걸치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철석같은 身心과 氷霜같은 신념으로 佛祖의 一大事因緣을 한 어깨에 걸머졌습니다. 그래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가야할 곳을 스스로 갔기 때문에 도달한 곳이 언제나 정확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어느 곳에 五山十刹 같이 으리으리한 거처와,

三玄이니 五位니 하는 괴이하고 복잡한 이론과,

放.收.殺.活의 구별 및 염(염).頌.判.別 같은 복잡한 이론이 있었겠습니까?

 

원래 흠집이 없는 玉은 갈고 닦지 않아도 되는데 무슨 연장이 필요하겠습니까?

안목이 처음부터 올바랐던 것입니다.

百丈스님이 叢林을 건립한 이래로 광대한 전답과 큰 집은 많아졌지만,

수행하는 자세는 퇴보하여 잘못과 허망이 도리어 늘어났습니다.

 

그 결과 쓸데없는 기강만 날로 번거로와졌고,

실제로 예의는 나날이 사라져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미 수백년 전에 禪風의 진면목을 제창하신 臨濟. 德山. 雲門. 眞淨 같은 스님은 분하고도 분한 기상으로 노하여 마치 음란한 여인을 보듯이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의 근본은 체득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입으로만 깨달으려 애써 결국은 서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또 삿된 스승이 있어 諸方을 깨우치고 禪을 말한다는 것이 마치 섭공(葉公)이 龍을 좋아하듯 하고,

趙昌이 花鳥를 그리듯 사이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섭공과 조창 자신이 잘못되었는데,

더우기 그들의 흉내 따위나 내는 자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비슷한 것을 진실인 양하는 잘못이 오늘날엔들 없다 하겠습니까?

 

이렇게 보건대,

참답게 구하고 실제로 깨달은 인재를 만나는 것이 오늘날에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난날에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고 생사의 情妄과 無明의 結習이 끊임없이 일어나 조금도 쉴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골수에 사무치도록 열심히 생사를 끊는 듯한 正念으로,

원수와 적을 만난 듯이 話頭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생生 두 生을 끊임없이 눈을 부릅뜨고 화두를 들어 깨닫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섭공과 조창같은 부류에게 미혹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三祖 僧璨大師가,

'증오와 사랑만 없다면 깨달음이 뚜렷이 명백해질 것이다'라고 한 것과,

永嘉大師가,

'망상도 제거하지 말고 진실도 구하지 말라'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증거로 대면서

 

'이것이 바로 깨닫는 이치인데, 무엇 때문에 한 生 두 生씩 육체를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괴롭혀가면서 도를 얻으려 하는가?'

라고 합니다.

 

이런 말들이 유행하면서 섭공, 조창같은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났고,

끌내는 이 마음을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영가스님이,

'法財를 손상시키고 공덕을 소멸하는 것은 바로 사량분별〔心意識〕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올바른 깨달음은 구하지 않고 헛되게 사량분별도 따져 이해한 그럴듯한 말들을 영가스님이 통렬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을 만 사람이 진실인 양 전하였으나,

사이비는 어디까지나 사이비지 진실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탄식만 나올 뿐입니다.

 

그 때문에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참선은 성실하게 해야하고 깨달음은 진실하게 깨달아야하니,

염라대왕은 말 많은 것을 개의치 않는다'

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옳은 것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진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되지 못하지만,

결코 경솔하게 섭공과 조창의 전철을 밟지는 않습니다.

평소 다른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 (東語西話) 참선에 대해 비평한 것은 내 스스로 깨달은 法門일 뿐이지,

아는 것을 가장해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들으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남들이 혹 믿어준다 하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또 믿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 노하겠습니까?

또한 믿고 안 믿고는 모두 그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으니,

어찌 제가 기뻐하거나 노하겠습니까?

 

오직 같은 길을 가는 사람만이 알아 줄뿐입니다.

혹 허망히 속인다고 나무란다 해도 어찌 싫어 하겠습니까?

 

"방편이나 점수로도 깨달을 수 있습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참선으로도 깨닫지 못한다면 다른 방편을 사용해서 깨달을 수 있는지요?

예를들면 漸修하여 깨닫지 못하면,

향후 세계에서라도 生死大事를 다시 깨칠 수 있겠습니까 !"

 

나는 말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깨달음이란 당사자가 직접 체험해야 하는 일입니다.

남들에게 의지해서  될 수도 없는 일이고,

남이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 때문에 미혹에 빠지는 것도 제 스스로 그렇게 만드는 것이고,

깨우침도 반드시 자신에 의해 달성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과 달마대사라 할지라도 그대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요즈음 스승들도 참선하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많이들 걱정합니다.

그러므로 根機에 알맞는 방법을 쓰고,

방편을 자세하게 베풀어 후학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들은,

生死大事를 해결해야 할 큰 문제로는 삼지 않고,

禪을 신속하게 머리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고작 방편 속에 쭈그리고 앉아서,

알음알이로 고금의 공안을 통하고서 관문을 뚫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生死라는 기장 크고 견고한 관문은 뚫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가 통과한 것은 고작 言說의 관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것은 수행에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자키의 본분을 스스로 해치는 짓입니다.

만약 진실하게 생사대사를 끊으려는 올바른 사람이라면,

비록 달마대사가 세간에 출현해서 모든 불조의 핵심되는 도리를 가져다 八識 가운데 놓아 준다해도,

뿌리까지라도 모두 토해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반드시 본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반푼어치도 다른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비록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직 正念만을 견고하게 지니고,

살아도 깨달음과 함께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태도로 절대로 알음알이를 갖고 이해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와같이 뜻을 지킬 수 있다면 한 생 두 생이 흘렀다 해도 깨닫지 못할까 절대로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중에는 고요하고 묵묵히 좌선하다가 번뇌 망상이 쉴 때,

문득 그럴듯한 도리를 깨닫게 되면 확철대오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여러 경전 속에서 증거를 대고,

마음 속에는 그 사이비 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착각에 의한 깨달음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생사문제를 見性하지 못했으면서도 자기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착해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깨달았다고 印可해 주길 바라지만,

이것이 결국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어떤 무리는 六識을 자기의 주인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옛 사람이 잘 모르고 한말을 끌어다 증거로 삼습니다.

참선을 하더라도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는 생사의 언덕에서 꼼짝도 못할 뿐 아니라,

 

밝은 대낮에도 눈을 부릅뜨고 혹 좋지 못한 말이라도 들으면 그냥 화가 나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비방이라도하면 根本無明이 일어나 상대방과 다투면서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데,

이런 것은 미친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평생 도를 배웠으나 깨닫지 못하면,

더 이상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와같은 사람들은 正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미 정념을 잃어버렸다면,

훗날에도 깨달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티끌이나 모래처럼 많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未來際가 다하도록 수행을 해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좋은 전답을 갖고도 김을 매지 않으며,

오곡이 저절로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므로,

이런 사람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참선했는데도 깨닫지 못하면 다른 방편을 써도 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평생동안 참선을 했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과보가 있어서입니까?"

 

나는 말했다.

"콩을 심은 곳에서 삼이나 보리가 나는 법이 없고,

풀뿌리에서는 소나무나 大春나무가 돋아나지 않습니다.

참선은 효과가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공부라고는 하지만,

참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오히려 참구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영명스님이

'참선해도 깨닫지 못하고 배워서도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저 듣기만 해도 영원히 도의 종자가 된다.

그러면 어느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생생토록 사람 몸을 잃지 않는다.

그러다 깨달음이 터지기만 하면,

한 가지를 들어서 천 가지를 깨달을 것이다'

고 한 것은 모두 진실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속담에는 '한 조각의 착한 일을 잠시만 닦아도 많은 이익을 얻는다'했고,

부처님 말씀에는 '다섯 번만 부처님 명호를 불러도 무수한 보물로 보시한 복보다 훌륭하도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헛된 말들이겠옵니까?

 

최초에 발심한 동기는 생사대사의 해결 때문이었는데,

2,30년씩 참선을 해서 설사 깨닫지 못했다더라도 따로 방편을 구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마음 속에 다른 생각을 하지말고,

모든  망한 생각을 끊고 부지런히 수행하십시오.

 

그리고는 참구하는 話頭만을 향하여 꿋꿋하게 정진하여 살아도 화두와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도록 해야 합니다.

깨닫는데 걸리는 시간이 三生이니 五生이니 十生이니 百世니 하는 말 따위에는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확실히 깨닫지 못했다면 절대로 쉬지 마십시오.

 

이런 각오만 있다면 一大事를 해결치 못할까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세의 중생이 한 순간만이라도 불퇴전할 생각을 하면,

그것이 바로 正覺이다'고하셨으니,

이 말씀은 참으로 극진하다 하겠습니다.

 

요즈음 수행을 하는 사람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처음 발심을 해도,

 발심이 온당하질 못합니다.

다만 새로운 환경에 처해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날까만 두려워합니다.

 

그러다가는 참된 주인공을 찾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 때문에 이리저리 생각생각하여 생사대사를 신속히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구 치닫는 생각이 오히려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생사대사를 깨닫겠다는 바른 생각을 가지고는 있지만,

허망한 생각이 스스로를 가리워버리고 맙니다.

그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생사대사를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생각을 바꾸게 되는데 거기에는 세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잘난 체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총명함을 여전히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스승과 벗이 그의 잘못된 깨달음을 꾸짖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오직 입으로만 깨달으려 하므로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알음알이〔知解〕에 빠져 들어갈 뿐입니다.

 

사이비 般若로써 六識 속에서만 허우적거리면서 스스로 확실히 깨달았다고 말하며,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조금도 생각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저 입으로 지껄이고 귀로 듣는 것만 복잡하게 많아질 뿐입니다.

교화의 방편이 쇠퇴하자 이런 잘못에 빠지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둘째 부류는 총명하지도 못하고 아는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매양 스승에게만 의지하는데,

잘 안되면 참선은 효과가 겉으로 드러나는 공부가 아니어서 전혀 영험이 없다고 합니다.

오직 10년 20년을 계속해도 확실한 효과가 없는 것만 한탄스러워 하며,

갑자기 여태껏 해오던 수행법을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念佛을 가장 빠른 수행법이라고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염주만 세면서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혹은 '一代時敎는 부처님 입으로 선양한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참선을 했어도 깨닫질 못했으니,

비록 참선하는 것만은 못하다 해도 경전을 연구하는 것이 그래도 善因을 심는 것이다'하며,

경전을 읽는 것이 헛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사람 만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 싫어합니다.

그런 사람은 숨어서 더러운 얼굴로 草衣를 입고 직접 일을 하며 밥을 지으며 육신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혹은 비밀스런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혹은 죄와 허물들을 참회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바른 믿음〔正信〕을 어기고,

異端에 깊이 빠진 것입니다.

 

세째 부류는 원래 믿음은 없었는데,

어쩌다 因緣이 닿아 발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잠시도 좌선은 하지 않고 八識을 기반으로 해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집니다.

 

화두도 깨닫지 못하고 수없는 생각을 때도 없이 일으킵니다.

이들은 채 3∼4년도 참선을 계속하지 못하면서도,

경솔하게 참선으로는 깨닫지 못한다고 하며 내동댕이쳐 버립니다.

이들은 할 일 없이 생각마다 六塵에 헤매고,

마음은 몹시 산란합니다.

죽음의 문을 향해 가면서도 반성할 줄을 모릅니다.

 

叢林의 기풍이 시들어가고 조사의 도가 희미해진 때에 참선하는 수행자가 끝내 물러서지 않겠다는 철석같은 몸과 마음〔身心〕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위에서 지적한 3가지 오류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마음의 큰 뜻을 잃었으니,

부처님과 조사들이 더욱 불쌍히 여길 것이고,

총림이 망하는 이유도 모두 이 때문일 것입니다. 

 

참선을 하여 신심을 내는 것은 천생에 한번 만나기 어려운 것이고,

백세에 한번 나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 한 순 간에 진실한 해탈을 얻으려 하지 않으면,

한 생각 굴리는 사이에 번뇌의 구름이 수만 리나 덮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반야의 씨앗이 다시 마음에 들어가길  바라지만,

이것은 마치 썩은 곡식에서 싹이 움트길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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