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야화(山房夜話)

산방야화(山房夜話). 3

通達無我法者 2008. 2. 29. 08:32

 

 

 

산방야화(山房夜話). 3

 

 

 

참선을 하는데 있어 요구되는 마음자세는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옛 사람과 요즘 사람들이 참선을 할 때 마음 씀씀이가 다릅니까, 같습니까?"

 

나는 말했다.

"옛 사람이 도를 배울 때는 도를 얻을 것인가,

얻지 못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다리가 문턱을 넘기 전에 도적질하는 마음을 단번에 잘라서 다시는 그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둘은 순전히 훔치려는 마음으로 주인을 삼습니다.

이것이 옛과 지금의 도닦는 사람의 뚜렷하게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

생사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훔치려는 이 마음이 바로 생사입니다.

 

그러면 열반이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훔치려는 이 마음이 완전히 없는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그대를 위해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생사는 큰 병이며,

佛祖가 말씀하신 가르침은 훌륭한 약입니다.

 

훔치려는 마음은 약에 의해서 치료되고,

생사의 큰병은 불조의 言敎로 치료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고금이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생사의 큰병은 치료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옛 사람들은 순수하게 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신통한 효험을 보았고,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이 약을 다 복용하지 않았는데도 계속해서 약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병을 치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질병까지 유발시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빼어난 의사라도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훔치려는 마음이라 하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바로 알음알이〔識情〕가 훔치려는 마음입니다.

 

본래부터 갖고 있는 法財를 없애고,

공덕을 소멸시키는 것은 모두 이 알음알이〔心意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가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法財를 손상시키고 공덕을 까먹는 까닭은 모두 이 알음알이〔心意識〕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요즘에 귀감이 될 만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六祖스님의 경우 黃梅山의 5조 弘忍스님에게 오자,

그저 방앗간에서 일하게 했을 뿐입니다.

 

또한 위산(위山)스님은 百丈스님의 문하에서 단지 典座의 소임을 보았을 뿐이고,

양기(楊岐: 966∼1046)스님은 십여년 동안 오직 후원 일을 총괄했을 뿐입니다.

演朝스님은 총림에서 방아찧는 일을 했고,

운봉(雲峰: 998∼1062)스님이 화주(化主) 노릇을 한 인연과,

설두(雪竇: 990∼1052)스님이 변소 청소를 했던 일,

자명(慈明: 987∼1040) 스님이 선소(善昭: 947∼1024)스님께 참례하자 선소스님이 희롱하고 웃으며 꾸짖기만 했던 일,

황룡(黃龍):1002∼1069) 스님이 자명스님에게 묻다가 욕만 들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이에 차별적인 인연이 뒤섞여 나오고,

違順의 경계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막힌 곳을 분명하게 뚫어주어 훔치는 마음을 다 없애주고,

각각의 상황에 알맞게 잘못된 점을 고쳐 지극한 이치로 귀결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로 보나 도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훔치는 마음을 곧 없애려 하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의 문제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空寂한 도량에 있지만,

마음은 取捨의 세계에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리들이 절집을 지키고 있으니,

옛사람과 우열을 비교한다면 하늘에서 쓰는 것과 땅에서 신는 신처럼 서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요즈음 사람들은 타고난 약간의 자질만을 자부하면서 명성을 멀리까지 내려고 주제넘게 고인의 훌륭한 말씀을 머리로만 따르고,

힘들고 소소한 일은 가까이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방아나 찧고 전좌나 하는 소임을 어찌 맡으려 하겠으며,

비록 잠자리가 편안하고 배불리 먹는다 해도 어찌 욕구가 다 채워지겠으며,

어찌 방앗간에서 고생스럽게 일하려 하겠습니까?

 

손으로는 주미불자(주尾拂子)를 종횡으로 흔들고 높은 사자법상에 앉게 되면,

깨달을 수 있는 인연은 더욱 멀어지고 훔치려는 마음은 들끊기만 합니다.

후배들을 걱정하여 보살펴주고,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는 시원한 그늘 나무가 되고 자 하지만,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이렇듯 교화하는 방편의 성쇠와 고금의 차이를 따져보면,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모두 훔치려는 마음의 有無에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꼭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훔치는 마음에는 성인과 범부의 차이가 있습니까?"

 

나는 말했다.

"훔치는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如來妙明元心"입니다.

그러나 도를 구하겠다는 뜻이 진실되고 간절하질 못하여,

허망에 가리운 것이 계속되어 훔치는 마음이 된 것뿐입니다.

 

이것은 벼에서 태어난 멸구가 벼를 해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고,

나무에서 발생한 불이 그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있어서 먹고 자는 일은 하루도 안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다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를 구하겠다는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다면,

하루라도 중지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천한 일을 대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하루 종일 몸이 피곤하고 괴롭다 하더라도,

마음은 조금도 꺼려하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눈꼽만치라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때마다 주인에게 매를 맞고 욕을 먹어도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먹고 사느라고 받는 수치는 어찌 그리도 쉽게 잊는지.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먹고 살려는 마음이 진실하교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독한 수치와 추악함조차도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성스러운 도를 구하려 하면서도 훔치는 마음을 없애려 하지 않는 것과 비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범부라 해서 어찌 성인과 다르겠으며,

성인이라고 범부와 다를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오직 훔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질 뿐입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특히 이 점에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혼침과 산란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공부를 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산란해져서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온 힘을 다해 물리치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근기와 능력이 미치지 못해 그리된 것이 아닌지요?"

 

나는 말했다.

아닙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 그대로가 본래의 면목〔本地風光〕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본래의 면목과 昏沈散亂은 본래 둘이 아닙니다.

그대가 정신이 혼미하고 산란한 것을 떨쳐버리려 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본래 自性도 없고 실체도 없는 것이어서 저절로 소멸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선하는 사람의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 생기는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한 생각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하면,

곧 그런 생각을 따라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입니다.

그다름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하면,

그 즉시 그 생각을 따라 또 다른 혼침과 산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백천의 생각 〔念〕이 모두 간절하고 진실하다면,

결국 혼침과 산란은 들어올 곳이 없습니다.

혹 최후의 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간절하고 진실되지 못한 점이 있으면,

그 즉시 그 일념을 따라 혼침과 산란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최초의 일념부터 간절하고  진실해서 心花가 피어날 때까지 그 마음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혼침이니 산란이니 하는 것들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도를 구하는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한 것은 탓하지 않고,

혼침과 산란이 참선에 장애가 된다고 탓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 있으면서 물건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지 못한다고 자기 눈을 탓하는 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또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 혼침과 산란을 느낀다면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렇다고 이 혼침과 산란을 물리치려 애쓰는 것도 잘못입니다.

또 설사 혼침과 산란을 물리쳐 눈앞이 깨끗해졌다 하더라도,

이것은 잘못된 가운데 더 잘못을 저지르는 짓입니다.

 

더구나 혼침과 산란이 본지풍광이라는 것을 옳다고 생각해서 하루종일 망상과 한덩이가 되어 딩굴며 지낸다면 그 잘못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혼침과 산란에 빠지지 않을까요?"

 

나는 말했다.

"만약 마음을 써야할 것이 있다면, 이것은 더더욱 잘못입니다.

혼침과 산란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때는 마음을 써도 쓰지 않아도 모두 잘못입니다."

 

그러자 객승이 말했다.

"언어나 알음알이로 도달할 수 없는 최상의 경지에 관한 말씀〔向上語〕을 저같이 근기가 낮은 사람으로는 이해하질 못하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도를 배우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진실한 마음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자리를 이미 깨달았다면,

부처와 중생이 서로 똑같은 것입니다.

경계가 높으니 낮으니 하는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대가 혼침과 산란을 알아 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걸핏하면 그것의 미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굳이 말로 지적하여 진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일이 이쯤 되었으니,

혼침과 산란의 근본을 찾아 보겠습니다.

 

그대는 無量劫으로부터 번뇌에 오염, 훈습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혼침과 번뇌의 근본입니다.

또한 그대가 지금 물질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바깔 대상 세계를 인식하고,

愛憎取捨의 감정이 들쑥날쑥 일어나는 것도 역시 혼침과 산란의 근본입니다.

 

또한 그대가 최초의 일념에서 생사를 초월하려 한 것이 흔침과 산란의 근본이며,

참선하여 도를 배우려는 것이 혼침과 산란의 근본이며,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려는 것이 혼침과 산란의 근본이며

위없는 대보리를 구하여 열반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혼침과 산란의 근본입니다.

 

나아가서는 세간 혹 출세간의 갖가지 가르침 중에 간직한 털끝만한 알음알이도 혼침과 산란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가령 이러한 혼침과 산란의 근본이 소멸되어 버렸다면,

三千大千世界 어느 곳에서도 혼침과 산란은 털끝만치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혼침과 산란이 없을 뿐 아니라, 眞如인 實際도 없습니다.

성인은 깨닫고 범부는 미혹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한가하게 알음알이로 따져서 조사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참선을 어느 정도 했을 때 주의할 사항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물었다.

"참선하는 사람 중에는 初發心을 위배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말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뭔가 부족하다고 여기게 마련이고,

반면에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마음이 편안한 법입니다.

이것은 사람 사는 데 흔히 있는 일로써,

천하고금이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참선하는 납자라면 마음으로는 늘 뭔가 부족하다 싶어야 하고,

마음을 편히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무언가 부족하게 여길 때,

가없는 성인의 도를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고,

무궁한 결실 또한 이때 보게 됩니다.

 

마음이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인연에 따라 더러워지기도 깨끗해지기도 합니다.

한 순간에도 별별 것을 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業이 되고,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미혹에 빠지니 두고만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까지 객승과의 대화가 미치자 어떤 늙은 비구가 일어나 말했다.

"지난날 세속에 있을 때는「법회경」7권 중에 네 권을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생각하기를 머리 깎고 승복을 입은 후에는 출가 전 외우지 못했던 나머지 세 권을 반드시 외우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출가한 지 20년이 되었는데도 나머지 세 권을 마저 외우기는커녕,

출가 전 외워두었던 네 권마저도 잊어버릴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말을 듣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나는 이 기회를 통하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세속을 벗어나야겠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매양 뭔가 부족함을 느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그 생각에 4권이라도 외울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출가의 목적이 이루어지자,

마음이 방일해져 외워두었던 것까지 모두 잊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근본을 살펴보면,

요즘 참선하는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세상 어디에도 자기 집이 없이 한 몸으로 만 리를 떠돌아 다닐 때는 깨달아 보겠다는 마음으로 오직 참선에만 몰두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눈밝은 스승이 교묘한 질문거리를 만들어 애매한 곳을 물으면,

총명한 재주를 동원해 언어와 문자로 이리저리 따집니다.

어쩌다 그렇게 해서 한 번 印可를 받으면,

거기에 안주해서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마음이 펀해져 허망한 견해가 생겨,

말할 때는 깨달은 듯하나 새로운 경계가 또 나타나면 다시 미혹된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한 처사입니다.

 

옛 사람이 해탈했던 경지에도 물론 도달하지 못한 것이고,

지난날 자신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깨달음을 구하던 마음마저도 몽땅 잃고 만 것입니다.

아!  성현의 학문이 어찌 여기서 머물겠습니까?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간절하지 못하고,

스스로 도를 깨달았다고 만족하는 생각을 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깨달은 뒤에도 漸修 필요가 있습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마음을 깨달은 뒤에도 실천 수행할 필요가 있습니까?"

 

나는 말했다.

"이것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대는 마음을 깨닫는다고 했는데,

본래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데 어찌 마음을 깨닫는다 할 수 있습니까?

'깨달음' 자체가 성립될 수 없으니 '마음'이라 할 때에도 정작 마음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마음이라 할 그 무엇이 없으므로,

有情. 無情을 모두 관찰한다 해도 관찰하는 주체가 그것들과 혼융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털끌만큼이라도 자타와 피차의 구별을 지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속박도 해탈도 없으며,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게 됩니다.

허망과 진실에서도 떠나고, 미혹과 깨달음 어느 것도 아닙니다.

일념이 평등하여 만가지 법이 如如한데, 또 무슨 실천 수행할 일이 있겠습니까?"

 

객승이 또 말했다.

"깨달았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에 쌓인 無明의 미세한 染習이 아직 남아 있는데,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이 갑자기 모두다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실천 수행이 없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나는 말했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情習이 남아 있다면 이것은 깨달음이 뚜렷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깨달음이 뚜렷하지 못하면,

반드시 뚜렷하지 못한 자취를 쓸어버리고 평생을 바쳐서라도 확철대오하도록 해야 합니다.

혹 누가 다 깨우치지 못했으므로 실천 수행을 더 하여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마치 불쏘시개로 불을 끄려다 불길을 더 일어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행동이 될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반드시 부처님의 知見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부처의 지견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과연 부처님의 지견으로 다스릴 수 있는 문제라면,

다스린다는 말부터 벌써 잘못입니다."

 

그러자 객승이 물었다.

 

"그렇다면 실천 수행할 것이 없다는 말씀인지요?"

 

나는 대답하였다.

"이것은 미리부터 실천할 것이 있느니 없느니 하편서 스스로 미혹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니, 정신차려 들으십시오.

부지런히 자신을 채찍질하여 깨달음이 밑바닥까지 도달하고,

그렇게 해서 번뇌를 훌쩍 벗어나야만 실천 수행할 것이 있는지 없는지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3학을 배워 3독을 끊어야 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악을 끊지도 않고 선을 닦지도 않으며,

貪. 瞋. 痴 三毒도 버리지 않고,

戒. 定. 慧 三學도 익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것이야말로 一性平等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

 

나는 말했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자세히 말하고 싶어도 겨를이 없었던 문제였습니다. 

마침 지금 질문을 하셨으니 간단하게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달마대사는 모든 부처님의 心宗을 깨달은 분이니,

外道. 二乘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一心法界 속에는 부처도 중생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생사와 열반도 군더더기 말에 불과한데,

무슨 악을 끊고 무슨 선을 행하며,

무슨 탐.진.치를 버리고 무슨 계.정.혜를 익히겠읍니까?

 

요즘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一心의 요지는 조금도 못깨닫고,

입으로만 3학을 배우지도 말고 3독을 끊으려 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떠들어댑니다.

다만 이것은 미친 짓에 불과합니다.

범부만도 못한 행동을 하여 律儀를 파괴해서 스스로 구렁텅이에 빠지는 행동일 뿐입니다.

 

이야말로 호랑이를 그리려다 잘못되어 개를 그린 격입니다.

악을 끊고 선을 닦는 뜻을 알려면 굳이 문자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자기 마음을 부지런히 참구하면 그뿐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참구하여 더이상 참구할 것이 없으면,

악을 끊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을 닦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는 것과 같아서 꿈속에서는 분명히 대상을 보지만,

말로는 표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문에 확철대오한 사람은 악과 탐욕이 모두 본인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마음을 끊어버려야 할 이유도 없고,

끊어버려야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객승이 또 물었다.

 

"마음을 끊어버릴 필요가 없다면, 갖가지 실천 수행을 해도 됩니까?"

 

나는 말했다.

"그대가 한 이 말은 사실이지 불조께서 매우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선악이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 하면서도 마음을 끊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실천 수행하는 마음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객승이 물었다.

"악.탐 등이 자기의 마음이므로 끊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실천 수행하려 해서도 안된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미 존재한 악.탐 등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나는 말했다.

"그대는 매우 미혹되어 있으므로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惡業과 탐.진.치와 無明煩惱 및 갖가지 망상들은 모두 自性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미혹된 본심 때문에 허깨비가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온도가 내려가면 물이 얼어 얼음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이 마음을 확연히 깨닫기만 하면 모든 허망은 사라집니다. 

이것은 날씨가 따뜻해져 녹은 얼음을 어디로 갔느냐 묻는 것으로써,

이야말로 몹시 미혹된 사람이 하는 짓이라 하겠습니다."

 

객승이 또 물었다.

 

"아무개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악과 탐심이 일어나도 전혀 혼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떤 상태입니까?"

 

나는 말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도 확철대오하지 못하여 번뇌 망상이 조금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더 수행하지 않으면,

끝내는 번뇌망상의 구덩이로 되돌아가는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뚜렷이 깨달아 어젯밤 꿈처럼 확실히 꿰뚫어 보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同事攝法을 실천할 경우는 걸으로 보기에는 흡사 악과 탐심이 있는 듯 해도,

그의 진실한 마음은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러한 행동을 확철대오하지 못한 사람이 흉내를 내면, 그 사람은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선업을 쌓으면 道를 얻을 수 있습니까?

 

객승이 또 물었다.

"사람이 매일 수만 가지 착한 일을 계속해서 한다면,

그 결과 도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말했다.

"도는 無爲가 근본이므로,

선.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미혹과 허망 때문입니다.

 

성인은 그런 미혹과 허망을 타파하는 도구로써 착한 일을 합니다.

그런 善業이 두드러지면 迷妄이 소멸되고,

미망이 소멸되면 악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따라서 모든 악이 사라지고 나면,  모든 선 또한 없어집니다.

 

옛 사람이 '선.악을 모두 생각지 않으면,

마음의 본체를 자연히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의 본체란 지극한 道를 말합니다.

 

만약 악을 버리고 선만 있는 상태에서는 지극한 道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변소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향기로운 냄새를 뿌려둡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부터 악취도 향기도 없는 것만 못합니다.

 

변소는 악에 비유된 것이고,

향기는 선에 비유한 것이며,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는 것은 바로 지극한 道를 비유한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어두운 지하실을 밝히려고 횃불을 켜지만,

그곳이 원래부터 밝은 방만은 못합니다.

여기서 어두운 방은 악을 비유한 것이고,

횃불은 선을,

밝은 방은 지극한 道를 비유한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엄동설한 추위가 싫어 모닥불을 피웁니다.

그러나 이것은 따사로운 방은 있는 것만 못합니다. 

여기서 추위는 악을 비유한 것이고,

모닥불은 선을,

따뜻한 방은 지극한 道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향은 사룰 적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며,

횃불도 켤 때와 끌 때가 있으며,

모닥불 역시 피울 때가 있고  꺼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道만은 영원토록 변치 않고,

세월이 홀러가도 항상 그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어찌 지극한 道를 끊겼다간 계속되고,

생겼다간 소멸하며,

있었다  없어지는 것들과 비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道를 깨닫는 데에 善을 행하는 것이 과연 어떤 효과가 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치가 이러한데,

제가 어떻게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악의 참된 뜻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선.악에 대한 말씀은 이미 들었습니다.

선.악에 대한 것을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때리고 욕하는 것을 악이라 하고,

이런 악행을 참고 보복하지 않으면 선이라 합니다.

 

또 칼로 살인을 하면 악이라 하고,

그것을 모두 받아들여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을 선이라 합니다,

또 음탕하게 많은 것을 탐내면 악이라 하고,

조용히 심신을 가다듬어 경전이나 읽고 있으면 선이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나는 말했다.

"이 말은 다 선.악의 겉껍데기만 말한 것입니다.

선.악의 속뜻은 이것과는 다릅니다.

선.악의 참된 뜻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이익을 주려 하는 것이면 모두 선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짓이면 악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면 일하는 과정에서 설사 욕을 먹고 배척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선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아무말 안해도 자신에게만 이로운 일이면,

그것은 악입니다.

 

이 때문에 성현이 중생들을 교화하여 세상을 구제하느라고 쉴 겨를이 없었던 것은 모두 지극히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겉으로 성현처럼 언행을 아름답게 꾸며도 남에게 이익을 주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이것은 악 입니다.

 

그런데 더우기 겉모습마저도 포악하고 성낸 모습으로 쉬지 않고 날뛰는 것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행동은 이렇게 하면서도 칭찬을 바라는 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諸子百家와 참선은 어떤 관계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孔子. 孟子 등의 서적은 王道를 말하여 仁義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또 老子. 莊子의 책에는 皇道를 말하여 無爲사상을 주장했습니다.

諸子百家의 서적은 覇道를 잡다하게 설명하며 功利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처님 경전에서는 단지 성품자리만을 밝혀 이르기를,

'모든 법은 오직 마음에서 발현된 것이다'고만 하며,

一念도 내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각각 달라서 서로 공통된 부분이 없는 듯 합니다.

과연 공통되는 부분이 전혀 없습니까 ?"

 

나는 말했다.

"공통된 부분이 없다고 한다면 편협스러운 것이 되고,

있다고 한다면 경솔한 것이 됩니다.

깨닫는 공부는 특정한 부분을 유난히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가 깨닫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깨닫고 나면 서로의 차이가 없어져 三敎의 성인이 하신 말씀이 서로 동일한 줄 알게 되고,

세간 출세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비록 「四庫書」를 달달 외워도,

그것은 多聞과 我見일 뿐입니다. 

이른바 印度의 聰明外道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이 확철대오하려 하지 않고 문자만을 이해하려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총명하지 못한 자들은 마음의 妄情을 죽여 바르게 깨달으려 하지는 않고,

매양 문자와 말만 따지려 합니다.

이렇게 하면 깨달음은 고사하고 알음알이〔識情〕의 사량분별만 늘어나 걸핏하면 성인의 도를 어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교화의 방편은 쇠퇴하고,

총림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벽암록으로 깨달음의 증표를 삼을 수 있습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종문 중에는 「碧岩集」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圓悟克勤)(1063∼1135)스님이 夾山에 머물 때,

설두(雪竇)스님의 頌古를 취하여 綱要를 나누어 배열하고,

말씀을 해설하여 만든 책입니다.

 

그 책의 설명은 세밀하고도 분명합니다.

풍부하고 유려한 것으로 말한다면 明珠와 貝玉을 수북이 쌓아 놓은 것 같고,

그 충만해 넘치는 것으로 말한다면 황하의 상류인 禹門을 가로막아 역류가 소용돌이치며 물결이 출렁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정말이지 매우 위대한 책입니다.

법을 깨달았어도 자유롭지 못한 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한다는 사람들이 모두 그 책을 사다리 삼아 깨달음을 얻으려 하자,

이 사실을 원오스님의 제자인 묘희 (妙喜:1088∼1163) 스님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책에 얽매여 배우는 사람들이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혹시나 잊어버릴까 염려해서 민(閔) 땅에 있던 板刻을 불질러 버렸습니다.

 

지금 전국 선원에서 다시 「벽암록」을 간행하는데,

이것은 말세에 배우는 자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나는 말했다.

"아닙니다. 중생들에게는 각각 자기에게 現成公案이 하나씩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靈山에서 49년 동안 설법하시면서도 이것을 일일이 다 설명하지 못하셨고,

 

달마대사도 서쪽으로부터 만 리 길을 왔지만 이것을 일일이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덕산스님과  임제스님 역시 이것을 다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설두스님이 어찌 이것을 다 頌할 수 있으며,

원오스님이 이것을 다 해설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벽암록」이 백천만 권이 있다 해도 현성공안의 하나인들 더하거나 덜 수 있겠습니까? 

묘희스님이 이런 이치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벽암록」판각을 불지른 것은,

마치 石女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시「벽암록」을 간행한 사람들의 행동은 석녀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권유하는 것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객승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각자의 현성공안은 끝내 불조의 言敎와는 관계가 없는지요? 

또 우리들은 무엇을 참고로 하여 깨달음의 증거를 삼겠습니까?"

 

나는 말했다,

"참고로 할 것도 없고, 증거를 삼을 것도 없습니다. 

오직 각자마다 한 순간에 回光退步하여 눈앞의 見聞覺知를 그대로 한꺼번에 뒤엎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바람결에 들려오는 폭포수 소리와 비온 뒤 시냇물 소리가 모두 頌古인 것을 알게 되고,

空山에 진동하는 우뢰와 대낮에 울리는 자연의 청아한 음향이 모두 해설〔判〕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넓으며,

밤은 어둡고 낮은 밝은데 萬象森羅가 정연하게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성공안인 「벽암집」인 것입니다.

 

비록 백 천의 설두스님과 원오스님이라 해도 현성공안의 그림자에는 쩔쩔멜텐데,

어찌 언어나 문자를 사용해 이러쿵저러쿵 논란할 수 있겠습니까?

선배들의 가르침이 어떤 때는 왕성하게 만들고 어떤 때는 부숴버리며,

어떤 때는 금지하고 어떤 때는 장려하는 것은,

다만 세속의 일반적인 풍속을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지,

이치가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벽암집」이 참선하는 자들을 잘못된 길로 들게 하여 스스로 깨닫는데 장애가 된다고 말하나,

두 스님의 마음을 소급해 추측해 보면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존께서 법계 중생 모두가 여래의 智慧德相을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妄想執着 때문에 증득하지 못하는 현상을 올바른 法眼으토 환히 관찰하시고,

당신 스스로 聖道를 가르쳐 중생을 모든 집착에서 떠나게 해야겠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왜 모르셨겠습니까?

聖道 또한 중생을 구속하여 언어로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듣는 이의 근기에 따라 무려 300여 회나 설법하신 대(大).소(小).편(偏).원(圓).돈(頓).점(漸).반(半).만(滿) 등의 가르침은 하루도 입에서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즘이나 옛날의 참선하는 자들은 그것이 언어로 표현된 방편인 줄을 모르고 참된 법이라고 여겨 집착합니다. 

그들이 각기 이해한 데에 집착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분분히 내세워 시비가 복잡하게 일어 났읍니다.

끌내 一大藏敎를 能과 所로 쪼개어 「벽암집」의 원래 취지와는 아주 멀어 졌습니다. 

성인의 가르침도 그러한데 더구나 범인들의 가르침은 어떻겠습니까?

 

그렇기는 해도 言敎의 장단점을 잘 응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당사자가 자기 일에 얼마나 진지하고 절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의 일에 진지하고 절실하다면 하잘 것 없는 이야기도 생사를 초월하는 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경전 중에 '거위왕이 우유만 가려 먹는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스승과 제자가 진지하게 자기의 일을 밝힐 수 있고 자기 宗門의 死活을 걸머지겠다는 뜻이 있다면,

절대로 문자에 의지해 의미를 깨달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 스스로에게 물어 참구한다면 「벽암집」의 유무에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사들도 계율을 지켜야 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고봉(高峰: 1238∼1295) 스님께서 제자들에게 受戒할 때에 손가락을 태우게 했다는데,

諸方에서는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정말 고봉스님이 그랬습니까?"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또한 그런 소문을 직접 듣고, 스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할 것이 없다. 저들이 방편임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인데,

난들 어찌 모르겠느냐'

 

달마대사께서 흘로 전하신 성품을 바로 가리키는 선은 文字도 쓰지 않았는데 무슨 戒를 주고 받겠습니까?

그러나 달마스님이 계율을 말씀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근본 宗旨만을 투철하게 관찰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고,

둘째는 제자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첫째의 근본 종지만을 투철하게 관찰하게 했다는 뜻은 달마스님은 오로지 부처님의 心印을 전하는 것으로써 종을 삼았습니다.

오직 바로 가리키는 것에만 힘을 기울여 단 한번에 훌쩍 깨달음의 자리에 그대로 들어가게 했을지언정,

대.소 二乘의 단계를 차례차례 거치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종지가 이와 같으므로 계율을 말한다면 벌써 잘못입니다.

 

다음으로 제자들을 믿었다는 뜻은,

일반적으로 달마스님의 문하에는 모두가 상근기의 인재들만이 모였었습니다.

숙세에 반야의 종지를 익히고 最上乘의 근성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戒.定.慧 三學을 닦았기 때문에 또다시 계율의 受持를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달마스님 당시에는 계율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아도 잘 지켜졌던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굳이 계율을 지키라고 강조하지 않았지만,

어느 제자도 고의적으로 계율을 어기는 자가 없었습니다.

 

달마스님 이후로 대승의 근기와 성품을 갖춘 선사들이 천지 사방에서 구름처럼 일어나고 바닷물이 용솟음치듯 하였습니다.

달마스님 때부터 계속하여 계율을 말하지 않았던 것은,

종지로 볼 때에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애초에 계율을 지키지 않고 부처님의 心宗을 전수했다는 소리는 내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

옛날에 자수화상(慈受和尙: 1077∼1132)은 宗門의 빼어난 지도자이십니다.

항상 제자들이 戒業을 잘 지키는 것을 극도로 찬양하였습니다.

 

또 진헐화상(眞歇和尙)은 '勸發菩提心大會'롤 개최하여 사부대중과 함께 계율을 권장 선양하였습니다.

이 두 스님은 모두 점진적인 방편을 사용하신 분들이십니다.

옛날에 담당무준(湛堂無準: 1061∼1115)스님께서 梁山乘스님을 찾아 뵙고 인사하자, 승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즉 '어찌 계율을 받지 않고도 감히 불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러자 담당 준스님은 합장예배하고 말하기를,

'계 받는 장소가 계일까요?  아니면 삼감마(三갈磨)와 청정한 아사리(阿사梨)가 계인가요?' 라고 했습니다.

 

승스님이 깜짝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하자,

담당 준스님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감히 계를 받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하고는,

곧 바로 康安律師에게 가서 具足戒를 받았습니다.

 

옛부터 禪家에는 계율에 대한 말이 아주 많았지만,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들지 못하겠습니다.

이른바 방편이란 상황에 알맞게 운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봉스님이 수계한 것을 조금도 이상스레  여기지 마십시오.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 대중 생활을 할 때는 開慶. 景定 연간이었습니다.

그때도 淨慈寺. 雙徑寺같은 절은 대중의 수효가 400∼500을 넘었습니다.

그 절의 주지스님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술을 마시면,

항상 술을 마신 것이 아닌데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꾸짖었습니다.

 

가끔 술을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가 방탕하여 피하거나 거리끼는 것이 없는 듯 합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는 일반 신자들을 위해 五戒를 말씀하셨고,

비구들에게는 四分. 僧祗 등의 계율과,

三聚淨戒, 具足大戒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승려들은 일반신자가 지키는 戒도 못지키는데,

律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위산스님도 '止持作犯은 처음 발심한 수행자들의 수행지침이다.

그러나 처음의 발심은 부처님의 心宗을 전하는 천리 길의 첫걸음으로서,

첫걸음을 내딛지 않고 천 리 길을 갈 수 없다.

또 옛 사람들은 계율을 지키고 도를 배우는 것이 수행의 근본이라 생각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根性이 둔해서 평생 수행을 했는데도 道眼이 밝아지지 않으면,

계의 힘으로라도 道念을 잃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세에는 도를 이루기가 쉽습니다.

계의 중요성을 거론한 경전으로는「楞嚴經」.「圓覺經」을 들 수 있는데,

모두 大乘圓頓의 중요한 밀씀입니다. 

 

의심스런 부분이 있으면, 다시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서는 수행의 근본을 계라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계는 기초이고,

도는 집이라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이 한 몸을 어디에 의탁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근기에 맞게 방편을 말한 것이므로,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계율지키게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편 예컨대 百丈스님은 허다한 爲儀와 禮法을 세우셨습니다.

스님은 사소한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도 빈틈없이 계율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달마대사의 사람의 본성을 바로 가리키는 종지에 비교할 때,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중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부터 총림에는 예법이 없어서는 안되게 되었다'고 예법의 세세함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율이 총림예법의 근본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근본없이 枝葉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선배 스님들도 '아아! 道體를 잃으면 계의 힘이 소멸하고,

계의 힘이 소멸하면 총림의 예법도 잃게 된다.

 

그리고서 어떻게 천하의 인심을 다시 道로 돌아가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금일 제자들에게 계율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고 했는데,

모두 진실한 말씀입니다.

그대가 공연한 질문을 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소리를 지껄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수행과 신통력은 어떤 관계가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불. 보살은 모두 神通하신데, 이것은 수행하여 修證한 것인지요?"

 

나는 말했다.

"神通力은 수행해서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신통은 불.보살들이 久遠劫 동안 四無量心. 六波羅蜜을 닦고,

갖가지 善行을 순수하케 닦아 생긴 능력입니다.

'신통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진다'

고 말한 뜻은 위와 같은 갖가지 수행을 하지 않으면 신통을 얻지 못한다 것입니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한 뜻은

불.보살이 수행한 바라밀과 공덕은 신통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행해진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통은 대자대비한 마음이 자기의 願行에 뿌리박혀 저절로 얻어진 것입니다.

 

가령 불.보살이 구차하게 신통을 구하고자 한 순간이라도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이 한 생각이 장애가 되어 모든 선행을 다 수행해도 결국은 有漏의 因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어떻게 自在한 解脫變化의 신통을 얻겠습니까?"

 

혹 부처님의 心宗과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願行에 계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밖의 二乘의 小果로부터 外道에게도 신통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통이 아니라 요술로서 단순한 변화일 뿐입니다.

요술은 모두 作爲的 思惟에 의해 얻어진 것이므로,

괴이한 것을 나타내 중생을 현혹하는 生滅의 因일 뿐입니다.

 

하지만 불.보살이 대자대비한 마음을 내어 인위적 조작없는 원력으로 발현한 신통은 法性과 같습니다.

불보살은 털구멍 하나에서도 백 천의 광명과 백천의 莊嚴具를 드러내어 법계를 채우고,

 

중생들이 좋아하는 것을 모두 얻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 보살의 해탈한 마음 속에는 신통력을 가졌다는 생각이 없고,

또한 신통을 나타내겠다는 생각도 없으며,

그 신통력으로 중생들에게 복을 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성은 평등하여 一異. 自他. 能所의 차별이 없으므로,

신통 또한 그러한 차별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불.보살의 신통력이 결코 닦아 얻은 것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닦아 얻은 것이 아니라면,

수행을 하지 않는 범부에게는 왜 신통력이 없는지요?"

 

나는 말했다.

"범부라고 해서 그외 법성에 신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범부와 축생들은 모두 몽매하여 그것을 스스로 알지 못할 뿐입니다. 

범부는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願行으로 바라밀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장엄한 신통력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반면 불.보살은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원행을 했기 때문에 신통을 얻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의 十大惡業을 짓고도 참회를 하지 않는 중생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생명이 끝나면,

그  業力 때문에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져 갖가지 괴로움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이 악업을 지은 것은 단지 迷妄한 마음이 생겨서이지,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리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옥이란 自性도 없고 실다운 법도 없는 것입니다.

지옥은 바로 자신의 허망한 업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두어야 하겠습니다. 

 

이와같이 불.보살의 신통도 자성이 없으며 실다운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계.정.혜와 바라밀을 잘 닦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니,

다시 무엇을 더 의심하겠습니까?"

 

요즈음 스님들에게는 왜 신통력이 없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西天의 二十七祖師는 모두 신통력이 있었으며,

달마대사 역시 신통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달마대사 이후에는 왜 신통력을 가진 스님이 없었을까요? 

한두 분 있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자주 듣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印度의 外道도 다 인위적인 思惟에 의한 신통변화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 할 때는 신통력을 부리지 않고서는 그 외도들을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인도 땅에서는 應化하신 불.보살들이 祖師의 몸으로 화현하시어 불법을 전수하셨읍니다.

 

달마대사같은 분은 관음보살의 응신이라고 합니다.

달마대사 이후 한두 분 신통력을 갖춘 스님이 출현한 것은 바른 가르침을 드날리도록 도운 것뿐입니다.

그러나 신통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부처님의 心宗을 깨달으려고만 노력했습니다. 부처님의 심종은 百千三昧와 갖가지 신통의 씨앗으로서,

그 씨앗이 뿌려지기만 하면 반드시 신통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진실하게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어쩌다 자신에게서 神異함이 발생하여도 그 자리에서 제거해 버립니다.

그는 이것을 기이하게 여기지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만일 구차스럽게도 이것을 기이하게 여기다가는 본심을 잃게 됩니다. 

 

깨달은 사람도 신기함을 자랑하지 않는데,

깨닫지 못한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올바른 깨달음은 구하지 않고 神通三昧만 얻으려 한다면,

이것은 불자가 아니고 외도의 권속입니다.

이렇게 하면 깨달음의 씨앗(正因)을 영원히 잃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옛 스님들은 신통도 전수를 하셨는데,

중국에 와서 기이한 것을 말한다고 꾸중을 들을까봐 전수가 끊어졌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을 미혹시킬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미혹시키는 말이니,

굳이 그렇게 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도대체 앎〔知〕이란 무엇입니까?

 

객승이 물었다.

"저는 반평생 동안 학문을 닦아왔습니다. 

그리하여 佛祖의 言敎를 섭렵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마주하면 언제나 늘 아는 것 갈았습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자극에  초연하지 못하고 愛憎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나는 말했다.

"그대의 말은 앎(知)을 개괄적으로는 설명하긴 했지만,

핵심을 찌르지는 못했습니다.

앎에는 靈知도 있고, 眞知도 있으며, 妄知도 있읍니다.

영지는 바로 道이고, 진지는 곧 悟이고, 망지는 즉 문자로 아는 것입니다.

 

앎이라는 측면에서는 모두 같지만 나눈다면 하루와 永劫처럼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참선하는 사람이 이치는 헤아려보지 않고,

대충 알고서 허망한 집착을 내고 시비를 일으켜 도의 근원을 흐려 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매몰시켜 버립니다.

 

배휴(裴休: 797∼870)가 말한 것처럼 '血氣가 있는 생명체에게는 반드시 앎(知)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앎은 다 똑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靈知를 말한 것입니다.

 

영지는 범부와 성인, 미혹과 깨달음에 관계없이 조금도 차이가 없는 앎입니다.

이것은 본래부터 마음 바탕에 넉넉히 갖추어진 것으로서 더하거나 덜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일체의 법이 마음에 相卽한 自性임을 알았다면,

지혜의 몸〔慧身〕을 성취하는 것이 다른 깨달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고 한 것과 같으며,「

 

원각경」에서 '헛꽃(空華)인줄 알았다면 바로 윤회가 없으리라'한 것과,

'허깨비인 줄알고 그대로 떠나면 방편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한 것과

다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眞知는 바로 悟入해서 된다는 것입니다.

미혹의 구름이 활짝 걷혀서 사량분별을 뚝 끊고 알음알이 내지 않기를 마치 무슨 일을 오랫동안 잊었다가 문득 기억해 내듯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解脫하여 모든 것이 다 진실해집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 나머지는 결코 옳을 리가 없습니다. 

 

또 「원각경」에서 '중생은 아는 것(解)이 장애가 되지만,

보살은 깨달음(覺)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세 중생이 成道하기를 바라거든 깨달음(悟)을 구하지 말라,

그것은 多聞만을 더하고, 我見만을 키울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妄知를 통해 깨달으려는 것을 통렬히 지적해 말한 것입니다.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고 성품을 밝히는데,

종일토록 수없는 변론으로 결론에 도달하려는 것이 바로 망지입니다.

이것은 따져볼 것 없이 이미 그 이전에 잘못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께서는,

雪山에서는 깨달은 그림자만을 보이셨고,

최후로 백만 대중 앞에서 꽃 한가지를 들어  깨달은 이치를 나타내셨습니다.

 

조사들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이 서로 동일하지 않았으나,

가까이하면 마치 불무더기와 같았고,

태아(太阿)의 검처럼 날카로왔으며,

우뢰와 같이 우렁차고,

독약같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語默動靜하는 사이에 끝내 바느질한 흔적도 지름 길도 용납하지 않은데는 다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宗門에서는 깨달음의 자취를 찾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法塵이라고 비난했고,

견해의 가시라고 배척하였습니다.

 

종문에서 이렇게 한 것은 迷와 悟를 둘 다 잊어버리고 신령한 근원에 젖어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혹 이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아는 것으로 걸핏하면 허망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봉사가 횃불을 들고 대낮에 길에 나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길을 밝히는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계속 횃불을 들고 있다가는 손마저 태우게 될 것입니다.

 

나 또한 眞知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으로서 妄知를 쓰는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내 자신을 경책했을 뿐입니다.”

 

세상사가 수행에 방해가 됩니까?

 

객승이 질문했다.

"번뇌라는 두 글자는 세속에서 쓰는 말입니다만,

그것의 근원(因)은 무엇이며 그 뜻은 무엇인지 모르겠읍니다."

 

나는 말했다.

"迷妄이 바로 번뇌의 근원이고,

물들여 더럽힌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

미망이란 자기의 마음이 미혹되어서 일체의 법은 自性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성이 없다는 뜻은 性品이란 본래 空寂하여 知見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서 사람들은 妄情을 일으키고,

일체의 법을 잘못 인식하여 실제로 있다(實有)고 믿는 것입니다. 

 

한번 있다(有)는 견해에 떨어지면,

取捨順逆의 생각이 나(我)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자기 생각에 맞으면 사랑하고,

어긋나면 미워합니다.

 

또한 사랑하면 취하여 받아들이고,

증오하면 버리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심해지면,

자기에게 좋으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노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마음은 의식에 속속들이 잠복해서 마음대로 날뛰고 아무 때나 막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五欲과 七情에 얽매이고,

생각은 이리저리 날뛰게 됩니다.

여기에 오염되면 六凡이 되고,

다행히 여기에 물들지 않으면 四聖이 됩니다.

 

迷와 悟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번뇌에 얽매인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한 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본래 청정하고 진실된 인간의 성품에는 예토부터 지금까지 따로 법을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청정함과 진실됨을 얻거나 잃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온 천지에 가득했고,

모든 것을 다 포함했고,

분명하여 결코 안주하는 모양(住相)이 없읍니다.

중생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걸핏하면 바깥 경계를 좇습니다.

 

그 무엇에라도 의지하면 모두가 번뇌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인이니 범부니 가릴 것도 없이 모두 번뇌에 오염되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번뇌는 계율로 다듬어진 몸을 심하게 하고,

定의 근원을 혼탁하게 하며,

지혜(慧)의 거울을 흐리게 합니다.

 

그 결과 탐욕의 뿌리는 더욱 견고해지고,

분노의 불꽃은 더욱 치솟으며,

어리석은 구름을 더욱 퍼지게 하며,

惡道를 열고 善門을 폐쇄하며,

業緣을 돕고 道力을 소멸시킵니다.

 

번뇌의 허물은 이 외에도 끝이 없습니다.

요즈음 참선하는 이들은 모든 행위가 모두 번뇌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몸은 어느 것도 침범하지 않는 곳에서 편안히 살고자 합니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언잖게 하고 번거롭게 하면 '도력을 소멸시킨다'고  말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립니다.

 

그 기상이야 갸륵하다고도 하겠지만,

이것은 오히려 미혹한 가운데도 더더욱 미혹된 사람의 행동입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도를 의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번뇌는 미망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결코 세상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번뇌가 세상일에서 나왔다면 배가 고파도 먹지 말아야 하고,

추워도 옷을 입지 말아야 하며,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따뜻한 집을 그리워하지 말아야 하고,

길을 가도 남이 닦아놓은 길로는 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다가는 머지 않아 죽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정말로 이와 같이 한다면 곡식은 농사를 지어서 나왔고,

옷은 베틀에서 만들어 졌으며,

집은 건축하고 보수하는데서 나왔고,

도로는 길을 개척해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령 사람들이 제각기 세상일을 분담해서 하지 않는다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기지 물품을 어찌 얻겠습니까?

또 이것은 바로 지금 도를 수행하는 이 몸이 본래는 없었는데,

부모가 양육해주신 노력으로 생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더우기 부모가 어루만지고 안아준 수고로움으로 자랐다는 것도 생각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옛부터 도가 광대하고 덕이 구비된 佛祖께서도 모두 밥먹고, 옷입고,

가옥에서 거주하며, 땅을 밟고 걸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조들은 확연히 깨달은 원만청정한 自心이 법계에 가득차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한 찰나 사이에 팔만 번뇌를 8만 佛事로 바꾸어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永嘉스님께서는, '한 법도 보지 않으면 바로 如來이다. 

굳이 그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觀自在菩薩이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自心을 깨닫는 것 외에 다른 법이 있어 번뇌가 되겠습니까?

이 때문에 華嚴會上의 모든 善知識들은 모두 번뇌에 의지하여 菩薩道를 실천했고,

菩薩行을 닦았습니다.

이것은 장엄한 부처님의 淨土에 들어가는 하나의 중요한 관문이었던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번뇌를 떠나서는 6바라밀도 없고,

번뇌를 버리면 四無量心도 없으며,

번뇌를 떠나서는 성현도 없고,

번뇌가 다하면 해탈도 없다는 것을... 

 

번뇌라는 것은 三世의 불조와,

十方의 보살들과,

가없는 선지식들의 모은 戒定慧와,

수많은 善功德을 잉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번뇌가 없다면 성현의 중생구제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참선하는 자가 이 이치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허망하게 기뻐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냅니다.

번뇌를 가지고 번뇌를 제거하려 하면 더더욱 미혹만 증가할 뿐입니다.

 

聖人은 이러한 중생의 번뇌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능엄경」에는

'나는 손가락을 누르기만 해도 海印의 광채가 발현하지만,

너희들은 마음을 조금만 움직여도 번뇌가 먼저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어찌 사람들을 속인 것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사람마다 이 자리에서 그윽히 성인의 마음에 계합하여,

번뇌를 그대로 오묘하게 사용하여 보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백만이나 되는 功德行으로 번뇌를 씻어 내려고 할지라도 성인께서는 오히려 쓸데없는 짓이라고 꾸짖으실 것입니다.

번뇌를 씻어버리려는 것도 꾸짖으시는데,

더구나 마음이 옹색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려 하지 않고,

다만  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는 것만으로 구실을 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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