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3칙 마조의 일면불〔馬祖日面佛〕

通達無我法者 2008. 2. 29. 22:01
 

 

 

제3칙 마조의 일면불〔馬祖日面佛〕


< 垂示 >

垂示云, 一機一境,一言一句,且圖有箇入處,好肉上剜瘡,成窠成窟.大用現前,不存軌則.且圖知有向上事,蓋天蓋地,又摸索不着.恁麽也得,不恁麽也得.太廉繊生.恁麽也不得.不恁麽也不得.太孤危生.不涉二塗,如何卽是.請試擧看.


(수시)

한 기연〔一機〕, 한 경계〔一境〕, 한 말씀〔一言〕, 한 구절〔一句〕에서 (깨달아) 들어갈 곳을 찾으려는 것은 멀쩡한 살을 깎아 부스럼을 만들고 고정된 틀〔窠窟〕을 만드는 것이다. 큰 쓰임〔大用〕이 목전에 나타남에는 일정한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데 나아가 끝없는 초월의 일〔向上事〕을 알려고 한다면 온 천치를 뒤져봐도 찾을 수 없다.

이래도 되고 이러지 않아도 되지만, 이는 너무나도 미세미묘(微細微妙)한 것이다. 이래도 안 되고 이러지 않아도 안 되지만, 이는 몹시 고준하여 양쪽(二塗)의 그 어디에도 빠져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거량(擧揚)해 보리라.


(본칙)

마조 도일(馬祖道一)스님의 몸이 편치 못하자.( 擧. 馬大師不安.)

-이 노인이 남에게까지 누를 끼치는구나.(這漢漏逗不少.帶累別人去也.)


원주(院主)가 물었다. “스님, 요즈음 몸이 어떠하십니까?"(院主問,近日尊候如何.)

-4백 4가지의 병들이 일시에 생겼구나. 3일 후에 (마조스님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면 훌륭하다 하리라. 인의(仁義)의 도리로써 여쭙는 인사구나.(四百四病,一時發.三日後不送亡僧,是好手.仁義道中.)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지.” (一面佛 月面佛.)

-매우 분명하구나! 제자를 기르는 솜씨여. (可煞 新鮮.養子之緣.)


(평창)

마조스님의 몸이 편치 못하자, 원주가 “스님, 요즈음 몸이 어떠하십니까?”라고 물으니, 스님은 “일면불 월면불이지”라고 하였다. 스님께서 본분의 일로써 제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불도가 빛날 수 있었겠는가? 이 공안의 핵심을 알았다면 높은 하늘〔丹霄〕에 홀로 걷겠지만 핵심을 모른다면 반드시 마른나무 바위 앞〔枯木嵓前〕에서 길을 잘못 들고 말 것이다. 본분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여기에 이르러 모름지기 농부의 소를 빼앗고 주린 자의 밥을 훔쳐먹는 수완이 있어야만이 비로소 마조스님이 사람을 지도하는 법을 보게 될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마조스님이 원주를 제접했다”고들 한다. 좋아하고 있네!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요즈음 대중들이 이를 잘못 이해하고서 눈을 부릅뜨고 “여기에서 왼쪽 눈은 일면(日面)이고, 오른쪽 눈은 월면(月面)이다”라고 하나, 이와는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당나귀띠 해가 되더라도 꿈에도 보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옛사람의 뜻을 잘못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마조스님이 이처럼 말씀하셨지만 본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어떤 사람은 “평위산(平胃散 : 뱃속을 편안하게 하는 가루약) 한 잔을 달여 오너라”라는 뜻이라고 말하지만, 무슨 근거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어떻게 하여야만 평온할 수 있을까? 이 때문에 (盤山스님은 이르기를) “향상일로(向上一路)는 1천 성인도 전하지 못하는데, 배우는 이들이 고생고생 하는 것이 마치 물에 어린 달 그림자를 잡으려는 원숭이와도 같다”고 말하였다.

이 “일면불 월면불”이란 몹시 알아차리기 어렵다. 설두스님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송(頌)을 붙이기 어려웠으나, 확실하게 알았기 때문에 평상시의 수행을 발휘하여 그것을 해석했다. 여러 사람들은 설두스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가? 아래의 글을 보아라.


(송)

일면불 월면불이여! (一面佛 月面佛.)

-입을 열어 뱃속을 들여내 보이다. 마치 양쪽에서 거울이 서로 마주 비춤에 그 가운데 어떤 형상도 없는 것 같구나.(開口見膽.如兩面鏡相照,於中無影像.)


오제 삼황(五帝三皇)은 무슨 물건인고? (五帝三皇 是何物.)

-대단하군. 그를 속이지 않는 것이 좋다. 귀하기도 하고 천하기도 하구나.(太高生.莫謾他好.可貴可賤.)


20년 동안 괴로움을 겪으면서 ,( 二十年來曾苦辛,)

-본래 그대 스스로 번뇌의 풀에 떨어진 것〔落草〕이지 산승과는 상관없다. 벙어리가 쓰디쓴 외를 먹는구나.(自是你落草.不干山僧事.啞子喫苦瓜.)


그대를 위하여 푸른 용이 사는 동굴을 몇 번이나 내려갔던고? (爲君幾何蒼龍窟.)

-그럴 필요가 뭐 있느냐? 그릇되이 마음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기특함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何消恁麽.莫錯用心好.也莫道無奇特.)


억울하도다.(屈 )

-남을 근심시키는구나. 근심있는 사람이 근심있는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愁殺人,愁人莫向愁人說.)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구나! (堪述.)

-누구에게 말할꼬? 근심있는 사람과 더불어 말하면 더욱 그 사람을 근심시킬 뿐.(向阿誰說.說與愁人愁殺人.)


눈 밝은 납승이여, 가벼이 굴지 말라. (明眼衲僧莫輕忽.)

-더더욱 신중히 하여야 한다. 쯧쯧, 거꾸로 삼천리나 물러섰군! (更須子細.咄.倒退三千.)

    (근원적인 본래심로 되돌아감)


(평창)

신종(神宗, 재위 : 1067 ~1085)이 제위(帝位)에 있을 때 이 노래가 나라를 풍자한 것이라 하여, 「대장경」에 입장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설두스님이 맨 먼저 “일면불 월면불이여”라고 하고, 이 말을 마치고 “오제 삼황은 무슨 물건인고?”라고 했다. 말해보라, 그 뜻이 무엇인가를. 조금 전 말을 마치고 뒤이어 그것에 주석을 붙였다. 그러므로(梁山스님이)이르기를 “사해(四海)에 낚시를 드리우는 것도 사나운 용을 낚으려 함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한 구절로써 벌써 (한 말을 ) 끝마쳤다고 하겠다.

뒤에 설두스님은 자신이 평상시에 마음쓰고 참구하였던 바를 노래하였다. “20년 동안 괴로움을 겪으면서 그대를 위하여 푸른 용이 사는 동굴을 몇 차례나 갔던가?”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푸른 용이 사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여의주를 얻으려는 것과 매우 같다고 하겠다. 뒤에 미혹의 칠통을 타파하여 제법 기특하다고 여겼더니, 겨우 “오제 삼황은 이 무슨 물건인고?”라고 말할 정도밖에 못 되네. 말해보라, 설두스님이 말한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를. 모름지기 스스로 뒤로 물러나 보아야만 비로소 그의 핵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듣지 못하였는가? 흥양(興陽)의 시자(侍者)가 법원(法遠)스님의 질문에 대답했던 것을. 법원스님이 묻기를, “사갈 용왕이 바다에서 출현하자 천지가 진동하는데,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만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하니, 시자가 “금시조왕(金翅鳥王)이 우주에 날개가 미치는데, 어느 누가 거기에 머리를 내밀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법원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갑자기 나오면 어떠합니까?”

“매가 비둘기를 낚아채듯 하겠지만 그대는 믿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체험해야만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싹 움츠려 두 손을 가슴 위에 앉고 세 걸음 뒤로 물러나겠습니다.”

“수미산 아래의 검은 거북이 자꾸만 이마에 점 찍히기를 또 기다리네.”

이상과 같은 배경에서 “오제 삼황도 무슨 물건인고”라고 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설두스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만 “나라를 풍자했다”고 하니,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는 정견(情見)일 뿐이다. 이는 선월(禪月 : 832~912)스님도 ‘제공자행(題公子行)’이란 시에서 이르고 있다.


화려한 비단옷에 손에는 매를 들고

한가로이 걷는 모습 퍽이나 우쭐거린다.

농사의 어려움은 전혀 모르니

오제 삼황이 이 무슨 물건인고


설두스님은 말하였다. “억울하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구나. 눈 밝은 납승이여, 가벼이 굴지 말라.” 많은 이들이 푸른 용이 사는 동굴 속에서 살림살이를 한다. 설령 정수리에 안목을 갖추고 팔꿈치 뒤에 부적〔肘後符 : 道家 護身符〕을 갖춘 눈 밝은 납승이 온 천하를 비춰 보아도, 여기데 이르러서는 결코 가벼이 굴지 말라. 모름지기 이는 신중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