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칙 趙州至道無難
(垂示)
垂示云,乾坤窄,日月星辰一時黑.直饒棒如雨点,喝似雷奔,也未當得向上宗乘中事.設使三世諸佛,只可自知.歷代祖師,全提不起.一大藏敎,詮注不及.明眼衲僧,自救不了.到這裏,作麽生請益.道箇佛字,拖泥帶水.道箇禪字.滿面慚惶.久參上士,不待言之.後學初機,直須究取.
(수시)
하늘과 땅이 비좁고,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일시에 빛을 잃고 어둡다. 설사 비가 쏟아지듯 수없이 ‘몽둥이질’을 하고, 우뢰같이 ‘고함(할)’ 소리를 질러대도 끝없이 초월해 가는〔向上〕종승(宗乘)의 일엔 당해 낼 수 없다.
설사 과거 현재 미래 三世의 많은 부처님이라도 부처님끼리만이 알 수 있을 뿐이며, 역대의 조사도 온전히 밝혀내지 못하고, 일대장교(一大藏敎)로서도 설명하지 못하며, 눈 밝은 납승이라도 제자신조차 구제하지 못한다.
여기에 이르러서 어떻게 법문을 청할까? 부처를 운운하는 것은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격이요, 참선을 운운하는 것은 얼굴 가득히 부끄러울 뿐이다. 오랫동안 참구한 빼어난 사람이라면 말할 것이 없겠지만, 후학으로서 처음 배운 이라면 모름지기 참구하도록 하라.
(본칙)
조주(趙州 : 778~897)스님이 대중에게 법문을 하였다. (擧.趙州示衆云)
-이 늙은이가 무슨 짓을 하는고? 언어문자를 쓰지 말라.(這老漢作什麽.莫打這葛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고,(至道無難)
-어렵지도 쉽지도 않다.(非難非易)
오직 간택을 하지 않으면 될 뿐이다.(唯嫌揀擇)
-눈앞에서 무슨 짓인고? 삼조스님이 계시는데.(眼前是什麽,三祖猶在.)
말하는 순간 간택에 떨어지거나 명백함에 덜어지리니,(纔有語言,是揀擇,是明白.)
-이랬다 저랬다 하는군. 잘난 체하지 마라. 물고기가 헤엄치면 흙탕물이 일고 새가 날면 깃털이 떨어진다.(兩頭三面,少賣弄.魚行水濁,鳥飛落毛.)
나는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느니라.(老僧不在明白裏.)
-도적의 정체가 탄로 났구나. 이 늙은이가 어느 곳으로 가는고?(賊身已露,這老漢向什麽處去.)
자 , 이런데도 그대들은 이를 보호하고 아끼려느냐?(是汝還護惜也無.)
-졌군(탄로났군)! 한 명은커녕 반 명이나 있을까? (敗也.也有一箇半箇.)
그때에 어떤 스님이 물었다.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껴야 합니까?”(時有僧問,旣不在明白裏,護惜箇什麽.)
-한 방 잘 먹였구나. 혀가 입천장에 붙었어.(혀가 굳어 말을 못하네).(也好與一拶.舌拄上齶)
조주스님이 말하였다. “나도 모른다.”(州云,我亦不知.)
-이 늙은이를 한방 먹였더니 삼천리 밖으로 도망(후퇴)갔네.(拶殺這老漢,倒退三千,)
그 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 모르신다면 어째서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십니까? (僧云,和尙旣不知,爲什麽却道.不在明白裏.)
-앗! 어느 곳으로 도망갔는가? 나무 꼭대기까지 쫓아가리라.(看,走向什麽處去.逐敎上樹去)
조주스님은 말하였다. “묻는 일이 끝났으면 잘 올리고 물러가라.”(州云,問事卽得,禮拜了退.)
-다행히도 이 한 수가 있었군. 노련한 도적이야! ( 賴有這一着,這老賊.)
(평창)
조주스님이 평소에 이 화두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간택을 꺼려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3조(三祖)스님의 「신심명(信心銘)」에 이르기를,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다. (至道無難)
오직 간택을 하지 않으면 될 뿐이니(唯嫌揀擇)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但莫憎愛
아주 명백하니라.(洞然明白)
고 했다. 시비가 있는 순간 간택에 떨어지거나 명백에 떨어진다고들 하는데 이렇게 이해를 하면 잘못이다. 이렇게 쇠못을 박고 아교풀 칠을 한 것처럼 집착해서야,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조주스님이 “간택에 떨어지거나 명백에 떨어진다”했는데 요즈음 참선하여 도를 닦는 사람들은 간택 속에 떨어져 있지 않으면 반대로 명백 속에 빠져 있다.
“나는 명백 속에도 있지 않는데, 그대들은 명백을 보호하고 아끼겠는가?”하였으니, 여러분들! 명백 속에 있지 않다면 말해보라, 조주스님은 어느 곳에 있으며,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호하여 아끼게 하였는가를.
은사이신 오조(五祖)스님께서도 항상 말씀하시기를 “(조주스님이) 손을 드리워 그대들을 이끌어주셨는(垂手來似過你)데, 그대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라고 하였다. 말해보라, 무엇을 이끌어주셨는지를. 말하는 취지〔鉤頭 : 대저울의 갈고리〕를 알아차릴지언정 언어문자〔定盤星 : 저울 눈금〕에 매이지 말라.
스님이 와서 질문한 것은 제법 기특하다 할 만하다. 조주스님이 허술한 곳을 꼬집어 그에게 내질러 말하기를 “이미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끼겠습니까?”라고 하니, 조주스님은 ‘몸뚱이’와 ‘할’소리를 전혀 쓰지 않고 “나도 모른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만일 이 늙은이(조주스님)가 아니었다면 내질름을 당하고는 반드시 쩔쩔맸을 것이지만 다행히도 이 늙은이는 자유자재로 몸을 비낄 수 있어서 이처럼 그에게 답변한 것이다.
요즈음 선승들은 질문했다 하면 “나도 모른다 몰라”라고들 하지만 조주스님과 길은 같아도 그 내용이 다른걸 어찌하랴! 그 객승은 그래도 기특하여 대뜸 묻기를 “스님께서 모르신다면 무엇 때문에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십니까”하니, 보기 좋게 다시 콱 내지른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반드시 이를 잘받아 진행하지(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주스님은 훌륭한 작가 선지식이라, 스님에게 말하기를 “묻는 일이 끝났으면 절 올리고 물러가라”하니, 이 객스님도 역시 이 늙은이를 어찌하지 못하고 숨을 들이쉰 채 찍소리 못한 것이다.
그는 훌륭한 솜씨를 갖춘 종사(宗師)이시다. 현묘한 말이나 상황〔機緣〕이나 경계를 의논하지 않고, 한결같이 본분의 일로써 사람을 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욕을 하려거든 해라. 욕하는 주둥이 모자라지 않게 입을 포개서 하라.(새주둥이까지 빌려다 달아주련다). 침 뱉으려면 뱉어라. 침이 모자라지 않게 물까지 퍼다주리라(相罵饒你接嘴,相唾饒你潑水)”라고 하였다. 이 늙은이가 평소에 ‘몽둥이’와 ‘할’소리로써 사람을 교화하지 않고 일상적인 말로 교화했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인들 어찌하랴! 그는 평소에 잡다한 계교(計較)가 없었으므로 종횡으로, 역행(逆行)으로, 순행(順行)으로 자유자재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그저 “조주스님은 답하지 못했고, 남을 교화하지도 않았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는 아주 잘못됐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頌)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다.(至道無難)
-세 번 거듭 문제를 제기 하는 군.(三重公案: 僧璨,趙州,雪竇.) 한 입 가득 서리를 물고 무슨 소리를 하는가? (三重公案,滿口含霜,道什麽.) --그렇게 입만열고 至道無難을 강조한들 무엇하나! 至道의 경지는 不立文字 言語道斷의 세계이다.
하는 말마다 모두 도이다.(言端語端) ---- 일언 일구가 모두 至道를 開示하고 있다.
-물고기 헤엄치니 흙탕물이 일어난다. 일곱 조각으로 갈라지고 여덟 갈래로 찢겼구나. 어리석군. (魚行水濁,七花八裂.搽胡也.)
하나지만 많은 종류가 있고,(一有多種)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한 덩어리인데 무얼 이러쿵저러쿵 하는고.(分開好.只一般有什麽了期)
둘이지만 서로 모순되지〔兩般〕않으니,(二無兩般)
-그래도 4, 5, 6, 7은 아니다. 언어문자를 써서 무얼 하려는가?(何堪四五六七,打葛藤作什麽.)
하늘에 해 뜨고 달 지며,(天際日上月下.)
-바로 눈앞에 있군, 머리 위에도 질펀하고 발아래에도 질펀하다. 절대로 머리를 들거나 숙여서는 안 된다.(覿面相呈,頭上漫漫,脚下漫漫.切忌昂頭低頭.)
난간 앞의 산은 깊고 물이 차갑네.(檻前山深水寒)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 머리털이 쭈뼛하게 솟구 치는 것을 느끼느냐?(一死更不再活, 還覺寒毛卓竪麽.)
알음알이〔髑髏識〕가 싹없어지니, 감정인들 있을쏘냐.(髑髏識盡喜何立.)
-널 속에서 눈알을 부릅떴구나. 혜능스님과 동기동창이네.(棺木裏瞠眼,盧行者是它同參.)
고목에 용의 울음 사라졌어도 아직 (나무가 완전히) 마르진 않았네.(枯木龍吟銷未乾)
-쯧쯧! 고목에 다시 꽃이 피었다. 달마스님이 동토(東土)에서 노니는구나.(咄.枯木再生花,達磨遊東土)
어렵고 어려움이여!( 難難.)
-사된 법이니 부지하기 어렵지. 필요없는 말.(뒤집어서 말했네). 여기가 어떤 곳인데 어렵다느니 쉽다느니 지껄여대는가.( 邪法難扶.倒一說.這裏是什麽所在.說難說易.)
간택이니 명백이니 하는 것은 그대 스스로 보아라.(揀擇明白,君自看.)
-눈이 멀었구나. 다른 사람에게 떠맡길 줄 알았더니만 다행히도 스스로 보라 하는구나. 산승(나)과는 상관이 없다.(瞎.將謂有別人,賴値自看.不干山僧事.)
(평창)
설두스님은 그 핵심을 알았기에 이처럼 송(頌)을 한 것이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다”라는 구절의 뒤를 이어 “하는 말마다 모두 도이다”라고 하니, 이는 한 목소리만을 드러내고 나머지 세 모서리는 생략한 것이며, 설두스님의 “하나지만 많은 종류가 있고 둘이지만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말은 마치 나머지 세 모서리를 미루어 하나를 짐작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말해보라, 무엇이 ‘하는 말마다 모두 도이다’며, 무엇 때문에 ‘하나지만 많은 종류가 있고, 둘이지만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했는지를.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면 어찌 이를 알 수 있으리요. 이 두 구절을 깨쳤다면, 옛사람이 말한 “깨치고 나서도〔打成一片依舊見〕본래 산은 산 물은 물, 긴 것은 긴 것, 짧은 것은 짧은 것, 하늘은 하늘, 땅은 땅이로다”의 경지가 된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하늘을 땅이라 하고, 어떤 때는 땅을 하늘이라 하며, 어떤 때는 산은 산이 아니라 하고 물은 물이 아니라 한다. 결국 어떻게 해야 평온할 수 있을까?
바람이 불어오니 나뭇가지 흔들리고,( 風來樹動)
파도가 일어나니 배가 높이 떠오른다.(浪起船高)
봄에 싹이 나 여름에 자라나매,(春生夏長 ; ������史記������ 淮南子의 말)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갈무리하네.(秋收冬藏)
한결같이 평안하면,(一種平懷)
(이거니 저거니) 저절로 사라지리.(泯然自盡)
이 네 구절의 노래로 단박에 모두를 끝내(해결해)버렸다고 하겠다. 설두스님은 그래도 재능이 있었기에 똘똘 뭉친 것을 풀어서 말한 셈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는 머리 위에다 다시 머리를 덧붙이는 꼴이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다. 하는 말마다 모두 도이다. 하나지만 여러 종류가 있고, 둘이지만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많은 일이 없다고 하지만 “하늘에 해 뜰 때는 달 지며, 난간 앞의 산이 깊으면 그물은 차가웁다”라는 구절에 이르러선 말도 도의 실마리이고 이야기도 도의 실마리이므로 곳곳마다 도이며, 사물마다 그대로다 진리이다. 어찌 이것이 마음과 경계〔心境〕를 모두 잊고서 하나를 이룬 경지가 아니겠는가? 설두스님이 처음에는 대단히 깨달음의 경지(孤峻)에서 차원 높게 굴더니만, 끝에 가선 상당히 탄로가 났네. 속셈을 내보였다.
만일 참구하여 투철하게 알아차려 사무치게 되면 자연히 으뜸가는 제호(醍醐)의 맛과 같겠지만, 알음알이(情解)를 떨쳐버리지 못하면 ‘일곱 조각으로 갈라지고 여덟 갈래로 찢어져’ 결코 이와 같이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알음알이가 싹없어지니, 감정인들 남아 있을쏘냐. 고목에 용의 울음 사라졌어도 아직 마르진 않았다”는 구절은 서로 섞인 부분(交加處 ; 본래심과 망심이 서로 포용되어 분별할 수 없는 경지. )이다. 객스님은 이렇게 묻고 조주스님은 이렇게 답하였다.
조주스님은 “지극한 도는 어려움 없으니 간택을 안하면 될 뿐이다. 말하는 순간 간택이거나 명백이다. 나는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는데 그대들은 도리어 이를 보호하고 아끼려느냐?”고 하니, 그때 그 객스님이 물었다.
“이미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다면 또한 무엇을 보호하고 아낍니까?”
“나도 모르겠다.”
“스님께서 모르신다면 무엇 때문에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조주스님이 이르기를 “묻는 일이 끝났으면 절하고 물러가라”하니, 이것은 옛사람이 도를 물었던 공안이다. 설두스님은 이를 인용, 하나로 꿰뚫어 송(頌)하기를, “지극한 도는 어려움 없으니 간택을 안하면 될 뿐이다”라 했다. 요즈음 사람들이 옛사람의 뜻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언구(言句)만 되씹을 뿐이니 언제 마칠 기약이 있겠는가? 팔방으로 방편(方便)에 통달한 작가 선지식이라면 비로소 이 말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故事)를 못 들었느냐?
어떤 스님이 향엄(香嚴)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입니까?”
“고목 속에서 용이 우느니라(枯木裏龍吟).”
“어떤 것이 도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까 (如何是道中人) ?”
“해골 속의 눈동자니라 (髑髏裏眼睛).”
그 스님이 훗날 석상(石霜)스님에게 물었다.
“(아직도 희로애락 등의) 감정에 얽매여 있구나.”
“무엇이 해골 속의 눈동자입니까?”
“아직도 알음알이〔識〕에 얽매여 있구나.”
그 스님은 또다시 조산(曹山)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고목 속에서 용이 우는 것입니까?”
“혈맥이 끊기지 않았다.(血脈不斷)”
“무엇이 해골 속의 눈동자입니까?”
“바싹 마르지 않았다.(乾不盡)”
“어떤 사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온 누리에 듣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
“모르겠습니다. 용의 울음은 무슨 글귀(章句)입니까?”
“어떤 글귀인지는 모르겠으나 들은 사람은 모두 목숨을 잃는다.”
조산스님에게는 이런 송(頌)이 있다.
고목에서 용이 우니 참으로 도가 드러났고
알음알이 없을 때 비로소 눈이 밝았네.
감정이 다할 때 소식(消息)도 다하니
당사자가 혼탁한 속의 맑음을 어떻게 알랴! (濁(簡擇)과 淸(明白)이 一如. 자체의 청정함을 자각할 수도 없는 완벽한 청정함.完全一體化.打成一片)
설두스님은 훌륭한 솜씨가 있다고 말할 만하다. 그대를 위하여 잘 섞어서 송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결코 그러하나 결코 모순된 것은 아니다.
설두스님은 맨 끝에 학인을 제접하는 부분이 있어서 “어렵고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 “어렵고 어려운”것을 모름지기 뚫고 지나가야만 된다. 무엇 때문인가? 백장(百丈)스님은 “일체의 말과 산하대지를 낱낱이 자기에게로 돌이키라”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때로는 드러내고 때로는 거두어들이다가 마침내는 자기에게로 귀결시켰다.
말해보라, 어떤 것이 설두스님이 학인을 제접한 점인가?
“간택이니 명백이니 하는 것도 그대 스스로가 보아라”하였는데, 언어문자로 송을 지어 놓고는 왜 도리어 “그대 스스로가 보아라”고 하였을까? 다행히(好彩)도 그대 스스로 보아라 하였으니, 말해보라, 그 뜻의 요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모든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탓하지 마소서. 설령 나(원오자신)라고 해도 이곳(경지)에 이르면 또한 그렇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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