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본지풍광(本地風光) / 극빈의 벌금

通達無我法者 2008. 3. 19. 11:22
본지풍광(本地風光)

극빈의 벌금

농부의 소를 몰아 가고 굶주린 사람이 밥을 빼앗으며
배를 갈라 심장을 칼질하며 벼를 두드려 부수어 골수를 꺼내어도
아직 본분 本分의 손과 발이 되지 못한다.
금강의 창을 쥐고 살활 殺活의 칼을 잡고서
부처와 조사를 잡아 무찌르고 보살을 종으로 부릴지라도
또한 높고 깊은 법문이 아니다.
새로 나온 운수 雲水에게는 묻지 않거니와
오래 공부한 대덕 스님들은 어떻게 행동하려는가?

농사를 짓는 사람은 소가 꼭 있어야 하는데 그 소를 몰고 가 버리고 여러 날 굶어서 죽게 된 사람이 얻어먹으려는 밥덩이를 빼앗아 가 버린다. 그리해서 배를 갈라 심장을 빼내 깔로 난도질하고 뼈를 두드려 부수고 뼈 속의 골수를 집어 낸다 하여도 본분종사의 수단은 못 된다는 말입니다. 이 무슨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말이냐 하겠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 조사스님들의 법 쓰는 것을 비유해 말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법을 쓰더라도 본분종사의 수단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금강으로 만든 창을 손에 거머쥐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청룡도를 들고서, 부처와 조사를 마음대로 잡아서 죽였다 살렸다 하고 보살들을 종같이 이리저리 부려먹는다 하여도 설사 그러한 큰 수단을 가졌다 하더라도 또 가장 최고의 근본법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 발심해 가지고 공부하러 다니는 운수 납자에게는 묻지아니하나, 수년 또는 수십년 동안 공부를 해서 완전히 성취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는가?

한참 묵묵한 뒤에 말씀하였다.
밤중에도 환히 밝은 부적을 손에쥐고 있으니
하늘이 날 새는 새벽임을 몇 사람이나 알리오.

보통은 불을 켜지 않으면 캄캄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것은 불을 켜고 끄고 할 것 없이 언제나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환히 밝아 있는 그런 부적을 손에 들고 있으니, 몇 사람이나 아침 새벽날 새는 것을 알 것이냐는 것입니다.

홍화스님이 “극빈”유나에게 물었다.
“그대가 알고서 안 들어가려는가, 모르고서 안 들어가려는가?”
“다 상관없습니다.”

법을 알고서 그런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법을 모르고서 그런집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니 홍화스님이 문득 때리고
“극빈이 법 싸움에 졌으니 벌금 오관으로 대중공양을 차려라” 하였다. 다음날 홍화스님이 대중에게 말하되, “극빈 유나가 법 싸움에 졌으니 공양에 들어오지 못한다.”하고 곧 절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이제는 법 싸움에 졌으니 벌금 오관을 내서 대중공양을 시켜라 해 놓고 , 오늘은 벌금 내가지고 대중공양을 시키려고 하는데, 아무리 네 돈 내놓고 대중공양을 차렸지만, 이 공양은 못 먹는다. 밥만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쫓아내 버려야 한다 하고는 몽둥이로 두드려 패고는 절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는 것입니다.
보통으로 볼 때는 법문에 졌으니 벌을 받았다. 이것뿐으로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그렇지만은 이 법문을 피상적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홍화스님과 극빈스님이 법 거량 하는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스님께서 이 법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착어하셨다.
날씨가 추우니 비로소 송백의 지조를 알고
일이 어려우니 바야흐로 장부의 마음을 안다.

원오선사가 이 법문을 들어 말했다.
“임제의 정법안장 正法眼藏을 붙들어 세우려면 , 모름지기 이 한 가지 공안 公案을 밝혀야만 비로소 되는 것이니, 사람들이 흔히 소리지르거나 때려야 한다고 분별견해를 낸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벌써 천기를 누설하였으니 여기에 이르러 어떻게 아느냐? 모름지기 저 부자 父子가 서로 이끌며 말과 기운이 부합하여야 비로소 극빈 유낭가 저를 위하여 보통 사람과 같지 않음을 볼 것이요. 겨우 분별견해를 지으면 문득 세간법의 흐름 속에 떨어지리라. 이 공안을 알지 못하고, 티끌 인연 속에 떨어져 향상인 向上人의 행동하는 곳을 모르니, 모름지기 이 향상의 근본 뜻을 바로 알면 자연히 저 고인 古人의 자재 自在하고 안락한 곳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되, ‘그대가 갈 때 나는 문득 앉고, 그대가 앉을 때 나는 문득가며, 그대가 손님이 되면 나는 주인이 되고 그대가 주인이 되면 나는 모름지기 손님이 된다’하니, 그런 까닭에 서로 건립함이요 만약 분별견해를 지으면 마침내 더듬어 찾아도 붙잡지 못할 것이다.
또한 임제스님이 돌아가실 때 삼성에게 말하되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의 정법안장을 멸해 없애지 말아라.’
하니 삼성이 말하되
‘어찌 스님의 정법안장을 없애겠습니까?’ 하였다.
임제스님이
‘어떤 사람이 묻는다면 너는 어떻게 말하려느냐?’
하니, 삼성이 할(喝)을 하니 임제스님이 말하였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먼 나귀한테서 멸하여 없어져 버릴 줄 누가 알았으리오.’
저를 봄에 이와 같으니 어디에 분별견해와 득실이 있겠느냐?
홍화가 묻되,
‘그대가 알고서 안 들어 가려느냐, 모르고 안 들어 가려느냐?’
하니, 극빈 유나가 대답하였다.
‘다 상관없습니다.’
말해 보라, 그 뜻이 어떠하냐? 뒷사람들이 분별견해로 말하되, ‘당초에 한 번 할(喝)할 것’이라 하며, 혹은 ‘앉은 방석으로 문득 때려 주었으면 자연히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라 하니 , 단지 의론만 하거니 무슨 교섭이 있으리오.
그 뒤에 극빈 유나가 출세하여, 개당할 때 홍화의 법을 이으니 대개 말하기를, ‘그가 향상의 긴요한 곳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른바 견해가 스승과 같으면 스승의 반밖에 되지 못하고. 견해가 스승보다 뛰어나야 비로소 온전히 법을 전해 받을 수 있다 하니, 어느 곳에서 지금 사람들이 분별망상 가운데 있으면서 득실을 분별할 것인가?”

스님께서 이 법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착어하셨다.
사람 죽이는 칼과 사람 살리는 칼이여
눈은 동남을 보나 뜻은 서북에 있도다.

대혜 고선사가 송하였다.
단산丹山에는 봉황새가 나고 사자는 무서운 사자 새끼를 낳는다.
몽둥이 밑의 *마혜안摩醯眼이여 부질없이 제일의 기봉을 자랑한다.

스님께서 이 법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착어하셨다.
못이 넓으니 산을 감추고
이리가 능히 표범을 잡는다.

아무리 못이 크지만 산이 어찌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으며, 아무리 살쾡이가 용맹하더라도 표범을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으냐. 이 뜻을 바로 알 것 같으면 원오스님의 법문이나 대혜스님의 법문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대중들이여, 극빈 유나가 이미 향상의 긴요한 곳을 밟고 섰을진대 어째서 도리어 두들겨 맞고 쫓겨났는가?

그런데 원오스님이 극빈 유나를 확철대오한 사람이라고 명했는데 어째서 방망이를 맞고 쫓겨났느냐. 원오스님은 극빈 유나가 홍화스님보다 낫다고 명했는데, 그러면 두 사람 가운데에 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니냐, 거짓말쟁이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참 묵묵한 뒤에 말씀하였다.
임제는 들을 안고 갚은 물속에 잠기고
삼성은 비단 옷 입고 자기 나라로 돌아온다.


극빈克賓/당대의 사람, 생몰 년대 미상. 임제종 홍확 존장의 범사, 남악하 육세.
유나維那/총림에서 승중의 수행을 독려 감시하며, 절 안의 모든 일을 총람하는 직책. 선종에서는 육지사六知事의 하나로 모든 승려들의 진퇴위의進退威儀을 관장하는 중요한 직책.
마혜안摩醯眼/마혜수라천왕의 정수리에 있는 또 한 개의 눈. 범인이 가진 두 눈 이외에 일체의 사리를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 정문정안正門正眼 일척안一隻眼이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