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소바나 사야도의 법문
(U Sobhana Sayadaw Dhamma talk)
첫째 날, 수행을 시작하면서 (1)
수행자가 가져야 할 5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수행자는 믿음을 가지고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 성인의 대열에 들으신 스님들에 대한 믿음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수행의 발전이 없습니다.
둘째, 수행자들이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한 상태로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음식물의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고, 알맞은 양의 육식을 취하고 적당한 온도에 유의해야 합니다.
셋째, 수행자는 정직한 마음으로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은 수행 중에 어느 곳에서나 법을 얻지 못하고 얻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법을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인터뷰를 할 때 경험한 것만을 진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넷째, 수행자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항상 마음을 기울여서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이렇게 노력을 해야 이미 저지른 악업을 제거 할 수 있고 앞으로 올 수 있는 불건전한 행동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노력을 해야 아직 얻지 못한 도과(道果)를 얻을 수 있고, 얻은 도과는 더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다섯째, 수행자는 물질과 마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마음과 물질이 가지고 있는 바른 본성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짐을 바르게 알고 지혜로 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를 항상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수행을 하게되면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게 되고 마음이 깨끗해지고 도과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한번 도과를 얻으면 절대 4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행기간 동안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7가지 요소(Sambojjha!nga. 七覺支)가 있어야 합니다.
1.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Sati Sambojjha!nga)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를 4념처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은 알아차림(Sati. 주시)입니다.
2.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Dhammavicaya Sambojjha!nga)
남자, 여자는 개념이고, 마음과 물질 뿐만 아니라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숙고하는 것이 법의 고찰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 여자는 개념이고 물질과 마음은 실재입니다. 법의 고찰은 가르침에 대한 탐구를 말합니다. 이때의 탐구는 개념인 빤냐띠(pa~n~natti)를 보는 것이 아니고 실재인 빠라마타(paramattha)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3. 노력의 깨달음의 요소(Viriya Sambojjha!nga)
위리야(Viriya)는 노력, 정진,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력이 줄어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4.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Piiti Sambojjha!nga)
수행을 하면 탐, 진, 치가 줄고 불선업을 짓지 않게 되니 마음이 깨끗해져 즐거움이 옵니다. 그러므로 인해 기쁨이 생깁니다. 이 기쁨을 삐띠(Piiti)라고 하는데 이것으로 인해 생기는 현상에는 5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 닭살이 돋는 듯한 느낌
②.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찌릿한 느낌
③. 불선업이 적어지고 마음이 깨끗해짐으로써 생기는 느낌인데 파도를 타는 듯하고 공간을 떠다니는 듯한 느낌
④. 몸이 들떠서 공중에 뜬 것 같은 느낌
⑤. 깨 안에 기름이 낀 것처럼 본인의 몸 전체에 기쁨이 충만된 느낌
이렇게 5가지 종류의 기쁨(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어도 좋아하지 않고 일어남 사라짐으로 보아야 됩니다.
5.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Passaddhi Sambojjha!nga)
마음이 깨끗해지고 수행을 하는 동안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안해집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이 상태를 열반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열반이 아니고 느낌을 원인으로 오는 것으로써 편안하다고 좋아하지 말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삼법인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6.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Samaadhi Sambojjha!nga)
사마디(Samaadhi)는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말합니다. 사마디는 삼매, 집중 등으로 말하는데 고요해진 마음에 의해 이루어진 집중의 상태입니다.
사마디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마디가 있습니다.
① 초기 삼매(Upacaara samaadhi. 접근삼매) ② 깊은 삼매(Appanaa samaadhi. 근본삼매) ③ 찰라 삼매(Kha.nika samaadhi. 순간삼매)가 있습니다. 이 중에 초기 삼매에 의해서 깊은 삼매로 가는 것은 사마타(Samathaa) 수행에서 사용되는 삼매이고, 찰나 삼매는 위빠싸나 수행에서 사용되는 삼매입니다.
사마디, 삼매, 또는 집중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대상에 밀착되어서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집중이란 것은 한 대상을 오랫동안 알아차림 할 때 일어나는 것을 알고, 사라진 것을 알고 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때 사라졌으므로 없는 것이어서 일어나는 것을 알고 또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이렇게 반복해서 아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알고 없고, 알고 없고를 연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때 모든 대상이 사라지고 없고, 사라지고 없고 하는 과정에서 사라짐을 '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때,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지 나의 어떤 것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나를 배제하고 볼 때 힘이 됩니다.
7.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Upekkhaa sambojjha!nga)
몸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법의 본래의 성품임을 알게됩니다. 이것이 모든 법의 본성이므로 그것을 봄으로써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 좋고 싫음이 떨어져나갑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도와 과에 가까워집니다.
이상과 같은 깨달음의 요인을 모두 얻게 되면 도와 과를 얻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비구. 비구니들 남자. 여자 수행자들에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많은 법문을 우리에게 해주셨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법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길을 가르쳐 줄 뿐 법을 얻는 것은 수행자들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
첫째 날, 수행을 시작하면서 (2)
부처님께서는 비구, 비구니, 남녀 재가자들에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을 가르쳐 줄뿐이고 길의 끝인 열반에 다다르는 것은 수행자의 의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법문을 해주셨더라도 수행자 여러분이 지속적인 노력이 없으면 법을 얻지 못합니다.
수행을 지도하는 스승과 수행자 여러분에게는 각각의 의무가 있습니다. 각각의 의무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스승은 수행자에게 법을 이해하도록, 분명히 알도록 법문을 하는 것이 스승의 의무입니다.
둘째, 수행을 하는 것이 수행자의 의무입니다.
셋째, 법을 드러내는 것은 법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스승, 수행자, 법의 의무,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셋 중에 첫 번째 의무는 스승에게 있습니다. 어떤 의무인가 하면 수행자가 법을 모르면 알게 하도록 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도록 하고, 잘못된 견해를 제거할 수 있도록 하고, 수행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도록 법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해서 일곱 가지의 청정에 대해서 법문을 하겠습니다.
일곱 가지의 청정이란 깨끗이 해야할 일곱 가지입니다.
일곱 가지 청정[七淸淨]
1. 계의 청정[戒淸淨. siila-visuddhi]
2. 마음의 청정[心淸淨. citta-visuddhi]
3. 견해의 청정[見淸淨. di.t.thi-visuddhi]
4.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道疑淸淨. ka!nkhaavitara.na-visuddhi]
원인과 결과를 알아 12연기를 이해하는 것
5. 도의 옳고 그름을 아는 청정[道非道智見淸淨. maggaamagga-~naa.na-dassana-visuddhi]
마음과 물질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가를 보는 것
6. 수행과정의 지혜와 통찰에 의한 청정[行道智見淸淨. pa.tipadaa-~naa.nadassana-visuddhi]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성과 소멸을 보고 그것을 혐오하는 것
7. 지혜통찰의 청정[智見淸淨. ~naa.na-dassana-visudhi]
고의 소멸로 도의 끝을 봄으로 해서 열반을 얻는 것
첫째, 계청정은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는 제일 먼저 계(戒)에 충실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가 청정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좋지 않은 일[不善業]을 삼가 하는 것입니다. 불선업은 10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삼가는 것이 계의 청정입니다.
나쁜 행동[不善業]을 10가지로 보면,
몸으로 저지르는 것 3가지,
입으로 저지르는 것 4가지,
마음으로 저지르는 것 3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 구, 의라는 3업(三業)입니다.
① 몸으로 저지르는 신업(身業)의 3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생명이 있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행동,
다른 사람이 주지 않는 물건을 훔치는 일,
다른 사람과 부적절한 성적 관계를 갖는 부정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수행자 여러분께서는 수행 중에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주지 않는 물건을 훔치거나 사용하지 마십시오.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성적 관계를 갖지 마십시오. 이 세 가지의 계를 지킴으로써 악업을 짓지 않게 되며, 이것이 계의 청정입니다.
② 입으로 저지르는 구업(口業)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업은 네 가지가 있는데 거짓말, 이간질, 거친 말, 이익이 없는 말입니다.
입으로 짓는 이 네 가지를 삼가고 제어함으로써 계청정을 지킬 수 있습니다.
③ 마음으로 저지르는 의업(意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업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탐욕(貪慾. abhijjhaa)입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불법으로 정당하지 않게 얻으려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둘째가, 악의(惡意. byaapaada)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되게 하기 위해 진심(嗔心)을 내는 마음입니다.
셋째가, 사견(邪見. micchaa-di.t.thi)입니다. 사견은 틀린 견해를 말합니다. 이것은 선업의 결과와 악업의 결과를 믿지 않는 잘못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 구. 의 3업(三業)으로 저지르는 10가지를 삼가고 제어할 수 있을 때, 계가 청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10가지를 사람들이 지켜야할 율(律)이라고 하는데 사람의 율(律)이라고 부릅니다.
수행자는 5계도 역시 안전하게 지켜야합니다. 즉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 음행을 하지 않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물이나 술을 먹지 않는 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8계를 지켜야합니다. 5계를 지키고 정오가 지난 다음에는 음식물을 먹지 않는 것, 가무, 치장, 향수 등을 사용하지 않는 것, 높고 사치스러운 침상을 사용하지 않는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삼가야 할 것을 삼가는 것이 계의 청정입니다.
둘째, 계청정이 이루어진 뒤에 마음의 청정[心淸淨]이 있게 됩니다. 마음의 청정은 마음이 깨끗해짐으로써 마음이 고요해지고 가라앉아 집중력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집중력(사마디)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이 불선(不善)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불선(不善)한 마음이 들어오지 못하므로 마음이 깨끗해져서 수행자는 알아차림과 함께 점점 더 마음의 집중력이 길러 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집중력을 얻게 하려면 항상 4념처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4념처는 신수심법(身受心法) 네 가지를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신념처(身念處)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 중에 들숨 날숨을 보는데, 들숨 날숨을 보는 것이 계속 이어질 때 다른 어떤 불선(不善)한 것들이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다른 안 좋은 것들이 들어올 틈이 없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코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들숨 날숨으로, 배나 가슴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일어남 꺼짐으로 알아차립니다.)
신념처는 행주좌와(行住座臥)도 포함이 됩니다. 움직일 때, 멈춰 섰을 때, 앉았을 때, 누웠을 때가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걸음을 걸을 때도 오른발 왼발 걷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걸으면서 알아차릴 때는 선하지 못한 마음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처음에 걸음을 걸을 때 오른발 왼발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걷는 것을 알아차릴 때 불선한 것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른발 왼발을 계속 보다가 어느 정도 집중(사마디)하는 힘이 생기면 들고 놓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발을 들면서 알고, 내리면서 알고, 동작 하나 하나를 알 때에 온전치 못한 것은 들어올 수 없고 수행자의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계속 들면서 알고, 내리고 알다보면 집중력이 더 좋아집니다.
다시 들고, 나아가고, 놓고, 하는 것을 알면서 (들면서 알고, 나아가면서 알고, 놓으면서 알고) 계속해서 알다보면 마음에 선하지 못한 것이 들어오지 못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이렇게 마음이 깨끗해지면 집중력이 점점 좋아집니다. 그것은 마음이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여러분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일어나는 대로 알게 되는 것을 집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집중을 사마디(samaadhi)라고 하는데 사마디가 좋아지는 것 역시 마음의 청정입니다. 마음의 청정을 얻은 후에는 견해의 청정이 뒤따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셋째, 견해의 청정이 있기 위해서는, 스승은 견해의 청정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도록 설명할 의무가 있습니다.
잘못된 견해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이 있고, 다음으로 상견(常見. sassata-di.t.thi)이 있습니다. 그리고 단견(斷見. uccheda-di.t.thi)이 있습니다.
처음인 유신견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빤냐띠(pa~n~natti)라고 하는 개념과 빠라마타(paramattha)라고 하는 실재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개념과 실재라는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알아야 비로소 잘못된 견해를 제거 할 수 있습니다.
빤냐띠(pa~n~natti)라고 하는 개념이란 사람, 여자, 남자, 아름다움, 추함, 뚱뚱함 등등을 말합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지어서 부르는 것도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개념으로 그렇게 부르라고 동의해서 정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부르라고 했을 때 이름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빤냐띠라고 하는 것인데 모양, 명칭, 개념, 관념 등의 뜻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관습적 진리하고 말합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는 개념과 실재 즉 궁극적 진리를 분리해서 봐야 합니다. 빤냐띠는 개념이고 빠라마타(paramattha)는 궁극적 진리, 실재입니다. 빠라마타는 개념으로써가 아니라 존재의 실재입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것은 존재의 실재인 빠라마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빠라마타라고 하는 궁극적 진리란 무엇인가요?
빠라마타는 다음 네 가지입니다.
① 마음[心. citta].
② 마음의 작용[心所. cetasika],
③ 물질(物質. ruupa)
④ 열반(涅槃. nibbaana)입니다.
수행자는 개념이 아닌 실재, 궁극적 진리에 대해서 안 후에야 만이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빠라마타를 안다는 것은 모양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의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빠라마타를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수행을 통해서 빠라마타를 알 수 있습니다. 수행 할 때 알아차릴 수 있는 빠라마타는 열반을 제외한 마음과, 마음의 작용과, 물질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온(五蘊)입니다.
오온(五蘊)은 다섯 가지의 무더기(모임)를 말합니다.
첫 번째, 색온(色蘊. ruupa kkhandha). 두 번째, 수온(受蘊. vedanaa kkandha). 세 번째, 상온(想蘊. sa~n~naa kkhandha). 네 번째, 행온(行蘊. sa!nkhaara kkhandha). 다섯 번째, 식온(識蘊. vi~n~naa.na kkhandha)입니다.
오온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더 자세하게 나눈 것으로 색, 수, 상, 행, 식으로 분류합니다. 이것들은 각자 저마다의 무더기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색[物質]이 아니고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서 몸이라는 하나의 물질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몸이라는 물질 하나만도 32가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색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心]은 식(識)을 말하며 마음의 작용[心所]은 수, 상, 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들도 저마다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서 무더기[蘊]라고 말합니다.
1. 색온(色蘊)은 몸이라는 물질의 무더기입니다. 물질의 본성은 계속해서 바뀌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뀌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뜨거웠다가 차가워지는 것이고, 전에는 아프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프고, 전에는 없었는데 지금은 생겼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본성은 항상 바뀐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바뀌는 물질의 본성이 우리 몸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것이 수행자들의 몸에 있습니까?
수행자 : '예,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빨리어로 삭카야(sakkaaya)라고 합니다. 삭카야는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몸, 또는 개체, 유신(有身)을 말합니다.
2. 수온(受蘊)은 느낌이라는 무더기를 말합니다. 좋고 나쁘고 한 느낌을 의미합니다. 좋고 나쁘고 한 느낌이 수행자 몸에서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 보십시오. 이와 같이 느낌이 실제 있는 것 역시 삭카야(sakkaaya)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느낌이 각자의 몸에 있습니까?
수행자 : '예, 있습니다.'
3. 상온(想蘊)은 오온(五蘊) 중에서 색, 수, 상에서 상(想)에 해당하는 무더기입니다. 산냐(sa~n~naa)는 바라본다,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여자를 볼 때 어떻다고 하며 바라보는 대상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표상작용을 하거나, 지각, 기억하는 것을 상온이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이 물건이나 무엇을 보았을 때 이렇게 알아보는 그런 마음이 수행자 마음에 있는가 알아차려 보십시오.
이런 마음이 수행자에게 있습니까?
수행자 : '예, 있습니다.'
4. 행온(行蘊)은 행위(行爲)에 해당하는 무더기입니다. 행온의 뜻은 행(行)하는 특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고, 말하기를 원하고, 앉기를 원하고, 원하는 것이 상카라(sa!nkhaara)입니다. 의도(意圖)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의도가 있은 다음에 행이 있기에 행과 의도는 같이 쓸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행하고자 하고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까?
수행자 : '예, 있습니다'
수행자의 마음에 의해 몸에 행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 역시 싹카야(sakkaaya) 입니다.
5. 식온(識蘊)은 아는 마음의 무더기입니다. 식온은 아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밤색이고, 저 사람은 남자고, 여자이고 하면서 보고 아는 것입니다. 식온은 단순하게 대상을 접수하여 아는 기능을 합니다. 수행자의 마음에 이렇게 아는 마음이 있는가 보십시오.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수행자 : '예, 있습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가 수행자 몸 안에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바로 삭카야(sakkaaya)라 합니다. 이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몸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개체(個體)라고 합니다.
이 개체를 말할 때 남자, 여자라고 개념으로 부르는 것이 빤냐띠(명칭, 관념)입니다. 그러나 실재하는 현상은 빠라마타(궁극적 실재)인 오온입니다. 몸과 마음이란 오온 다섯 가지가 빠라마타인데 오온을 지, 수, 화, 풍이라는 4대의 느낌으로 아는 것이 빠라마타를 아는 것입니다. 이 4대 외에 28가지의 파생된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신견(有身見. sakkaaya di.t.thi)이 어떻게 생기는 가를 설명하겠습니다.
잘못된 견해 중에 유신견(有身見. sakkaaya di.t.thi)이 있습니다. 빨리어로 삭까야 디티[有身見]라고 설명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종교들의 믿음은 '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온을'나'라고 믿는 것이 삭까야 디티 즉 잘못된 견해입니다. 오온 안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역시 삭까야 디티입니다.
다시 말하면 삭카야(sakkaya)는 실재하는 몸을 말하므로 유신(有身)인데 이것을 '나의 몸'으로 아는 견해를 유신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의 몸'이라는 견해가 잘못된 견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삼법인(무상, 고, 무아)의 교리가 있습니다. 즉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 이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할 뿐이며, 일어나면 사라지고 일어나면 사라지고 하는 것만 있어서 모든 것이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이 고(苦)라는 것입니다.
무상이란 일어나면 사라지는 것이고, 항상 일어나는 것은 사라지고 유한(有限)하다는 것이 고(苦)이고, 그 괴로움을 알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아(無我)입니다. 이렇게 3법인의 세 가지가 무상, 고, 무아입니다.
수행자께서는 수행자 각자에게 있는 것이 오온뿐이지 그 안에 있는 것이 '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노력하고 믿으십시오.
이것을 믿습니까?
수행자 : '예. 믿습니다.'
수행자가 항상 바뀌는 물질을 볼 때도, 느낌을 느꼈을 때도, 사물을 지각할 때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도, 아는 마음이 생겼을 때도, 내가 느끼고, 지각하고, 행하고, 내가 아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온의 본성의 작용으로 느끼고, 지각하고, 행하고, 아는 것입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 오온의 하나인 물질로써 일어났다고 생각할 것입니까? 색온(色蘊. 물질의 무더기)이 일어났다고 그렇게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내 몸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오온의 색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느낌을 느꼈을 때도 내가 느꼈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수온(受蘊)의 작용일 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까?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우리가 어떤 물질을 알아 볼 때 상온(想蘊)은 내가 기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상온(想蘊)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번째 행온(行蘊)도 내가 행하는가 아니면 마음의 작용으로 행합니까? 어떻게 느끼십니까? 오온 안에는 '나'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수행자 : '예, 믿습니다.'
잘못된 견해가 제거되는 것은 법문을 듣고 보고 아는 것 등등이 오온의 작용일 뿐,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 일어나는 모든 대상 역시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로써 생기는 것이지 '나'는 포함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았을 때만이 집착이나 욕심을 줄여나가거나 제거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면서 일어나는 대상을 알아차릴 때 그것이 통증이라면 내가 아프고, 내가 참을 수 없고 하는 것이 아닌 나와 통증을 분리해서 볼 수 있다면 화를 내는 것 역기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통증이 일어났을 때도 내가 아픈 것이 아니고 이것은 오온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어떤 물질의 본성과 어떤 느낌은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무더기[蘊]의 작용이라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프고, 내가 느끼고, 내가 알고,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알았을 때 수행자는 집착이나 욕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수행하면서 대상을 볼 때 무엇을 볼 것인가? 수행의 대상은 이름, 개념이 아니고 실재하는 빠라마타(궁극적 실재)의 오온을 일어나는 대로 봐야합니다.
오늘은 개념과 실재를 구분하고 잘못된 견해를 제거한 후 수행하는 법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참고 : 사야도의 법문이 짧은 시간에 통역에 의해 전달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은 추가로 기록했습니다. 다만 사야도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장을 완성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첫째 날, 수행을 시작하면서 (3) - 수행하는 방법
수행자는 수행을 하기 위해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1. 조용한 곳에서
2. 가부좌를 하고(두 다리를 가지런히 놓아도 됨)
3. 허리를 펴고(너무 곧게 힘을 주지 않고 편하고 바르게 폄)
4. 손을 편안하게 가지런히 놓고
5. 눈을 살짝 감고
6. 입을 살짝 다뭅니다.
이제 마음을 코의 가장자리에 두고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주시합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알고, 내쉬면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10분 정도를 계속합니다.
10분 정도를 들숨 날숨을 알아차린 뒤에 몸을 알아차립니다. 몸의 어느 곳에서 일어나든, 일어나는 것은 모두 알아차립니다. 아픔, 더움, 차가움, 무거움, 저림, 쑤심 등등 어떤 것이나 일어나는 대로 모두 알아차립니다. 계속 10분 정도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든 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몸 전체에서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나는 쑤심이나 저림 등의 느낌이 일어났을 때, 쑤시면 쑤시는 것을 알고, 저리면 저린 것을 알고, 일어나는 것을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립니다.
수행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대상을 알아차릴 때, 알아차림(sati)과 노력(viriya)이 함께 하여, 분명한 앎(sampaja~n~na)과 지혜로운 마음으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림으로 지켜본다는 의미는 숲에서 사슴이나 곰을 사냥할 때 그들을 지켜보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니는 곳을 하나도 놓침 없이 보듯이,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분명한 앎으로, 지혜로 본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도록 노력해야 되고 점점 양이 많아지도록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이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 분명히 아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보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점점 횟수가 많아질수록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는 것을 알게 되고, 차츰 고(苦)의 본성(本性)을 알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고 생각하게 되면, 이제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이므로, '고(苦)가 일어나는 것을 알고', 다시 또 '고(苦)가 일어나는 것을 알고' 하게 됩니다. 이렇게 알게 됨으로써 고(苦)의 본성을 알게 되고,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을 알고를 계속함으로써 점점 더 조용한 가운데 고(苦)의 본성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수행자가 가능한 한 참아가면서 대상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중에서 고(苦)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봄으로써 사성제 중에서 고제(苦諦)를 알게 됩니다. 실제 수행을 통해서 고(苦)의 본성을 알면 이 몸 자체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고(苦)의 본성을 알아차린 후에는 이 고(苦)가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수행의 목적은 열반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합니다. 이 몸이 고(苦)라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열반을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한 시간은 60분이고 1분은 60초입니다. 그래서 1초에 아는 마음이 한번 있다고 볼 때, 수행자가 1분을 알아차리면 60번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순간순간에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계속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처음에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을 계속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면 알아차림(sati)과 노력(viriya)이 강해지고 그러면서 집중(samaadhi)하는 힘이 강해집니다.
수행의 처음 단계에서는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부터 계속하면 집중력이 생기고, 다음 단계로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이 쉬워집니다. 앞에서는 일어나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차리고 나서 집중력이 생기면 다음으로는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하다가 집중하는 힘이 생기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는 것을 계속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하는 것을 계속하다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내 몸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물질이라는 오온의 그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때, 거기에 '나'라고 하는 것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 때, 내 몸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이 위빠싸나 수행도 힘이 없게 되고, 힘있는 위빠싸나 수행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힘이 없는 위빠싸나 수행을 하게 되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위빠싸나 수행도 향상이 어렵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 산다라는 스님이 수행을 하시면서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내 몸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생각했을 때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스님은 내가 내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았는데 내가 왜 두려운 마음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고서 질문을 하러 갔습니다.
질문에 대해 한 스님의 답변은 무상과 무아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하지 않는 것을 봄으로 해서 무아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답변하신 스님이 무상과 무아를 보도록 요구했을 때, 질문한 스님의 말이 무상과 무아를 보았지만 그 무상과 무아를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거기서 물러 나와 아난존자에게 갔습니다.
스님은 아난존자에게 내가 수행을 해서 일어남 사라짐도 보고, 무상도 보고 그것을 어쩔 수 없다는 무아도 경험했지만, 내 안에 두려움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 질문을 했습니다.
아난존자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질문한 스님이 무상과 무아를 보고도 법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은 항상 거기에 '나'라는 것을 포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난존자도 질문한 스님에게 무상과 무아는 볼 수 있었지만 '나'라는 잘못된 견해와, '나'는 항상 하다는 견해와, '내'가 여기서 다하면 그만 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난존자는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항상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나'라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스님의 수행이 향상이 없었고, 일어나는 것도 고(苦)이며, 사라지는 것도 고(苦)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모든 것, 사라지는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내가 아닌 다만 그것들의 본성으로, 곧 물질과 마음이 본성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거기에는 내가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가 포함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두려움이 사라질 때 마음에 고요함과 평화가 다가옵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는 항상 알아차림과 노력이 함께 해야 몸 안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기에는 내가 아닌 어떤 마음과 물질들의 모임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앎으로써 고(苦)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수행을 통해서 고(苦)의 본성을 봄으로써 고(苦)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싫어함으로 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어 열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고(苦)의 본성을 알고, 고(苦)에 대한 혐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열반을 얻기를 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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