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소바나 사야도 12연기 법문
둘째 날, 법문
어제 법문을 했던 견해의 청정[見淸淨]에 대해서 간단하게 부연 설명을 한 후에 12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법문에서 오온(五蘊)은 오온일 뿐이지 '나'가 없지만, '나'가 있다고 믿는 것이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이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 드렸습니다. 이렇게 내가 있다는 유신견을 갖는 사람은 상견(常見. sassata-di.t.thi)이든 단견(斷見. uccheda-di.t.thi)이든 역시 마찬가지로 잘못된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유신견을 갖은 사람이 어떻게 상견 역시 가질 수 있는가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없어지지만, 우리가 말하는 영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몸은 없어지지만 나라고 믿는 영혼은 좋은 곳, 혹은 나쁜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구성하는 오온은 무상(無常)한데, '나'라고 하는 것이 항상(恒常) 하다는 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바로 이것이 상견(常見)입니다. 뿐더러 유신견을 가진 사람이 상견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단견(斷見)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무상(無常)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며, 그러므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상(無常)은 항상(恒常) 하다는 것과 반대가 된다.)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는 오온은 오온일 뿐이지 내가 없지만 있는 것으로 믿고 오온과 내가 같이 태어나서 같이 죽고,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내생에서도 같이 태어났다가 같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잘못된 견해 세 가지 견해는 제대로 설명을 하려면 긴 시간이 걸리므로 짧게 마치고 12연기를 설명하겠습니다. 수행자는 어떤 종류의 견해이든지 이 세 가지 종류의 잘못된 견해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사야도나 수행자, 우리 모두가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제 법문에서 오온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생에서의 오온의 힘이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생에서의 오온이 원인이 되어 결과로써 다음 생이 있습니다. 그것을 원인과 결과로 설명한 것이 12연기입니다.
( 지금부터 이 글을 읽으시는 수행자께서는 12연기 도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2연기의 도표를 보면 원의 바깥쪽에 1. 2. 3. 4의 4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번 칸은 전에 행한 과거입니다. 1번이 시간적으로 과거이면 2번은 현재입니다. 3번은 시간적으로는 현재로써 다음 생의 원인이 되는 칸입니다. 그리고 4번 칸은 미래의 시간입니다.
수행자가 지금 머물고 있는 시간은 2번 칸으로 현재입니다. 2번 칸에는 현재 가지고 있는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根], 촉(觸), 수(受)입니다.
지금 수행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식(識. 再生連結識. vi~n~naa.na)
2. 명색(名色. 정신과 물질. naama-ruupa)
3. 육입(六入. 六處. 六根. 여섯 가지 감각영역. sa.iaayatana)
4. 촉(觸. 접촉. 부딪침. phassa)
5. 수(受. 느낌. 감각. vedanaa)
이것을 오온(五蘊) 또는 다섯 가지 요소라고 합니다.
지금 오온(五蘊)이라고 한 것은 12연기에서와, 경장(經藏)에 따른 오온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말한 오온과 오늘 부르는 다섯 가지 요소가 이름만 다르지 실제는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편의상 사람, 남자, 여자라고 부를 뿐이지 모든 것이 이 다섯 가지의 모임일 뿐입니다.
빨리어로 윈냐나(vi~n~naa.na. 識)는 우리가 모태에 들어 갈 때 첫 번째 갖는 식(識)입니다. 생(生)이 시작하는 첫 번째 식(識)을 윈냐나라고 합니다.
첫 번째 식이 있으므로 해서 정신과 물질[名色]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빨리어로는 나마 루빠(naama-ruupa)라고 하는데 나마(naama)는 정신이고, 루빠(ruupa)는 물질입니다. 이때 정신(精神)은 오온 중에서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질(物質)은 몸[肉體]을 의미합니다.
육입(六入. sa.iaayatana)은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육근(六根)을 말합니다.
촉(觸. phassa)은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대상에 부딪쳐서 생긴 식(識)이라고 하는 아는 마음입니다. 이때의 식(識)은 육식(六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근이 육경에 부딪쳐서 육식을 하는 것을 통털어 촉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식은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마음도 여섯 가지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이 있으므로 해서 알고, 그 촉을 원인으로 해서 좋고, 싫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 수(受. 느낌. vedanaa)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세속적인 진리[俗諦]로써 사람이라 부르고 때로는 남자, 여자라고 부릅니다. 지금 이 오온이 과거의 결과로써 얻어진 현생(現生)입니다. 현재의 생에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다섯 가지는 4성제의 고성제(苦聖諦. dukkhasacca)입니다. 고성제의 둑카(dukkha)는 고통스러움, 괴로움, 불만족을 말하고 사짜(sacca)는 진리, 제(諦)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가 오온을 받은 것은 누가 준 것도 아니고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지난 과거생의 무명(無明)과 행(行)을 원인으로 해서 지금의 오온을 결과로써 받은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과거의 생에서 무명이라는 원인으로, 행(行. sankhaara)이라는 원인을 만들며 살았었습니다. 여기서 행이라고 하는 상카라(asnkhaara)는 업을 형성하는 의지, 의도입니다. 행은 내가 좋은 의도로 행했는가, 아니면 나쁜 의도로 행했는가, 하는 의지를 가지고 살아 온 것을 말합니다. 이 결과로 오온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제 무명(無明. avijja)이란 과연 무엇인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수행자가 12연기를 이해하려면 무명의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무명이란 첫 번째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 두 번째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명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온 자체가 고(苦)라는 것을 모르게 할 뿐 아니라, 오온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것으로 잘못 알게 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오온이 고라는 것을 가리우고, 반대로 이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알게 하는 것이 무명입니다. 무명과 치심(癡心. moha)은 같은 뜻입니다.
이 무명은 나면서부터 볼 수 없는 장님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면서부터 장님인 사람은 흰색인지, 노란색인지, 빨간색인지 모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어떤 사람이 흰옷을 입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장님은 흰옷을 입고 싶다, 흰옷을 입고 싶다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조르는 바람에 친구는 검정 색 옷을 만들어서 주었습니다. 자기가 원했던 것은 흰옷을 입고 싶어했기 때문에 검정 색 옷을 받았지만 볼 수가 없었던 장님은 자기가 입은 옷이 흰옷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님은 그 옷을 입고 다니면서 흰색 옷을 입었다고 말하면서 마을과 도시로 나갔습니다. 그는 흰옷을 입었다고 했지만 실제 그가 입은 옷은 검정 색 옷이었습니다.
장님이 검은 옷을 입고 흰옷을 입었다고 돌아다닐 때 그의 친구가 그것은 흰옷이 아니고 검은 옷이니 벗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장님은 벗지 않았습니다. 이 친구는 장님의 부모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지금 아드님이 검은 옷을 입고 흰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며, 좋지 않은 옷을 좋은 옷으로 여기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창피를 당하기 전에 빨리 아들을 말리라고 했습니다.
이때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로 가서 '지금 네가 입을 옷은 흰옷이 아니고 검은 옷이다. 네가 검은 옷을 입고 있으면서 흰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니 빨리 옷을 벗도록 하여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말하기를 '내가 흰옷을 입고 있는 것이 너무 좋아 보이고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재차 벗기를 권했으나 실패하고 아버지에게 가서 검은 옷을 벗도록 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검은 옷을 벗게 하려면 먼저 아들의 눈을 고쳐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얘기는 하나의 예입니다. 나면서부터 장님은 무명을 상징하고, 검은 옷은 고(苦)를 흰옷은 열반(涅槃)을 상징합니다. 법문을 하는 스님이나 수행자 모두 우리가 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고(苦)를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생에서도 고를 모르고 살았으며, 모를 뿐만 아니고 반대로 고가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무명이었습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해서 모르고서 행했지만 그 중에는 선업도 있었고 악업도 행했습니다. 우리는 선행을 행할 때마다, 또는 좋지 않은 일을 행할 때마다 고(苦)인 갈애(渴愛)와 함께 했던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무명이고 모름으로 해서 원하여서 선한 일, 악한 일을 행한 것이 쌍카라고 하는 행입니다.
지금 설명한 무명과 행은 과거에 행한 것이고 사성제로는 집제(集諦)에 해당합니다. 사성제 중에 집제는 고의 원인이 되는 법(法)입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있었고, 행을 원인으로 식(처음에 태에 든 식. 再生連結識)이 있었고, 그 식을 원인으로 명색(마음과 물질)이 있고, 명색을 원인으로 육입이 있고, 육입을 원인으로 촉이 있고, 촉을 원인으로 수(느낌)가 있는 것입니다.
무명과 행은 시간으로 볼 때 과거이고, 과거의 원인으로 현생의 오온이 있습니다. 과거의 무명과 행은 사성제 중에 집제(集諦)에 해당하는 것이고 현재 갖고 있는 오온은 고성제(苦聖諦)입니다.
이번에는 12연기 도표의 바깥쪽에 있는 2번 칸에서 3번 칸으로 넘어가는 설명을 하겠습니다.
현재 갖고 있는 오온(五蘊)이 고성제(苦聖諦)라는 것을 모름으로 해서 집착하고, 고(苦)를 다시 받게 하는 선업도 행하고 악업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현재의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모름으로 해서, 스스로 다시 원하게 되어 갈애와 집착으로 연결되어서 업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번째 칸에 있는 갈애(渴愛. ta.nhaa), 집착[取. upaadaana), 유(有. 業有. 업의 생성. kammabhava)가 다음 생의 원인이 되는 집제(集諦)입니다. 현재의 갈애와 집착과 업을 생성[有]하는 집제로부터 4번 칸의 미래에 생(生. jaati)과 노사(老死. jaraamara.na)를 결과로 갖게 되는 것입니다. 태어남[生], 늙음과 죽음[老死]을 다음 생에 다시 받게 된다면 역시 고(苦)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 도표에서 화살표(원의 윗 쪽 중앙)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무명인 상태에서 법을 얻기 전에 죽게 된다면 다시 무명과 갈애와 함께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법을 얻지 못하고 죽는다면 우리 역시 무명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자신의 몸이 오온인 고(苦)라는 것을 모르고 무명에 가려서 죽는다면 아들, 딸, 재산 등등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갈애와 함께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윤회로 떨어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무명과 갈애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무명이 가리고 반대로 이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온과 살기를 원하는 것이 갈애입니다.
수행자에게 이 생에서 죽고 다시 태어날 때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이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이번 생(生)인 사람에서 다른 생으로 가야할 때, 첫째로는 무명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사람에서 개[犬]의 생으로 가야 한다면 개의 생에서 겪어야 하는 괴로움을 모르도록 가리우는 것이 무명입니다.
개로 태어난 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모르게 하는 것도 무명이지만 개의 그런 생이 좋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도 무명입니다. 개의 고통을 모르는 무명이 일어난 후에는 이런 무명으로 인해서 모르기 때문에 개로 태어나기를 원하는 갈애가 생깁니다.
무명과 갈애 뒤에는 개로 다시 태어날 수 밖에 없는 자기가 행한 악업이 개로 태어나게 되도록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것을 모르도록 가리우는 것이 무명이고, 그런 생을 원하는 것이 갈애입니다. 다시 생을 갖도록 행위를 하는 것을 빨리어로 상카라(sankhaara. 行)라고 합니다. 이때의 행(行)은 업의 형성이라고 하며 의도에 의해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윤회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무명, 갈애, 행, 이 세 가지가 계속 도는 것입니다.
도표를 보면 1번 칸을 원인으로 해서 2번 칸이 있고, 2번 칸을 원인으로 해서 3번 칸이 있고, 다시 3번 칸을 원인으로 해서 4번 칸이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해서 모든 번뇌를 여읜 아라한의 대열에 들지 않는 한은 우리에게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무명과 갈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무명이 무명으로 인도하고 거기에는 항상 가운데 원 안에 있는 무명(無明. avijjaa)과 갈애(渴愛. ta.nhaa)가 우리를 윤회로 이끄는 가장 큰 두 가지 원인입니다.
그래서 무명과 갈애가 원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고, 원의 중앙 상단의 화살표에서처럼 우리가 성인의 반열에 들지 않는 한은 무명으로 해서 다시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행자에게 묻는데 계속해서 이렇게 연기법에 의해서 윤회를 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윤회에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까? 모두가 답을 하십시오.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까?
수행자 : 예.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벗어나는 길을 지금부터 안내하겠습니다. 벗어나게 하는 길은 2번하고 3번 칸의 사이에 화살표가 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12연기를 게송으로 만들어서 매일매일 외우게 합니다.
시간으로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개입니다.
도표의 가운데 중앙에서 볼 수 있듯이 근본이 되는 원인인 무명과 갈애는 네 칸으로 나뉘고, 다시 완전하게 해부해서 암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를 아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법문을 듣고 아는 것, 수행을 해서 아는 것, 법을 얻고 아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법문을 듣고 아는 것은 지금 갖고 있는 오온이 고성제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 고(苦)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오온이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이므로 일어나고 사라질 때마다 고(苦)로 계속 앎으로 해서 오온인 고(苦)를 원하는 갈애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원하지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원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다음 생에서 고(苦)를 받기를 원합니까? 미래에 다음 생에서 고(苦)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생에서 원인이 되는 갈애를 제거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갈애(渴愛)는 범부가 목마르게 오욕(五慾)에 애착하는 것입니다.
정말 갈애를 없애고 싶습니까?
수행자 : 예, 없애고 싶습니다.
그렇게 원하면 할 수 있습니까?
원한다면 말로만 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정말 갈애를 제거하기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이 오온과 함께 하는 것이 고(苦)라는 것을 알 때만이 가능합니다. 오온이 좋은 것이 아닌 고(苦)라는 것을 앎으로 해서 갈애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갈애하고 고성제하고 어떤 것이 중요합니까?
고(苦)가 먼저입니다.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알 때 갈애가 안 생깁니다.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원하게 되어 생이 이어집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수행자 : 예.
그러면 어디서 우리가 고성제를 알도록 노력해야 하는가는 2번 칸의 수(受. 느낌)에서 3번 칸의 갈애로 넘어가는 사이에서 알아야 합니다.
도표의 아래를 보면 2번 칸의 수에서 3번 칸의 갈애로 넘어가는 화살표가 있습니다. 이 화살표가 양방향으로 표시되어있습니다.
첫째, 이 도표에서 주목할 것은 갈애에서 시작해서 집착 쪽으로 가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12연기의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의 과정입니다.
둘째, 그러나 수(受)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연기의 출구(느낌. 갈애의 소멸)'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가면 됩니다.
바로 수(受)와 갈애(渴愛)에서 수행자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수(受)라고 하는 느낌에서 갈애 쪽으로 가면 다시 이 생에서 원인이 되어 미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에서 갈애 쪽으로 가지 않고 원의 밖에 있는 쪽으로 나아가면 느낌이 갈애로 연결되지 않아 갈애가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자에게 묻겠습니다.
한국인이 좋은 차, 좋은 집을 갖고 수준 높은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나'입니까? 아니면 느낌의 작용입니까?
수행자 : 느낌의 작용입니다.
그러면 행복하다는 느낌이 항상(恒常) 합니까?
아닙니다. 항상(恒常)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지 않은 법이 고통인가요? 아니면 즐거움인가요?
수행자 : 고통입니다.
고(苦)라는 것을 자꾸 자꾸 보고 알아차릴 때에 점점 갈애가 줄어들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시면서 지금 가지고 있는 오온이 고성제라는 통찰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현재의 오온이 고성제라는 것을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본다면 갈애, 집착, 업의 형성[行]이 없게 되고, 다음 생의 원인이 되는 갈애, 집착, 업의 생성[有]이 없다면 결과로써 태어남[生], 늙음과 죽음[老死] 역시 없습니다.
그래서 고(苦)가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멸제(滅諦. nirodha sacca)라고 하며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
둘째 날, 질문과 답변
수행자 질문 1 :
오온(五蘊)을 개념(槪念) 없이 어떻게 말로 표현합니까?
우 소바나 사야도 답변 1 :
오온(五蘊)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개념(槪念)입니다. 실재하는 것(paramattha. 빠라마타)은 우리 몸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쉽게 얘기하려면 빤냐띠(pa~n~natti. 명칭. 개념)를 붙이는데 이것을 이름이라고 합니다. 개념이란 이름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개념과 다릅니다. 다만 실재에다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알기 위해서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실재를 보아야 법을 얻기 때문에 실재를 알기 위해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대상을 말하는 것은 개념으로써 모든 것이 빤냐띠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을 모두 오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온아! 이리 와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개념으로 모든 것은 빤냐띠이고 실재하는 것은 모두가 똑같이 알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오온이라는 몸과 마음은 이름이고, 실재하는 것은 성품인데 빠라마타라고 합니다. 이 빠라마타를 아는 것은 느낌으로 압니다. 몸의 느낌은 지, 수, 화, 풍의 4대와 28가지 파생된 느낌으로 압니다. 마음도 수, 상, 행을 통해서 느낌으로 압니다.
몸과 마음에서 실제로 있는 것은 빠라마타이고, 이것을 말하거나 부르기 위해 명칭을 붙이는데 이것이 빤냐띠입니다. 그러므로 오온도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빤냐띠입니다.)
질문 2 :
어떻게 하면 무아(無我)를 알 수 있습니까? 무아를 몰라도 무아를 믿고 수행해도 되겠습니까?
답변 2 :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직 체득하지 않았을 때는 무아를 믿고 수행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성인의 대열에 들지 않은 범부는 믿음을 믿고 실재를 알도록 수행을 하는 것이고 이렇게 수행을 함으로써 실재를 보고 알게 됩니다.
첫 번째는 믿고, 두 번째는 알도록 수행하고, 세 번째는 수행을 함으로써 실제로 보고 알게 되도록 노력을 합니다.
무아에 대해 의심이 없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수다원과를 성취해야 가능합니다.
질문 3 :
'나'라고 하는 것이 무아를 알 수 없게 하는 이유라면 몸 전체를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있게 되는 나라는 느낌이나,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도 결국에는 떨쳐버려야 하는 가요?
답변 3 :
떨쳐버려야 합니다. 내가 아닌 오온의 작용이라고 자주 자주 추구해야 합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역시 수다원과를 얻어야 완벽하게 제거됩니다. 우리가 수행 중에 정도의 차이이지 항상 내가 있다는 것은 수행을 하면서도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줄여가려는 노력으로써 수행을 하는 것이고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질문 4 :
오온의 작용으로 12인연으로 돌아가는지요? 오온의 작용이 없어지면 무아가 되는지요? 번뇌가 마음을 떠나지 않고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이런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있는지요?
답변 4 :
오온의 작용으로 12연기대로 순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온이 고성제라는 것을 모르므로 해서 순환하는 것이지 오온 자체가 원인은 아닙니다. 오온이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생각은 무명을 원인으로 해서 하는 생각입니다. 이때 오온 자체가 직접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오온을 원하는 무명에 의해 잘못 알고 오온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하는 갈애가 있음으로 12연기대로 도는 것이지 오온의 자체는 무아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번뇌가 생기면 잘 알아차리십시오. 계속해서 번뇌가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알아차리십시오. 이렇게 알아차리다 보면 번뇌가 점점 줄어듭니다.
우리가 사는 집도 물이 새지 않도록 지붕을 덮듯이 알아차림과 노력이 함께 한다면 번뇌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5 :
모든 것을 고(苦)로 돌리면 생사(生死)를 어떻게 알게 되는지요?
답변 5 :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은 오온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뜻이지 생사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고(苦)는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로 오는 것입니다.
질문 6 :
좌선 중에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느낌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이것은 오온 중의 무슨 현상이며 무슨 작용입니까?
답변 6 :
식온(識蘊 . vi~n~nnakkhandha)을 윈냐나 칸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 아는 마음이 오온의 리더(지도자)가 됩니다. 그렇다고 나머지 4가지가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라임주스로 보면 거기에 설탕도 들어가고 물도 들어가고 하지만 라임열매가 주가 되므로 라임주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질문 7 :
어제 법문에서 사성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오온과 사성제에 대한 것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도제와 도는 같은 것입니까?
답변 7 :
오온(五蘊)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고제(苦諦. dukkhasacca)입니다.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아는 것이 도제(道諦. maggasacca)입니다. 도제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에서 집중력이 좋아지므로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제입니다.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는 고(苦)의 세 가지 대한 유한성을 의미합니다. 고의 세 가지는 심신의 괴로움을 말하는 고고성(苦苦性)과 변화의 고통을 말하는 괴고성(壞苦性)과 오온의 괴로움을 말하는 행고성(行苦性)이 있습니다.
여기서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유한(有限)하며 고성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둑카사짜(dukkhasacca)라고 합니다.
어제 법문에서 말씀드린 도제(道諦)는 성인의 반열에 들어서 얻는 도(道. magga)가 아닙니다. 어제 말씀드린 도(道)는 지혜에 속하는 고(苦)가 아닙니다. 성인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은 멸제(滅諦)를 말하며 이것을 도과(道果)를 성취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인의 대열로 인도하는 것은 도성제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위빠싸나 도를 말하는 진제입니다. 위빠싸나 도는 진제이며 실세간적인 도는 속제입니다.
도성제는 도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팔정도를 말하고, 도(道. magga)는 멸성제에 의해 열반에 이르러 얻게 되는 도과(道果)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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