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아침 법문
마음을 알아차리는 법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알아차리는데 있어서 밖에서 들어오는 대상 5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일어나는 대상이 6가지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항상(恒常) 하는 대상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밖[外]에서 들어오는 마음은 다섯 가지입니다.
1. 보는 마음[眼識]
2. 듣는 마음[耳識]
3. 냄새맡는 마음[鼻識]
4. 맛을 아는 마음[舌識]
5. 몸을 아는 마음[身識]
둘째, 안[內]에서 생기는 마음은 여섯 가지입니다.
1. 탐욕이 있는 마음[貪心]
2. 성냄이 있는 마음[嗔心]
3. 어리석은 마음[癡心]
(이상은 불선(不善)의 대표적인 마음으로 탐(貪), 진(嗔), 치(癡)를 말합니다.)
4. 탐욕이 없는 마음[寬容]
5. 성냄이 없는 마음[慈愛]
6. 어리석지 않은 마음[智慧]
(이상은 선(善)의 대표적인 마음으로 관용(寬容), 자애(慈愛),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셋째, 항상(恒常) 있는 마음은 두 가지입니다.
1. 들숨의 마음
2. 날숨의 마음
여기서 마음이란 뜻은 마음의 본성을 아는 것입니다.
안식(眼識)은 눈에서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보는 마음이란 볼 때만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식(耳識)도 귀에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비식(鼻識)은 코에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것이고, 설식(舌識), 신식(身識)은 입과 몸에 통해서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18계(十八界)라고 하는데 육근(六根. 안, 이, 비, 설, 신, 의)이 육경(六境. 색, 성, 향, 미, 촉, 법)에 부딪쳐서 육식(六識.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을 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여기서 세 가지 조건들의 부딪침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촉입니다. 이런 촉에 의해 식이 성립됩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 앞선 마음을 뒤에 있는 마음이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여기에 컵이 있다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컵이구나, 하고 앞선 마음이 있고, 뒤에서 다시 이 앞선 대상을 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한꺼번에 같이 일어나지 않고 한 순간에 하나만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대상이 있을 때(일어났을 때) 대상이 있는 것을 알고, 다시 대상이 있는 것을 뒤에 일어난 마음이 안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알고', 다시 '있는 것을 알고'를 하는 것은, '앞에 마음이 있고', '뒤에 마음이 있고'를 하면서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대상이 있고 알고', '있고 알고'를 거듭하는 것이고 이것은 '앞에 마음', '뒤에 마음'을 거듭하여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볼 때는 사마디(samaadhi. 집중)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마디가 있으므로 해서 앞선 마음을 뒤에 마음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집중력이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을 때 대상이 있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같이 일어나고 같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식이나 비식이나 설식이나 신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대상을 알고 보면 보는 것을 알고 다시 뒤에서 이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안[內]에서 생기는 마음에서 첫째, 탐욕이 있는 마음을, 욕심이 있는 마음으로 알아두어야 하고, 이 마음은 바람직한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보아야 합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과,
탐욕이 없는 마음(관용), 성냄이 없는 마음(자애), 어리석지 않은 마음(지혜)을,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이 모든 것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외부에서 방문하는 의식과 내부에서 생기는 의식이 없을 때는 들숨과 날숨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들숨과 날숨을 볼 때는 '들숨이 들어오고 없고', '날숨이 나가고 없고' 입니다.
(호흡의 경우 코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들숨과 날숨으로 이해하고, 가슴이나 배의 호흡은 일어나고 꺼지는 것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호흡은 일어남이 있고 휴지부가 있고, 다시 꺼짐이 있고 휴지부가 있고, 가 반복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들숨이 들어오고 없고', '날숨이 나가고 없고', 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때의 '없고' 라는 것은 일어남이 있고 사라진 것을 말하며, 또한 일어남이 있었다가 사라진 뒤에 쉼(휴지부)이 있는 것을 '없고'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모든 대상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마음도 함께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대상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인데,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없고, 알고 없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념처(四念處. satipa.t.thaana)는 몸과, 느낌과, 마음과, 마음의 대상(法)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사념처 중에서 마음을 본다고 말할 때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든지 알아차리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것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알고 보고, 알고 보고, 하는 것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담마누빠싸나(法念處.dhammaanupassanaa)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고, 지적(知的)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찌따누빠싸나(心念處. cittaanupassanaa), 즉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하셨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도 수다원과를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많이 보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넓은 의미에서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마음이 하는 것이므로 마음을 보는 것으로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념처에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본다고 하는 것은 이것과 다르게 마음 그 자체의 본성을 대상으로 보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몸을 볼 수도 있고, 느낌, 생각, 행위를 볼 수도 있는데 이때도 본다는 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고 이것도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마음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르게 아는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으로써의 마음을 본다는 것을 '마음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본다'고 하는 표현은 한문으로는 관(觀)을 의미하며, 영어로는 look, see 등등 많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대상을 마주할 때 눈으로 맞이하는 것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고 대표적이라서 본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에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대상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직관(直觀)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용어로써 '본다'는 말을 사용하고 또한 실제로 눈으로 대상을 제일 많이 보기 때문에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알아차림을 할 때는 '본다'는 용어에 익숙하여 마음으로 대상을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 실제로 눈으로 보려고 애를 쓰다 두통이나 상기가 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뿐더러 특히 마음을 보는 경우에는 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비 물질이라서 물질을 대하는 개념으로는 알기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경우에는 본다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특별하게 '마음을 본다'고 말할 때는 '본다'라고 하지 않고 '마음을 알아차린다' 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문제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수다원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많이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씀은 수행의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경우에 수행자들이 처음에 마주하는 대상을 몸이라는 물질이나 마음의 작용인데 수행의 진전에 따라 이런 대상들이 사라져 버리면 남는 것은 마음만 남습니다.
이때 몸이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지고, 알아차릴 대상이라고는 아는 마음 하나이기 때문에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앎'을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것이 아는 마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숙지되지 않은 수행자는 헤매게 되고 장애가 일어나거나 수행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일어나는 대상의 뿌리를 알게 되어 본질적인 것에 접근하여 지혜가 나게 하며, 마지막에서 무사하게 수행을 계속하게 되는 힘이 되기 때문에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사마디가 성숙되어야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수행을 하려면 먼저 호흡과 몸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충분히 거치고 마음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셋째 날, 저녁 법문
여기 계신 수행자 여러분은 매일 하는 법문을 잘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이해하는데 그치지 말고 수행을 해서 실제 경험을 해야 할 것이고 마지막에는 도과(道果)를 얻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법문을 듣고 실행을 해서 도와 과를 얻기를 !
일곱 가지 청정에서 첫째, 계청정(戒淸淨), 둘째, 심청정(心淸淨), 셋째, 견청정(見淸淨)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 드렸습니다.
네 번째, 도의청정(道疑淸淨. ka!nkhaavitatra.na-visuddhi)을 이해하려면 12연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12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온에 내가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오온을 창조주의 창조물로 보거나 우연히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됩니다. 도의청정은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도과(道果)라는 열반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사람은 가슴에 찔린 창을 뽑듯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즉시 잘못된 견해를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러 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강하고 빠르게 제거해야 합니다.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지 않고 수행을 해도 공덕을 쌓고, 집중력을 얻고, 생성과 소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온의 소멸을 내가 소멸한다고 믿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그 두려운 마음 때문에 수행의 향상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도과(道果)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견해 세 가지를 법문을 듣고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12연기를 꼭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법문을 내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오온의 작용입니다. 여기에서 오온은 식(識. vi~n~naa.na), 명색(名色. 정신과 물질. naamaruupa), 육입(六入. 六根. sa.laayatana), 촉(觸. 接觸. phassa), 수(受. 느낌. vedanaa)입니다.
오온은 자연히 생긴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시간에서 무명(無明. avijjaa)과 행(行. sa!nkhaara) 을 원인으로 현재의 오온이 있게 된 것입니다. 과거의 시간에서 무명과 행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로써 현재의 식, 명색, 육입, 촉,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오온을 받는 것, 생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천상에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많은 생 자체는 고(苦)라는 것을 모름으로써 생을 원하고 집착하여 생을 다시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생에서 현재의 신, 구, 의라는 3업이 행한 선한 행동이나 불선한 행동들이 원인이 되어 다시 업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원인이 있음으로써 미래에서도 태어남[生]과 늙음과 죽음[老死]이 있게 될 것이고 이와 같이 윤회를 멈추지 못하면 생로병사 역시 멈출 수가 없고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생로병사가 있는 한 저나 수행자 모두가 고통 속에서 윤회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왕자로 태어나서 맛볼 수 있는 감각적인 것을 다 맛보고 즐겼으나 처음 노인, 병든 자를 보고 두려움을 느껴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숲으로 떠나셨습니다.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시고자 출가를 하신 것입니다.
미얀마에는 법문을 하시는 여러 큰스님이 계십니다. 그 분들 중에는 입적하신 분도 계시고 현재 살아 계신 분도 있습니다. 이미 입적을 하신 모곡 사야도께서는 다음 세 가지를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첫째,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것
둘째, 생을 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아는 것
셋째, 더 이상 생을 받지 않고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위빠싸나 수행을 하는 것.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生滅)을 아는 것, 생멸을 안 후에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법문을 하셨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신도들에게 법문을 하실 때 절에 와서 보통의 보시 공덕을 쌓기 위해서 오거나 집중력의 공덕을 쌓기 위해서나 또는 다른 공덕을 원하기 때문에 온다면 오지 말고 도과를 얻기를 원하는 사람만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의 한 수행자가 저에게 묻기를 다른 센터의 스님은 12연기 도표를 사용하지 않는데 왜 모곡에서는 도표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이 도표를 이해하지 않고 수행을 하면 수행의 향상을 가져오는 것이 느리게 됩니다. 뿐더러 이 도표를 통해서 우리가 윤회를 도는 모양을 알게 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겪어야 되는 이유를 알게 하기 위해서 도표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무명(無明)과 행(行)이 노사(老死)의 원인이 되고 오온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입니다. 갈애(渴愛), 집착[取], 업의 생성[有]을 원인으로 다음 생에 생로병사(生老病死)로 이어집니다.
이 도표를 봄으로써 교훈을 얻고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음으로 열반을 얻기 위해 강한 마음으로 수행에 임하게 됩니다.
12연기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첫 번째 수행자 여러분의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견해가 청정해지므로 지혜(pa~n~naa)와 분명한 앎(sampaja~n~na)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앎과 함께 수행을 함으로써 두려움, 슬픔, 기쁨 등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고(苦)라고 볼 수 있게 됩니다.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짐이 고(苦)라고 보고 앎으로 해서 고에서 벗어나고 싶게 됩니다. 앞에서 분명한 앎이 인도함으로써 도과(道果)를 얻는데 훨씬 빠르게 얻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마하니다나경에서 왜 살아있는 것들이 윤회해서 도는 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12연기를 세 가지 견해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돈다고 하셨습니다.
수행자가 12연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면 많은 이익이 있습니다. 사실 12연기는 어려운 법문입니다. 미얀마에서도 최소한 7일 정도는 법문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바르게 이해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주십시오. 윤회를 돌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왜 윤회를 하는가를 설명하겠습니다.
12연기의 이해가 부족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아(無我)라는 법을 모르므로 '나'라는 그늘 밑에서 살아왔고 그래서 내가 윤회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12연기 도표의 첫 번째 칸 1번에 있는 무명(無明. avijjaa)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의 영향으로 해서 모를 뿐이지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은 내가 아니고 일종의 법인 것입니다. 무명의 본성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무명이 일어나고 사라진 후에 무명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의 힘이 작용해서 행(行. sa!nkhaara)이라고 하는 업의 형성이 따릅니다. 이 행은 선업과 악업 모두가 포함되는 행인 것입니다.
무명의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없지만 무명의 힘이 남아서 그 영향력으로 우리가 행위라는 것을 합니다. 행(行)이 '나'인가 하면 '나'가 아닙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말하기를 원하고, 생각하기를 원하고, 내가 말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 모두 행의 작용입니다.
빨리어로 상카라(sa!nkhaara. 行)의 본성은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행이라고 하는 것 역시 법(法.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이고 항상(恒常) 하지 않습니다. 행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우리가 과거 생에서 상카라(行. 마음의 의도. 업의 형성)가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지 못함으로써 도과를 얻지 못했고, 그래서 행의 힘(영향)으로 다시 이 생의 오온을 받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 생에서 처음 시작인 식(識. vi~n~naa.na. 입태식. 재생연결식)으로 시작되는 오온은 과거의 업의 힘 때문입니다. 과거의 업(業)이 이 생에 따라오지는 않지만 만일 과거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이것 역시 잘못된 견해입니다.
여기서 경전에 있는 예를 하나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울을 볼 때 보고있는 사람의 모습이 거울에 나타납니다. 그러면 '거울 속에 나타난 모습이 거울을 보고 있는 사람입니까?' 물으면 대답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울을 보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상좌불교의 부처님말씀에 의하면 과거의 업이 현생에 따라오지는 않지만 현생이 과거의 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뚜바라고 불리는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단명하고, 어떤 사람은 병을 얻고, 어떤 사람은 재산이 많고, 가난하고, 잘생기고 등등 한 사람, 한 사람의 현재의 결과가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각자가 다른 결과는 전생에서 행한 업의 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생을 한 사람은 단명하고, 살생을 삼가한 사람은 오래 살고, 남을 괴롭힌 사람은 병을 얻고, 괴롭히지 않은 사람은 건강하고, 보시를 많이 한 사람은 부자이고, 보시를 안한 사람은 가난하고 등등의 이유가 있음으로써 이 생에서 얻은 결과가 각기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해서 행이 있고, 행을 원인으로 해서 식(재생연결식)이 있고, 식을 원인으로 해서 명색(정신과 물질)이 있고, 명색을 원인으로 해서 육입이 있고, 육입을 원인으로 해서 촉이 있고, 촉을 원인으로 해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受)라고 하는 느낌에 대해서 말하자면 느낌도 내가 있다고 믿으면, 내가 느끼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고, 내가 덤덤하게 느끼는 것으로, 모든 느낌을 내가 느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고, 싫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을 내가 느낀다고 생각하면 이것 역시 잘못된 견해입니다.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닌 감수의 모임[受蘊]인 수(느낌)의 본성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한 스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열반에 다다르게 하는 근본이 되는 선업의 공덕이 무엇인가요?'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계의 청정이고,
두 번째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견해의 청정이다.'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첫 번째 계의 청정이 중요한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두 번째 견해의 청정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견해의 청정입니까?'
'견해가 청정해졌다고 하는 것은 선업과 악업을 행하는 '나'는 없고, 선업과 악업의 결과를 받는 '나'도 없고, 선업과 악업을 행하는 것은 상카라(sa!nkhaara. 行. 마음의 의지. 意圖)이고, 그 결과를 받는 것은 느낌일 뿐이라고 아는 것이다. 행한 것은 마음의 의도[行]이고 결과를 받는 것은 느낌이라고 아는 것이 견해의 청정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수행자에게 묻겠는데 수행을 하는 목적이 세속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도과를 얻기 위해서인가요?'
'도과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세속적인 행복과 물질적인 풍요함을 얻기 위해서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으나, 도과의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지 않고는 안됩니다.
'세속적인 행복과 부유함 등 세속적인 추구가 병들고 결국에는 죽어야 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줍니까?'
'아닙니다.'
'인간계가 아닌 천상계 존재들 역시 그들의 수명이 다하면 늙고 죽습니다. 여기 계신 수행자 여러분 중에 늙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프기를 원합니까?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 역시 원하지 않습니다. 늙기를, 죽기를 원하지 않지만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합니다. 나나 수행자가 늙고 병들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은 원인이 되는 무명과 행(업의 형성)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고를 다시 반복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도표의 3번째 칸에 있는 '갈애', '집착', '업의 생성'입니다. 이 세 가지의 원인을 만들지 않아야 됩니다. 이 세 가지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 중에서 고(苦)의 원인이 되는 집제(集諦)에 해당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성제 중에서 제거해야할 것은 바로 이 집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애, 집착, 업의 생성, 즉 고(苦)의 원인이 되는 집제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느낌의 힘을 점점 약하게, 종국에는 느낌이 힘을 쓸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느낌도 법(法)입니다. 이 법 역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사라진 후에도 느낌이 고(苦)라는 것을 모름으로써 느낌의 힘(영향력)이 갈애가 생기도록 만들게 합니다.
여기서 법이라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고 이것이 고(苦)라는 것을 모름으로 느낌을 받게 되고 이 느낌으로 인해 갈애로 넘어 갑니다.
여러분께서 이 갈애를 제거하고 싶으면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봄(주시)으로 해서 알아차리고, 즉 보고 알고, 보고 알고를 계속함으로 집중력(사마디)이 좋아집니다. 이렇게 알아차린 뒤에 집중력이 생기면 다시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生滅]을 분명히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처음에는 알아차리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계속해서 알아차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 이상을 알아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차츰 사마디가 생기면 이제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생멸(生滅)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알아차림을 유지하여 집중력을 얻는 것이 순서입니다.)
한국 수행자들이 심념처(心念處. 마음을 알아차림. cittaanupassanaa)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잠깐 언급을 하겠습니다.
사념처(四念處. satipa.t.thaana)에 대해서 말하자면 첫째, 신념처(身念處. kaayaanupassanaa)인데 신념처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것은 사념처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법이라서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에는 신념처를 말씀하시고 둘째로, 수념처(受念處. vedanaanupassanaa)를 말씀하셨습니다. 수념처는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념처 역시 분명하고 두드러진 편이어서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신념처와 수념처를 주 대상으로 하려는 수행자의 성향은 다릅니다. 욕심이 많고 지적이지 않으면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가 좋고, 욕심이 많고 머리가 좋으면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념처가 좋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는 심념처(心念處. cittaanupassanaa)입니다. 심념처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지적(知的)이지 않으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잘못된 견해란 '나', '내 아들', '내 딸', '내 재산' 등등 모든 것에 항상 '나'를 포함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 처음 대상은 들숨 날숨입니다. 들숨 날숨을 할 때 들이쉬는 대로, 들이쉬는 동안 알아차리고, 내쉬는 대로 내쉬는 동안 알아차립니다.
들숨은 물질이고,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물질이 아닌 들숨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입니다. 즉 물질이 아닌 마음을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숨을 들이쉬면서 알고', '내쉬면서 알고'를 할 때 물질이 아닌 '아는 마음' 쪽으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미얀마에서 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데 있어서 마음을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고, 다는 아니지만 지적(知的)이지 않은 사람도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이때 여러분 자신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다면 대상을 알아차릴 때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이름을 붙여도 좋습니다.
그것은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 숨을 내쉬면서 알고, 들이쉬면서 알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바로 법념처(法念處. dhammaanupassanaa)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법념처는 마음의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명칭을 붙일 때는 어떤 것을 선택해도 좋지만 본인이 머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대상을 알아차릴 때 이름을 붙여도 무방합니다.
좌선을 시작해서 처음 15분 정도는 계속해서 들숨 날숨을 알아차림으로써 점점 집중력이 생기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소리와 귀[耳根]가 부딪침으로써 듣는 마음[耳識]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식(耳識. 귀로 듣는 마음)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계속 알아차림으로써 결국 소리가 사라집니다.(들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수행을 할 때,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 비오는 소리를 듣는 마음(이식)을 대상으로 계속 알아차림으로써 집중력이 강해져서 나중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집중력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듣는 마음이 사라지고 난 후 수행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가려우면 가려움을 아는 마음, 아프면 아픔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모든 대상을 강한 의지와 불굴의 노력으로 알아차림과 함께 보게 되면 이것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들이 사라진 후 수행자들의 몸에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물질로써 심장의 소리를 이식(듣는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심장이 뛰고 들으면서 알고, 심장이 뛰고 들으면서 알고를 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집중력이 생기면 앞의 마음을 뒤에 마음이 항상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소리를 듣는 마음이 있을 때, 듣고 그 마음은 사라졌는데 그 때에 그 다음 마음은(그 듣는 마음은 듣는 것으로 역할이 끝나고 사라졌고) 앞에서 있었던 듣는 마음이 사라진 것을 뒤에 마음이 압니다.
다시 말하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 마음(이식)이 일어나서 듣고 알고, 사라진 앞선 마음을 뒤에 마음이 다시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항상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앞선 마음이 없어졌을 때 뒤의 마음이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미얀마에서는 교통 신호등에 몇 초, 몇 초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신호등에 붙은 숫자 표시가 차츰 줄어듭니다. 5, 4, 3, 2, 1, 0으로 가면서 45초를 줍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와 같이 3이 있으면 3이 없어지므로 2가 생기고, 2가 없어지면서 1이 됩니다.
여기서 듣는 마음이 없어졌고, 그 뒤의 마음이 듣는 마음이 없어졌음을 뒤에서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난 것을 아는 것과 마음이 사라진 것까지를 아는 것은 다릅니다. 일어난 것을 알 수도 있고, 사라진 것까지 알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라진 것까지 마음을 알아차리면 마음이 생멸한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대상을 보고 아는 마음이 앞의 마음 뒤에서, 다시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뒤에 마음으로(이것을 편의상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수 있어야 마음이 한 순간에 하나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生滅)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순간의 마음은 있지만 이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 현상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알게 되었을 때 진정으로 무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느낌을 알아차릴 때도, 느낌도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설명한 것을 여러분이 처음부터 다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단계별로 이런 단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정말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을 알아차리려 한다면 상당한 집중력을 요합니다. 어느 정도 집중력이 생겼을 때만이 마음을 계속 알아차려서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을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손에 볼펜을 쥐고 이것이 볼펜이라고 봅니다. 이때 볼펜이라는 대상이 일어났다 사라지면서 눈하고 대상하고 부딪쳐서(접촉) 볼펜이라고 아는 식(識)이 생깁니다. 이것이 첫 번째 마음입니다.
이 첫 번째 마음은 물건을 보고는 끝나는 것입니다. 일어났으므로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마음이 일어나서 다시 볼펜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로 볼펜을 본 마음은 앞선 마음이고 다시 본 마음은 뒤에 마음입니다.
이렇게 앞의 마음과 뒤에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생멸(生滅)을 봐야 합니다. 앞에서 이식(듣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다시 뒤에 마음이 앞선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을 때 뒤에 마음이 앞선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
셋째 날, 질문과 답변
질문 1 :
제일 처음에 좌선을 시작하면 무엇부터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까?
답변 1 :
처음 좌선을 시작하면 들숨과 날숨을 15분 정도 알아차리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른 두드러진 대상이 없으면 계속 코에 집중하여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모곡사야도의 12연기 수행방법은 처음에 10분에서 15분 정도 코의 호흡에 집중할 것을 말합니다. 이는 초기에 사마타 수행방법을 활용하여 집중력을 키워 안정감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 수행에서 꼭 코의 호흡만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수행자들의 상당수가 배의 호흡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코의 호흡을 말할 때는 들숨 날숨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가슴이나 배의 호흡은 일어남 꺼짐으로 부릅니다. 때로는 배의 호흡을 일어남 사라짐으로 부를 수도 있으나 본문에서 보듯이 일어남 사라짐은 생멸(生滅)을 말하는 것으로 호흡의 일어남 사라짐과 혼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배의 호흡은 일어남 꺼짐으로 부릅니다.)
질문 2 :
12연기 중에서 유(有)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2 :
유(有)는 빨리어로 깜마바와(kammabhava)라고 합니다. (이는 업을 통한 존재. 업유(業有)라고도 하고) 업의 생성(業의 生成)이라고도 부릅니다. 유의 시간은 현재입니다. 현재에서 신, 구, 의로 행하는 선한 행동과 선하지 못한 행동들인 것입니다.
현생에서 행한 선업이나 불선업들이 현생에서 행한 업의 결과로 다음 생이 생깁니다. 그래서 유(有)를 업의 생성이라고 합니다.
(유는 현생이면서 미래의 원인이 되는 업입니다.)
질문 3 :
죽으면 떠나가는 것이 영혼인가요?
답변 4 :
이것이 영혼은 아닙니다. 죽어갈 때에 죽는 사람은 자신이 자기가 가야 할 생에 대해 어떤 형상으로 나타날 수는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다음 생을 자신이 상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죽을 때 자식이나 어떤 것에 집착을 하면 집 주위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죽을 당시의 마음이 가야할 데를 못 가서가 아니라 생의 한 종류로 집 주위에서 태어납니다. 예를 들면 아귀나 축생 등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영혼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무상(無常)을 설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恒常) 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정신 또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마음은 영원하지 않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원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영혼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시각의 차이는 매우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자의 존재나 창조의 문제와 직결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죽으면 떠나가는 것은 영혼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업의 결과로써 생명이 사는 세계 중에 한 곳에서 조건지어져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윤회에 드는 것으로 다음 생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색계, 무색계로 나뉩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이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이 연속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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