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위빠사나

6. 넷째 날, 아침 법문

通達無我法者 2008. 4. 2. 13:53
 

 

 

넷째 날, 아침 법문


위빠싸나 수행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념처 수행을 할 때 처음에는 코나 배에 마음을 두고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며 집중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코의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릴 때, '들이쉬면서 알고', '내쉬면서 알고', 다시 '들이쉬면서 알고', '내쉬면서 알고'를 10분에서 15분 정도 하면 집중력이 좋아집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집중력이 생겼을 때 몸 전체를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합니다.


이번에는 안에서 방문하는 손님을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에서 방문하는 손님은 탐심, 진심, 치심과 무탐심, 무진심이 있고 무치심이 있는데 무치심은 어리석지 않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수행 중에 때로는 탐심이 생깁니다. 이때 수행자는 탐심이 생긴 것을 알아차리고 탐심이 사라질 때까지 보셔야 합니다.


(무탐심은 관용(寬容)이고 무진심은 자애(慈愛)이고 무치심은 지혜(智慧)입니다. 지혜는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탐심은 불선(不善)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불선한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은 선한 마음입니다. 즉 선하지 못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선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알아차림은 행으로써 선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어떤 대상이나 대상에 불순한 것이 붙지 못하도록 마음을 보내는 것이 알아차림(sati)입니다. 이렇게 대상에 마음을 보내면 다시 마음이 이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밖에 알 수 없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선한 마음이 새로 일어나면 기존의 불선한 마음은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의 효능입니다.)


탐심이 사라지고 난 후에 대상이 없으면 몸 전체를 알아차리십시오. 어느 곳에서든지 마음이 일어나서 몸의 어느 부분으로 마음이 가지는 곳이 있거나, 또는 다른 느낌이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이 대상이므로 알아차리십시오.

만약 아픈 곳이 있다면 아픈 곳을 알아차리면서 아픔을 주시하십시오. 그리고 아픔이 사라지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오르면 그 망상을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망상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난 후에 다른 대상이 없다고 알아차림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 몸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짐이 있습니다. 소리나 다른 두드러진 대상을 알아차리시고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십시오. 이렇게 소리를 듣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다른 대상을 알아차리십시오.

때로는 지루한 마음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지루한 마음은 치심(癡心)입니다. 이때도 지루한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십시오. 이렇게 계속해서 알아차리다 보면 일어나는 것 역시 마음이고 사라는 것 역시 마음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계속해서 대상을 주시함으로써 알아차림이 계속 유지되면 여러분의 집중력이 더 좋아집니다. 대상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알고를 하게되면 계속해서 아는 마음만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앞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뒤의 마음이 계속 알아차리는 것을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곡사야도 수행방법은 첫째는 집중력(사마디)을 높이기 위해서 대상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로 집중력이 좋아진 다음에 대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모곡 방법은 처음에는 코의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여 알아차림을 계속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이렇게 직접 자신의 몸에서 알아차릴 때는 지혜(智慧. pa~n~naa)와 분명한 앎[正知. sampaja~n~na]이 함께 했을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어남과 사라짐은 '나'라고 하는 자신이 아니고, 단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라고 하는 아만심, 유신견이 없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보고 알았을 때,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어남이 고(苦)이고 사라짐 역시 고(苦)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 뿐이라는 것을 알고 고(苦)를 숙고함으로써 팔정도 중에 정견(正見)과 정사(正思)를 하게 됩니다. 정견과 정사를 숙고하여 지님으로써 열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처음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고 알고 하십시오. 오직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 내가 있다는 생각을 제거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는 것을 통해 정견(正見)과 정사(正思)로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넷째 날,  저녁 법문


오늘은 12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왜 윤회를 하는가 하면 가장 큰 근본원인은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입니다. 그래서 무명과 갈애를 번뇌의 두 가지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오온(五蘊)이 있게 한 가장 가까운 원인은 행(行. 좋고 나쁜 의도가 가지고 신, 구, 의로 행한 업)이며 현재의 오온이 있게 한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무명입니다.

현재 이 자리에 있는 저나 수행자 여러분이나 왜 현재의 이 생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과거 생에서 무명의 속임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연기 도표 4번에 있는 미래의 생을 받게 되는 가장 가까운 원인은 유(有)라고 하는 현생에서의 업의 생성(kammabhava)입니다. 그 다음 가까운 원인은 집착[取]입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갈애[愛]입니다.


여러분께서 갈애의 본성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다시 고통스러운 미래의 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윤회에 돌게 하는 것은 과거 생에서의 무명과 현생에서의 갈애입니다. 이것을 근본원인으로 다시 12연기의 순환으로 윤회를 하게 됩니다.


과거 생에서 모르고 행하므로 업을 만들었고, 현생에서는 원함이 있으므로 집착을 하고, 집착함으로 얻기 위해서 신, 구, 의로 행하므로 업을 만들고, 업을 만들므로 해서 미래의 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윤회의 근본원인이 되는 무명과 갈애의 두 가지로 생을 받게 되면 사성제 중의 고제(苦諦)와 고의 원인이 되는 집제(集諦)를 계속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제과 집제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12연기의 도표에 있는 2번과 4번은 고제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1번과 3번은 집제에 해당됩니다. 도표 1번의 과거 생의 무명과 행의 결과로 도표 2번 현재의 생이 있고, 도표 3번 현생에서 갈애, 집착, 업의 생성으로 미래의 생이 있습니다.


과거 생에서 선한 업을 한 사람은 선업의 좋은 결과로 이 생을 받고, 또 현재의 선업의 행으로 미래의 생에 좋은 결과를 받습니다. 또한 과거 생의 불선업을 원인으로 현생에 나쁜 결과가 있습니다. 다시 이것이 원인이 되어 결과로 계속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로 이어집니다. 과거에 원인이 없으면 결과로써 현재도 없고, 현재에 원인을 만들지 않는다면 미래에 결과도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사리불 존자는 전신(사리불존자가 출가하기 전 속인 시절)이 '우 빠띠사' 라는 남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죽지 않는 법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죽지 않는 법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법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에 거리에서 탁발을 하는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스님은 아라한 이셨습니다. 우 빠띠사가 그 아라한의 행동을 보니 위엄있게 걸어가는 모습이 단아하고 맑고, 평온한 기품이 흐르는 존경심이 절로 나는 분이었습니다. 그가 평화롭고 조용한 것을 보고 그에게는 반드시 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그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우 빠띠사는 스님(아라한)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은 누구이시며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님은 말했습니다.

'나의 스승은 고타마 붓다이시고 나의 이름은 아싸지입니다. 나의 스승이 설한 가르침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생긴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법문을 들은 우 빠띠사는 친구인 꼴리따(뒤에 목련존자가 됨)와 함께 고타마 붓다에게 갔습니다.


이와 같이 12연기에서 볼 수 있듯이 무명과 행이라는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의 결과가 있고, 현재의 원인인 갈애[愛], 집착[取], 업의 생성[有]으로 미래에 생을 받고 고통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생을 원하지 않는다면, 즉 열반을 원한다면 현재에 원인을 만들지 않을 것을 수행자들께서는 숙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 생을 받지 않기 위해서 제거해야할 것은 도표 3번에 있는 갈애, 집착, 업의 생성입니다. 미래 생에 원인인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을 사성제에서는 집제라고 합니다.

도표 3번은 미래 생의 원인을 현재 만들고 있는 곳입니다.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란 세 가지의 근본은 갈애입니다. 원하는 것, 좋아한다는 갈애는 어떤 것인가 하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온(五蘊)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오온(五蘊)의 색, 수, 상, 행, 식은 도표 2번에 있는 식, 명색, 육입, 촉, 수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도표 2번 칸에 있는 오온을 제거한다면 갈애는 저절로 제거됩니다.


부처님께서 나뚜마까(natumhaaka)라는 경에서 '다섯 가지 오온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미래에는 분명히 고통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온을 좋아하는 마음을 제거했을 때만이 미래에 결과로써 평화로움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수행을 할 때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고 또 좋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시고 마음을 기울여 수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써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일로 한 분이 아라한이 되신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삐따말라로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이름이 가진 뜻은 운동경기에서 가장 잘한 사람에게 금메달을 달아 주듯이, 최고로 수행을 잘 해서 달아주는 금메달이라는 뜻입니다.


이분은 어느 날 시장을 가려고 집을 나섰는데 우연히 길가에 있는 절에서 스님 한 분이 학승들에게 교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가르침의 내용이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의 어떤 것도 우리 것이 아니고, 오온을 원하는 마음이 미래를 있게 하고, 이 오온을 좋아하여 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이것이 나의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한다면 원함이 저절로 줄어들고 종국에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이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해서 스님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되기를 청한 다음에 우리에게 생을 받게 하는 원인인 갈애를 제거하기 위한 수행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절에서 그에게 비구계를 주고 다른 30명의 스님들과 함께 숲에서 수행을 하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항상 알아차림과 함께 노력을 기울여 수행할 것을 말했습니다. 갈 때, 올 때, 앉을 때, 잠들 때도 항상 알아차림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알아차림과 함께 하라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여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숲 속에서는 30명의 수행자가 서로 떨어져 한 명씩 자기 처소에서 혼자 고요히 수행을 했습니다.


그는 내가 열반을 얻을 때까지 결코 수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불굴의 의지로 수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좌선을 할 때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다리가 저려서 행선을 하려고 일어나면서도 다리의 저림을 알아차리고, 일어나고자 함을 알아차리고, 일어남과 허리를 펴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걸을 때도 발을 들고, 나가고 놓는 모든 동작을 알아차리고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걸을 때도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렸으며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렇게 오온인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계속해서 알아차렸습니다. 이렇게 계속 걸으면서 알아차림을 하다보니 다리가 너무 아파서 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가며 알아차리는 수행을 했습니다.


이때 수행자의 옆모습이 짐승이 기어가는 것같이 보여서 사냥꾼이 지나가다가 산짐승으로 잘못 알고 수행자에게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옆구리에 깊게 박혔습니다. 수행을 하시던 스님은 넘어졌고, 그 상태에서도 스님은 알아차림을 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으면서 화살을 빼고 손으로 출혈을 막으면서 계속 수행을 했습니다.


이때 스님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이 고통을 알아차림과 노력과 지혜로 밀착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느낌을 고통으로 알고, 통증이 일어남을 알고, 또 통증이 일어남을 알고, 이렇게 계속 수행을 했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 잠깐씩 기절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 고통은 나의 고통이 아니고, 이 고통 안에 나도 없고, 단지 일어나고 사라짐뿐이라고 숙고했습니다. 이렇게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수행을 통해서 알아차렸을 때, 오온을 원하는 마음이 없어졌고, 오온을 원하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온을 원하는 마음이 없어졌을 때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님은 이처럼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고 난 뒤에 오온을 혐오하는(원하지 않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수행을 하면서 거기서 벗어나고픈 마음으로 더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스님은 계속 일어남 사라짐을 알아차리다가 마침내 일어남 사라짐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이때 몸이 더울 때 시원한 물을 끼얹는 것처럼 시원하고 평화로움을 느꼈습니다. 이 순간 스님은 고요와 평화를 맛봄으로 해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아라한이 되었을 때 자신이 곧 반열반(般涅槃. parinibbaana)에 들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수행자들에게  알리려고 기침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주위의 수행자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상처가 매우 심한 것을 알았고, 이 상처와는 대조적으로 아주 평화로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왜 이런 심한 상처를 입고서도 알리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라한이 된 스님은 '나의 수행이 끝나지 않아서 알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열반에 들 때가 되어서 알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위의 수행자들이 '열반에 드시기 전에 마지막 법문을 해 주십시오.'하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아라한이 되신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스님들이여, 오온이 스님들의 것이 아님을 알고, 오온을 좋아하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오온은 스님들의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원인으로 생기는 것은 반드시 변화하는 법입니다. 계속 변화하면서 사람으로 또는 다른 생명체로 계속 윤회를 해서 도는 것입니다. 항상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행(行)이라는 법은 다른 의미에서 변화한다는 뜻이며 행이라는 법이 멈춘다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짐이 멈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평온입니다.'하고 법문을 마치고 반열반(윤회가 없는 죽음)에 드셨습니다.


과거의 원인으로 인하여 현재가 있고, 현재에서 원인을 만든다면 다시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들께서 이 12연기를 이해하고 정말 열반을 얻기를 원한다면 지금 다음 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인 갈애와 집착, 업의 생성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 생을 만드는 원인 중에 첫째인 갈애를 제거하려면, 현재의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안다면 거기에는 오온을 위하거나 원하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갈애가 없으면 집착도 없고, 집착이 없으므로 업의 생성도 없고, 업의 생성이 없으므로 다음의 생이 없고, 생이 없으므로 노사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오온을 위하는 마음인 갈애를 없애므로 해서 12연기의 고리가 끊어져 윤회를 벗어나게 됩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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