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法語)

선을 참구하는 이가 가장 두려워 해야 하는 것 / 경허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5. 3. 18:36

 

 

 

선을 참구하는 이가 가장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세월이 무상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생사의 일이 중대한 까닭으로 옛 성현들은 “오늘 살아 있다고,
내일을 보장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매사에 단단히 마음을 먹고,
조금도 방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모든 세상일에 관대하여 조금이라도 간여하려는 뜻을 없애
고요한 무위(寂然無爲)의 상태를 유지하여야 합니다.

만약 마음과 경계가 서로 제멋대로가 되면 마치 마른 장작과 불이 서로
만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어지럽고 물결치듯 흘러서 세월만 지나가
버릴 것이니, 이는 화두 드는 데에만 방해가 되고 악업만 쌓여갈 뿐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사에 무심함이니 마음에 일이 없으면
곧 마음의 지혜가 자연히 맑고 깨끗해 질 것입니다.

온갖 종류는 다 마음을 따라서 만들어지는 것이니 착한 일을 하면 천상에 나고,
악한 일을 지으면 지옥을 만나며, 포악하면 범과 이리가 되고,
어리석으면 지렁이가 되고, 가볍고 분주하면 나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옛 성현들은 “단지 한 생각 차이로 만 갈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무릇 그 마음을 비워서 머리를 맑게 하면 순수하게 한결같아
흔들리지 않고, 혼미하지 않게 하면 광활하여 확 트일 것입니다.

다시 어느 곳을 향해 생사를 찾고, 어느 곳에서 보리를 찾으며,
어느 곳에서 선악을 찾으며, 어느 곳에서 가지고 범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매우 활발발하고 밝고 분명하며 머리 밑바닥까지 꿰뚫어서
생이 일어남을 따르지 않고, 멸이 사라짐을 따르지 않으며 부처도 짓지 않고
조사도 짓지 않습니다.

크게는 항하사 세계를 감싸기도 하고 작아서 가는 먼지 속에도 들어갑니다.
또 능히 부처가 되고 중생이 되며 크거나 작지도 않으며 자재 융통하여
조금도 억지로 지어낸 도리가 아닙니다.

또한 무릇 불교에 귀의한 사람은 항상 반조하기를 힘써서 작용하는 마음을
참구해야 합니다. 지극히 간절한 마음으로 중간에 끊어지지 않게 참구하되
작용하는 마음이 없는 곳에 이르면 이것이 본래 경지일 것입니다.

이러하면 홀연히 마음길이 끊어져 근본생명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본지풍광(本地風光)입니다. 본래 갖추어져 옥과 같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이며 모자람도 남음도 없습니다.

현묘한 이치를 참구하려 한다면 실상의 이치를 알아서 법식을 반조하며
분명히 묘사하고 세밀히 살펴서 소홀하지 않게 수행해야 합니다.

수행하는 공력이 무르익으면 실상의 이치가 스스로 드러납니다.
태고화상(고려 1301∼1382)이 이르기를 “겨우 활을 들어 쏘자마자
화살이 돌에 박힌다”고 하였고, 청허화상(조선 1520~1604)이 이르기를
“모기가 무쇠소 등어리에 올라가서 부리를 댈 곳을 얻지 못했으나
부리를 댈 곳이 없는 곳에서 온 몸채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이들은 마땅히 이 말로써 지남(指南)을 삼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 일상생활에서 온갖 행동을 논할 때 마음속이 텅 비면 분명하여
대상경계가 없으며 육근이 텅 비어서 너그럽고 넓으면 이것이 보시이며,
맑고 깨끗하면 이것이 지계이며, 텅비고 부드러우면 이것이 인욕이며,
본래 밝고 항상 나타나서 어둡지 않으면 이것이 선정입니다.

밝고 고요해서 분명하다면 법을 분별하여 공을 관하리니 본래 어리석음이
없으나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하되 움직임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인연을 수순하여 장애가 없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달마대사가 이르기를 “마음을 관하는 하나의 법이 모든 행의
전체를 다스린다”고 하였으니 다만 나무뿌리와 줄기를 잘 가꾸어 기르는데
힘쓸지언정 그 가지가 무성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만 견성하여 부처가 될지언정 부처가
신통과 삼매가 없다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헌데 요즘 사람들은 흔히 참구하여 배우지 않거나 참되고 올바른 도인과
본색의 납자들이 불법 가운데에 법의 이치를 밝히지 못하고 도의 안목도
진실하지 않아서 모두 갈림길에서 양을 잃은 것과 같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대개 길을 가는 이는 처음 길을 떠날 때 바른 길에 들지 못하면
천리의 먼길에 헛되이 공력만 낭비할 뿐입니다.
걸어가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규봉선사(당 780∼841)가 이르기를 “결택이 분명하여야 이치를 깨달아서
마땅히 닦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세 칸의 초가집을 짓고자 함에 먹줄을 치고 자귀로 깎아내고
자로 재는 기술이 없으면 성취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원만한 깨달음을 이룰 대가람을 지으려 하는데 건축하는 이치를
따르지 않고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을 이루려고 하는데
곧 잘못되어 이루지 못할까 두렵거나 그 이치를 모를 때 지혜 있는 사람에게
물어야만 그릇되고 어긋남 없는 공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심오한 이치의 도를 깨달아 일부러 마음을 짓지 않고,
세밀하게 결택해서 공부하는 이를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또 공을 뒤집어 실패하지 않는 이는 거의 적습니다.

따라서 늘 모든 것이 무상함을 조심하고 경계하되,
생사대사를 밝혀 깨닫기 위해서는 중생들은 시급하게
스승을 찾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