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편의 명구·무비스님

근원으로 돌아가다[還源]

通達無我法者 2008. 8. 13. 21:36

 

 

 

근원으로 돌아가다[還源]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서 근원에 돌아오는 일이 이미 틀렸으니

본래 머무는 곳이 없어 집이라 이름하지 못하네.

만년의 솔밭 길에 눈마저 깊이 덮였고

한 자락 긴 봉우리에 구름 다시 가려 있네.

손님과 주인이 화목한 시절이라도 온전히 망상뿐이요,

임금과 신하가 자리를 같이해도 올바름 가운데 삿됨이어라.

고향에 돌아왔으니 곡조를 어떻게 부를까.

달 밝은 집 앞 마른나무에 꽃이 피었구나.

返本還源事已差  本來無住不名家

 반본환원사이차    본래무주부명가

萬年松徑雪深覆  一帶峰巒雲更遮

 만년송경설심복    일대봉만운갱차

賓主穆時全是妄  君臣合處正中邪 

 빈주목시전시망    군신합처정중사

還鄕曲調如何唱  明月堂前枯木花

 환향곡조여하창    명월당전고목화

- 동안상찰 선사 「십현담」7

 

 

   불교란 깨달음의 가르침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다른 사람들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깨달음의 내용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선불교에서는 이 경우 ‘고향에 돌아간다.’ 또는 ‘근원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을 잘 사용한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동안 전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수 억만 겁 이전부터 이미 있던 것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멀리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을 되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에도 모순이 없지 않다. 그래서 선시(禪詩)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시로 손꼽히는 동안상찰 선사의 이 십현담(十玄談)에서는 근원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틀렸다고 말한다. 본래로 그 자리이기 때문에 달리 어디로 돌아갈 곳이 없다. 돌아갈 곳이 따로 있을 때 돌아간다는 말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어느 곳인들 고향이 아니던가[何地非故鄕]”라고 하기도 하고 또한 “지말(枝末)이 이미 공하고 근본도 역시 있는 것 아니니 근본에 이르고 고향에 돌아왔다는 말도 어젯밤 꿈속의 일과 같다[末云旣空 本亦非有 達本還鄕 更如昨夢]”라고 하였다. 혹은 “백년 삼만 육천일 동안 매일 매일 반복하는 것이 곧 그것이다”라고도 하였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본래 지니고 다니던 것을 찾는 일이 그렇게 녹녹하지가 않다. 세존(世尊)의 6년 고행과 달마의 9년 면벽이 모두 본래 지니고 다니던 것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화엄회상에서 선재동자가 일백 일십 성을 지나면서 53선지식을 참예한 것도 실은 이 본래 잃어버리지 않은 물건을 찾기 위해서였다. 열반회상에서 설산동자가 젊은 몸을 나찰에게 공양한 것도 늘 사용하고 있는 그 물건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물건을 위해 어떤 이는 원주라는 소임을 십 년이나 살았고, 장경(長慶, 856~932) 스님은 방석을 일곱 개나 떨어트렸으며, 향림(香林, 870~949) 스님은 40년 만에 비로소 일편(一片)을 이루었다. 그 외에도 10년 20년 30년, 그리고 한 생애를 송두리째 집어 던진 이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모두가 수억만 년 동안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는 그 물건을 찾기 위해서였다.

   동안 스님은 “만년의 솔밭 길에 눈마저 깊이 덮였고 한 자락 긴 봉우리에 구름 다시 가려 있네.”라고 너무나 운치 있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지만 그 말 속에 감춰진 난행과 고행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사연을 거쳐 고향에 돌아온 일을 한 곡조 노래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달 밝은 집 앞 마른나무에 꽃이 피었구나.”라고 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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