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기 욕구라는 환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라호르 박물관에 있는 붓다의 고행상
그럼, 지금 불교는 인간의 자연적 생물학적 욕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육신을 거부하고 부정해야 구원이나 해탈을 기약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극단적 고행을 시도했습니다.
붓다 또한 당대의 유행을 따라 이 길을 걸었습니다.
붓다는 그러나, 어느 순간 이렇게 육신을 학대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
즉 “초월로, 갈애의 소멸로, 윤회의 멈춤으로, 업의 감소로, 높은 지식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에로 이끄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행을 포기하게 됩니다.
다음은 폴커 초츠가 <마하시하나다 숫타>에서 인용한 것인데요,
제가 읽기 편하게 정돈한 것입니다.
“나는 소똥도 먹고 내 똥도 먹었다.”
<마지마 니카야>는 이 시절 붓다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몸은 극히 야위어 갔고, 팔과 다리는 마른 수수깡처럼 되었다.
몸은 쭈글쭈글해졌고, 엉덩이는 낙타 다리처럼 가늘어졌으며,
등뼈의 마디가 드러나 마치 구슬을 꿰어놓은 것처럼 앙상했다.
붓다는 결국 이 극단적 고행을 포기합니다.
그것은 육신을 다만 수고롭게 할 뿐,
진정 이르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첫 번째는 유복하고 사치스러운 열락의 세계를 떠난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처럼 구원을 위한 육신의 극단적인 학대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생각하고 분별하는 작용이 멈춘 경지’에 도달했고,
더 깊이 주의를 집중하자,
‘투명하고 밝은 경지’가 드러났습니다.
십자가 위의 붓다
이 깨달음의 여정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를 인정한다면,
그럼 불교가 나아가 깨부수려는 그 ‘넘쳐나는 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오염된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
그런데 내 이제 그 실상을 투명하게 알겠다!”는 발견이 곧 깨달음입니다.
이 새삼스런 각성, 그 앎이 곧 해방입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붓다는 아무 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금강경>은 바로 붓다와 그 제자들이 구걸로 삶을 영위했다는 것,
그러면서도 최고의 위엄을 자랑하며,
빛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공중을 나는 새들을 보라.
그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天父)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비록 외도(外道)의 말이긴 하나,
저는 이 수훈이 불교가 가르치고 있는 바를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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