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관심론(觀心論)-3. 그대는 계속 잠잘 권리가 있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1:22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42년이 지난 후 부처는 죽었다.

부처는 죽음이 가까이 오자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그대들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려고 한다.

나의 육체는 이제 늙고 지쳤다.

나는 이제 궁국의 안식을 얻으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난다는 천 명의 제자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다.

아난다는 비록 석가모니 부처보다 한두 살 위였지만 그의 오른편에 앉아서 아이들처럼 오열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아난다여, 왜 우는가?

나는 무지한 채로 죽음을 맞지 않는다.

나는 절대적으로 깨어 있음 속에서 죽는다.

그것은 보통의 깨달음이 아니다.

이전에는 한번도 없었던 깨달음이다.

한 스승이 이렇게 많은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죽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단히 만족스럽다.

그리고 나는 궁극의 안식 속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나에게는 죽음이 없다."

아난다가 말했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 자신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나는 42년 동안 당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무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가시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 당신 같은 분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나는 이제 모든 기회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은 나를 새벽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남겨 두고 떠납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이번에는 그의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다시 웃었다.
아난다는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서도 또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당신은 이상한 순간에 웃으시는군요."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24시간 안에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그대는 24시간 안에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이제 내가 죽으면 그대는 더 이상 나의 사촌형이 아니다.

그래서 그대의 에고 역시 사라진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없어지지 않던 에고가 말이다."

실제로 그 일은 일어났다.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가 죽고 난 지 24시간 안에 깨달음을 얻었다.

사라(紗羅) 나무 아래서 석가모니 부처는 옆으로 누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고,

그 곁에서 그는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었다.

아난다가 눈을 뜨려고 결심하는 순간 그의 내면의 눈도 함께 열렸다.

그가 깨달음을 얻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 눈을 감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눈을 뜨고 바깥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에 내면의 눈도 함께 열려져서 안과 밖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먼저 그는 자신의 본성을 보려고 했다.

그때 그가 눈을 뜨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을 뜨겠다는 결단과 함께 밤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24시간만에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라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의 개성이었다.

달마가 아난다를 좋지 않게 말한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아난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기억하는 데 있어서 제일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부처를 알지 못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가 한 것은 단지 공부하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사실이다.

아라한은 부처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라한은 바로 자신이 부처가 된 사람이다.

그들이 석가모니 부처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기억하는 학자라 할지라도 그들은 깨달음의 본성이 무엇인지,

불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아라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때 그들은 아라한이 된다.

아라한의 본성이나 보살의 본성은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에 찾아온다.

그전에는 알 수 없다.

그대가 깨달음을 얻은 뒤라야 그대는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자비에 대한 어떤 바람이 있겠는가?

아니면 바람이 없겠는가?

그대는 언제라도 이쪽 언덕을 즉시 떠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몇 사람을 깨닫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이곳에 머물겠는가?

나는 '아라한은 부처를 알지 못한다.'란 말이 그의 제자가 잘못 덧붙인 말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달마 자신의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보살이며,

보살과 아라한들 사이에서는 2,500년 동안 갈등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가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자비심을 가질 수도 있고,

갖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

보살은 자비심 없이도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라한도 역시 깨달은 사람이 여전히 어떤 바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아직 무욕의 상태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그런 사람들이 깨달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깨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을 강제로 깨울 수 있단 말인가?

그때는 그들의 잠이 방해받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

그대가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듯이 모든 사람은 자신의 개성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도 때가 되면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깨달음을 얻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람을 설득하거나 유혹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아라한은 보살을 이해할 수 없다.

보살 역시 아라한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완전히 반대 극이다.

내가 이 문장에 제자의 실수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실수는 달마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아라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불교국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는 대승불교에 속한다.

그곳은 보살들의 땅이다.

그리고 스리랑카 같은 나라는 소승불교에 속한다.

그곳은 아라한들의 땅이다.

스리랑카에서는 전혀 선불교를 존경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스리랑카에 가서 달마를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웃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아난다 같은 아라한을 일본에 가서 말한다면 그들은 그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달마가 아무런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이 양극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판디트들은, 학자들은, 지식인들은 부처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말은 완전히 옳다.

여기에 아라한을 집어넣으면 틀릴 뿐만 아니라,

광신도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것은 "오직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모두 틀렸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아라한 대신 판디트, 학자, 지식인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는 수행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지만 인과의 법칙에 매여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업이다.

부처가 가르친 반대의 일만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부처를 모독하는 것이다.

이 말 역시 판디트나 학자들에게는 맞지만 아라한에게는 맞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죽여도 허물이 안 된다.'란 말은 광신도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이 말은 그의 추종자들이 덧붙인 말이 아니다.
"아라한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의 말에 따르면 개미 한 마리라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아라한은 적어도 개미 한 마리보다는 더 소중한 존재이다.

이러한 광기 때문에 달마의 초상화는 매우 사납게 그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달마는 그런 일로 신경 쓰지 않을 위인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알고 있으며 또 그 말을 능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대는 이 말을 단지 하나의 상징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보살은 결코 상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보살은 자신의 뜻을 직설적으로 정확히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경에 일렀으되

"외도들은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불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라고 했다.

이제 그대는 '외도'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

외도(外道)란 일차원적인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진리의 한쪽 단면만 보는 사람들이다.

이 외도에 대해서 마하비라와 자이나교의 티르탕카라(tirthankara),

즉 달인(達人)들은 상대어를 갖고 잇었다.

그들은 그것을 아니찬티카(anicchantika)라고 부른다.

진리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마하비라는 존재에 대해서 매우 다차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인류 역사상 상대성이론을 말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것이 서양에 전달되는 데는 2,500년이 걸렸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 다른 과정을 거쳐 이 상대성이론에 도달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은 철학과 과학이란 점에서 학문의 성질이 다를 뿐,

같은 메시지이다.

마하비라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상대성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어떤 사물에 대해서 한마디의 말로 규정지은 것은 하나도 없다.

한마디의 말은 한쪽 면만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진리에 대해서 일곱 가지 면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대가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그에게 질문하면,

그는 일곱 가지 면으로 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곱 가지 답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마하비라와 이야기한다면 그대는 이야기하기 전보다 더 큰 혼란 속에 빠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서 누가 마하비라에게 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아마'란 말을 사용해서 대답한다.

'아마'란 말을 쓰지 않을 때는 광신적인 말이 된다.

'아마'란 말은 그대를 열려 있게 해준다.

그 말은 다른 사람도 옳을 수 있고,

반대 의견도 옳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대를 깨어 있게 해주며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문을 닫아 버리지 않게 하는 말이다.

그대는 신에 대해서 묻는다.

기독교인들은 한가지 면밖에 보지 못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론, 신은 있다. 오직 한 분의 신만 있다"

그대가 이슬람교도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그들 역시 유일신만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 역시 진리를 한 면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이나교에서는 그들을 이찬티카(icchantika)라고 불렀다.

그들은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볼까봐 두려워한다.

그것은 오직 그들에게 한 신과 한 예언가만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도에게는 두 명의 예언가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위험한 상태에 돌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언가가 두 명이라면 그들은 서로 모순될 수도 있다.

그들은 서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슬람교도들은 혼란에 빠진다.

한 가지 생각으로 똘똘 뭉치는 바보가 될 수 없다.

오직 바보들만이 한 가지 생각으로 똘똘 뭉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