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관심론(觀心論)-2. 그대는 계속 잠잘 권리가 있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19. 03:58

 

 

그대는 계속 잠잘 권리가 있다.

달마의 어록 중에서 특히 이 부분은 심오한 재미가 있다.

그리고 진리를 찾아 헤매는 모든 구도자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몇 가지 엉터리 문장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엉터리는 첫 부분부터 나오고 있다.

그것은 아마 달마의 말을 오해한 제자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달마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나는 어록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해 두고자 한다.

첫째,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두 가지 종류의 구도자들을 만들어 내었다.

하나는 아라한(阿羅漢)으로 불려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보살(菩薩)이라고 불려지는 존재들이다.

아라한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바치다가 한번 깨달음을 얻게 되면,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은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실 아라한들의 말에 따르면 자비심 같은 위대한 생각도 엄밀하게 말해서 집착이란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다.

자비심이란 또 하나의 인간관계이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욕망이다.

비록 그것이 좋은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차이가 없다.

아라한의 말에 따르면 욕망은 좋든 나쁘든 하나의 구속을 가져온다.

그것은 황금 사슬이냐 쇠사슬이냐 하는 차이일 뿐이다.

사슬은 사슬인 것이다.

자비심은 황금 사슬이다.

아라한들은 아무도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한다.

남을 도와준다는 생각은 애당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대는 오직 자신만을 도울 수 있다.

보통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아라한들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선입관도 없이 본다면,

그들의 선언은 이 세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남을 돕는 것은 남의 삶에 간섭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생활 방식에,

운명에,

그의 미래에 간섭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들은 어떤 자비심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욕망에 대한 아름다운 이름일 뿐이다.

왜 그대는 다른 사람이 깨닫는 것에 그토록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은 그대의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대적인 자유가 있다.

아라한은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와 독립성을 주장하고 있다.

선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아라한은 깨닫는 순간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법도 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도 남을 돕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의 황홀경 속에서 살아간다.

만약 누군가가 그의 샘물에 목을 축이러 온다면 그때는 그 사람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에게 샘물을 마시러 오라는 초대장 같은 것은 결코 보내지 않는다.

만약 그대 스스로가 그의 현존을 마신다면 그것은 그대의 일이다.

그대가 길을 잘못 들었다 해도 그는 그대를 말리지 않는다.

확실히 이것은 개인의 자유에 절대적인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다.

그대가 깊은 수렁 속에 빠져 있더라도 아라한들은 그저 잠잠히 기다리기만 한다.

만약 그의 현존이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좋다.

그러나 그는 그대를 도우려고 일부러 손을 뻗어 그대를 끌어당기지는 않는다.

그대는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확실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비라는 말은 아라한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들의 제자들 중 몇몇 사람이 아라한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길을 히나야나(Hinayana)라고 불렀다.

그것은 소승(小乘),

즉 작은 수레라는 뜻이다.

한 배에 한 사람만 타고서 강을 건너갈 수 있는 작은 배란 뜻이다.

그들은 큰 배를 만드는 번잡스러움을 피한다.

피안으로 건너가는 데에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 배는 두 사람도 탈 수 없다.

오직 홀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홀로 수백만 번의 생을 거듭하다가 홀로 우주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부처는 아라한의 길을 받아들였고 또 존경했다.

그러나 또한 이 세상에는 많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그는 간과하지 않았다.

그들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들의 첫 번째 열망은 자신들의 기쁨을,

진리를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자비는 그들의 길이다.

그들은 역시 심오한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초대하고 설득시켜서 같은 경험을 맛보도록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쪽 언덕에서 가능한 많은 구도자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보살은 피안으로 건너가기를 자꾸만 연기한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향한 자비심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의 관점이기도 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아라한은 아라한이고 보살은 보살이다.

그들은 다른 운명을 갖고 있다.

물론 목적지는 동일하다.

그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보살들은 뱃사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기다리라.

서두르지 말라.

나는 이쪽 언덕에서 충분히 오랫동안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

번뇌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해야 한다.

나는 절대적인 평화와 축복 속에 있다.

나에게는 피안이 필요 없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이곳에서 도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도 역시 이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는 아라한과 보살을 어떤 차별을 두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맞는 삶을 택하라고 했다.

그래서 보살들은 마하야나(Mahayana)라고 불린다.

그 말은 대승(大乘),

즉 큰 수레,

큰배라는 뜻이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가 죽은 후에 이 두 흐름은 2,500년 동안 서로 자신의 길이 옳다고 주장해 왔다.

달마는 보살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아라한에게 반대하는 많은 말을 했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나는 이 두 흐름인 아라한과 보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석가모니 부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의 비전을 갖고 있다.

나 자신만의 길이 따로 있다.

그래서 나는 달마의 모든 말에 동의할 의무가 없다.

특히 이 점에서 말이다.

아마 이 점에는 석가모니 부처도 동의할 의무가 없다.

특히 이 점에서 말이다.

아마 이 점에는 석가모니 부처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달마는 한쪽 노선만 따른 사람이다.

두 번째로 그는 매우 사나운 사람이며 매우 무서운 용모를 갖고 있다.

그대가 그의 초상화를 아이들에게 보여 준다면 아이들이 겁을 낼만큼 무섭게 생겼다.

그는 남인도 제국인 팔라바스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초상화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의 사나움을,

맹렬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려진 그림이다.

그가 말하는 몇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그대가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 점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대승불교라는 특정한 노선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라한과 보살을 똑같이 존경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어록으로 들어가자.

석가모니 부처의 십대 제자 중에서 아난다(Ananda)는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기억하는 데 있어서 제일인자였다.

아난다는 특별한 경우이다.

그에 대해서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사촌형이었다.

동양에서는 사촌이라도 형에 대한 예의는 엄격하다.

그래서 아난다가 석가모니 부처에게 제자로 입문하려 할 때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다.

"들어보아라,

싯다르타여,

나는 지금 그대의 제자가 되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대는 나의 스승이 되고 나는 그대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직 나는 그대의 사촌형이다.

그러니 상황이 바뀌기 전에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무슨 조건인가요?"

아난다가 말했다.
"그것들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

나는 그대의 제자가 되고 나면 그대가 대중들에게 설법을 할 때는 항상 나를 그곳에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나를 밤이나 낮이나 그대 옆에 있으면서,

그대의 건강을 돌보며 시중을 들게 해 달라.

그때 그대는 나를 막아서는 안 된다.

이 약속은 내가 입문하는 순간부터 당장 지켜져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는 아난다의 사촌 동생이었고 동양에서는 사촌형의 말을 듣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대가 동양에 태어났다면 형의 말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

아난다가 또 말했다.
"두 번째 조건은 내가 질문을 할 때에는,

그 질문이 비록 의미가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라도 항상 그 즉시로 대답해 주어야 한다.

절대로

'그것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라든지,

'내일 대답해 주겠다.'

라는 말로 대답을 연기해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좋습니다."

또 아난다가 말했다.
"세 번째 조건은 내가 누구를 데려오든지,

그대는 한밤중이라도 일어나서 내가 데려온 사람을 만나 주어야 한다.

그가 누구라도 말이다.

이것이 나의 조건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러자 아난다가 물었다.
"그대는 왜 웃는가?"

석가모니 부처가 말했다.
"지금은 아직 그 조건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먼저 당신이 나에게 입문하고 나면 그때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그래야 계약이 완전히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 날 이후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가 되었고,

42년 동안 밤이나 낮이나 항상 그의 옆에서 살았다.

봄이 오고 계절이 변하고 해가 가도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곁을 그림자처럼 쫓아 다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난다가 입문한 뒤에 입문을 했고 그들 중에서 깨달은 사람도 나왔다.

그러나 아난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어느 날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 뒤로 온 사람들도 깨달음을 얻었는데 왜 나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나만큼 당신의 설법을 많이들은 사람도 없고,

나만큼 당신과 가까운 사람도 없는데 말입니다.

왜 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그대는 처음 입문할 때 내가 웃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대의 조건이 바로 그대의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내가 그대의 사촌 동생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대가 나의 제자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나의 사촌형이란 생각이 남아 있었고 그것은 미묘한 에고가 되었다.

비록 그대가 어떤 누구보다 나와 함께 있으면서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내가 한 모든 설교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 지식,

그 기억 때문에 그대는 자신만의 경험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는 내가 한 말을 20년 동안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다.

그리고 사촌형이라는 사실이 미묘한 에고가 되어 깨달음을 얻는데 장벽이 되었다.

그대는 내가 죽을 때까지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