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관심론(觀心論)-4. 그대는 계속 잠잘 권리가 있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1:31

 

 

그래서 그들은 신도 하나고,

예언자도 하나며,

성스러운 《꾸란》도 하나이다.

다차원적인 실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진리는 그들의 머리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하비라 같은 사람들은 이들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다.

그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항상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말한다.

그대가 신에 대해서 마하비라에게 묻는다면 그는 일곱 가지 방식으로 대답한다.

그러면 그대는 도대체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가 없다.

첫 번째로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마 신은 존재한다.

내 말은 절대적일 수가 없다.

그대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 그의 대답은 이렇다.
"아마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무신론자들이 맞을 수도 있다.

아무도 신을 본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마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이 두 가지 대답을 들으면,

그대는 또다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러면 신을 믿어야 합니까?

안 믿어야 합니까?"

그러면 그의 세 번째 대답이 나온다.
"아마 둘 다 옳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또 그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떻게 둘 다 옳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의 네 번째 대답이 나온다.
"아마 둘 다 옳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일곱 번째까지 대답한다.

그대는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대는 차라리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차원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하비라는 많은 추종자들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 대답이 무엇을 뜻하든 상관하지 않고 마하비라의 인격 자체와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그를 따를 수 있다. 마하비라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는 항상 현존해 있으면서 어떤 관념에도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 나간 몇몇의 사람들이 그를 따를 수 있었다.

그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존재가 아름답고,

그의 현존이 빛났기 때문에 그를 따랐다.

그의 삶은 완전히 하나의 노래였다.

완전한 황홀경 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였던 것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에 개의치 말라.

그것은 그대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는 옳은 사람이다.

그의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아마'란 말을 쓰지 않는가?

그러나 달마의 발언은 단호하다.
"외도들은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

러나 믿는 사람은 불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라고 했다.

이찬티카들(선한 본성이 끊어진 사람들),

진리가 절대적일 때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따라 산다.

진리의 상대성을 믿는 사람들 또한 그들의 견해를 따라 산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따라 살 권리가 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달마는 매우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확실한 것만 말했다.

그의 확실성과 진지함은 의심스러운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말은 부정할 수 있지만,

그의 의도는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이나 유태교인들을 죽여왔다.

이슬람교도들은 힌두교도들을 죽여 왔다.

그리고 힌두교도들은 불교도들을 죽여왔다.

아무도 "가서 그대의 철학을 믿지 않는 사람을 죽여라."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일은 전 세계에 걸쳐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달마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단호했다.

그의 이해는 그에게 매우 가치 있는 것이며 진실이었다.

그래서 그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죽어도 괜찮다.

비록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그는 매우 엄격한 방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매우 부드럽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다.

종교는 잔인하고 사납게 말하지는 않지만 행동은 그렇게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사랑과 존경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이 세상에 없다.

모든 종교가 사람에게는 존엄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진리만 강조한다.

그리고 그 진리에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틀린 것으로 친다.

달마와 다른 종교가들이 틀린 점이 바로 이것이다.

달마는 말은 엄격하게 하지만 아무도 죽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그대를 죽인다면,

그것은 그대의 에고를 죽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의 독재자들은 말은 부드럽게 하지만,

자기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죽이려고 추종자들을 선동해 왔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잘못될 수 있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되려고 결심하다 해도 그는 여전히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그의 결정이다.

그가 자신의 결정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아무도 그의 삶과 철학에 간섭할 수 없다.

자신의 무심을 아는 사람은 부처가 그들의 머리카락을 깎아줄 필요가 없다.

나는 달마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본다면 그때는 그런 무의미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머리를 삭발하고 가사를 몸에 걸친다고 해서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속인도 역시 부처인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진리를 찾는 것은 승려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속인이라도 그가 침묵할 수 있고 명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면,

그는 자기 집에서 자신의 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는 부처가 될 것이다.

그가 세상을 포기하거나 수도원으로 가야 할 아무런 당위성이 없다.

이 점은 나 역시 강조하는 바이다.

세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대의 무의식이다.

그대의 무의식을 포기하라.

세상과 시름하지 말라.

세상이 그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그대는 궁전에서 살수도 있다.

궁전이 그대의 깨달음을 막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절대적인 빈곤 속에 살수도 있다.

그러나 빈곤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그대가 얼마만큼 깨어 있느냐 하는 데 있다.

오두막이건 궁전이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대의 각성이 어디에서 일어나건 그대는 부처가 될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 무엇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속인도 역시 부처인 것이다.

출가자라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면 그들은 머리를 깎은 광신자일 뿐이다.

사람은 남의 눈에 들어 있는 작은 티라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눈 안에 낙타가 들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는 절대로 지켜보지 못한다.

그들은 항상 남을 바라보고 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는 매우 정확하고 예술적일 만큼 정교하다.

하지만 자신은 수천 가지 잘못된 점을 갖고 다니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인류의 단점이다.

제자는 달마에게 또 묻는다.
"그렇지만 결혼한 속인은 그들의 성생활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나는 전적으로 달마를 지지할 수 있다.

그가 하는 말은 엄청나게 중요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1,400년 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아들러(Alfred Adler)도 먼 미래의 사람이다.

엘리스(Havelock Ellis)나 융(Carl Gustav Jung)이나 아사지올리(Assagioli) 같은 심리학의 거장들이 태어날 꿈도 꾸지 못하던 시대였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성적 관심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사람들이지만 그것은 1,400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달마가 한 말은 매우 찬란히 빛난다.

너무나 위대하고,

너무나 정확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방면에 있어서 그를 원조로 삼고 싶다.

달마는 말한다.
나는 단지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다.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남녀간의 단순한 성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면 성은 기본적으로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위대한 통찰력이다.

불교의 가장 위대한 성자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그대가 깨닫는 순간 성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꿈을 이루고있는 것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것에 반대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