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이야기·이규행

41. 거짓 법문

通達無我法者 2008. 9. 22. 18:38

 

 

거짓 법문

“한짝 짚신을 죽은 사람인줄 알고 묻도다”

무제를 구하려고 갔다
죽을 뻔했고
신광을 구하려고 했다가
쇠염주를 맞았소



무작정 향산사를 떠나긴 했지만 신광은 갈 길이 막막했다. 어디로 가야 달마 대사를 만날 수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곳 저곳을 헤매면서 사람들에게 수소문하는 게 고작이었다. 동록관에 이르렀을 때 마침 달마의 행적을 귀동냥할 수 있었다. 달마가 어떤 여인의 집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라 신광은 양연지의 집을 찾아갔다.

양연지는 방문객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유명한 고승인 신광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작스런 신광의 출현에 속이 뜨끔했다. 혹시 신광이 모든 사실을 알고 꼬치꼬치 캐묻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마치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인양 신광을 대했다. 양연지의 이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신광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듣건대, 이 댁에 얼굴이 시커먼 노스님 한 분이 머물고 계시다고 해서 찾아왔소이다. 계시면 좀 뵙고자 하니 안내해 줄 수 없겠소이까?”

시치미 떼는 양연지

신광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양연지는 내심 안도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노스님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이레 동안 머무신 적은 있습니다.”“아니, 그렇다면 지금은 안 계시다는 말이오?”
연지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탄식하듯 말했다.

“갑자기 병환이 나셔서 어떻게 손 쓸 사이도 없이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신광은 눈앞이 아찔했다.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온몸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물었다. “그 노스님을 어디에다 장사 지내셨습니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제가 혼자 힘으로 정성을 다하여 동록관의 교외에다 모셨습니다.”신광은 대성통곡했다. 두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땅바닥에 덥석 주저앉았다.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이렇게 인연이 없고 박복한 줄을 미처 몰랐구나. 찾아오신 큰스승을 쫓아내 여기까지 참회의 발걸음을 했건만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이제 어디 가서 내 잘못을 용서받고, 장차 큰스승의 끊긴 도맥은 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고….”독백을 마친 신광은 다시 소리 내어 울었다. 양연지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짐짓 애통한 목소리로 신광을 위로했다.

“비록 노스님은 가셨지만 도(道)의 뿌리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어디서 오신 스님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이 말을 들은 신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말했소? 스승의 도근(道根)이 남아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그것을 얻은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양연지는 자세를 바르게 하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이미 나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졌소!”
신광은 순간 야릇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달마 대사가 이 여인에게 전법(傳法)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여인은 당당하게 그것을 밝히고 있지 않은가. 신광은 잠시 의심을 접어 두기로 했다. 이 여인은 그래도 큰스승을 일 주일이나 모셨고 마지막 임종까지 지켜보지 않았는가. 이것만으로도 자기보다 인연이 깊은 듯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신광은 앞뒤 가리지 않고 여인에게 매달렸다.

“그 가르침을 나에게 전해 줄 수 없겠소이까?”
양연지는 목소리에 한껏 위엄을 담아 정중하게 말했다.

“그대에게 전법할 수는 있소. 하지만 어떻게 해야 법을 받을 수 있는지는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마음을 낮추고 인내하지 않고선 어려운 일이 아니겠소?”연지의 대답에 신광은 당황했다. 급히 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그녀는 꼿꼿한 자세로 절을 받으면서 말했다.

소리내어 우는 신광

“법은 가볍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오. 반드시 하늘 앞에 큰 원을 세워야만 하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전법이 허용되는 것이오.”신광은 아찔했다. 그녀의 말에 따라 서둘러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고 예의를 갖췄다.

“제자 신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제자는 아직 현(玄)에 통하지 못했습니다. 전심일의(專心一意)로 스승님을 따르고 참선(眞善)을 배우고자 합니다. 만약 제가 가르침을 가벼이 여긴다면 영원히 고(苦)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요. 스승님의 은혜를 잠시라도 잊는 일이 있다면 성명(性命)이 환원(還元)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맹세하오니 가르침을 주시옵소서.”양연지는 법단에 올라 새롭게 촛불을 밝히고 상좌에 앉아서 스승으로서의 위엄을 보였다.

“나는 오늘 그대를 제자로 삼아 법을 전하노라. 수행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느니라. 그릇된 사람에게 전하면 그 죄 또한 가볍지 않느니라. 도(道)는 산을 꿰뚫고 바다를 투과하여 항상 응현(應現)하느니라. 그것은 하늘을 감싸고 땅속까지 스며들지만 사람 몸에 있느니라. 동정(動靜)을 활발히 하여 성천(性天)을 기르도록 할지어다. 천 번을 다시 태어나야 비로소 부처를 이룰 수 있느니라. 건곤(乾坤)을 관통하고 가득 채우는 것은 진성(眞性)에 달렸느니라. 그래야만 본래의 근원자리에 이룰 수 있을지니.”“가르침을 명심하겠나이다. 그렇다면 몸 가운데 있는 성명(性命)과 생사(生死)의 근본은 무엇입니까?”신광은 양연지에게 삼배(三拜)의 예를 하며 간곡하게 물었다.

“생사는 성명의 근원으로, 내외(內外)의 분별(分別)이 있느니라. 안으로는 능히 골수(骨髓)까지 뚫고 들어가 온몸을 덮고, 만물에 응하여 화육하느니라. 이것이 육문(六門) 곧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동정(動靜)이니라. 밖으로는 능히 산을 뚫고 바다를 투과하며 천지를 쌓아 안아 시방세계에 가득 관통하느니라. 놓아 주고 거둬 드리며 움직이고 고요함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곧 시간에 매이지 않는 진인(眞人)이로고.”양연지의 입에선 청산유수처럼 법문이 흘러 나왔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현재, 과거, 미래의 마음을 함께 얻을 수 없나니. 인상(人相) 아상(我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모두 끊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해야 비로소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염군의 형벌을 면할 수 있느니라.”신광은 연지의 강설을 들으면서 의심이 뭉클 샘솟았다.

“지금 말한 도리(道理)는 내가 일찍부터 늘상 강론하던 내용과 똑같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선천(先天)의 대도(大道)를 전해 달라는 것이외다.”그러나 연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한 마디 내뱉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법은 이미 그대에게 전했노라. 나에게는 또 다른 법이 없느니라.”
신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양연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연지는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신광의 가슴엔 의심의 구름이 덮쳐 왔다. 선천의 도법은 분명 경전의 글귀를 나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일찍이 달마 대사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생사의 해탈은 그런 경전으론 어림도 없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양연지가 스승의 죽음을 말한 것조차도 의심스런 일이 아닌가. 거기엔 무슨 깊은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신광은 연지를 응시한 채 생각에 생각을 굴렸다. 한데 갑자기 대문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동토(東土)의 중생들은 인연이 없도다. 안타깝구나. 서천의 달마가 일부러 불가(佛駕)를 동토로 갖고 왔거늘. 그것을 그대로 놓쳐 버렸구나….”신광과 양연지는 마치 용수철처럼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노스님이 우뚝 선 자세로 두 사람을 코끝으로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신광이 서둘러 합장의 예를 갖추고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디서 달마 대사님을 만나셨습니까?”
노스님이 대답했다.

“나는 서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루 낮 하룻밤을 달마 대사와 같이 지냈소이다.”이 말에 신광과 양연지는 어리둥절했다. 특히 신광은 어떤 충격을 받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노스님은 신광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며칠 전에도 달마 대사를 우연히 서양호(西洋湖)에서 만났소이다. 마침 그 곳에서 몸을 씻고 있는데 대사께서 지나가십디다. 한 손에 긴 지팡이를 들고 계셨는데 짚신 한 짝이 걸려 있고 등에 짐을 진 채 갈대 위에 올라서 강을 건너가려고 하더이다. 그래서 내가 어디로 가시냐고 물었소이다.”신광이 참지 못하고 숨이 넘어가듯 물었다.

“대사께서 어디로 가신다고 하십디까?”
“내가 묻는 말에 대사께서는 비감한 목소리로 말씀하더이다. ‘일찍이 무제를 구하려고 갔다가 죽을 뻔했고, 그 다음엔 신광을 구하려고 했다가 인연이 없어 쇠염주를 맞았소. 우연히 양연지를 만나 구해주려고 했는데 도리어 독살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소. 그래서 이제 웅이산(熊耳山)으로 가서 조용한 곳에서 잠시 쉬려고 가는 길이오.’ 이런 말씀을 남기시고 그대로 자취를 감추셨소.”신광은 노스님의 말이 진실 그대로라고 여겼다. 양연지를 노려보며 힐문했다.

“그대는 대사께서 중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살아 계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양연지는 펄쩍 뛰었다.

“대사께서 돌아가신 것은 사실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나와 함께 동록관 교외에 있는 묘로 가 보면 알 것이 아닙니까.”

감탄의 눈물이 절로

신광은 연지를 따라 나섰다. 묘를 파고 관 뚜껑을 열어 보았다. 관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연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신광이 관 속을 살펴보니 한쪽 구석에 짚신 한 짝이 놓여 있었다. 신광은 짚신을 집어 들어 찬찬히 살폈다. 놀랍게도 짚신의 밑바닥엔 자수로 수 놓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달마 서쪽에서 와서 짚신 한 짝에 천 개의 바늘과 만 가닥 실로 수를 놓았노라. 동토의 중생 나를 알지 못하고 한 짝의 짚신을 죽은 사람인 줄 알고 땅에 묻도다.”신광은 짚신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큰스승을 독살하려한 독부 양연지에 대한 분노는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분노는 짚신 앞에서 오히려 눈 녹듯 녹아 내렸다. 달마의 신통광대(神通廣大)와 변화무쌍(變化無窮)함에 감탄의 눈물이 절로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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