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이야기·이규행

38. 보정선사(寶靜禪師)

通達無我法者 2008. 9. 22. 18:34

 

 

보정선사(寶靜禪師)

희광은 망설였다 “입문을 허락치 않으신다면…”

“몸과 마음을
별개로 생각해서는
병을 다스릴 수 없으니…”



출가를 결심한 희광은 낙양 용문(龍門)의 향산사로 보정 선사(寶靜禪師)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병든 몸을 이끌고 먼 길을 나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고행이나 마찬가지였다. 희광이 걷는 모습은 차라리 기는 것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쓰러질 듯 말 듯하면서 때때로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면서 헐떡거렸다. 그러나 끝내 향산사에 도착했다.

밤늦게 도착한 희광은 절 깊숙한 곳에 있는 선사의 방으로 향했다. 오래 전에 찾았던 기억을 되살리자 그리 어렵지 않게 선사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때마침 보정 선사의 방은 불이 밝혀져 있었고 그림자로 미루어 선사가 경전을 읽고 있는 듯싶었다. 희광은 망설였다. 늦은 밤에 아무런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도 그렇고 자칫 선사의 노여움을 사 찾아오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가 빚어질까 두려웠다. 스승으로 모시려다 영원히 쫓겨나는 꼴이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희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춤거렸다. 보정 선사는 문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사실 밤 깊은 산사에선 안과 밖이 다를 바가 없었다. 문풍지 하나 사이로 모든 것이 소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끊겼다가 이어지곤 하는 발소리는 보정 선사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여태껏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선사의 머리를 휘감았다.

보정 선사는 넘기던 책장을 잠시 멈추고 밖의 동정에 신경을 기울였다. 도대체 이 밤중에 누가 찾아온 것일까? 사중의 승려라면 저러지는 않을 것이고 절 밖의 사람이 분명한 듯싶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한밤중에 방안을 엿본단 말인가? 도둑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보정 선사의 입에선 절로 실소(失笑)가 흘러 나왔다.

보정 선사의 머리엔 불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황금이 들어 있는 주머니에서 냄새가 나는 것처럼 황금을 탐하면 냄새가 나느니라. 수행자도 역시 그러하니라. 스승이 비록 청정(淸淨)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불상(佛想)을 가져야 하느니라.” 선사는 밖을 향해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 누구요?”
아무런 대답도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보정 선사는 몸을 일으켜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역시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바람이 방안으로 휘몰아쳤다. 등잔불이 춤을 추며 금새라도 꺼질 듯싶었다. 선사는 방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동안 밖은 고요했다. 그러나 문밖에서 다시 발소리가 살며시 들렸다. 조금 전 선사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문을 열었을 때 희광은 재빨리 담장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든 몸으로 추운 밤을 밖에서 지샌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희광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방문 앞으로 나와 맨땅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보정 선사는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과연 방문 앞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얼핏 보아 얼굴이 누렇게 떠 있는 듯싶었다. 아무리 보아도 중환자가 분명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숨어 있는 듯했다.

병자는 선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 합장의 자세를 취했다. 이어서 고개를 조아려 절을 했다. 절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괴로운 것 같았다. ‘풀썩’ 하고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더니 다시 한 발 앞으로 나와 아홉 번의 절을 했다. 그런 다음 쓰러질 듯 선사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고 어깨가 들먹였다. 무엇인가 처절한 소원이라도 있는 듯했다. 보정 선사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내려다 볼 뿐이었다. 처음엔 크게 호통을 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는 짓이 어딘가 범상치 않아 보였고 그의 마음 속엔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그래서 잠자코 행동거지를 살폈다. 이윽고 병자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저는 호뢰관에 사는 희광이라고 합니다. 선친의 함자는 적(寂)이라고 하옵니다. 저는 선친의 말씀을 듣고 오래 전부터 스승님을 흠모해 왔습니다. 이번에 먼 길을 오느라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늦은 밤에 스승님께 가르침을 청하오니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성불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말을 끝내자 희광은 계속 절을 했다. 보정 선사는 그제야 젊은이가 이 밤중에 찾아온 까닭을 알았다. 선사는 희광을 일으켜 세워 방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희광은 황송해 하며 더욱 정성스럽게 예를 올렸다. 그러나 선사는 고개를 저으며 희광에게 말했다.

“그대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네. 하지만 그대 같이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는 허약한 몸으로 무슨 공부를 할 수가 있겠는가. 나더러 그대를 제자 삼아 거꾸로 선법을 연마하라는 뜻은 아니겠지.”희광은 보정 선사가 꾸지람하지 않고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힘겨웠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몇 번이고 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보정 선사는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불문(佛門)에서 발심(發心)하여 수행에 든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는가? 지극한 마음은 있으나 건강한 몸이 없다면 어려운 일일세. 그대가 먼저 나의 제안을 들어주면 내, 제자로 삼을 것이니 그렇게 알게. 제안이란 다른 게 아니라 나를 밖으로 끌어내 보라는 것일세. 자, 해 보게.”희광은 보정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이 워낙 간절했기 때문에 앞 뒤 가리지 않고 보정 선사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병약한 몸으로는 한치도 끌 수가 없었다.

보정 선사는 그런 희광의 태도가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론 대견스러웠다.

“그런 몸으로 수행에 들어설 수는 없느니라. 그러나 그대가 몸이 건강해지면 반드시 제자로 삼을 터이니 그리 알고 오늘 밤은 여기서 묵어 가도록 하게나. 내일 아침이면 내가 그대에게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니 그렇게 알게. 자, 밤도 늦었으니 쉬도록 하게.”희광은 아픈 몸이 금새라도 낫은 듯싶었다. 그만치 몸과 마음이 가뿐했다.

이튿날 아침, 보정 선사는 약속대로 희광에게 건강법을 가르쳐 주었다. 비록 병이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곤 하지만 몸과 마음을 별개로 생각해서는 병을 다스릴 수 없다는 이치를 깨우쳐 주었다. 마음 공부와 몸 공부 그리고 숨 공부가 모두 하나라는 것이 보정 선사의 가르침이었다. 보정 선사는 앉는 자세며 몸 동작의 연공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숨을 뱉는 것을 위주로 해야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모든 병은 안에 가둬 두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네. 숨을 들이쉬기만 하고 뱉지 않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네. 먹기만 하고 배출하지 않으면 병이 쌓이는 것과 같은 이치네. 세상이치도 마찬가지라네. 재물을 탐하기만 하고 잘 쓰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큰 병이 생기는 법이라네. 벼슬이나 권세도 마찬가지일세. 그것을 움켜잡기만 한다면 파멸이 있을 뿐이지. 병을 고치고 싶으면 숨도 뱉고 마음도 비우고 모든 것을 버리게.”희광은 벌떡 일어나 진정으로 감사의 예를 올렸다.
“스승님 말씀대로 반드시 건강한 몸을 만들어 찾아뵙겠습니다. 그때는 틀림없이 거둬 주실 수 있으신지요?”“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네.”
“스승님, 거듭 감사드리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희광은 발걸음도 가볍게 절을 나왔다.

희광을 떠나보낸 뒤 늙은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병이 깊어 생사의 갈림길에 들어선 아들이 출가의 결심을 말했을 때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노모에겐 한 가지 믿음이 있었다. 희광이 부처님의 점지로 태어났기 때문에 반드시 불문에서 대성하리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희광이 집을 나선 뒤 노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정안수를 떠다 놓고 기도했다.

기도는 정성과 비례하여 효험이 있는 법이지만 기도하는 이의 마음이 안온할수록 공덕이 있다고 일컬어진다. 노모는 자신을 잊은 채 오로지 기도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보고 싶어 졌다. 한 번이라도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진짜로 아들이 돌아온 것이었다. 노모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노모는 마치 몇 해만에 만나기라도 한 듯 아들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그 동안 보지 못한 한이라도 풀려는 듯 보고 또 보고 마음껏 보았다. 아들은 집을 떠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야위고 약한 몸에 꾀죄죄한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노모는 웃는 얼굴로 연신 “부처님의 자비로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다”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노모는 일말의 의혹을 떨칠 길이 없었다. 출가한다고 나간 아들이 그냥 돌아온 까닭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희광은 효자였다. 어머니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는 그 동안 일어났던 일을 소상하게 어머니에게 말함으로써 걱정을 풀어 드렸다. 희광은 집에 머무르면서 보정 선사의 가르침대로 건강회복에 온힘을 기울였다.

희광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었다. 누가 보아도 기적으로 여길 만큼 건장한 몸이 되어 다시 보정 선사를 찾았다. 보정 선사는 기쁜 마음으로 희광을 제자로 삼았다. 희광은 선사의 가르침을 따라 수많은 경서를 읽었다.

하루는 경서를 읽다가 비몽사몽간을 헤매는 중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에게 말했다.

“내 그대를 보아 하니 뜻이 높고 원대하며 보통의 승려와는 같지 않네. 반드시 정과(正果)를 얻도록 하게. 이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이 곳은 그대가 끝까지 머무를 곳은 아니네. 그대가 공덕을 이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니 지극한 마음으로 공부하게.”희광이 깜짝 놀라 깨어 보니 신인은 온데간데없었다. 희광은 스승에게 신인의 말을 전했다. 보정 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법명을 신광(神光)이라고 지어 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신광은 영목사(永穆寺)에서 계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명산대찰을 두루 찾아 공부하고 난 뒤 향산사에 주석했다고 한다. 달마가 신광을 찾아 향산사에 온 것은 바로 신광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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