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이야기·이규행

51. 폐허의 천성사(千聖寺)

通達無我法者 2008. 9. 22. 21:20

 

 

폐허의 천성사(千聖寺)

“자기가 불통이면 남도 불통으로 보이는 것”

“바다에 풍파가 이니
사공이 배 띄우지 않네
자연 그대로 맡길뿐”



소림사를 떠난 달마 조사는 우문(愚門)의 천성사(千聖寺)를 찾았다. 천성사는 대자산(大慈山)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이미 인적이 끊긴 지 오래인 듯싶었다. 돌이 깔린 오솔길엔 이끼가 퍼렇게 덮여 있었다. 달마는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성한 숲과 절 주변을 둘러싼 대나무밭이 특히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지만 뇌리에선 범음(梵音)과 절의 모습들이 중첩되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순간 달마는 이 곳이 천성사인 줄 알았고, 모든 것을 마무리할 터전임을 느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천성사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다만 때가 되지 않아서 찾지 않았을 뿐이었다.

“천성, 천성. 노납이 찾아왔소이다.”
달마는 혼잣말을 되뇌며 천성사 정전에 눈길을 꽂았다. 웅장하면서도 맑은 종소리가 산허리를 타고 절에서 들려 오는 듯싶었다. 달마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오직 산바람 소리만이 윙윙거릴 뿐이었다. 천성사의 산문에 들어선 달마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폐허로 변해 버린 절 모습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만사가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벗어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천성사의 옛모습은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달마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감고 숨을 고루었다. 그의 망막엔 휘황찬란하던 옛 천성사의 환영이 떠올랐다. 하지만 눈을 뜬 그의 앞에 나타난 실체는 퇴락한 모습일 뿐이었다. 산문을 뒤로 하고 잡초가 우거진 뜰을 가로질러 본당으로 갔다. 오랜 풍상을 겪기는 했지만 대웅보전(大雄寶殿)이란 현판만은 뚜렷했다.

본당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이라곤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전 앞 향로에서는 세 줄기의 향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방안에 가득 찬 향내로 미뤄 분명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다. 달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반가움과 함께 궁금증이 일었다. 본당 옆 요사채 쪽을 바라보니 도인풍의 사람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게 누구요? 보아 하니 화상(和尙)이신 것 같은데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진승(眞僧)같기도 하오만…. 진승인지 가승(假僧)인지 한 번 보십시다.”압도하려는 듯 말을 걸어왔지만 달마는 웃으면서 목례(目禮)로 대신했다.

“허허…, 그렇소이까. 그대가 진(眞)이면 전체가 진(眞)이요, 그대가 가(假)이면 전부가 가(假)가 아니겠소이까.”달마의 응수에 도인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도인의 기세는 쉽게 멈출 것 같지가 않았다.

“화상은 어디에서 오셨소?”
“진공사(眞空寺)에서 왔소이다.”
“진공사라구요? 그런 절 이름은 내 생전 듣지도 못했소이다. 솔직하게 말하시오. 화상은 어디서 왔소?”도인은 언성을 높였다. 달마는 그것을 누그러뜨리기나 하려는 듯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오는 곳에서 와서 가는 곳으로 갈 뿐이외다.”
도인은 또 다시 다그쳤다.

“여보시오. 태어나서 머물고 있던 곳이 있을 게 아니오?”
“나의 고향을 물으시는 겁니까? 은혜를 많이 받은 곳이 곧 내 고향이올시다.”“여보, 그렇게도 내 말귀를 못 알아듣겠소? 화상이 이 곳에 오기 전에 머물던 곳이 어딘지 묻는 것이오.”“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중이 어찌 정한 곳이 있겠습니까. 구름 타고 온 세상을 노니는 날더러 돌아가는 곳까지 묻는다면 쌍림수(雙林樹) 아래 적멸(寂滅)을 닦는 곳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소이다.”“그래요? 화상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또 무엇이오?”
달마는 대답 대신 도인에게 되물었다.

“지금 내 앞에 계신 도인께서는 고명(高名)하신 분 같은데 존함부터 들려 주시기 바라오.”도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답했다.

“나는 도가(道家)의 종지(宗旨)를 받드는 종횡(宗橫)이라는 사람이오. 그대는 누구요?”“빈승의 성은 성(性)이라고 하고 이름은 왕(王), 자(字)는 공명(空明)이라 하오.”달마의 대답에 종횡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 일찍이 온갖 성씨를 다 보아 왔지만 ‘성’이라는 성씨는 보도 듣도 못했소.”달마가 응수했다.

“도인께서는 온갖 성씨를 다 알면서 자기 성(性)은 모르시는구려. 천지개벽할 때는 오직 일점(一點)의 진성(眞性)만이 있을 뿐이었소. 사람은 누구나 이 한 점 진성을 지니고 있소이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물체에도 진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외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외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것처럼 오행(五行) 속에 들게 되면 모양이 달라지고 언어도 달라지고 성명 곧 이름도 달라지는 것이외다. 이름만 찾는 것은 진(眞)을 인정하지 않고 가(假)를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외다.”종횡은 달마의 대답에 어떤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솔직하게 물었다.

“화상은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소. 진실을 밝혀 주시기 바라오.”“도인께서 그렇게 물으시니 솔직하게 대답하리다. 내가 온 길과 가는 길은 한 마디로 말후일착(末後一着)이외다.”종횡은 그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다.

“산에 오르려면 꼭대기까지 가야 하고 바다에 뛰어들면 밑바닥까지 보아야 하지 않겠소?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도달하는 마지막 낙착점, 그 한 곳이오.”“그렇게 말씀하시니 내가 이 땅에 온 까닭을 이야기하리다. 실은 빈승은 남천축의 사람이외다. 도(道)의 근원지인 동녘 땅을 찾아 수행하고자 온 것이외다.”“남천축이라니 그 곳은 머나 먼 이역 땅이 아니오. 여기서 얼마나 되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10만 8천 리이외다.”
“얼마나 걸려 이 땅에 왔소?”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소이다.”
“이 땅에 단기간에 왔다니 믿어지지 않소이다.”
“빈승은 오히려 늦은 편입니다. 나의 고향에 달마 조사라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은 일시진(一時辰) 아니 반각(半刻)이면 10만 8천 리를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소이다.”종횡은 도(道)의 세계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런 능력을 지닌 화상이 구태여 이 땅을 찾아 수행하고자 했다는 말에는 좀처럼 수긍이 가지 않았다.

“화상께 묻겠소. 이 땅에 온 진짜 이유가 무엇이오?”
“하나(一)의 진법의 발원지인 동녘 땅에 도가 끊겼다고 하기에 전도교화(傳道敎化)의 수행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외다. 한데 안타깝게도 나 같은 밝은 눈의 고사(高師)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소이다 그려.”종횡은 하나의 진법이란 말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도가(道家)에서는 일찍부터 하나(一)가 곧 진도(眞道)이며 그것은 천부경과 직결된 것이라고 일컬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상이 말하는 하나(一)의 진법은 무엇이고 어떤 수행법으로 전도하려고 하는 것인지 말해 줄 수 있겠소?”달마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나는 산과 바다를 구름 따라 노닐 뿐 무슨 수행법이 있는 것은 아니외다.”“무엇이라고? 수행법도 없이 무엇으로 전법(傳法)한다는 말이오?”
달마는 짧은 게송으로 대답했다.

“한가하면 청정(淸淨)을 지키고, 피곤할 때는 누워서 자네. 배고프면 밥을 찾고, 목마르면 물을 찾네. 부처가 되고 싶으면 부처가 되고, 신선이 되고 싶으면 신선이 되네. 바다에 풍파가 이니 사공이 배를 띄우지 않네. 만사 자연 그대로에 맡길 뿐이네. 이 땅에 온 지 1년반의 광음이 지났네. 아무도 나를 스승으로 여기지 않네.”달마의 게송은 그야말로 대도(大道)의 현기오묘(玄機奧妙)를 축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횡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달마에게 핀잔을 주었다.

“여보시오. 화상처럼 수행법도 없이 일규불통(一竅不通)인 사람을 누가 스승으로 삼는단 말이오?”달마는 주저하지 않고 반박했다.

“일규불통을 단정해서 말하는 것을 보니 한 구멍을 통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도인이구려. 자기가 불통이면 남도 불통으로 보이는 법이 아니겠소. 진정으로 한 구멍을 깨달아 통하게 되면 초생료사(初生了死)도 어렵지 않을 뿐더러 부처님을 증득하거나 진인(眞人)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이까?”이 말에 종횡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는지 버럭 화를 냈다.

“당신 같은 화상하고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소. 어서 이 곳을 떠나시오.”그러나 달마는 떠날 생각이 추후도 없었다. 오히려 도가의 법사를 불문에 귀의시킬 심산이었다.

“내가 이 곳에 올 때는 오직 한 줄기 정로(正路)만 있더니 떠나고자 하는 지금 갈 길을 보니 천만 갈래인 것 같소. 부디 나에게 나갈 길을 지도해 주시기 바라오. 그 가르침은 나의 천년 수행보다 윗길이 되리라고 믿소. 노여움을 푸시고 부디 교시해 주소서.”그제야 종횡은 마음이 풀리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만약 내가 화상과 종교가 같다면 지도하지 못하겠다고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도교를 믿기 때문에 불교도인 그대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소이다.”“선천(先天)에서는 불교, 유교, 도교의 구별이 없이 본래 일가(一家)가 아니었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제각기 세 개의 종교를 만든 것일 뿐인데 근본이치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달마가 간곡하게 말하자 종횡은 갑자기 교만심이 가득해졌다.

“하긴 그렇소이다.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구해 줄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오. 나에게 우선 스승의 예를 올리도록 하시오. 그렇게 할 수 있겠소?”나이 많은 달마 조사에게 종횡은 고개를 쳐든 채 눈을 아래로 깔며 고자세를 취했다. 달마는 얼굴빛 하나 변함이 없이 차분히 대응했다. 기왕 종횡을 불문에 귀의시키기로 마음먹었거늘 그의 무례한 요구를 뿌리침으로써 일을 그르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달마는 종횡이 시키는 대로 사제(師弟)의 예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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