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육조 스님 구결 풀이 下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1:45

 

돌사람이 밤마다 나무닭 울음 듣는 까닭은
 
물속에 잠긴 달 소유할 수 없는데
진리의 실체를 어찌 알 수 있으리

{說} 南泉 問講師 講甚經 云講涅槃經 云經中 以何爲極則 云以如 如爲極則 云喚作如如 早是變了也 須向異類中行 道取異中事 始得 法 眞一 頌云 涅槃寂滅 本無名 喚作如如早變生 若問經中何極則 石人 夜 聽木聲 謂涅槃寂滅 本無名字 若立名字 未免變異去在 須向異類中行 道取異中事 圓轉不 始得 且道 變向甚處去 不得亂走 若以變不 變 商量 又却不是也 畢竟作生 涅槃寂滅 雖本無名 亦不妨因名現體 爲甚如此 說名之時 早已風吹不入 水不著 只有一段通身寒光 喚作如 如 有甚變去

남전이 강사에게 묻기를 “무슨 경을 강하는가?” 강사가 대답하길 “열반경을 강의합니다.” 남전이 묻기를 “열반경 가운데 무엇을 지극한 법칙으로 삼는가?” 강사가 답하길 “여여(如如)를 극칙으로 삼습니다.” 남전이 이르시길 “여여(如如)라고 결정지어 버린다면 벌써 (열반경의) 맛이 변해 버리니, 모름지기 異類(무정물을 포함한 다른 무리들) 가운데를 향해 도를 행했을 때 도가 異類의 일들에도 (원만히) 통하고 들어맞아야 비로소 옳도다.”라고 하시거늘, 법진 도일이 송(頌)하여 이르되 “열반적정이 본래 이름이 없는데/ 여여라 결정지어 말해버리면 벌써 맛이 변해버린다./ 만약 (당시에 남전이) 경 가운데 극칙을 (내게) 묻는다면/ 돌 사람이 밤마다 나무 닭의 울음소리를 듣는다/고 답하리라.”하시니, 말하자면 열반적정이 본래 이름이 없으니 만약 이름을 세운다면 맛이 가버림을 면치 못한다. 모름지기 異類 가운데를 향해 도를 행하여 도가 異類의 일과 맞아 떨어져서 원만히 굴러 저촉되지 않아야 비로소 옳다. 또한 일러 보라. 맛이 변하여 어느 곳을 향해 갔는가? 돌! 어지러이 내달리지 말지어다. 만약 변화와 불변으로 헤아린다 해도 또한 도리어 옳지 않다. 필경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열반적멸이 비록 본래 이름이 없으나, 또한 이름으로 인하여 본체가 드러남을 방해하지 않으니 어째서 그런가? (열반을) 이름으로 설명하면 일찍이 바람이 불어도 (한 틈이라도) 들어가지 못하고, 물을 뿌려도 물이 묻지 않도다. 단지 한 덩어리 通身(평등한 한 몸)의 차가운 광명이 있으니, 여여라 부른들 무슨 변할 것이 있겠는가.

〈보충설명〉 돌 사람, 나무 닭은 우리의 희노애락이나 의식을 초월하여 청정무구한 모습을 파격적으로 그려낸 것이며 사량분별과 고정관념을 뛰어넘은 활발발한 표현인 것입니다.

〈참고〉 南泉普願禪師; (748-834) 당나라 스님으로 정주 신정에서 태어났다. 마조스님의 법제자. 대외산 대혜선사의 지도로 수행했고 30세에 숭악에서 계를 받았다. 마조스님 문하에서 이론의 경지를 초월한 유희삼매를 얻었으며 30년 동안 산문을 나가지 않았는데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들었다.

如如 靜夜長天 一月孤
여(如)라고 하는 여(如)여! 고요한 밤, 넓은 하늘에 오직 한 달이 외로이 걸렸도다.

{說} 水與波 無二 波與水 不別 淸寥寥時 元的的 白的的處 亦寥寥
물과 물결이 둘이 아니고 물결과 물이 다르지 아니하니, 맑고 고요할 때(시간)가 원래 또렷또렷하고, 밝고 또렷또렷한 곳(공간)이 또한 고요하고 고요하다.

是是 水不離波波是水 鏡水塵風不到時 應現無瑕照天地 看看
시(是)라고 하는 시(是)여! 물이 물결을 여의지 않으니 물결이 바로 물이로다. 거울 같은 물에 티끌 바람이 이르지 않을 때에 응현하여 티 없이 천지를 비추니 조심 조심하라.(놓치지 말아라)

{說} 指水全是波 指波全是水 毗盧華藏 物物頭頭 萬像森羅 全機無垢 機無垢 本淸淨 鏡淨水澄 風塵 不到 湛湛地 明歷歷 輝天鑒地 曜古騰 今 要會要會 高着眼
물을 가리킴은 곧 온전한 물결을 가리키는 것이요, 물결을 가리킴은 곧 온전한 물을 가리킴이라. 비로자나의 화장세계가 낱낱이 드러나고, 삼라만상의 기틀이 온전해서 더러움이 없도다. 삼라만상의 근기에 더러움이 없음이여! 본래 청정하고, 맑은 거울처럼 물이 맑아서 풍진(風塵)이 이르지 않도다. 맑고 맑은 바탕이 밝고 또렷해서 하늘도 빛내고 땅도 빛내고 옛날도 빛내고 지금도 빛나도다. 알기를 원하는가? 알려고 한다면 눈을 더 높이 더 멀리 뜰지어다.


선시 맛보기

송나라 때 깨달음의 세계를 뛰어난 문장으로 표현한 同安常察禪師의 律詩 십현담 중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十玄談 律詩 中에서(同安常察禪師)
涅槃城裏尙留危 陌路相逢沒定期
열반의 성 안에 갇혀 있으면 오히려 위험만 더하고,
저자거리에서 만나더라도 정해진 기약이 없도다.

權掛垢衣云是佛 却粧珍御復名誰
방편으로 때묻은 옷 걸친 것을 부처라고 하지만
화려한 보배로 장엄한 부처님은 다시 무어라 이름하는가?

木人夜半穿靴去 石女天明戴帽歸
나무로 만든 사람이 밤마다 신발을 신고 나가고, (體에서 用으로)
돌로 만든 여자는 하늘이 밝아지니 모자를 쓰고 돌아오도다. (用에서 體로)

萬古碧潭空界月 再三撈始應知
만고의 푸른 못에 허공의 달이 찍혔으니,
두 번 세 번 건지려고 애 쓴 뒤에야 달의 참 맛을 알 것이로다.

〈보충설명1〉 涅槃城裏尙留危 陌路相逢沒定期; 항상 法身(깨달음)의 자리에 있으면서 중생구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사에 최고여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수행인들도 열반이란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거기에만 머물려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열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진일보(進一步)하여 중생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도리어 열반이란 한계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열반의 기약 없이 저자거리에만 머물며 중생과 어울리는데에 빠져 있어도 또한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보충설명2〉 權掛垢衣云是佛 却粧珍御復名誰; 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이 중생제도는 잊고 空에만 빠져도 그 의미가 없고, 化身佛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진리를 잊고 중생제도에만 빠져있어도 그 의미가 없으니, 진공(眞空)과 묘유(妙有)가 서로 하나로 어우러져야만 원만함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보충설명3〉 木人夜半穿靴去 石女天明戴帽歸; 밤은 삼라만상이 차별 없이 어둠에 묻히기 때문에 절대평등의 자리입니다. 이 절대평등의 진리에서는 신을 신고 차별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 하늘이 밝으면 삼라만상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삼라만상의 차별세계에서는 다시 진리의 세계로 돌아가야합니다. 이렇게 夜半과 天明이 돌아가고(去) 돌아오는 것(歸)은 곧 진공과 묘유의 어울림입니다.

〈보충설명4〉 萬古碧潭空界月 再三撈始應知; 유구한 세월에 걸쳐 변함 없이 맑은 연못에 잠기는 달은, 우리가 건지려고 애쓴다고 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심히 오가는 물 속의 달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은 여러 번의 수고로움 끝에 비로소 알게 됩니다. 진리도 그와 같아서 건지려고 애써서 그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계속〉
 
출처: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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