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법회 인유분』 해설 2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1:42

 

망상 떠나면 여래 지혜 만나리
 
二 聞 我 卽阿難 五蘊假者 聞 謂耳根發識 廢別從摠 故云我聞 阿難 所不聞二十年前之經 有云如來重說 有云得深三昧 摠領在心 若推本而言 阿難 是大權菩薩 何法不通


2)는 聞成就니, 아(我)는 곧 오온을 가장한 아난이고, 문(聞)은 이근(耳根)으로 듣고 식(識)을 발한 것만 말하는 것이니, 別(耳根) 만을 들지 않고 摠(我)을 들어 아문(我聞)이라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난이 (출가하기 20년 전) 듣지 못했던 경은 “여래가 아난을 위해 거듭 말씀해주셨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깊은 삼매를 얻어서 모두 깨달아 마음에 저장해 두었다”라고도 하나, 만일 근본을 추구해 말한다면 아난은 큰 방편보살이니 무슨 법인들 통하지 못했겠는가?

三 時 師資合會 說聽究竟 故言一時 諸方時分 延促不同 故但言一 又說法領法之時 心境 泯 理智 融 凡聖 如 本始 會 此諸二法 皆一之時

3)은 時成就니,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설하고 듣는 때가 원만하기 때문에 일시(一時)라고 말했으며, 지역마다 시간대가 서로 달라 빠르고 늦은 것이 같지 않으므로 다만 일시라고 말했다. 또 법을 설하고 법을 알아듣는 그 때에, 마음과 경계가 사라지고 이치와 지혜가 원융해지며 범부와 성인이 같아지고 본각과 시각이 만나게 되니, 이 모든 두 법이 모두 하나가 되는 때가 일시다.

〈보충설명1〉 여기서 언급되는 一時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고 한 덩어리를 이루어 법희선열에 들어간 정신세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보충설명2〉 本始는 本覺과 始覺을 말합니다. 本覺은 현상계를 초월한 궁극의 깨달음, 본래 구비하고 있는 깨달음입니다. 始覺은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면서 처음으로 얻은 깨달음입니다. 本覺에 의거하여 不覺이 說해지고 不覺에 의거하여 始覺이 說해집니다.

四 主 具云佛陀 此云覺者 起信 云所言覺義者 謂心體離念 離念相者 等虛空界 卽是如來平等法身 則以無念 名之爲佛 然 覺有三義 一 自覺 覺知自心 本無生滅 二 覺他 覺一切法 無不是如 三 覺滿 二覺理圓 稱之爲滿 故知有念 則不名覺 起信 云一切衆生 不名爲覺 以無始來 念念相續 未曾離念 又云若有衆生 能觀無念者 卽爲向佛智故

4)는 主成就니, 줄이지 않은 말로 불타 이며, 번역어로는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기신론(起信論)에 이르길 ‘깨달음의 뜻은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떠난 것을 말하니, 망념을 떠난 모습이 허공계와 같아서 곧 이것이 여래의 평등법신이다’라 하였으니, 곧 무념으로써 부처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있다. 그러나 깨달음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①은 자각(自覺)인데 자신의 마음이 본래 생멸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요, ②는 각타(覺他)인데 일체의 법이 이 진여 아님이 없는 것을 깨달은 것이요(삼라만상이 모두 진여의 자리에서 벌어짐을 아는 것), ③은 각만(覺滿)인데 자각과 타각의 진리가 원만한 것을 칭하여 만(滿)이라 한다. 고로 알라. 망념이 있으면 깨달음이란 이름이 맞지 않으니 기신론에 의하면 ‘일체중생을 각(깨달음)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은 무시이래로 망념과 망념이 서로 이어져서 일찍이 망념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하였고, 또 이르길 ‘만일 어떤 중생이 능히 망념이 없음을 관하면 이는 곧 부처님 지혜에 향하게 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五 處 舍衛 此云聞物 謂具足欲塵財寶多聞解脫等 遠聞諸國 故 義淨 譯云名稱大城 祇樹等者 卽祇陀太子 所施之樹 給孤獨園者 須達長者 所買之園 祇陀 此云戰勝 波斯匿王 太子也 生時 王 與外國戰勝 因以爲名 梵語 須達 此云善施 給孤獨 卽是善施 又亦常行施故 西國 呼寺爲僧伽藍 此云衆園

5)는 處成就다. 사위는 번역하여 ‘문물(物)로 소문(聞)난 곳’이니, 미녀와 재물과 학자와 깨달은 자 등이 구족되어 있어 멀리 모든 나라에까지 소문이 났기 때문에 의정스님이 번역하면서 대성(大城)이라 칭하였다. 기수~ 등은 기타태자가 보시한 수림(樹林)이요, 급고독원은 수달장자가 매입한 공원이다. 기타는 번역하면 ‘전쟁에 이겼다’는 뜻인데 파사익왕의 태자 이름이다. 태자가 태어날 때에 왕이 외국과의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범어의 수달은 번역하면 ‘善施 (보시를 잘 한다)’인데 급고독 또한 善施이기도하고, 또 수달장자가 항상 보시를 행했기 때문에 급고독이라 하였다. 서국(西國)에서는 절을 승가람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번역하여 중원(衆園)이라 한다.

六 衆 與者 幷也 及也 大者 名高德著 比丘者 梵語 此含三義故 存梵不譯 一 怖魔 二 乞士 三 淨戒 衆者 理和事和 千二百五十人者 佛 初成道 度陳如等五人 次度迦葉三兄弟 兼徒摠一千 次度舍利弗目乾連 各兼徒一百 次度耶舍長者子等五十人 經擧大數 故減五人 是常隨衆 故偏列數 非無餘衆 文 隱顯耳 俱者 一時一處

6)은 衆成就니, 여(與)는 ‘~와 아울러’, ‘~와’라는 뜻이다. 대(大)는 명성과 덕이 높은 것이다. 비구는 범어인데 세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으므로 범어 그대로 音譯하고 의역하지 않았으니, ① 마구니를 두렵게 함 ② 걸사(乞士) ③ 청정한 계를 지킨다는 뜻이 있다. 중(衆)이란 진리로 화합하고 현실생활로도 화합하는 것이다. 천이백오십인이란 것은 부처님이 처음 성도할 때 교진여 등 다섯 사람을 제도하시고, 다음으로 가섭 삼형제와 그 무리 총 일천 명을 제도하시고, 다음으로 사리불·목건련과 각각 그 무리 백 명을 제도하시고, 다음으로 야사장자 등 50명을 제도하시니, 경에서는 대략 큰 수를 들었기 때문에 다섯 사람은 생략된 것이다. 이들은 항상 따르는 대중이기 때문에 편의로 수를 나열해 보인 것이지 나머지 대중이 없는 것이 아니며, 글에는 숨겨지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한 것일 뿐이다. 구(俱)라는 것은 같은 때, 같은 장소라는 것이다.

〈참고〉 믿음이 없을 때와 믿음이 충실할 때는 금강경 공부에 차이가 많이 납니다. 믿음을 기반 삼아 안개에 옷 젖듯 금강경을 공부하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탐심과 오욕을 버리면 달과 별의 속삭임이 내 것이 됩니다. 21년 동안 역설하신 부처님의 금강경 말씀을 잘 새겨 四相이 버려지면 스승과 도반도 시공을 초월하여 만날 수 있고, 우리의 生을 마감하는 것도 낙조처럼 아름다울 것입니다. 금강경은 물론, 제가 소개하는 고전들을 금강경처럼 음미하면서 공부해 나가면 내면의 세계가 더 깊이 우러납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道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형용한 글이 있어 소개하겠습니다.

道德經 第 15章 道者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深不可識

옛적의 상사(上士)가 될 만한 인물의 성품은,

微妙玄通

(깨달은 경지의 형용)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도다.

夫唯不可識故强爲之容

대저, 오직 알 수 없으므로 억지로 외형적 모습만 그려 볼 뿐이로다.

豫焉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조심스러움이 마치 겨울 냇물의 얇은 얼음을 밟으며 건너는 것 같고,
머뭇거림은 마치 是非, 思辨에 걸릴 것을 꺼리는 것 같도다.

儼兮其若客 渙兮若氷之將釋

엄숙한 모습은 겸손한 손님과 같고,
화기애애하게 풀어주는 모습은 봄볕이 얼음을 녹일 듯하며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도타움은 겉치레 없이 질박하고,
넓고 편안함은 텅 빈 큰 골짜기 같고,
속된 사람들과 섞여 있는 모습은 흐린 듯 보이도다.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之徐生

누가 능히 흐린 듯 보이지만 내면의 고요로 맑은 물결이 샘솟게 하는 것을 알겠으며
누가 능히 안정된 모습으로 한결같이 生白을 이루는 것 알겠는가?

保此道者不欲盈 夫唯不盈 故能不新成.

이 도를 지니는 사람은 넘치게 하려들지 않으니
대저, 오직 넘치게 하지 않으므로
옛 것에 만족하고, 새 것을 추구하지 않도다.

〈보충설명1〉 진리를 표현하기에는 부처님의 49년 설법도 형용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노자도 선위사(善爲士)라는 말을 빌려 道를 표현했지만 그 표현이 미흡할 수 밖에 없어서 억지로 이름을 붙여 볼 뿐이라고 했습니다.

〈보충설명2〉 微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본래 모습, 妙는 진리가 현실로 표상된 모습, 기기묘묘한 삼라만상의 모습입니다. 玄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이 깊고 그윽한 모습, 通은 微와 妙와 玄함이 서로 엮이어 있으나 훤하게 통해 있는 모습을 말합니다.

〈보충설명3〉 深不可識 은 道人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사량분별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보충설명4〉 豫와 猶는 조심스러워서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즉, 도인은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 畏四隣은 도와 더불어 살면서 사방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시비선악 등 사변적인 모습에 승부를 걸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중용(中庸)에도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君子之道 暗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이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이것은 ’비단 옷을 입으면 홑옷을 덧입으니, 그 문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군자의 도는 (안으로) 숨기더라도 나날이 빛이 나고, 소인의 도는 (밖으로) 시비를 분명하게 드러내어도 나날이 손상된다’는 뜻입니다. 도인은 사변적인 일에는 머뭇거리지만, 내면 세계에는 암연이일장(暗然而日章)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보충설명5〉 儼은 엄숙하고 신중하고 의젓하여 위용이 있는 모습입니다.

〈보충설명6〉 渙은 따스한 봄이 얼어붙은 눈을 녹이 듯, 굳게 엉겨있는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고 산뜻함으로 넘실거리도록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상사(上士)의 모습은 말하자면 봄기운과 같다는 뜻입니다.

〈보충설명7〉 敦은 독실하고 꾸밈이 없는 모습, 樸은 겉치레가 없어서 질박한 모습, 曠은 넓고 편하고 훤히 트인 모습, 谷은 크고 작은 일체의 것을 넓게 받아들이는 골짜기의 모습을 형용한 것입니다.

〈보충설명8〉 濁은 上士이면서도 俗人들에 묻혀 살면서 자신의 훌륭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어수룩하고 멍청한 듯 보이게 사는 모습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자신의 빛나는 광명을 감추고 중생과 똑 같은 모습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표현하는 화광동진(和光同塵)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보충설명9〉 安以久之徐生은 텅 비어 있는 집에 흰 광명이 생긴다는 뜻의 허실생백(虛室生白)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이 계신 석굴암도 바로 허실생백에 해당합니다.

〈보충설명10〉 不盈이란 넘쳐나도록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는 누덕누덕하거나 떨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예부터의 도덕을 말하고, 無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新은 지금 새로 유행하는 것들을 말하고, 有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계속〉
 
출처: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