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불(佛)이여!
{說}本源天眞 是 相好嚴身 是 一身 分作兩鄕心 본래 근원의 천진이 부처인가, 훌륭한 상호로 장엄된 겉모양이 부처인가? 한 몸이 두 마음으로 나뉘어졌도다.
無面目說是非漢 얼굴도 없이 시비를 설한 사람이로다.
<보충설명> 부처란 모든 모습이 끊어져서 면목도 없는데도, ‘잘 살아야한다, 못 살면 안된다’는 설법을 하게 되셨습니다. 모든 것이 끊어진 진리자리에서 설법을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진설명>불국사 승가대학 학장 덕민 스님은 "부처의 상에 집착하면 자신은 마구니가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說}無形還有像 逢人說是非 모습이 없는 가운데 도리어 모습이 있어, 만나는 사람에게 시비를 설하셨다.
小名 悉達 長號 釋迦 度人無數 懾伏群邪 若言他是佛 自己 却成魔 只把一枝無孔笛 爲君吹起太平歌 어릴 때 이름은 싯달타요, 장성해서는 석가라 불리웠다. 수 많은 사람을 제도하고 삿된 무리들을 두렵게 하여 항복받았다. 만일 저 것을(설법하는 모습) 부처라고 말한다면 자기는 도리어 마구니를 이루니, 다만 한 자루 구멍 없는 피리를 잡아서 그대를 위해 태평가를 부르겠다.
<보충설명> 부처님을 상대로 나누어서, 마구니를 섭복하는 위대한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자기는 곧 상에 집착한 마구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는 無孔笛 太平歌(부처님의 49년 설법)를 불러서 상대적인 모든 시비분별을 없애주겠다는 뜻입니다.
{說}世與出世 俱是化儀 雖然如是 妙相 無形 眞名 非字 形之與名 甚 處 得來 不因江招月 爭知應萬般 應萬般 多少人天 言下 知歸 多少魔 群 迴邪返正 此是拔亂返正 致得太平 須知有本太平 始得 若將報化云 是佛 自已天眞 竟何物 君看四十九年跡 太虛空裏 生閃電 君看四十九 年說 權將黃葉止兒啼 唯有一處 也大難忘 黃葉葉底無孔笛 吹起吾家劫 外歌 劫外歌 歌何事 歌詠人人本太平 怎生是本太平 人人脚下 淸風拂 箇箇面前 明月白 세간과 출세간을 모두 교화하는 의식을 한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묘상은 형상이 없고 진리라는 이름은 문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모습과 이름을 어느 곳에서 불러오겠는가? 강물이 달을 초대하지 않으면, 어찌 만 가지 모습이 응함을 알겠는가? 만 가지 모습으로 응해줌이여! 얼마나 많은 人天이 부처님 말씀에 귀의할 줄 알았으며, 얼마나 많은 마구니들이 삿됨을 돌이켜 正道에 돌아왔는가? 이것이 어지러움을 뿌리뽑고 正道에 돌아가 태평에 이른 것이나, 모름지기 본래부터 태평했음을 알아야 비로소 옳다. 만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을 가지고 부처라고 한다면, 자기의 천진은 무슨 물건인가? 그대는 부처님의 49년 자취를 보라. 태허공 속에서 번개 불이 번쩍하는 잠깐의 소식일 뿐이다. 그대는 부처님의 49년 설법을 보라. 방편으로서 누런 나뭇잎을 가지고 (황금이라 하여)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한 것과 같다. 오직 이 한 곳(낙처)에 크게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누런 나뭇잎의 無孔笛으로 우리 본분의 겁외가(劫外歌)를 불러 깨우치도다. 겁외가(劫外歌)여! 무엇을 노래하는 것인가? 사람마다 본래 갖춘 태평을 노래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본래의 태평인가? 사람마다 발 아래에 맑은 바람이 불고 각각의 면전에 달이 밝은 것이로다.
在 존재(在)여!
{說}主中主 長年 不出戶 又寂然不動 又獨坐庵中寂無事 주인 가운데 주인이여! 오랜 세월 문 밖에 나가지 않도다. 또한 적연하여 움직이지 않고, 암자에 홀로 앉아 일 없이 고요하도다.
客來須看 也不得放過 隨後便打 객(망상)이 오면 모름지기 잘 살피고 또한 놓치지 말고 뒤를 쫓아 문득 때릴지어다.
{說}若一向坐在家舍則途中事 關 一向行在途中則家裏事 疏 要須在家 舍而不虧途中事 在途中而不昧家裏事 始得 所以 道 妙喜 豈容無着問 漚和 爭負絶流機 又客來云云 感而遂通 不得云云 隨緣無着 又客來 云云 若遇客來 須善待 不得云云 是客 稍有賊氣在 知有賊氣 須打殺 만약 한결같이 집에만 앉아 있으면 길거리 일을 놓치고 또 길거리만 다니면 집안 일이 소홀해지니, 반드시 집에 있으면서도 길거리 일을 어그러트리지 않고 또 길거리에 있으면서도 집안 일에 어둡지 않아야 비로소 옳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묘희(문수)가 어찌 무착의 질문을 용납했겠냐만 거품처럼 화답(=>방편)해 준 까닭은 絶流機(생사의 흐름을 끊을 근기)를 어찌 져버릴 수 있을까 하는 때문이다” 하였다. ‘객래--’운운은 느낌으로 마침내 통하는 것이요, ‘부득--’운운은 인연을 따르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또, ‘객래--’운운은 만일 객이 오는 것을 보거든 모름지기 잘 대접할 것이요, ‘부득--’운운은 이 객이 조금 도적기가 있는 것이니 도적기가 있음을 알면 모름지기 살짝 때려 보내라.
<보충설명> 妙喜 豈容無着問 漚和 爭負絶流機 : 무착선사와 문수보살의 만남에 관한 일화를 인용한 구절. 무착이 문수를 찾아 오대산에 갔을 때는 아직 자신의 길거리 일과 집안 일을 한결같이 통합하지 못한 경지였습니다. 그래서 문수와 자신도 하나가 아닌 둘로 쪼갠 시각에서 문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때 문수는, 무착이 곧 깨달음을 얻을 근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답해 줄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거품이 물에 녹아 섞이듯이 무착에게 친절히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의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출처:법보신문
| |